박근혜 대통령이 연초에 ‘통일대박’론이라는 큰 의제를 꺼낸 후 이산가족 상봉, 남북 고위급 접촉이 시도되는 등 남북관계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국무회의에서는 또다시 통일준비위원회 설치를 강조하였다. 그는 독일방문 일정 등과 결합해서 통일에 관한 또 하나의 회심의 카드를 내놓을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사회복지 영역에서 사실상 공약을 지킬 수 없는 한계를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돌파하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되었다. 야당이나 반정부 세력이 평화·통일을 주장하면 ‘종북’으로 공격을 당해도 박 대통령이 이야기하면 극우세력도 달랠 수 있으므로 장차 박 대통령이 미-중 교류를 통해 데탕트를 이끈 닉슨과 같은 역할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특히 지난해부터 박 대통령이 유라시아 철도 연결 프로젝트 등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주로 강조하기는 하나, 디엠제트(DMZ) 평화지대 구상을 밝힌 적이 있고, 부쩍 ‘분단 70년’을 강조하는 점을 보면, 그동안 지난 민주정권과 운동세력이 추진해온 평화통일의 ‘가치’까지도 어느 정도 낚아챈 것 같다.
물론 통일대박론은 사실 국내용인데,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국제변수, 곧 정전협정이 엄존하고 미국이 일본을 지원하면서 동아시아에 더 적극 개입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마당에 통일은 남북한 지도자들의 의지 밖에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덮어버리고 있다. 그리고 이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 한번 성사시킨 것 외에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진전시킬 어떤 구체적인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직은 ‘말’에 머물고 있다.
통일 의제는 너무 인화성이 크기 때문에 박근혜 정부가 새로운 카드를 내놓을 경우 우리는 어떤 통일, 왜 통일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남북 단일 경제권 수립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절실한 사안이다. 실로 더 중요한 것은 장기 경제 효과를 포함한 정치적 결과다. 단순한 국가연합 수준의 낮은 수준의 통일이라고 하더라도, 남북 간의 적대가 종식되고 남북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갈 수 있다면, 미국의 동아시아 정치군사 개입의 명분이 약해지고, 일본 극우세력의 입지도 크게 약화시키는 등 동아시아의 정치경제 지도를 바꿀 것이다. 더 나아가 서구 콤플렉스에 시달려오면서 오히려 서구 자본주의의 단점만 과도하게 수입해온 동아시아를 새 문명의 주체로 거듭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분단은 서구 근대의 극단적 충돌 현장이며, 한반도는 근대 문명의 쓰레기장이기도 하기 때문에, 국가연합과 같은 낮은 단계로 통일이 진행되더라도 결국 국가를 새로 만드는 작업, 사회의 판을 새로 짜는 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통일은 경제적 동기로 출발하더라도 ‘한반도 경제 활력 이상’의 심대한 정치사회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런 통일 과정에서는 내부의 ‘적’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주민을 겁주고 권력을 누려온 남북한의 두 적대적 공존 세력이 뒤로 물러나야 한다. 북한의 세습전체주의도 설 자리가 없지만, 북한과 적대를 빌미로 만들어진 남한의 모든 법·제도·기관이 없어지거나 변해야 한다.
박근혜의 통일론이 과연 내적으로는 자기 살을 도려낼지도 모르는 이런 통일까지 추진할 비전과 의지를 담고 있을까? 그리고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할 배짱이 있을까? 지금까지 행동과 말로 봐서는 전혀 아니다. 남한 내의 심각한 갈등을 건너뛰는 통일은 불가능하다. “남북통일 미루시고 대한민국 먼저 통일하세요.” 국정원 공작 피해자의 유서에 많은 당부가 담겨 있다.
<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마당] ‘건국’논란, 근거와 논리 대라 (0) | 2014.03.23 |
---|---|
[한마당] 조국에 꿈은 있는가 (0) | 2014.03.15 |
[1500자 칼럼] 짝을 찾는 당신에게 (0) | 2014.03.15 |
[사설] 국정원 철저 수사만이 검찰이 살 길이다 (0) | 2014.03.15 |
[사설] 한-캐나다 FTA, 철저히 검증해야 (0) | 2014.03.15 |
[1500자 칼럼] 봄은 오는가? (0) | 2014.03.10 |
[칼럼] “광화문에 3.1혁명 기념탑을” (0) | 2014.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