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한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는 장면은 안현수가 러시아 국기를 들고 소치 경기장을 보란 듯이 뛰어다니던 모습이다. 기라성 같은 한국선수들을 제치고 8년 만에 빙상황제로 다시 태어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당연히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어야 할 그가 낯선 삼색기를 들고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과, 러시아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 한국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새삼스럽게 안 선수가 떠오르는 것은 조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그의 심경과, 마침내 조국에 일격을 가한 그의 극적인 스토리가 작금의 우리네 현실과 오버랩 되어서 그렇다.
조국을 등진 사람은 안현수 만이 아니다. 지난해의 경우 하루 평균 55명씩이나 한국 국적을 포기했고, 캐나다로 국적을 바꾼 사람도 1만8천264명이나 됐다는 법무부 통계다. 조국을 떠나 이민 길에 오른 사람들은 저마다 이유가 있다, 가난이 싫고 정치가 싫고, 교육이 싫어서 떠난 사람도 있었다. 그 중 안현수 같은 경우는 답답한 현실을 탈출해 무지개 빛 꿈을 좇아 조국을 버린 사례로 꼽힌다. 그는 “올림픽에 꼭 한 번 다시 나가고 싶었고, 저를 인정하고 믿어줬기 때문에 러시아를 선택했다. 후회는 없다”고 밝혔다. 그가 일말의 배려를 보이긴 했지만 빙상계의 인간적 모멸과 푸대접 때문에 조국을 등졌다는 사실은 정설로 굳어져있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서 “안현수 선수는 최고의 실력을 갖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다른 나라 선수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며 “파벌주의, 줄세우기, 심판부정 등 체육계 저변에 깔린 부조리와 구조적 난맥상에 의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선수들이 실력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시스템과 심판의 공정성을 담보할 대책을 강구하고, 비리를 반드시 근절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주길 바란다”고 강하게 주문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평소 정치·사회 부조리 이슈에 대해 입을 닫고있던 박 대통령이 안현수 문제로 일갈하자, 기다렸다는 듯 각계에서 풍자적 힐난이 터져 나왔다. 빙상계의 관행을 꼬집어 우리 사회 전반의 불공정, 반칙 문화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을 것인데, ‘반칙문화’가 비단 체육계 뿐이냐는 것이다. “민주헌정을 위협한 국기문란의 국가기관 선거개입에 대해서는 모르쇠 하더니…”라며 “대통령은 이 나라 최고의 심판이니 반칙이 있으면 반드시 찾아내 페널티를 물려야 하는데 심판이 패거리 부정과 짬짜미로 선발됐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비꼰 것이다.
사실 박 대통령의 지적은 백 번 지당한 말이다. ‘저변에 깔린 부조리와 구조적 난맥상’을 바로잡고 ‘실력대로 평가 받을 수 있는 시스템과 심판의 공정성을 담보할’사회를 만드는 것이야 말로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며 꿈이다. 단지 체육계에만 국한 된 원칙과 정의가 아니라, 온 나라, 각 분야에 빠짐없이 적용되고 구현되어야 할 정치적 비전인 것이다. 그래야 각 부문에서 열심히 땀흘리며 행복을 꿈꾸는 국민들이 남의 나라를 선망하기는커녕 내 나라에 자부심을 갖고 조국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요즘 고국의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내 나라에 자부심을 가져도 되나, 자신감과 비전을 내세울 수 있을 것인가?, 곳곳에서 안현수들이 나올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하루가 멀다하고 전해지는 자살소식은 그 징표들이 아닐지, 대략 훝어 보아도 암담하다. 사회 지도층과 고위공직자들의 도덕적 해이, 재벌과 가진 자들의 교만, 갈등과 적대의 정치타락, 권력기관들의 아부, 언론이기를 포기한 미디어, 학벌과 족벌과 정실 만능의 풍조 등등… 사회적 양심 마비와 가치혼란이 갈수록 가속화하고 있음을 본다.
국정원의 간첩 조작문서 파문은 이 같은 ‘반칙문화’의 백미와 저변을 보는 것 같아 탄식이 나올 뿐이다. 국가최고 정보기관이 간첩을 잡는 게 아니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공문서를 위조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사법절차에 활용하여 헌법체계를 위협하고, 외교마찰로 국위를 손상함은 물론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이적행태라니,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과 나라를 위해 봉직해야 할 국가기관이 ‘국(가)조(작)원’소리마저 듣는 추태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그 뿐인가. 선거와 민의를 왜곡시킨 국기문란에, 국가의 명예는 안중에도 없이 자기들의 명예를 대들며 정상간 대화록을 까발리고, 검찰총장 사생활을 파내 수사방해와 사퇴를 부른 흥신소 같은 지저분한 ‘암약’… 온갖 정치공작에 나섰던 과거를 참회한 환골탈태는 커녕 갈수록 ‘몬스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비단 한 기관에 그칠 일이 아니다. 대통령 자신을 포함해 나라 국가적인 기강과 체계, 무너져 내린 정의와 양심의 난맥생들을 하루속히 바로잡고 공정성을 담보하지 않으면, 내 나라 내 조국에서 꿈을 잃고 떠나려는 수많은 안현수들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 김종천 편집인 >
< 김종천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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