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안은 ‘브로큰 잉글리시’

● 칼럼 2014. 3. 23. 15:37 Posted by SisaHan
영어 때문에 마음고생 했던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1박2일 동안 얘기할 자신 있다. 나만 그렇지 않을 거다. 대부분 한국인들에게 영어는 ‘업’이다.
그 똑똑하다는 심상정 정의당 의원도 마찬가지다. 그는 국회 17대 때 초선 의원으로 정무위원회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조차 사석에선 “노선은 달라도 정말 능력 있다”며 심 의원을 칭찬했다. 그러나 그도 상임위 동료 의원들과 외국에 갔다가 마음 상한 적 있다. 대학 졸업 뒤 바로 노동운동을 했던 그는 영어로는 도저히 유학파 한나라당 의원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심 의원의 보좌관은 “우리 의원, 그때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영어 피커폰’ 신청했었어”라고 귀띔했다.
 
영어는 사람 기죽이는 데 한방이다. 올해 초 포스코 회장을 뽑을 때도 영어가 후보들의 당락을 갈랐다고 한다. 면접 때 한 외국인 사외이사가 갑자기 “포스코는 글로벌 기업이니 통역 없이 영어로 면접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영어권에서 학위를 딴 후보는 막힘 없이 술술 답변한 반면, 국내파였던 다른 후보는 급당황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영어 못하면 서럽다. 지난 8일 실종된 말레이시아 비행기엔 전체 탑승자 239명 중 중국인이 153명이었다. 중국 정부는 발을 동동 구르는 탑승자 가족들을 말레이시아로 데려가 수색 현장을 지켜보도록 하려고 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우리 대부분은 영어를 못한다. 가봤자 중국에서 수사 상황을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며 그냥 중국에서 애태우고 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소치 겨울올림픽을 현장 취재하기로 돼 있던 <한겨레> 스포츠부의 한 기자는 몇 달 전부터 아침마다 영어학원에 다녔다. 지난해 국제적십자사의 구호 활동을 취재하러 아프가니스탄에 갈 예정이었던 한 후배도 캐나다 원어민과 매주 두 차례씩 일대일 회화를 했다. 결국 아프간 출장이 무산되자, 그는 “그래도 영어는 남겠죠”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우리는 정녕 영어의 ‘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이성훈 한국인권재단 상임이사에게 물어봤다. 이 이사는 1988년 홍콩에서 ‘아시아가톨릭학생운동’(IMCS) 사무국장을 지낸 이후로 타이와 스위스 제네바 등 외국에서 주로 활동해왔다. 이번달부터는 국제시민운동을 희망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평화·인권·개발(PHD) 글로컬 리더십 학교’를 열어 영어로 강의하고 있다. 그가 성공적으로 시민운동을 해온 데는 영어 실력이 많이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를 아는 사람들 모두 그가 영어를 잘한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그가 영어로 말하는 장면을 목격한 한 국제엔지오 활동가는 냉정하게 말했다. “정말 잘하지. 그런데 발음은 꽝이야. 신기한 건 발음이 그런데도 외국인들이 다 알아듣는다는 거야.”
이젠 영미권의 영어 인구보다 개발도상국에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역전 상황도 벌어진다. 요즘 미국 대학의 이공계 분야에서 인도계 교수가 많이 늘자, 영어가 모국어인 학생들이 인도 교수의 발음에 익숙해지기 위해 일부러 인도 출신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려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이성훈 이사는 말한다. “세상엔 ‘인도영어’, ‘타이영어’, ‘방글라데시영어’ 등 갖가지 영어가 많다. 주눅들지 말자. 어차피 영미권에서 커오지 않았다면 콩글리시 하면 된다. 콩글리시도 어려우면 그냥 ‘브로큰 잉글리시’ 하자. 발음, 문법, 정확하지 않아도 다 알아듣는다.”

< 이유주현 - 한겨레신문 국제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