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언론 객관과 중립을 내세워 정쟁으로 몰고 가는 고질병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나가자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 계획을 검토했다. 경찰만으로는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국민의 함성을 막기 힘들다고 보고 공수부대를 투입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대외 신인도 추락과 경제에 미칠 악영향, 특히 서울올림픽이 무산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접었다. 대신 노태우 차기 대통령 후보로 하여금 직선제 수용을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게 해 간신히 상황을 수습했다.
그 뒤 40년 가까이 계엄령을 걱정하는 국민은 없었다. 지난 8월 더불어민주당에서 계엄령 준비설을 제기했을 때 언론에서 “국민을 바보로 아는 괴담”(조선일보)이라거나 “소설 같지도 않은 집단망상”(서울신문)이라고 조롱한 것도 무리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전두환도 차마 감행하지 못한 결단을 내렸다.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듣고 국회를 지키려고 여의도로 달려간 시민들이 아니었다면 신문과 방송은 계엄사령부 포고령 1호 3항에 따라 군인들의 검열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대다수 신문과 방송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계엄령 선포의 무도함과 무모함을 꾸짖고 나섰다. 비록 제대로 된 사과나 반성은 없었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잘못된 국정 운영 방식을 비판하는 칼럼도 줄을 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표결을 놓고 여야의 의견이 갈리고 여의도의 탄핵 촉구 집회에 맞서 광화문에서도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리자, 일부 언론에선 객관과 중립을 내세워 정쟁으로 몰고 가는 고질병이 재발한 것이다. 더욱이 조기 대선으로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계엄은 잘못이지만 야당의 입법 폭거와 이재명 방탄 탄핵도 문제다”라는 양비론을 펴고 있다. 내란 관련자들의 새빨간 거짓말이나 제 논에 물 대기 식 주장을 아무런 검증이나 반론 없이 중계방송하는 행태도 나타난다.
윤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서류 받기를 거부하며 시간을 끄는가 하면 경호처도 수사를 방해하고 있다. “뭐가 잘못됐느냐”고 눈을 부라리며 복귀하면 언제든 또 계엄을 선포하겠다는 기세다.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 총리마저 지연 작전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이고,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는 “탄핵이 기각되면 찬성 표결한 의원들을 직권남용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언론이 불법 계엄에 일관되게 매서운 회초리를 들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싶다. 대학생 때까지 아버지한테 고무호스로 맞았다는 윤 대통령이야 워낙 고집불통이어서 어쩔 수 없다 쳐도 대통령실이나 총리나 여당은 여론에 귀 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했을 것이다.
2016년 10월 티브이(TV)조선은 ‘최순실 의상실 영상’을 공개해 한겨레, 제이티비시(JTBC)와 함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을 주도했다가 박근혜 열성 지지층의 항의에 직면했다. 비슷한 일이 재연되는 것을 우려해 진실에 눈감고 시대적 책무를 외면한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그런 언론이 정당에 “국익을 생각지 않고 당리당략에만 매달린다”고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계엄은 잘못됐지만 탄핵엔 반대한다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느냐 마느냐는 윤석열이 물러난 뒤의 일이다. 아직은 언론이 양비론 뒤에 숨거나 뒷짐 지고 훈계할 때가 아니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른 데는 언론의 책임도 크다. 탄핵 막으려다 내란 공범으로 몰릴지도 모르는 여당의 운명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이미 시민들은 그런 언론에도 단죄의 칼날을 겨누고 있다. < 이희용 언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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