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 자부심과 용기 꺾으려는 정치적 목적 찰스 1세 언급 뒤에 숨겨진 윤 어게인의 암시? 무죄 추정 우기는 장동혁과 반격 꿈꾸는 극우
조희대 사법부와 반혁명 요새 어찌할 것인가 반혁명 채찍 맞고 전진하는 위대한 시민의 빛
김용민 화백
2월 19일 아침, 날아든 ‘윤석열의 내란을 막아낸 한국 국민들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는 소식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난 2년간 광장을 지키고, 서로의 손을 붙잡으며, 촛불과 응원봉을 들었던 시민들에게 그것은 고통과 불안을 견뎌낸 시간에 대한 국제적인 승인처럼 느껴졌다. 우리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임을 재확인하며 벅찬 감정을 나눴다.
그러나 같은 날 오후, 정반대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지귀연 재판부의 윤석열 내란 사건 선고였다. 그 판결 결과는 무기징역이기는 했지만 마치 많은 시민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당신들이 2024년 12·3과 그 이후 2년 동안 했던 투쟁과 연대는 그리 대단한 것도, 역사적 의미가 큰 것도 아니었다.' 재판부의 논리는 이랬다.
윤석열의 행위는 치밀하게 준비된 쿠데타가 아니었고, 불과 3일 전에 즉흥적으로 결심한 어설픈 시도였으며, 스스로 물리력을 자제한 허술한 사태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민들이 막아낸 것은 거대한 역사적 만행이 아니라, 미숙한 권력자의 일탈에 불과한 셈이 된다.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그 밤의 승리는 '별것 아닌 해프닝'에 불과했다는 노골적인 조롱이다.
내란 우두머리 법정에서의 윤석열 전 대통령과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 부장판사
이것은 승리한 시민들의 뒤통수를 향한 사법 권력의 비열한 가격이었다. 재판은 단지 법률 조항의 해석이 아니고 사회적 메시지를 생산한다. 특히 국가적 중대 사안에 대한 판결은 그 자체로 역사 해석이 된다. 이것은 지귀연 재판부의 정치적 목적이 한국 사회와 역사를 바꾼 '빛의 혁명' 참가자들의 자부심, 자신감과 용기를 꺾어놓는 것에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자신감과 용기는 계속 발전하고 확대되면서, 단지 특정 정권에 대한 찬성이나 반대를 넘어서 한국 사회를 더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방향으로 바꿀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기득권 카르텔의 입장에서 보자. 재벌, 고위 관료, 주류 법조 엘리트, 일부 언론 권력으로 구성된 구조적 동맹은 한국 사회의 부와 권력을 오랫동안 독점해 왔다.
이들에게 광장의 집단적 각성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시민이 스스로를 정치의 주체로 자각하면, 폐쇄적 엘리트 구조는 균열을 맞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과제는 열광과 연대를 일상적 무력감으로 되돌리며 그 힘을 다시 ‘호리병’으로 집어넣는 일이다. 그래서 지귀연이 선택한 것은 윤석열 정권의 문제점과 12·3 내란의 위험성을 최대한 축소하는 방향이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윤석열은 내란을 위해 북한과의 전쟁을 도발한 적도 없으며, 독재와 학살을 꿈꾼 적도 없는 '야당의 폭주에 가로막혀 길을 잃은 통치자'일 뿐이었다. 더욱 경악스러운 점은 '비상계엄 선포 자체는 대통령의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존중해야 하며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통치행위론의 부활이다.
오직 국회 기능을 정지시키려 한 점만이 문제라는 식의 논리는 장차 발생할 수 있는 또 다른 반동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과 다름없다. 이것은 마치 '다음에는 더 일찍 결심하고, 더 치밀하게 준비하며, 국회를 직접 건드리지 않고도 비상계엄을 성공할 방법을 찾아보라'는 반혁명적 충고처럼 읽힌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19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2·3 비상계엄 관련 내란 우두머리 혐의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해 있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지귀연 부장판사)는 윤 전 대통령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2026.2.19 [서울중앙지법 제공. 연합
또,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칠 수는 없다"는 꾸짖음은, 한편으로는 감옥에서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는 윤석열에 대한 살뜰한 위로처럼도 들리고,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윤석열이 내란을 일으킨 목적의 진정성을 인정한다'는 이중적 의미로도 들리고 있다. 그러면서 지귀연은 로마와 영국의 찰스 1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자신의 박학다식을 어줍잖게 과시했다.
그 모습은 과거에 윤석열처럼 룸살롱 가서 접객원들을 옆에 앉혀두고 폭탄주를 마시며 '맨스플레인'하는 타락한 법조 엘리트들의 전형처럼 보일 뿐이다. 물론, 지귀연의 찰스 1세 언급은 단순한 현학적 지식 과시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청교도 혁명은 찰스 1세를 타도했지만, 나중에 올리버 크롬웰의 독재로 변질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래서 다시 찰스 2세로 왕정 복귀가 이루어지면서 그것은 혁명의 파괴와 피의 복수로 이어졌다. 그러니 혹시 지귀연은 극우를 향해 '빛의 혁명과 민주당의 독재를 끝내고 윤어게인과 복수의 시간이 돌아올 수 있다'는 암시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지금 윤어게인 극우 세력은 이번 판결을 통해 반격의 틈이 만들어졌다고 판단하고 있다.
판결 자체가 너무나 허술하고 앞뒤가 모순적으로 충돌하며, 곳곳에서 윤석열과 내란을 정당화해주는 내용을 심어 두고 있기 때문에 2심과 상고심을 통한 뒤집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국민의힘 대표 장동혁은 “판결문 곳곳의 논리적 허점은 지귀연 판사가 남겨둔 마지막 양심의 흔적들”이라며 '무죄 추정의 원칙'을 강조했다.
윤석열 역시 “장기집권을 위한 여건 조성이라는 특검의 소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며 오히려 '재판부가 나의 진정성을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제 진정성을 인정하면서도, 단순히 군이 국회에 갔기 때문에 내란이라는 논리는 납득하기 어렵다”라며 뻔뻔스럽게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20일 국회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무기징역 선고 관련, 입장을 밝히고 있다. 2026.2.20. 연합
물론 이번 판결은 지귀연 개인의 판단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지난 2년 동안 조희대 대법원 체제, 주류 언론, 법조·관료 엘리트가 형성한 담론 지형이 그 배경에 있다. '민주당이 이재명 방탄과 정쟁에 몰두해 윤석열의 어설픈 내란을 불러왔다'는 프레임은 우리 사회의 주류적 설명 방식이었다.
그래서 많은 언론, 지식인, 엘리트들이 노상원 수첩에 대한 지적과 해석을 망상으로 치부하고 '김어준식의 음모론'이라고 했다. 그런 것을 고발하고 개혁하려는 최전선이던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추미애-나경원 충돌의 아수라장'이라고 했다. 조희대 탄핵 추진이나 내란특별재판부 설치는 '개딸과 강성 지지층의 눈치만 보는 민주당의 무리수'라고 했다.
그 과정에서 민주당 역시 주춤거렸다. 강력한 사법 개혁과 제도적 안전장치 마련보다는, 내부 권력 구도와 차기 권력 경쟁에 휩싸여 갔다. 결국 내란 수괴 윤석열이 임명한 조희대는 지금도 대법원장으로 있으면서 '사법부 독립'을 외치며 사법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 윤석열을 풀어줬던 지귀연은 끝까지 재판장 자리를 지켰고 이번 같은 모욕적인 판결을 내렸다.
조희대는 여전히 인사권을 바탕으로 강력한 사법부 통제력을 가지고 있고, 새로 임명된 법원행정처장은 더욱 조희대와 가까운 극우적 인물이다. 이진관 같은 정의로운 판사와 올바른 판결은 소수이고 지귀연 같은 의심스러운 판사와 이상한 판결이 더 많으니, 내란전담 재판부나 윤석열 항소심 재판부 구성에도 조희대의 입김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무도한 특검이 무리하게 기소했던 사건들이 줄줄이 무죄가 선고되고 있다"라고 자신감을 드러내며 "이재명 정권의 신독재 광풍"을 공격했다. 나아가 이번에 지귀연이 수상하게도 판결문에서 '대통령도 수사받을 수 있다'고 적시한 것을 이용해 "이재명 대통령 재판을 중지할 법적 근거가 사라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12일 서울 대법원을 나서고 있다. 2026.2.12. 연합
심지어 윤석열은 지귀연 판결 다음날 발표한 입장에서 “저 윤석열은 광장의 재판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모든 책임을 짊어지겠다”라고 말하고 "우리의 싸움은 끝이 아니다. 뭉치고 일어서야 한다"라며 극우 세력의 결집과 저항을 선동하고 나섰다. 이는 패배의 언어가 아니라 동원의 언어이고, 광장을 다시 반동의 공간으로 호출하려는 시도이다.
이 모든 흐름은 분명히 말해 준다. 윤석열의 내란도, 빛의 혁명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새로운 정부와 집권당의 권력을 서로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다투던 사람들도, 이제는 살아있는 권력인 이재명 정부와 싸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 사람들도, 빛의 혁명을 지나간 과거로 생각하며 우리끼리 차이점을 찾는 데 더 몰두하던 사람들도 섣불렀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언제든 후퇴할 수 있고 시민의 각성과 연대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프랑스 혁명이 공포정치와 제정복고를 거쳤고, 영국 혁명이 왕정복고를 경험했듯이, 혁명은 한 번의 선거, 한 번의 판결로 완결되지 않는다. 혁명은 반혁명의 채찍질을 맞으며 전진하고, 혁명을 절반에 그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라는 말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2월 19일 아침의 자부심과 오후의 허탈감 사이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12·3의 밤에 우리가 확인했던 그 뜨거운 연대는 이제 법원이라는 성벽 안에서 공고해진 반혁명의 요새를 허무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사법 권력이 역사를 모욕할 때, 그 역사를 다시 쓰는 힘은 오직 깨어 있는 시민들의 끈질긴 연대와 투쟁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