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자립·주체는 우리 공동체의 가치를 나타내는 좋은 말들이다. 그러나 언론이나 실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다. 북한이 애용하거나 미국을 거역하는 느낌의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자주외교라는 말을 쓸라치면 나도 모르게 반미적으로 비칠까봐 움찔한다. 주체적으로 살자는 말은 북한의 주체사상 때문에 친북이라는 말을 들을까봐 더 겁난다. 그래서 이 말들은 남북 간 이념 대결 속에서 분단에 갇힌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이 언어들에 대한 유폐는 부당하다. “자주적인 역량의 구축과 주체의식의 확립”, “자주국방과 자립경제 달성이 지상목표”, “투철한 자주의식과 민족주체의식이 뒷받침하는 국력.”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중에 주장한 말들이다. 미국의 도움으로 나라를 꾸려가고 북한에 뒤지던 시대에 자주·자립·주체를 강조한 박정희야말로 수구세력의 기준에서 보면 영락없는 ‘친북좌파’이며 정신 나간 ‘반미자주파’다. 그러나 그들은 비난은커녕 이런 박정희를 숭배한다.
그런데 30년 후 박정희가 사용한 기치를 노무현이 사용하자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힘이 닿는 한 내 나라는 내가 지켜야 한다는 자주국방을 제창했으며 이를 위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추진했다. 그러나 수구세력은 여기에 반미와 친북의 올가미를 씌우려 했다. 박정희에 대한 태도와 비교해 보면 지독한 자기모순이다.
 
우리는 오늘날 북한을 압도하는 경제력을 보유하고 북한보다 최소 10배 이상의 국방비를 지출하며 미국을 돕기 위해 자비로 해외파병까지 하는 시대에 살건만 자주도 주체도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 왜일까? 민주주의의 발전과 세계 냉전의 해체라는 시대적 조류에 역행하여 우리 사회에서 이 언어들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이데올로기 지형이 확장되지 않는 특이한 경험을 해왔다. 즉, 수구세력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좌파 척결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네거티브 전략을 내세워 반사적 이익을 얻으려 하면서 이념적 포용성이 오히려 좁아지는 절름발이형의 자유민주주의 성장이 이루어졌다. 이명박 정부 4년은 그 절정을 보여주었다.
분단이 반쯤 불구로 만든 언어도 있다. 조선이다. 1910년까지 이 땅을 통치한 왕조가 조선이지만 북한의 국가 명칭도 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줄임말)이다. 남북한이 각각 유엔에 가입한 주권국가지만 북한을 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금기처럼 돼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말을 쓸 때는 역사 속의 조선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며 조심스럽게 사용한다. 엄연히 중국이 북한을 조선이라 부르고 있고 국가보안법에 저촉될 것 같지도 않지만, 누구도 이 언어를 사용할 엄두를 내지 않는다. 물론 북한한테도 우리는 한국이 아니라 남조선이다.
 
그러나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최근까지 평등은 수구세력에게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급진좌파의 용어처럼 취급받았지만 뉴욕에서 불어온 ‘99%의 분노’가 단숨에 이를 일상 언어로 되돌려놓았다. ‘1% 부유층의 탐욕에 저항하는 99%’라는 자극적인 말 덕분에 평등은 이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상식이 된 느낌이다.
이제 분단에 갇힌 언어들이 머지않아 우리 사회의 중요한 가치로 떠오를 것다. 대외 경제의존도가 100%에 이르고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고유의 삶과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극단적인 대외 의존적 삶에 대한 반성 속에서 우리는 곧 자주적 삶과 자립지향형 경제를 희구하며 ‘나’라는 ‘주체’ 찾기에 나서주체와 세계가 균형을 이루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날을 위해서라도 이 언어들은 본래 모습으로 해방돼야 한다. 이 언어들에 대한 유폐가 비합리적인 우리 사회의 단면이었기에 그 해방은 합리적인 사회로의 진전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명박 정부 4년은 한반도 냉전구조의 본질이 남북대결이 아니라 우리 사회 속에 겹겹이 박혀 퇴장을 거부하는 냉전 인식과 우리 안의 적대적 대결심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래서 진정한 냉전 종식을 위해서는 우리 안의 냉전부터 해소해야 한다. 이 작업을 위해 우리가 한 발짝만 내디뎌도 그곳에서 분단에 갇혀 해방을 기다리는 소중한 언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