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드 7년 임기 대통령 당선 기정사실

반세기 집권 ‘아사드 부자’ 정권은 건재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한 남성이 대통령 선거 투표를 마친 뒤 잉크가 찍힌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다마스쿠스/로이터 연합뉴스

 

2010년 ‘아랍의 봄’ 이듬해 시작된 내전이 10년째 계속되고 있는 시리아에서 26일 임기 7년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열렸다. 내전 희생자는 38만명을 넘지만 반세기에 걸쳐 시리아를 철권통치 중인 ‘아사드 왕국’은 건재하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입증했다.

 

26일 실시된 대선에서 이미 21년째 집권 중인 바샤르 아사드(56) 대통령 4선이 확실시된다고 <에이피>(AP) 통신 등 외신이 전했다. 아사드 가문의 시리아 지배는 이미 51년째다.

아사드의 아버지인 하페즈 아사드가 197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그의 사망 뒤 바샤르 아사드가 대통령을 이어받았다.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오전 7시에 투표소 문이 열리자 수천명이 투표를 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통신은 전했다. 아사드 대통령이 등장하는 대형 포스터와 “우리는 미래를 선택한다. 우리는 바샤르 아사드를 선택한다” 같은 문구가 적힌 펼침막이 거리 곳곳에 걸렸으나, 상대 후보 2명의 포스터가 걸린 곳은 적었다고 덧붙였다.

 

선거 전부터 아사드의 당선은 기정사실과 다름없었다. 시리아 헌법재판소는 대선 후보 신청자 51명 중 아사드 대통령을 포함해 3명의 후보 등록만 허용했다. 연속 10년 이상 시리아에 거주하지 않은 사람의 후보 등록을 금지해 망명 중인 야권 인사들의 출마는 원천 차단했다.

아사드 정권은 내전 중인 지난 2014년 대선 때도 아사드가 89% 득표율로 승리했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투표는 아사드 정권 통치력이 미치는 지역에서만 치러졌으며, 쿠르드족이 장악한 북동부에서는 진행되지 않았다.

 

정부군이 장악한 남부 다라 지역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번 선거가 “적법하지 않다”며 보이콧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독일 <도이체 벨레>는 “국제사회는 이번 선거를 우롱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미국과 독일·영국·이탈리아 외무장관은 공동으로 이번 대선이 “공정하지도 자유롭지도 않다”는 성명을 냈다.

 

 

아사드는 아버지인 하페즈 아사드가 2000년 6월 69살 나이로 숨진 지 한달 만에, 35살에 유일한 대선 후보로 나와 97% 득표율로 당선됐다. 두달 뒤인 9월 지식인 100여명이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라고 요구한 ‘다마스쿠스의 봄’ 사태가 벌어지자, 이듬해 10여명을 체포하며 탄압했다. 하지만 이는 더 큰 탄압의 전주곡이었을 뿐이다.

 

2010년 말 튀니지 노점상 모하마드 부아지지 분신 이후, 중동 각국에서 민주화 시위인 ‘아랍의 봄’이 일어났다. 이듬해인 2011년 3월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등에서 아사드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다. 아사드 정권은 군을 동원해 잔혹하게 탄압했고 시민들은 반정부 무장 투쟁으로 맞섰다. 시리아 내전의 시작이었다.

 

반군 연합체인 자유시리아군(FSA)는 수니파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받으며 아사드 정부군과 맞섰다. 아사드 정권은 시아파지만 시리아 국민의 다수는 수니파다. 반군은 2012년 시리아 제2의 도시 알레포 등을 장악하며 공세를 펼쳤지만, 아사드 정부군은 2013년 중반부터 반격에 나섰다. 미국, 사우디, 터키, 러시아의 개입 그리고 이슬람국가(IS)까지 얽히며 시리아 내전은 복잡한 국제전 양상으로 번졌다. 2018년께부터는 아사드 정부군의 우세가 굳어졌다. 내전 초기 시리아 국토 30% 정도밖에 통제하지 못했던 아사드 정권의 영향력은 이제 전 국토 3분의 2가량으로 확대됐다.

 

이번 대선은 시리아 내전의 승자가 아사드로 굳어져 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싱크탱크인 뉴스라인 인스티튜트의 니콜라스 헤라스는 <에이피>에 “아사드가 자연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이유로 사망하지 않는 한, 과거 그리고 미래의 시리아 대통령일 것”이라며 “그와 그의 동맹은 이 사실을 밀어붙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10년에 걸친 내전 과정에서 38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2011년 내전 발생 이후 660만명이 난민이 됐고 670만명은 국내에 흩어진 것으로 추정했다. 합치면 1300만명 이상이 전쟁으로 고향을 떠난 셈인데, 시리아 전체 인구 2100만여명(2011년 기준)의 절반이 넘는 수치다.

 

아랍의 봄 때 민주화 요구 시위로 중동 독재 정권 상당수가 무너졌다. 튀니지의 자인 엘아비딘 벤 알리,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가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현재 아랍의 봄으로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된 곳은 튀니지 정도밖에 없다. 이집트에서는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압둘파타흐 시시가 정권을 잡았고 예멘은 내전 중이다.   조기원 기자

닉슨 독트린, 백곰 그리고 ‘미사일지침’ 폐지

● 칼럼 2021. 5. 27. 09:54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합의가 아니라 한국이 스스로 지키겠다고 통보한 ‘미사일 개발 자율규제 서한’

 

미국은 1969년 ‘아시아 문제는 아시아인끼리’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1971년 경기 동두천에 있던 주한미군 제7사단도 철수했다. 당시 한국이 군인 5만명을 베트남에 파병해 미국을 도왔지만, 미국은 한국의 반대를 무시하고 7사단 철수를 강행했다.

미국을 믿을 수 없게 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에 나섰다. 군 전력 증강 사업인 ‘율곡사업’을 시작하고 비밀리에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착수했다. 무기 개발은 보안을 위해 ‘위장 사업명’을 사용한다. 1974년 미사일 개발 사업은 ‘항공공업계획’이란 사업명으로 대통령 재가를 받았다. 유도탄연구소는 ‘대전기계창’, 충남 태안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ADD) 안흥 비행시험장은 ‘안흥측후소’로 위장했다.

 

1978년 9월26일 미사일 공개 시험 발사에 성공해, 한국은 세계에서 7번째 미사일 개발국이 됐다. 첫 국산 미사일은 미국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을 개조한 지대지 미사일이었다. 이 미사일 별칭이 ‘백곰’이었다. 겨울에 폭설을 맞으며 안흥 비행시험장 야외에서 일하던 연구원의 모습이 마치 북극곰 같아서였다.

 

백곰 발사 뒤 주변 강대국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백곰을 핵무기 운반체로 본 것이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핵 개발과 연관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고, 소련 국방부는 “남한의 핵 개발을 경고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도 “탄도미사일 개발 뒤에는 핵을 개발할 것이냐”고 한국 정부를 추궁하고 “미사일 사거리를 서울에서 평양 타격이 가능한 180㎞로 제한하라”고 압박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 미국 정부 특사까지 국방과학연구소를 찾아와 미사일 개발 중단을 요구했다.

 

1979년 7월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미사일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해 9월 노 장관은 ‘(미국이 용인 가능한) 사거리 180㎞ 이내, 탄두 중량 500㎏ 이내로 개발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종료된 ‘미사일 지침’의 시작이었다. 그동안 ‘한-미 미사일 지침’으로 불렸는데 ‘미사일 지침’이 정확한 명칭이다. 양국 합의가 아니라 한국이 스스로 지키겠다고 통보한 ‘미사일 개발 자율규제 서한’이기 때문이다.    권혁철 논설위원

'피트는 적절한 부모 아냐' 졸리 주장, 재판서 인정 안 돼

졸리 "판사가 아이들 증언 배제, 불공정 재판" 항소 방침

 

    앤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

 

결별한 미국의 두 스타 배우 브래드 피트(57)와 앤젤리나 졸리(45)의 자녀 양육권 분쟁이 격화하고 있다.

피트는 최근 공동 양육권을 사실상 확보했으나 졸리가 이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피트와 졸리가 고용한 사설 판사(Private Judge) 존 아우더커크는 최근 피트에게 공동 양육권을 부여하는 잠정 결정을 내렸다고 26일 페이지식스 등 미국 연예 매체들이 보도했다.

 

사설 판사는 비공개로 분쟁 해결을 원하는 당사자들이 선택하는 미국 사법제도 중 하나로, 사설 판사 결정에 불복하는 당사자는 공공법원에 항소할 수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입양한 자녀들인 매덕스(19), 팩스(17), 자하라(16)와 친자녀 샤일로(14), 비비언(12), 녹스(12)가 있다. 두 사람은 성인인 장남 매덕스를 제외한 5명의 자녀를 놓고 양육권 분쟁을 진행해왔다.

 

     2017년 토론토 영화제에서 포즈를 취한 앤젤리나 졸리와 6자녀, 자녀의 친구들 [EPA=연합뉴스]

 

졸리는 2016년 피트가 장남 매덕스를 학대했다며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주법에 따라 자녀 양육권과 재산 분할 문제를 일단 제외하고 2019년 4월 법적으로 이혼했다.

이후 졸리는 단독 양육권을, 피트는 공동 양육권을 각각 주장했고, 아우더커크 판사는 최근 피트의 손을 들어주는 결정을 내렸다.

 

페이지 식스는 소식통을 인용해 아우더커크 판사가 자녀들을 인터뷰한 아동 전문가 등의 증언을 청취한 뒤 최근 재판에서 피트에게 공동 양육권을 부여하는 잠정 결정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연예매체 TMZ는 잠정 결정은 같은 내용의 확정판결을 내리기 위한 형식적 절차이기 때문에 "피트의 법적인 승리"라며 "피트가 적절한 부모가 아니라는 졸리의 주장에 판사는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느꼈다"고 전했다.

 

     2013년 자녀들과 함께 영화 홍보차 일본을 방문한 브래드 피트와 앤젤리나 졸리 [EPA=연합뉴스]

 

한 소식통은 "피트는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노력했을 뿐인데 졸리가 이를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해왔다"며 "피트는 이번 결정에 무척 기뻐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졸리는 이 결정에 분노하면서 피트에게 공동 양육권을 부여하는 최종 결정이 내려질 경우 항소하기로 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졸리는 이번 잠정 결정에 앞서 캘리포니아주 항소법원에 제출한 자료에서 아우더커크 판사가 공정한 재판을 진행하지 않았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법에 따라 14세 이상 자녀는 원할 경우 직접 증언을 할 수 있는데도 아우더커크 판사가 이를 거부했다면서 "아이들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증거를 부적절하게 배제했다"고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