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표가 19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신년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선대위가 총선에서 전권 행사…백의종군 할 것”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선대위가 안정되는대로 빠른 시간 안에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문 대표는 또 4·13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백의종군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문 대표는 1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신년기자회견에서 “통합의 물꼬를 틔우기 위해 제가 비켜서는 것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천정배 의원이 이끄는 국민회의와 정의당과는 비공식인 협의를 이어왔지만 결실을 맺지못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논의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그는 “당 선대위는 총선에서 전권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권한 이양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백의종군하겠다”며 “최고위 의견이 모아지면 권한이양의 절차와 시기를 바로 공표할 계획이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 대표는 “대한민국을 바꿀 유일한 방법은 이번 총선에서 의회권력을 바꾸는 것”이라며 “이번 총선은 기득권정치와 미래정치의 대결”이라고 규정했다.

문 대표는 이어진 일문일답에서 이번 총선과 관련해 “일단 저는 이번 총선에서 지역구든 비례든 출마 않겠다. 불출마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총선 승리를 위해 돕겠다”고 덧붙였다. 문 대표는 또 “백의종군하겠다면 모든 직책을 내려놓는 게 깔금하다고 생각한다”며 인재영입위원장에서도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 김원철 기자 >



세상은 때때로 영적 축복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 계약을 맺지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흔히 이 세상의 큰 부(富)를 많이 소유하고 있다. 비록 다른 사람들처럼 많이 가지고있지는 않지만 자기가 지니고 있는 것이 넉넉하다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나는 넉넉하다,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욕심이 다른 사람의 겸손한 친절을 이용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어리석게 다른 사람의 관용에서 자기의 이익을 취득해서도 안된다. 또한 서로 불화했던 믿음의 친구들 사이의 우정이 회복되어 화목하게 되고, 사랑할 수있게 되는 것은 참으로 축복이고 즐거움이다.


우리의 신앙이 사람들로 하여금 관대하고, 마음이 자유롭고, 인색하지 않고, 유치하고 간교한 일을 경멸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 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것은 복음 안에 있는 깨(깨닫고), 충(충성하고), 사(사랑함)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불화했었던 믿음의 형제, 자매와 화해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그 우정을 더 개발하고 서로 겸양하여 더욱더 예의를 갖추는데 게을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들의 자녀의 짐은 때때로 장성하자마자 우리에게 근심 거리가 되는 때도 있다. 신앙심 깊은 부모들이나 사역자의 자녀들이 비행을 저지르기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괴로울 때, 그것이 자기들만의 유일한 경우이고 전례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선한 사람은 놀라서 아무런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람처럼, 자기 마음의 평화를 묵묵하게 지켜나간다. 아니면 <다윗>처럼 실수를 범할까 두려워서라도 그러한 사람은 침묵을 지킨다(시39:12).


그러나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어긋남에 침묵의 한계를 넘어서도 안된다. 그들 앞에 <정직>함을 보이는 것은 얼마나 크나 큰 교육인가! 부모의 권위가 가정에서 실추되면, 잘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집안 식구들은 각자 규칙을 지키고, 자녀들은 모든 중요한 일에 복종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항상 우리의 감사와 봉사는 주님의 은혜에 합당한 것이 되어야 한다. <복음>은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도록 했다. 사도<베드로>는 좀 더 높은 사랑의 차원을 향하여 순전한 마음으로 피차 뜨겁게 사랑하자고 말하고 있다. 우리 크리스천은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1:22), 율법 아래서의 레위인들의 정결케 함이나, 그 밖의 사람들의 위선적인 정결도 이 일을 해낼 수 없다. <복음>은 영원한 진리로 존속하여 거듭(중생)난 사람들의 심령에 영원토록 살아 남게된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마음은 복종의 가장 가치있는 보답이 된다. 우리가 주 하나님을 예배하면 할 수록 더욱 하도록 허락받으며 더욱 더 예배하게 될 것이다. 즉 열매를 맺는 나무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될 것이다” (요 15:2). 우리가 돌이켜 보아야 할 사건들 중에 한국 기독교의 참상을 뒤돌아 보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우리의 경제가 비록 지극히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주님의 증거로 우리들의 발을 돌이켰기>때문에, 또한 신실한 크리스천들은 주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규범으로 삼고 그 규범에 따라 행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곁길로 갔던 다른 길에서 돌아와 주 하나님의 증거로 돌이켰다. 그들은 주님의 증거로, 그들의 눈을 돌이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발도 돌이켰고, 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참회>를 실행 하도록 주님의 말씀에로 돌아왔다. 그들의 영혼이 주 하나님의 증거와 말씀을 향하여 굽혀지고 기울어 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복음>에 의해서 다스려지게 되었다.


그런 연고로 당시에 한국교회는 교회부흥의 횃불이 되었던 참회에서 <회개>로 교인들이 <성도>들로 바뀌는 부흥의 물결을 이루었다. 오늘날 우리는 바로 천국이 가까와지는, 우리들 앞에 놓여진 <참회하는 반성>으로 결국 경건한 결심을 창출하며, 세상을 향하여 모본을 보이는 <믿음(신앙)>생활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있을 때 우리는 ‘더 편안한 시기’로 그것을 미루지 말고, 쇠가 달았을 때 때려야 하듯이 신속히 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부를 때에 응답하시는 주 하나님께서는 나의 탄원을 허락하시고, 나의 호소를 판단하시는 주님이시다. “주의 긍휼하심을 인해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훌륭한 간구가 되는 것인 줄 믿는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며,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비밀을 지킴으로”우리는 바른 교훈과 선한 행실을 더욱 더 열심히 지키게 된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견고히 지키는 길은 경건한 믿음을 사수하는데 있다. 그런고로 건전한 믿음 위에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세우고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세우자!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에’ 우리의 <기도>는 가장 큰 효험을 얻게 된다.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



[한마당] 뻐꾸기 둥지와 뭉크

● 칼럼 2016. 1. 15. 17:50 Posted by SisaHan

희망의 새해가 왔는데, 왜 뭉크의 ‘절규’가 생각나는지, 영화 ‘뻐꾸기 둥지’가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기쁨의 외침이 이어져야 할 텐데, 경제는 어둡고, 주변의 삶들은 팍팍하고, 세상은 갈등의 소용돌이입니다. 북한의 철없는 핵 실험 뉴스까지,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더 암울합니다. 아무리 외쳐도 메아리가 없어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듯 답답한 심경들 때문일 겁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는 ‘영혼없는 삶’에 대한 저항입니다. 주인공은 감옥보다 자유롭겠지 하는 생각으로 정신병원에 도피하지만, 그 곳의 자유는 실상은 자유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간호장의 철저한 통제 아래서 숨막힐 것 같은 일상은 자유가 아니라 짓눌린 죽음의 삶이었고, 자유를 향한 그의 외침이 아무런 동조로 반향도 없음에 낙담합니다. 주인공이 절망한 것은 권력의 벽이기도 했지만,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순응하는데 지칩니다. 영혼없는 무뇌(無腦) 인간들 때문에 절규하는 것입니다. 발버둥치던 그의 삶은 끝내 죽음으로 끝납니다.
흑자를 낸 회사에서 억울한 해고와 끈질긴 복직투쟁이 핍박에 짓눌리며 벼랑에서 죽음을 택한 많은 노동조합원들의 처지도 마찬가지 일 겁니다. 절박한 처지에서 아무리 외쳐봐도 들어주는 사람 손내미는 사람 없이 냉대하고 되레 눈을 부라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기란,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최근의 그런 답답한 소식 가운데 한-일 정부가 합의했다는 일제 군대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불가역적 타결’ 발표는 또 하나의 어이없는 절망감을 안겼습니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할머니들이 분노의 눈물을 쏟고 있습니다. 무려 24년 동안 1천2백회를 훌쩍 넘긴 수요집회마다 노구의 저무는 생명들이 힘겹게 외쳐왔습니다. 법적책임과 배상, 명확한 사죄와 역사교훈적 후속조치…귀에 박힌 ‘해결원칙’은 얼마 전까지 대통령도 일본에 요구했던 것들인데, ‘합의’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명예를 더럽힌 굴욕적 외교참사’라는 비판이 그래서 들끓습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최선을 다한 대승적 결과이니 그 정도로 됐다”고 주장하고, 일본은 “다신 입에 올리지 말라”고 쾌재를 부릅니다. 아베는 제 입으론 직접 사죄할 수 없다고 대놓고 큰소리에 소녀상은 옮길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단죄’가 아닌, 오히려 ‘최종 입막음’을 안겨준 현 한국정부의 대응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닐 겁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유신회귀적 국정운영과 국정교과서에 이르기까지 일맥상통하지 않은지‥ 태생적으로, 또한 일관된 친일과 독재의 후예들이며 그런 인식의 소유자들임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뿌리가 그런데, 그들의 역사의식에서 뭘 기대할 수 있겠나요?. 일제하 성노예 전쟁범죄라는 인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반인권적·몰역사적 합의에 응해줄 리가 없을 겁니다.


유엔헌장에도 나와 있는 피해자 중심 협상이어야 함에도 피해자 의견을 전혀 듣지 않은 것에서 보듯,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감대나 배려 혹은 책임의식이 갖춰지지 않았고, 협상외교의 기본과 자주적 입장을 견지하지 못한 채 일본과 미국의 위세에 끌려간 외교력 결핍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덧붙인다면, 국민 한사람 한사람을 살펴 받들고 섬긴다는 위민(爲民)헌신의 자세보다 군림하는 제왕적 리더쉽이 몸에 배었으니, ‘까짓 귀찮은 위안부 논란 그만 끝내라’고 서둘러 얼버무리고 틀어막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한 것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성경(마 12:35)도 말씀하고 있지요.
다수 국민이 반발하고 당사자가 용납지 않는 역사적 상처를 그냥 덮으려 하는데, 할머니들을 가장 잘 이해할 것 같은 60대 이상에서 긍정적 반응이 높다니, 참 무정한 세상입니다. 이미 편향에 길들여진 많은 언론은 정부편을 들기 시작합니다. 신문방송에서 반대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지며 슬그머니 사라져 갑니다. 외교무대에서 정부는 ‘위안부’라는 말은 입도 벙끗하지 못할 판이니, 할머니들의, 아니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는 또 하나의 역사적 암덩이가 되고 말 처지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소리치다 지치고, 아예 외치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함께 외쳐주고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외면하고 심지어 손가락질 하는 이들이 더 많아진 때문입니다. 권력과 재력 등 힘있는 자들과 그들에 한통속이 된 언론마저 정권과 사익에 몰두해 작지만 정의로운 신음들을 못들은 척 깔아뭉개는 직무유기에 젖어든 탓도 큽니다.
그런데 그런 정치와 권력의 난폭운전과 역주행에 제동장치가 없는 현실이 더욱 답답하게 합니다. 주눅들고 각자도생인 야당도, 국민도, 또한 다수 시민의 각성이나 결기(決起)도 자꾸만 ‘뻐꾸기 둥지의 무골인간들’처럼 되어가는 듯 하니까요. 더 기막힌 것은 그런 후진적 ‘헬조선’의 폐습이 밖으로 수출돼 해외에서까지 기세를 부리려하니, 참 한심한 노릇입니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