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사사시대에 베들레헴 지역에 엘리멜렉과 나오미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 그들이 살던 그곳에 큰 흉년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두 아들을 데리고, 지금의 요르단 지역인, 요단 강 동편 모압 지방에 이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곳에서 남편 엘리멜렉은 죽고, 두 아들은 장성하여 그곳 여인들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두 며느리 이름은 오르바와 룻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되어 안타깝게도 나오미의 두 아들도 그곳에서 죽게 되고, 이제 나오미와 두 며느리인 오르바와 룻 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너희들도 너희들의 살 길을 찾아가라고 이야기 합니다. 나오미가 이렇게 한 이유는 그 당시 세 여자가 한 곳에서 생활을 유지 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법에는 여인들은 남편으로부터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큰 며느리인 오르바는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떠나지만, 둘째 며느리 룻은 끝까지 나오미와 함께 하기로 작정 합니다. 이제 룻은 함께 하기로 한 시 어머니인 나오미와 어떻게 해서든 먹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가난하고 궁핍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었습니다. 룻기 2장 23절 말씀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 하니라.” 
그 당시 남편을 잃어 버린 과부 룻이 살아 남은 방법은 밭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 그것으로 시 어머니와 연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어떤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두 여인이 굶지않고 먹을 만큼, 즉 그들이 원하는 만큼 가져올 수 있는 이삭들이 늘 땅에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나눔의 법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레위기 23장 22절에서 이렇게 이웃들과의 나눔에 대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또한, 신명기 24장 19절부터 21절에서도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추수할 곡식의 일부를, 나에게 주신 물질의 일부를, 더 구체적으로 내 삶의 일부를 나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15장 11절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우리가 나누고 섬기고 돌보아야 할 우리의 이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감사의 계절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땅에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 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반드시 너의 땅 안에 너의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저의 손을 펴라”고 말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나눔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나누는 손과 나누는 발과 나누는 삶의 모습이 있을 때, 우리를 통해 이 땅에는 더 큰 감사의 찬양과 함성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추수 감사절을 맞이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한 톨도 남김 없이 다 우리들의 곡간에 넣어 두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또한 이 땅의 우리들의 이웃들이 그것을 취할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주신 일부를 남겨 두는 풍성한 감사의 계절이 되길 소망해 봅니다. 

< 이충익 목사 - 시냇가에 심은 초대교회 담임목사 >


슬픔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폭식을 하면서 조롱하거나 욕을 퍼붓는 사람들을 보고 공감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인간들이라고 개탄한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 극단적인 대립이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세월호 그만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과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세상을 보는지 의심한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는 오늘날 세월호 문제에 대한 극한적 대립은 한국 사회가 TV 종합편성채널(종편)과 조·중·동으로만 세상을 읽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종편을 전혀 보지 않지만 식당이나 목욕탕 등 공공장소에서 할 수 없이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언론계나 지식사회에서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대단한 논객이 되어 방송사가 작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진보/보수의 양 테이블에 나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의제를 긴 시간 떠드는 것이나 세월호 참사 이후 유병언과 구원파의 동향을 거의 생중계하듯이 계속 보도하는 것을 본 적 있는데, 그걸 보고 왜 종편으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유족 공격 담론에 솔깃하게 되는지 약간 이해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은 “텅 비고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귀중한 시간을 때우면서, 정작 보여주어야 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보여주고’, 시민이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기 위하여 가져야 할 적절한 정보를 멀리하게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텔레비전이 소유주나 광고주의 시청률 압박 요구에 완전히 종속되어 권력에 민감한 의제는 의도적으로 피해가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한 것인 양 포장하는 일종의 상징 폭력 기구라고 보았다.
 
이번 한국의 종편과 지상파도 ‘참사’를 교통사고로 만들었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 다음, 정부나 당국의 구조 책임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세월호 구조 관련 수많은 의혹에 대해서는 질문조차 않고, 농성장의 유족과 생존자들에게 마이크 한번 들이대지 않은 채, 이들이 마치 자식 죽음을 팔아 욕심을 채우려는 탐욕스러운 떼잡이인 양 만들어 버렸고, 유족들 대리기사 폭행 사건이 나오자 잘 만났다는 듯이 뉴스의 머리기사로 띄워 종일 틀어댔다. 이런 걸 칼 안 든 폭력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해방 직후 <동아일보> 등 여러 신문이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안을 소련이 제안한 것으로 왜곡 보도하여 숨죽이고 있던 친일파를 반탁·반공 투사로 부활시켰고, 나라를 적대적 대립으로 몰고 갔듯이, 그 악명 높던 서북청년단이 다시 나타난 지금도 그 상황과 유사하다. 물론 8.15 직후 하나였던 국민이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적대적으로 쪼개진 것은 언론들만의 작품이 아니라 기사회생을 노리던 친일 정치세력들의 공작 혐의가 있듯이, 국민적 공감에서 출발했던 세월호 여론을 적대적 반반으로 돌려놓은 주체도 사실상은 이미지 조작과 허구적 여론지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현 집권세력일 것이다.
 
가공된 이미지가 ‘여론’이 되고 ‘지지율’이 되어 권력을 재생산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과 새누리당은 온갖 무리수와 편법을 써서 종편 허가를 강행했을 것이다. 그들은 세월호 여론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고 좋아할지 모르지만, 공감대와 합의의 기반 위에 서서 비극적 재난 방지를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국민들은 폭발 직전의 두 적대 진영으로 쪼개졌고 근본적 대안 마련 작업은 더 멀어졌다. 유신 시절 지식인들이 국내 소식을 알기 위해 외국 신문·잡지를 뒤졌듯이, 21세기에 사는 지금 우리는 일본의 <후지TV>를 통해 침몰 직전 세월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언론환경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박근혜호의 한국은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공감은커녕 폭력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집단이 활개치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을까?
<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스트레스 경감 효과 입소문… 그림그리기 책 등 인기

“이렇게 색칠공부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직장인 박지혜(33)씨는 요즘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색칠공부에 푹 빠져 산다. 얼마 전 문구점에서 36색 색연필도 샀다. 초등학교 이후 처음이다. 그는 색칠공부를 하면 스트레스가 사라진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바로 책을 샀다. “처음엔 이렇게 복잡한 그림에 색칠을 하다가 스트레스를 더 받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예전에는 집에 와도 일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지금은 색칠에 집중하다 보면 한결 마음이 편해요.”
 
색칠공부뿐 아니라 수채화 그리기 등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하는 활동들이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컬러링북’을 표방한 일부 색칠공부 책은 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 등 주요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취미 분야 판매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베스트셀러에 오른 컬러링북을 펴낸 김경태 편집장은 29일 “초판 2000부를 찍었는데 이틀 만에 다 팔려 일주일 동안 품절되기도 했다. ‘안티 스트레스’ 효과뿐 아니라, 특히 여성들은 책이 예쁘고 종이에 손으로 직접 색칠을 하는 아날로그적 감성에 열광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서점에서는 비슷한 종류의 컬러링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공통적으로 ‘안티 스트레스’를 내세운다. 최근 그림 그리기에 빠진 김경민(31)씨도 “그림을 그리다 보면 집중력도 높아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짧은 시간에 결과물이 나오니까 뿌듯하기도 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색칠공부가 경쟁사회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의 ‘전투성’을 줄여준다고 분석했다. 긴장감을 풀어준다는 것이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색칠을 하다 보면 어릴 적으로 돌아가는 마음이 생긴다. 게다가 편안하게 두려움 없이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영희 한국미술치료학회 사무국장은 “우리가 불안을 느낄 때 어딘가 끄적거리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색칠을 반복하면서 자기 안에 있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서영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