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속히 할 것과 더디게 할 것이 있다. 더뎌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니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말하기와 성내기가 이에 해당한다(야고보서 1: 19). 물론 우리 인생사에 대부분의 일들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빠르면 빠를 수록 좋은 것도 있다. 
듣기가 그렇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라”(야고보서 1: 19). 화해가 그렇다.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마태복음 5: 24-25a). 전도도 그렇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이 기쁜 소식을 ‘빨리’ 가서 전하라 하셨다(마태 28: 7).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것은 죽음의 길로 가는 영혼을 살리느냐 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한가지 더한다면 ‘감사’가 그렇다. ‘감사’ 역시 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 그러면 감사할 일이 더 생기는 법이다.
 
벌써 오래전 일이다. 친구 아이 돌잔치가 있어서 아이가 정말 좋아할 만한 것을 정성껏 골라 선물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나서 여러번 만났는데, 이 친구가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꼭 그 말을 듣고자 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이 나는 걸 보면 그 때 많이 섭섭했던 모양이다. 
월요일 아침, 딸 아이로부터 문자가 왔다. 집에 숙제(assignment) 한 걸 두고 왔다는 것이다. 시간에 맞춰 숙제를 들고 학교 건물 앞에서 기다렸다. 약속한 시간이 지났다. 건물 안으로 올라가 볼까 했지만 혹시나 어긋나면 안되겠기에 계속 기다렸다. 마침내 딸 아이가 보였다. 반갑게 숙제를 건네주는 순간, ”왜 6층으로 올라오지 않았어!” 하고 목소리를 높히고는 숙제를 받아채갔다. 그리고 나는 아이의 등 뒤에 대고, “Thank you 는 해야지?” 하고 소리쳤다. 
마침 쉬는 날이라 딸아이 일을 도와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그래도 좀 서운하고 아쉬웠다.
‘짜~식, 최소한 고맙다는 말은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냐?’ 이렇게 속으로 투덜데는데, 바로 그 때, 딸 아이로부터 문자가 왔다.

"아빠 고마워!!"
‘그럼 그렇지. 바쁘고 쫓겨서 그랬겠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돌아오는데, 문자 하나에 이내 서운함은 사라져 버리고 온데간데 없었다. 늦게라도 말해주니 좋았다. “아이 참, 목사님이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래요? 유치하게…”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그러는 것 같다. 그래도 들으니까 좋았다. 유치해 보여도 좋았다. 
빠르면 빠를 수록 좋았을 한 마디, 그러나 늦게라도 여전히 마음을 풀어 주는 말 한마디.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고맙습니다!” 오늘 나를 행복하게 하는 한 마디, “아빠 고마워!!”
‘그런데..... 짜~식, 왜 느낌표(!)가 두개 뿐이지? 하나만 더 쓰지. 그럼 더 좋을 텐데…. 아하! 그래서 감사는 넘치게 하라는 것이로구나!’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로새서 2: 6-7) 
이제 곧 추수 감사절이다. 올해는 이전 보다 감사함을 더 넘치게 해야겠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 김진식 목사 - 몬트리올 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 >

 

[1500자 칼럼] 미 카

● 칼럼 2013. 10. 19. 16:46 Posted by SisaHan
새 학기가 시작됐다. 온타리오 정부가 시작한, 유치원에 갈 나이의 아이들을 정규 초등학교 과정으로 흡수시키는 정책 때문에 4살짜리 아기 학생들이 가는 학교마다 눈에 띈다. 새로 학교에 온 유치원(kindergarten) 학생들에게 학교의 곳곳을 보여주는 날이다. 20여명의 어린 아이들이 선생님과 같이 학교 사무실을 보러 왔다. 일하던 어른들도 모두 나와서 아이들을 맞는다. 병아리 같은 어린 학생들은 제일 예쁜 옷을 입고, 새 운동화를 신고 옹기종기 모였다. 그들의 고개는 어른들을 향해 모두 위로 젖혀져 있고, 맑은 눈동자들은 긴장과 호기심으로 더욱 반짝거린다. 그 모습은 귀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들의 얼굴은 한없는 가능성과 어른들의 마음을 꿰뚫을 듯한 순수함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학교 앞에서 엄마 손을 놓치못해 어려워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모두 교장선생님께 인사도 드리고, 사무실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열심히 듣고있다.
 
헌데, 다른 친구들이 서로 의지하고 붙어 서 있는데, 어린 여학생 하나가 그룹에서 밀치고 나와 혼자 달아나기도 하고, 마루 바닥에 주저앉기도 한다. 그 학생은 전혀 옆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도 없고, 선생님이 얼굴을 마주하고 타일러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을 인솔하는 사이 사이에 “미카, 친구들 옆에 서 있어야지, 혼자 가면 않되지”, “미카, 같이 ‘안녕하세요?’ 라고 해야지”, “미카는 선생님 옆에 와서 손을 잡으세요” 하며 아이를 타이른다. 미카는 옆에 친구들보다 눈에 띄게 작고, 커다란 갈색 눈과 조그만 얼굴이 마치 인형과 같아 보였다. 자신이 집을 떠나 학교에 있다는 인식이 없는 듯 하고픈대로 행동한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을 보면 마치 그 어린 학생은 말을 안듣고 말썽만 부리는 것 같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어린 미카를 말썽꾼 학생이라 생각하기 전에 그 학생을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원인들이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한다. 미카는 귀에 잦은 염증으로 늘 말 소리가 정확히 들리지 않을 수도 있고, 요사이 늘어가고 있는 미세한 자폐 증세를 가진 아이거나,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한, 언어장애를 가진 학생일 수도 있다. 이유는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도 그 어린 학생의 의도일 수는 없다.
 
며칠 전 운전 중에 라디오에서 흥미있는 인터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가 타고난 심성이 다 선한 것도 아니고, 사람마다 다르게 태어난 능력 때문에 삶이 공평할 수도 없고, 또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본성은 서로 화목하게 지나기도 어렵게 만들어진 것이 우리 피조물들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어서 그 사회학자는 다행히 우리에게는 ‘교육’이라는 것이 있어, 한 공동체로 우리들의 본성을 바꾸어 갈 수 있는 큰 연장이 되고 있다고 했다. 온타리오 주 교육부가 발간한 문서들을 보거나, 교육청 건물들에 들어서면, ‘학생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해 주는 것’ 이란 말이 곳곳에 보인다. 교육의 목표 속에 들어있는 ‘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 한다는 말은 학생들 모두에게 더 많은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 다 풍족히 살게하겠다는 약속은 아닐 것이다. 많은 능력을 갖고 태어난 학생들과, 여러가지 어려움을 타고난 학생들이 같이 한 교실에서 자라나는 학교라는 곳은 이미 작은 세상이다. 학생들이 지금부터 긴 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들을 매일 매일 연습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공동적인 훈련을 하는 곳이다. 그 훈련의 핵심은 부족한 학생은 다 같이 돕고, 우수한 학생은 씩씩하게 많은 일을 책임지는 일이다.
 
사무실 견학을 끝내고 병아리들이 한 줄로 서서 교실로 돌아간다. 오늘 등교 첫 날, 반에서 가장 많이 불리운 이름이 ‘미카’일 것이다. 선생님은 거듭 한 학생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서,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를 의식하는것 같다. 돌아가는 길에는 미카의 주의를 끌려면, 옆에 있는 아이들 두, 세 명의 이름을 같이 부른다. 미카는 친구들이 선생님 쪽으로 얼굴을 돌려 대답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같이 얼굴을 돌리기도 한다. 공동체 훈련의 지도자는 아이들의 작은 감정도 철저히 감싸려하는 선생님임을 예쁘게 보여주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돌아가는 뒷모습들이 대견하다.

< 김인숙 - ‘에세이 21’로 등단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심코 가톨릭교육청 언어치료사


[칼럼] 참 나쁜, 더 나쁜, 가장 나쁜

● 칼럼 2013. 10. 19. 16:43 Posted by SisaHan
박근혜 대통령의 간결한 화법은 말 많은 세상에서 말의 적음이 오히려 더 강력할 수도 있다는 역설을 과시했다. 그의 다듬어진 문어체는 절제된 인격의 표현인 듯 고고한 인상을 주었고 때로는 비수처럼 예리한 정치적 효과를 발휘하기도 했다. 참여정부 말년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쏘아붙인 단도직입적 논평은 그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 희미해진 뒤에도 사람들 입에 남아 여전히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민주당 김한길 대표가 복지공약 축소를 두고 그 말을 저작권자에게 반환한 바 있다. 하지만 누적사용의 효과 체감 탓인지, 김 대표의 공격은 박근혜를 ‘나쁜 대통령’의 이미지로 묶는 데 성공한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그때 박근혜 수사학이 일정하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통찰력과 언어능력 때문이 아니다. 노무현이라는 특정 카운터파트너의 존재가 이 경우 필수였다. 노무현처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극단적으로 갈라지는 예가 드물다는 것을 전제로 해 나는 그를 철두철미 서민적인 감정과 민주적인 심성의 소유자로 기억한다. 그는 가슴에 담긴 생각과 밖으로 나타낸 발언 사이에 간극이 없다고 믿어지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도시적 세련과 거리가 먼 직설적인 언변과 타협할 줄 모르는 정의감은 그를 청문회 스타로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기득권 세계에서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정치가로 입신하고 나서도 한국 사회의 지배계급으로부터 ‘이너서클’의 일원으로 대접받은 적이 없었고, 당선 후에도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는 보수층 일각의 배타적 정서 때문에 고통 받았다. 내 생각엔 이것이 박근혜 수사학의 성공의 기반이고, 심지어 세상을 떠난 지 4년여가 지난 오늘도 정치적 모략의 희생이 되는 원인이다.
 
그 노무현이 퇴임 뒤 봉하마을로 내려가 밀짚모자를 쓴 채 자전거를 타고 논두렁길을 달리는 장면은 한국 사회의 기준에서는 하나의 감동이고 신화이다. 갑자기 그 장면이 떠오른 것은 다른 한 사람의 퇴임 대통령 사진이 개천절 아침 신문을 장식했기 때문인데, 다름 아닌 이명박이다. 다들 보았겠지만, 이명박은 선글라스에 헬멧을 갖추어 쓰고 쌩쌩 달리는 사진을 자기 페이스북에 싣고 “북한강 자전거길에 나왔습니다. 탁 트인 한강을 끼고 달리니 정말 시원하고 좋습니다” 운운하는 글도 올렸다. 기가 막힌다고 할까,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뜨거운 기운이 명치끝에서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게 느껴지고, 눈앞에 황사가 일어 천지가 뿌옇게 사라지는 것도 같았다. 아, 이럴 수도 있구나. 이 사람은 신문도 읽지 않고 텔레비전 뉴스도 보지 않는구나. 남녘지방 강과 바다가 여름내 녹조로 덮여 지역민들이 애를 태웠고 양식어장이 폐허가 되다시피 망가져 어민들이 죽을상이었는데, 몇 달 전까지 국정의 최고책임자였던 사람이 그 어려움을 조롱하는 듯한 글과 사진을 올리고 “여러분도 한번 나와 보세요” 라고 말해도 되는구나. 그러니 설사 노무현을 ‘나쁜 대통령’이라 해도 나로서는 이명박을 ‘더 나쁜’ 대통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명박으로부터 석연찮은 선거과정을 통해 정권을 이어받은 것이 박근혜이다. 야당과 시민사회는 국정원의 대선개입과 정치공작을 규탄하는 시국성명과 촛불집회를 넉 달 가까이 이어가고 있는데, 마지못해 입을 연 박 대통령은 선거에서 국정원의 도움을 받은 바 없고 정치공작은 모르는 일이라고 야멸치게 잘랐다. 국정원 직원들의 댓글이 민심의 추이에 실제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물론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나 같은 사람은 댓글의 저열함이 도리어 역효과를 냈을지 모른다는 순진한 억측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국정원 정치개입이 누구에게 이로웠느냐가 아니라 개입 사실 자체의 불법성이다. 채동욱 검찰이 밝힌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게다가 대선 승리를 위해 온갖 달콤한 공약으로 사탕발림을 하다가 이제 대부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있다. 진영 복지부 장관의 사퇴가 박근혜 공약의 행방에 대해 말하는 바가 그것 아닌가. 제발 ‘가장 나쁜’ 대통령의 길로 향하지 않기 바란다.
< 염무웅 -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