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들이 첨단 자동화 시스템을 갖춰갈수록 새로운 형태의 사이버범죄인 ‘자동차 해킹’의 우려가 커지고 자동차 제조업체나 사법당국에 큰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이미 시중에는 미끄러운 노면 탐지, 충돌 예방, 전자제어식 제동장치(ABS) 같은 전자기술 기반 시스템이나 전자제어장치(ECU)를 내장한 반 자동화시스템을 갖춘 자동차들이 넘쳐나고 있다. 또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BMW가 이미 무인자동차(self-driving cars)를 개발하고 있는 것처럼 2020년까지 완전 자동화된 자동차들이 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다른 컴퓨터시스템과 마찬가지로 자동차에 내장된 첨단장치들도 해킹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선량한 해커’(white hacker)나 학자들이 실험을 통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8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미국 국방부 후원 국제해커행사 ‘데프콘’(DefCon)에서 찰리 밀러와 크리스 밸러섹은 2010년 도요타 프리우스와 포스드의 이스케이프를 노트북PC로 해킹하는 실험을 보여줬다. 2011년에는 워싱턴대학과 캘리포니아 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UC샌디에이고)도 무선해킹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운전대와 브레이크는 물론 계기판, 가속페달과 엔진, 전조등, 경적까지도 원격 제어했다. 이에 따라 미국과 유럽의 사법당국들과 자동차 제조업체들도 이에 주목하고 있다. 미 고속도로교통안전국(NHTSA)은 자동차 해킹을 연구하기 위해 자동차 사이버 보안 연구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아들을 먼저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고 살 맛 나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버지의 마음은 같았을 것이다. 아들의 체취가 뭍은 물품들, 아들의 어린 시절이 새겨진 놀이터, 마을, 동네, 고향.. 아버지의 아픔은 지워질 수 없는 것이어서 차라리 정든 고향을 떠나기로 작정한다. 살아온 삶의 자리를 떠나는 일이 힘든 일지만,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지우기 위해서는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누가 알랴!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다른 아들이 눈치 챈다. 묵묵히 짐을 싸며 고향을 떠나겠다는 아버지를 지켜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와 함께 길을 가기로 자청하고 아버지의 길에 동참하며 순종한다. 아니, 아버지의 무언의 부탁을 들어드리는 것이다. 나라도 함께 아버지와 고향을 떠나서 아버지의 슬픔을 달래드리는 것이 효이며, 자식 된 도리이며, 순종의 삶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아브람은 그렇게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무작정 가나안을 향했다. 하란이란 곳에 도착, 아직은 가나안에 갈 길이 먼데 마음의 병이 육신의 병이 된 것일까,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타향 하란에서 그만 이 세상과 작별한다. 아브람은 당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비록 아픔을 잊기 위해 떠난 고향이지만, 그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그 날 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신다. “그냥, 계속 가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우리는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 순종의 사람이라 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의 순종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영적 캐릭터가 아님을 알게 된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앞서 육신의 아버지께 순종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믿음생활의 패턴이나 캐릭터가 영적 변화의 한 순간에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를 하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음을 성경을 통해서 배운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는가는 하나님이 우리보다 이미 더 잘 알고 계신다. 

먼저 인간이 되어, 참 인간이 되어 자신의 도리를 다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패턴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우리를 쓰실 곳을 찾으신다. 직함과 명예에 목숨을 걸고 자신의 참된 인간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보시면서 어떻게 생각할까? 
요즘 자문하는 가장 많은 질문은 “난 참 인간인가?”이다. 목사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어야 하며 아빠가, 아내가 되기 전에 먼저 참 사람이 되어야 함을 절실하게 느낀다. 조금 못나고, 조금 늦고, 조금 작아도. 비록 크지 않고, 대단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내 스스로가 먼저 참 인간이 되어야지. 40대 후반을 보내며 이제야 이런 생각이 드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 최규영 목사 - 토론토 Back to Bible교회 담임목사, 온타리오 한인목사회장 >


마태복음 5장의 산상 수훈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신 모든 말씀의 집약판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한번쯤 생각해 볼 부분이 있어서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38절 이하를 보면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현재 상황이라해도 뺨을 때린 자가 당황하게 될 말씀을 하셨습니다. 뉴욕 오번 신학대학의 성서학 교수인 ‘월터 윙크’(저서: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 예수님과 비폭력 저항)의 연구에 의존 하자면, 그당시 로마인들은 유대인을 동급의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왼손을 사용하지 않았던 관습에 따라 오른손등을 사용하여 뺨을 때렸습니다. 이것은 멸시를 나타내며 동등의 신분자들끼리 사용하는 손바닦이나 주먹을 사용하지는 않았던 점을 생각해 본다면, 오른손등으로 상대의 들이미는 왼쪽 뺨을 때릴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비폭력으로 로마인들에게 저항하라는 하나의 메세지 였던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피래미’라는 글을 통하여 피래미의 끝없는 저항을 이야기 한적이 있습니다. 피래미가 한자리에 머물러 살기 위해서는 끝없는 지느러미 운동을 통하여 흐르는 물에 저항 하여야만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물결에 떠밀려 내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끝없는 움직임이 필요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퇴보되어 세상에 빠져서 구별된 삶을 살아 갈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 명하셨던 것입니다. 5장40절에는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 보아도 저항의 극치 입니다. 가난했던 그시절, 악덕 지주들이나 악덕 사채업자들은 옷까지 담보로 빼았아 갔었습니다. 그렇다고 발가벗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속옷을 달라 하니까 것옷까지 벗어 버린다면 그 상황은 감당할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립니다. 이사야 20장을 살펴 보아도 발가벗긴다는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옷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저녁에는 돌려 주어 그가 추워 떨게 하지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또한 로마인에 대한 비폭력적인 저항 이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5장 41절에는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리를 가라고 명한 사람을,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는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도 됩니다. 그 당시 점령지에서의 로마인들 착취가 극에 달하자 많은 유대인들의 저항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법령으로 하루 노역을 1마일(우리 성경에는 오리)이상 시키면 죄를 묻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1마일의 노역을 시켰는데 1마일 분량의 일을 해 버리면 그 일을 지시한자는 벌을 받게 됩니다. 얼마나 통쾌한 말씀입니까! 
예수님 께서는 우리에게 절대로 손해가 나거나 불행해지기를 원치 않으시며, 불이익을 당할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대로 순종하면 반드시 하늘의 축복과 마음의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5장42절 이하의 말씀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42절:”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말씀 하셨습니다. 지혜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의 비폭력 저항에 대한 귀한 말씀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 정훈태 - 동산교회 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