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신앙 재조명‥ 한국교회의 밀알

100여년 전 북미에서 온 선교사들에게 조선인은 미개인이나 식인종처럼 묘사됐다. 그때 한국 문화의 진수를 간파해 이를 서양에 소개하고, 토착적 기독교를 한국에 심어주기 위해 애썼던 선교사가 있었다. 바로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 제임스 스카스 게일(James Scarth Gale :한국명 기일 奇一: 1863~1937) 목사다. 
“제가 영국에서 조선에 온 지도 올해로 꼭 40년이 되었습니다. 그간 내가 보았던 조선! 생각해보면 그것은 실로 한편의 활동사진입니다. 이 40년간 나는 보면 볼수록 조선 그 자체가 심오하게 여겨져 흥미를 더해 가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전도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지…….”
 
1928년 ‘조선사상통신’에 실린 게일 목사의 글 ‘구미인이 본 조선의 장래 - 나는 전도를 낙관한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게일 목사는 암흑 같았던 조선의 미래를 ‘낙관’했다.
올해가 그의 탄생 150돌-. 그는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교회의 토양을 갈아 한 알의 밀알처럼 희생과 헌신의 열정을 쏟았다. 위기론에 싸인 한국교회의 회심과 회복을 위한 ‘초심의 거울’로 게일의 삶과 신앙이 되새겨지는 가운데, 그가 몸담았던 연동교회를 중심으로 조명 작업이 활발하다.
최근 <한국 고전번역가의 초상, 게일의 고전학 담론과 고소설 번역의 지평>(소명출판 펴냄)을 출간한 이상현 부산대 인문한국(HK) 연구교수는 “게일은 한국인보다 먼저 한국어를 연구한 한국어학자이자 고전번역가였으며, 서구가 아닌 한국의 시선에서 한국학을 개척한 학자였다”고 평했다. 
1888년 캐나다 토론토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기독청년회(YMCA) 파송으로 25살에 최초의 캐나다 선교사로 한국에 와 서울 종로5가 연동교회 초대 목사를 지낸 게일은 언어와 문학의 천재여서 한국어를 빠르게 익혀 성서를 한글로 번역한 데 이어 한국 최초의 한영사전을 만들고 <천로역정>과 찬송가를 우리말로 번역했다. ‘갓(god)’을 ‘하나님’이란 표기로 정리한 것도 그였다. 
그는 또 <구운몽>, <심청전>, <홍길동전>, 조선 시대 야담집 <천예록> 등을 영어로 번역해 영국 런던에서 발간했다. 특히 구운몽’ 영역본은 고풍스러워서 지금도 해외 한국학 학자들 사이에 교과서처럼 읽힌다.
 
“조선은 실로 동양의 희랍(그리스)이라고 말하고픈 나라로, 일찍이 고대 유사 이래 온갖 문화를 창조했으며 세계에서 으뜸가는 바가 있었습니다. 우선 문학의 측면에서 보자면 서양을 떠들썩하게 했던 세익스피어는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 조선으로 말하자면 임진란 이후의 인물이지만, 조선에는 이미 그보다도 1000여 년 전 신라 최고운(최치원)의 문학이 당나라에 들어와 측천무후를 놀라게 하지 않았습니까. 고구려 광개토왕 비문과 같은 것은 그 웅도거업(雄圖巨業)은 접어두더라도, 단순히 문장 그것만 놓고 보더라도 천고의 걸작이며 게다가 그것은 실로 기원후 414년이라는 고대의 것에 속합니다. 그 사상, 그 문물제도에서 보아도 조선과 같이 발달한 곳은 없었습니다.” 
한국 고전에 매료된 그는 조선을 동양의 그리스로 칭송했다. 
게일 목사는 고려의 문신 이규보를 좋아해 그의 무덤까지 찾아갔고, 40년의 한국생활을 접고 떠날 때 <동국이상국집>을 갖고 갔다고 전한다. 
토론토대 토마스피셔희귀본 장서실에는 ‘게일 문서’가 보관돼 있다.
24개 상자로 분류된 ‘게일 문서’는 편지, 비망록, 일기 등이 포함돼 있다. 특히 친필 일기에는 ‘심청전’ ‘홍길동전’ ‘숙영낭자전’ ‘창선감의록’ 등 한국 고소설을 번역한 내용이 담겨 있다.
게일의 일기는 모두 19권, 권당 200쪽 분량으로, 일기보다 한국 고전을 번역한 내용이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춘향전’ ‘심청전’ ‘토끼전’ 영역본, 조선 후기 문신 신유한의 일본 여행기 ‘해유록’ 영역본 등 일기에 수록된 고소설 영역본과 교정 원고들은 아쉽게도 출간되지 못했다.
 
지난 17일 주일 그가 초대 담임목사를 지냈던 연동교회에서는 게일 탄생 150돌 기념 예배와 게일학술연구원 개원 발기 대회가 열렸다. 또 이날 연동교회 안에 마련된 게일목사기념관이 개관하며 게일의 연구 활동을 조명한 논문집도 발간됐다. 
한편 캐나다 한인교계는 지난 2008년 6월21~22일 게일 선교사의 한국선교 120주년 기념행사를 고향에서 가진 바 있다. 
당시 행사는 게일을 연구해온 토론토대 유영식 박사의 노력과 온주교협 및 캐나다장로교(PCC) 한카 동부노회, 해외한인장로회(KPCA) 캐나다 동노회가 공동으로 마련해 열렸다. 먼저 게일 선교사가 다녔던 키치너-워터루 인근 앨마(Alma)의 성 앤드류스(St. Andrews)장로교회에서 손녀 웬디 얼(Wandy Earl), 로즈마리 힐(Rosemary Hill)씨와 증손녀 등 9명의 후손도 참석한 가운데 1백여 명이 모여 유영식 교수의 강연과 생가방문, 야유 친교행사 등을 갖고 발자취를 돌아보았고, 이튿날은 토론토 한인장로교회에서 후손과 목회자, 일반 성도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예배를 드리고 캐나다인 선교시대의 문을 연 게일의 선교행적과 한국 기독교는 물론 사회-문화발전에 끼친 업적을 되새겼다. 
게일 선교사는 25살부터 40년간 한국에서 헌신했다. 그는 특히 신학이 아닌 문학사를 전공한 특이한 이력의 장로교 선교사로 나중 목사 안수를 받았다. 어문과 역사에 능해 개화기 문화적 기여가 대단했다. 
1928년 은퇴한 후 영국으로 건너가 1937년 7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생전 1남1녀를 두었으나 아들은 지난 해 타계했고, 영국과 네델란드 등지에 외손녀와 손자 등이 살고있다.



GTA 한카노인회(회장 조영연)와 주부문학교실(실장 박희남)이 공동
으로 마련한 홍순관 선생 강연회가 지난 23일 오후 노스욕 에디스베일 커뮤니티센터에서 열려 160여명의 청중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뤘다.

주부문학교실 송완일 고문이 사회를 맡아 노래교실 지도강사인 이영실 씨와 테너 유인 씨의 특송으로 시작된 강연에서 홍순관 선생은 2시간 동안 ‘자연을 통해 배우는 아름다운 인생’을 주제로 철학과 종교를 넘나드는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청중의 박수를 받았다. 이날 참석자들은 비교적 긴 강연이었음도 홍 선생 특유의 재미와 감동, 유머가 담긴 명강의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귀를 기울였다.
 
필라델피아 Eastern Baptist 신학교를 졸업한 홍순관 선생은 토론토 동부장로교회 담임목사와 북미주 기독학자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고, 조국 민주화와 인권, 재일동포 지문날인 문제 등을 국제사회에 알리는데 힘을 쏟았다. 위 사진은 자리를 메운 청중들.
< 문의: 647-402-7362, 416-577-8998 >


[한마당] 3.1운동은「3.1혁명」이다

● 칼럼 2013. 3. 1. 13:27 Posted by SisaHan
1919년 4월10일 밤 중국 상하이의 한 다락방에 29명의 청장년 애국자들이 은밀하게 모였다. 밤샘 논의 끝에 그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을 제1조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만들어냈다. 
그 4월11일 아침, 민주공화제란 체제를 표방한,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의 나라가 탄생했다. 망명정부의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5000년 한국 역사에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다.

10년 전이었다면 어땠을까. 그야말로 대역죄에 처해질 음모였다. 대황제께서 ‘무한한 군권을 향유하는’ 대한제국 아래서, 민주공화제를 지향하는 어떤 움직임도 사형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제국에서 민국으로, 군주 아닌 국민이 주권자가 되는 경천동지할 구상이 어떻게 돌출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바로 1919년 삼월과 사월에 한반도 전체를 뒤흔든 대사건과 직결된다.

기미년 3월1일 낭독된 기미독립선언서는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했다. 이 시점에서는 독립이 최우선 과제였기에, 독립 후의 정치체제까지 상상하는 건 사치였다. 독립만세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을 흔들었고, 몇백만의 남녀노소가 함께 참여했다. 만세운동이란 비폭력 시위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총칼로 진압하고 불태우고 고문하고 죽였다. 이토록 간절하게, 목숨을 걸고 싸운 주체를 무엇이라 부를까. 왕조가 사라진 땅에 인민이 이 땅의 주인으로 나선 것이다. 이같이 주권자로 부상한 전체 인민의 지배를 담아낼 정치적 틀은 민주공화제 외에 달리 있을 리가 없다.

일제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은 기미년의 사건을 ‘3.1혁명’으로 파악했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혁명은 주권의 소재를 국왕으로부터 국민으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황제·천자·국왕·군주에 덧씌워진 신성의 후광을 빼앗고, 때로는 그 지존자의 생명까지 박탈하는 치열한 쟁투가 혁명 과정이었다. 그 국왕의 실체는 물론 그림자까지 지워내는 작업, 그것은 5000년 조선 역사에 최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혁명은 거대한 유혈을 동반한다. 유혈 없이 공화제로 순탄하게 이행한 국가는 역사상 없었다. 우리에겐 그런 시민혁명이 없지 않으냐는 주장이 종종 제기된다. 그러나 우리의 민주공화제는 바로 기미년의 대유혈을 치르고 확보한 것이다.

일제하에 여러 무장투쟁도 있고, 비무장 독립운동도 있다. 그런 운동과 3.1은 독립을 추구한 항쟁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러나 3.1은 다른 운동과 차원을 달리하는 면이 있다. 1941년 <대한민국 건국대강>은 이 점을 가장 뚜렷이 명문화하고 있다. 기미년의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의 발인(發因)이고 신천지의 개벽”이다. 우리 민족이 자력으로 “이민족의 전제를 전복”한 동시에 “5000년 군주정치의 구각을 파괴”한 사건이란 것이다. 이민족 지배와 군주정치를 동시에 타도한 사건은 일개 ‘독립운동’의 차원을 넘어 ‘민족-민주혁명’으로 손색이 없다. 대한민국은 바로 전 인민대중의 핏방울로 창조된 것이라는 인식이 뚜렷하다.

해방 후 제헌헌법을 위한 여러 초안에도 ‘3.1혁명’이란 용어가 더 빈번하다. 이승만도, 김구도 이 표현을 즐겨 썼다. 다만 제헌의회에서 촉박하게 심의하는 과정에서 ‘혁명’이란 초안이 ‘운동’으로 대체되었고, 지금껏 ‘3.1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3.1운동’은 수십년간의 복잡한 헌법 개정에서도, 한번도 삭제되지 않은 채 부동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란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 역시 내용상의 변화는 전혀 없이 확고하게 대한민국 헌법 제1조로서 자리잡고 있다.

각국에서 헌법을 제정할 때는 거대한 논쟁이 일어난다. 군주정치냐 민주정치냐, 제한선거제냐 보통선거제냐, 신분·계급을 두느냐 아니면 일체평등이냐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 논쟁은 우리에겐 이미 철 지난 것이었다. 기미년 대혁명의 덕분이었다.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된 사건은 혁명으로 부르기에 충분하다. 그 민족-민주혁명의 기념일인 3월1일을 대한민국 건국기원절로 새기자.
 
<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