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비난 보수단체들에 배상판결…‘종북’남발에 경종

근거 없이 ‘종북’이란 단어를 사용해 특정 단체·개인을 비난한 행위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사회적 낙인·배척 효과를 노리고 ‘북한 정부를 맹목적으로 따른다’는 뜻을 가진 종북이란 표현을 남발하는 분위기에 법원이 경종을 울린 것으로 해석된다. 
서울고법 민사24부(재판장 김상준)는 21일 보수단체인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반교연) 등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소속 교사가 근무하는 학교 앞에서 ‘주체사상 세뇌하는 종북집단 전교조’라고 적힌 펼침막을 들고 시위한 행위 등으로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전교조가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반교연한테 ‘전교조에 5000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반교연이 펼침막에 “김정일이 이뻐하는 주체사상 세뇌하는 종북집단 전교조, 북한에서 월급받아라”고 적은 것에 대해 재판부는 “원고(전교조 교사)들이 주체사상을 교육하고 있다고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는 점에 비춰 허위 사실의 적시에 해당한다”며 “이는 반국가·반사회 세력으로 낙인찍혀 그 사회활동의 폭이 현저히 위축될 가능성이 있을 정도로 상대방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현저하게 저해시키는 표현으로, 전교조의 명예를 중대하게 훼손하는 행위”라고 밝혔다. 종북이라고 비난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7월 1심 재판부인 서울남부지법 민사합의15부(재판장 유승룡)도 같은 취지의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지난 15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1부(재판장 김정학)도 전교조 소속 교사들에게 “종북세력들이 전교조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등의 편지를 보낸 보수단체 ‘교육과 학교를 위한 학부모 연합’(교학연)을 상대로 전교조가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명예훼손을 인정하며 200만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피고들이 제출한 증거가 한때 전교조 누리집 등에 게시된 자료인 것은 맞지만, 그중 일부는 외부 인사가 작성한 것이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만큼 전교조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1심 재판부도 “전교조를 종북단체로 묘사한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며 ‘교학연은 3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바 있다.
 
잇따른 판결에서 법원은 객관적인 근거 없는 종북 비난이 ‘표현의 자유’나 ‘공익적 목적’으로 합리화되지 않는 ‘부당한 사회적 낙인’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교학연에 대한 명예훼손 판결에서 법원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위가) 국가보안법으로 엄하게 처벌되는 실정을 감안하면 종북세력이 아닌 개인이나 단체가 ‘종북세력’으로 지칭되는 경우, 그 개인이나 단체에 주어질 사회적 평가가 객관적으로 침해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종북’이라는 단어 사용이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는 교학연의 주장을 두고서는 “교학연이 제출한 근거들은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가 될 수 없으므로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반교연에 대한 명예훼손 판결에서 재판부는 “허위 사실을 공표했더라도 공익적 목적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반교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익적 목적을 앞세운다 해도 허위 사실에 근거해 ‘종북’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종북’이라는 단어는 해방 이후 한국 사회를 짓눌러왔던 ‘빨갱이’의 진화된 표현이나 다름없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며 이성적인 대화와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과거의 ‘색깔론’이 종북이라는 낙인을 이용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진보·개혁 성향의 인물·단체를 공격하는 용도로 무분별하게 쓰이고 있다. 급기야 한상대 전 검찰총장은 2011년 8월 취임식에서 ‘종북 좌익 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하기도 했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는 고위 공직자가 일부 정치집단이 악의적으로 쓰는 종북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종북 좌익 세력과의 전쟁’ 운운한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매우 부적절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 허재현 기자 >


[1500자 칼럼] DO YOU SEE WHAT I SEE?

● 칼럼 2013. 3. 1. 14:44 Posted by SisaHan
남편과 나는 가끔 색깔의 이름때문에 실랑이를 벌이다 웃곤한다. ‘서랍안에 있는 하늘색 지갑안을 찾아 봐요.’ 그러면 남편은 서랍 맨위에 단정히 놓여진 지갑을 옆으로 밀쳐내며 서랍안을 뒤진다. ‘ 없는데... 올라와서 찾아봐.’ 먼 발치에서도 보이는 하늘색 지갑은 이미 몸의 일부가 서랍밖에까지 올라와 있다. ‘ 아니 그 위에 있는 것도 안보여요 ?’ ‘ 이거 ? 이게 하늘색이야 ? 이건 회색이구만…’ 기가 막혀 잠시 말없이 쳐다보다가 서로 피식 웃고 만다. 여기에 영어 표현까지 더해지면 더욱 대책없이 흘러가는데 BURGUNDY와 PURPL에 이르면 우리는 그저 뻘건 이것의 이름이 진홍색이든 자주색이든 개의치 말아야 한다. 고백하건대 나에게 색의 명칭은 무척이나 단순해서 어린 시절 18색이나 24색 크레파스에 딸린 이름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경우 대개 나는 남편에게 지고 마는데 그건 ‘ 내 크레파스는 48개 짜리였다’고 주장하는 남편이 나보다는 더 많은 색깔의 이름을 받아들였으리라 인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40여년전 크레파스 공장 사장님의 과학적 근거 없는 작명술에 의거한 것일 수도 있지만)

검은 색의 옷을 즐겨 입는 나는 가끔 검은 울코트와 비스코스가 섞인 검은 울바지와 검은SUEDE구두를 맞춰 입고 각각 다른 검정을 바라보며 고민한다. 맞추어 입었지만 그들이 가지는 색조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말로는 색조라고 표현되는 단어는 영어로는 순색에 검정을 더한 SHADE와 순색에 흰색을 더한 TINT, 또 순색에 검정과 흰색이 합해진 TONE으로 다르게 일컬어진다. 순색에 더해지는 색과 양에 따라 우리에게 보이고 감지되는 색은 다르게 인식되고 다른 느낌으로 전달된다. 그러다 보니 같은 푸른색을 같은 장소에서 본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같은 이름이 떠오르기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기에 개인적인 경험과 취향이 더해져 어떤 이는 순색인 파랑쪽의 느낌을 강하게 받고, 어떤 이에게는 추가되는 흰색 쪽의 느낌이 강하게 전해지면서 그 색에서 연상되는 느낌은 개인적인 것이 되고 만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바다를 연상하면서 차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고 어떤 사람은 봄기운과 희망이 가득한 하늘을 떠올리며 온기를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보여지는 색과 그 인식에 관한 나의 관심은 여행중 비행기에서 보았던 다큐멘터리에서 시작되었다. BBC가 제작한 ‘Do you see what I see ?’라는 다큐멘터리는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힘바족을 통해 언어와 감각과 의식이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들이 가진 색의 이름은 모두 다섯가지. 모든 색은 이 다섯가지 중의 한 이름을 갖는다. 우유와 물은 다같이 하얀색이며 파랑과 연두는 그들에게 한가지 이름으로 불리워진다. 그들은 파랑색 중에 섞인 연두색을 구별해내지 못했다. 보지못한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힘바족의 독특한 색의 체계를 통해 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감각을 넘어온 의식의 단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눈에는 다른 색이라 할지라도 한가지의 이름을 가진 것은 감각의 의지를 넘어 인식의 단계에서 그냥 하나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언어가 가진 무서운 힘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사물에 대한 주관적인 개념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너머 더 깊이에 담겨진 무엇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다. 언어는 태생적인 불완전성을 통해 더 큰 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파랑과 연두가 같은 이름을 가진 뜻밖의 (?) 세상이 우리 앞에 가능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남편과 나는 이제 색의 이름에 대해 문제삼지 않는다. 이름은 달라도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 있으므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결혼기념일에 자기가 사주었던 지갑안을 찾아 보세요.’ 라고.

< 김유경 시인 - ‘시.6.토론토’동인,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칼럼] 표절에 관대해선 안된다

● 칼럼 2013. 3. 1. 14:42 Posted by SisaHan
박사학위 논문을 두 번이나 쓰고도 학위를 받지 못했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20여년 전 미국 테네시대학의 포크너라는 학생은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제출했는데, 주제가 군사기밀에 관한 것이라는 이유로 통과되지 못했다. 미리 학칙을 챙겨 보지 못했던 지도교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자신의 논문을 베껴 쓰도록 허락했고 새 논문은 심사를 통과해 학위가 수여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학이 표절이라는 이유로 학위를 취소해 버렸다. 결국 학생은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재판에서 원고는 표절이란 저자의 동의 없이 가져다 쓸 때 성립하는 것인데, 자신의 경우는 저자의 동의가 있으므로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법원은 표절을 원고처럼 정의하면 학위논문의 정직성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면서, 표절을 용인한 지도교수뿐만 아니라 그의 비호 아래 숨으려는 학생의 신뢰도 잘못된 것이라고 판결했다.
 
표절은 저작권 침해와 달리 저자의 동의로도 면책되지 않음을 확인한, 지극히 당연한 판결이다. 논문에 대한 저작권 침해는 친고죄로서 피해자인 저자가 문제 삼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다. 그러나 표절은 다르다. 표절당한 저자 외에 학계와 독자 전체가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박사학위 논문을 표절했다고 해서 논란이 뜨거운데, 최근 논의가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어 안타깝다. 미국 교수의 논문을 상당 부분 출처표시 없이 베낀 것은 인정하면서도, 사전 또는 사후 허락이 있었는지에 대한 진실공방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표절당한 사람의 동의나 용서 여부는 표절 성립과 무관하고, 단지 정상참작 사유가 될 수 있을 뿐이어서 낭비적인 논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밖에 표절 의혹 당사자들의 반응으로 당시에는 표절금지윤리가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표절 판정과 자리를 연계하여 시간끌기를 하는 등 다양하다. 최근에는 표절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경우도 등장했다. 
조선조 실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양반집에 들어간 도적이 훔친 여자의 속곳을 어디에 쓰는 물건인 줄 모르고 벙거지처럼 쓰고 다녔다는 것에 비유하여, 남의 시문을 함부로 가져다 엉뚱하게 쓰는 표절자를 슬갑도적(膝甲盜賊)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남의 글을 자신의 것인 양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는 어제오늘 생긴 것이 아니다.
 
독일은 메르켈 총리 재임 기간 중 장관 두 명이 박사학위 논문 표절로 총리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국방장관은 이미 사임했고, 최근 학위가 박탈된 교육장관도 사임 압박을 받고 있다. 
새 정부가 출범했다. 앞으로 며칠간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논문 표절은 단골 검증 메뉴로 등장하고, 이 과정에서 박사학위가 짐이 될 사람이 분명 나올 것이다. 그런데 표절이 공직 수행에 결격사유가 될 수 없다는 동정론이 등장하고, 정작 파수꾼이어야 할 지식인들이 침묵의 카르텔로 이를 덮어버린다면, 학계와 우리 사회의 도덕 수준은 한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게 될 것이다. 
마침 졸업철이다. 표절 논란의 근본적인 책임은 과욕을 부린 표절 당사자에게 있을 것이지만, 심사를 허술히 한 대학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최근 논란이 된 사건에서 표절이나 연구윤리 위반이라는 판단을 발표한 대학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바 없어 안타깝다. 

< 남형두 -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저작권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