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진통과 숱한 곡절 끝에 여야가 세월호 특별법에 합의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가 난 지 5개월하고도 보름이 지난 시점이다. 여야가 철저한 진상규명을 외쳤는데도 왜 이토록 늦어졌는지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합의 내용을 뜯어보면 우려스러운 대목이 적잖다. 여야는 특별법에 합의했지만 정부조직법과 ‘유병언법’(범죄수익 은닉 처벌법) 합의안이 마련된 이후 10월30일까지 일괄 처리하기로 했다. 새누리당이 특별법과 다른 법안의 연계 처리를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인데, 특별법 입법이 또 다른 암초를 만나면서 더욱 늦어질 가능성도 있다.
 
야당과 유가족의 절충안은 특검 후보군 4명을 추천할 때 여야와 유가족 3자 합의를 거치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유가족 참여를 강력히 거부하자 새정치연합은 ‘유가족을 뺀 여야 합의 추천’으로 물러섰다가 유족들의 반발 분위기에 다시 ‘유족 참여는 추후 논의’로 돌아섰다. 세월호 국정조사 과정 등에서 정치권에 불신이 쌓인 유족들로선 특검 추천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게 돼 아쉬움이 클 것이다. 물론 새정치연합으로서도 할 말이 있을 법하다. ‘특별법 이후’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시점에서 내린 고육책이란 항변도 일리가 있다. 그럼에도 새정치연합은 유가족의 동의를 압박하는 듯한 모양새로 특별법에 합의했다는 아픈 멍에를 벗을 수 없게 됐다.
특별법 합의는 첫걸음을 뗀 것에 지나지 않으며 진상규명을 할 수 있는 틀을 갖춘 것에 불과하다. 여당과 청와대가 협상 과정에서 보인 태도에 비추면 ‘성역없는 철저한 진상규명’이란 목표에 이르려면 앞으로도 숱한 고비와 난관에 부닥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야당은 협상 과정에서 드러낸 무능과 난맥을 거울삼아 처절하게 반성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특별법 합의로 ‘개점휴업’ 상태이던 국회가 정상화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정치권은 국민이 정치에 넌더리를 내도록 세월호 정국을 질질 끌어온 원인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개선점을 모색해야 한다.
 
성찰이 필요한 것은 정치권뿐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 4월16일의 시점으로 돌아가 ‘세월호 이전과 이후가 달라야 한다’고 했던 그날의 다짐과 각오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때만 해도 세월호는 진보-보수의 문제도, 친정부-반정부의 쟁점도 아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모두가 공감했던 문제의식에서 출발할 때 사안의 본질이 명확해지고 무엇을 고치고 어떤 부분을 먼저 손대야 할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검찰이 인터넷 허위사실 유포를 엄단하겠다며 전담팀까지 꾸려 상시 감시에 나섰다. 16일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 발언이 도를 넘었다”고 말한 직후 급하게 정해진 일이다.
검찰이 하겠다는 일은 폐기돼 마땅한 과거 행태의 답습이다. 검찰은 포털사이트 등의 허위사실 유포를 감시해 피해자의 고소·고발이 없어도 직접 수사에 나서겠다는 방침이다. 최우선 수사 대상은 ‘공적 인물’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도 밝혔다. 이대로라면 인터넷에 공개된 모든 글이 잠재적인 수사와 감시 대상이 된다. 상시적 검열과 다를 바 없다. 대표적인 ‘공적 인물’인 대통령이나 정부·여당을 비판하는 글들이 당장 감시를 받고,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될 것이다. 이를 겁내 입을 다무는 것이 바로 ‘표현의 자유’ 위축이다. 긴급조치로 국민의 입과 귀를 틀어막았던 1970년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유신독재가 바로 이랬다.
 
허위사실 유포를 앞세운 여론 봉쇄는 진작에 위헌으로 판정됐다. 허위사실 유포를 금지한 유신 시절 긴급조치 1호는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에서 모두 위헌 선고됐고, ‘미네르바 사건’ 등에서 인터넷을 통한 정부 정책 비판을 억누르는 데 악용됐던 옛 전기통신기본법도 헌재의 위헌 결정을 받았다. 인터넷을 통한 허위사실 유포를 처벌할 근거는 이미 모호해졌다. 명예훼손에 대해서도, 대법원과 헌재는 공직자나 국가기관의 업무에 관련된 의혹 제기 혹은 대통령의 사생활에 대한 의혹 제기는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명예훼손죄의 폐지를 권고했고, 상당수 선진국은 이를 범죄로 삼지 않는다. 이들 혐의가 권력자 비판을 탄압하는 데 악용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이런 법률적 배경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고소·고발이 있어야만 명예훼손 수사에 나섰던 일반적 사건처리 절차도 무시하겠다고 한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법리나 판례, 절차를 모두 내팽개친 꼴이다. 그렇게 졸속으로 강행하다 보니 검찰 스스로 무엇을 수사나 감시 대상으로 삼을지부터 우왕좌왕이다.
 
그 해악은 이미 가시화했다. 인터넷을 감시할 검찰 전담팀이 만들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인터넷 이용자들의 ‘자기검열’이 번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걱정은 해외 사이트로 활동공간을 옮기는 ‘사이버 망명’으로 이어지고 있고, 포털 업계는 이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걱정하고 있다. 대통령과 검찰의 ‘시대착오’가 헌법상 표현의 자유는 물론 IT강국의 위상까지 위협하고 있는 꼴이다.


[칼럼] 정의구현사제단 40돌 맞이

● 칼럼 2014. 10. 7. 08:39 Posted by SisaHan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박정희 정권은 1천명이 넘는 학생들을 ‘민청학련’의 이름으로 잡아들이고, 혹독한 고문을 통해 반국가사범으로 조작했다. 체포망은 천주교의 지학순 주교에까지 다가왔다. 학생들에게 거사 자금을 건넸다는 혐의였다. 독재정권은 거칠 게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태가 일어났다. 지 주교의 구속에 항의하는 거센 물결이 30대의 청년 사제들을 중심으로 퍼져간 것이다. 당황한 정부는 지 주교를 잠시 석방하는 유화책을 썼다.
사제들은 기로에 섰다. 주교 석방의 주장이 이뤄졌으니, 이만 물러설 건가. 그러나 옥중에 있는 양들을 놓아둔 채 혼자 빠져나오는 목자는 있을 수 없는 일. 지 주교는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양심선언을 하고, 이번엔 아예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갔다. 주교의 양심을 앞세우고, 사제들은 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하였다. 시대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결단한 것이다.
 
그로부터 40년. 사제단은 권력에 핍박받는 어려운 이웃과 늘 함께했다. 간첩 낙인이 찍혀 접촉조차 꺼리는 인혁당 가족들을 따뜻이 맞아들인 게 사제단이었다. 인혁당에 대한 사법살인을 규탄하고, 형사자(刑死者)의 시신을 안치하려 한 유일한 곳이 사제단이었다. 32년 뒤 인혁당에 대한 재심-무죄판결로 귀결되기까지 사제단은 늘 이 억울한 가족들과 함께했다.
지난 9월22일 명동성당에서 사제단 40주년 기념미사가 열렸다. 여러 피해자, 희생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양심수의 가족들. 의문사의 유가족들.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강정, 밀양에서 어려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분들. 그리고 세월호 유족들! 이들이 바로 사제단의 역사다. 정부의 횡포와 여론의 매도에 초토화된 억울한 이들에게 사제단은 먼저 다가서고, 함께 돌팔매를 맞으며, 위로하고 연대했다. 절망 속에 희망을 피워내고, 어둠 속에 불을 밝혔다.
 
독재정권은 사제단 신부들을 감옥으로 위협했다. 1976년 3.1구국선언 사건에 가톨릭 신부들은 사실 관여한 바가 없었다. 그러나 정권이 재야-개신교-가톨릭을 일망타진하듯 엮자, 사제들은 검찰의 기소 내용을 부인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십자가를 껴안았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진범이 조작되었다’는 역사적 문건의 발표에 앞서 함세웅 신부는 김승훈 신부를 만났다. “이번 발표로 감옥에 갈지 모릅니다.” 김 신부는 “응, 알았어”로 간명하게 답했다. 이렇듯 사제들은 감옥을 두려워하기는커녕, 하나의 은총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사제들에게 정권의 위협 따위는 “의를 위해 핍박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에 다름 아니었다.
사제단에 대한 음해와 낙인은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다. “사제단을 해체하라”는 악성 파파라치는 사제단 활동을 위축시킬까. “사제단 해체의 소음이 높은 그때가, 사제단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때”라고 한 신부는 답했다. 탄압으로 해체될 조직이라면, 수십번도 더 해체되었을 것이다. 40년의 연륜은 불의한 권력의 필멸성과 훼방행위의 무익성을 깨닫기에 충분하다.
진짜로 사제단을 해체시킬 방법은 없을까. “정의”를 실제로 “구현”해버리면, 사제단의 존재 기반이 쇠퇴할 것이다. 그런데 갈수록 파쇼화, 신유신화, 비인간화하는 지금 같은 분위기는 사제단의 존재 근거를 되려 강화시켜준다.
 
부패한 세상에서 종교는 ‘세상의 소금’이어야 한다. 그런데 소금 역할을 하랬더니 소금장수 노릇만 하고, 각종 비리가 종교계를 좀먹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억울한 이웃을 위한 고난의 짐을 기꺼이 지는 성직자의 존재는 귀하고도 거룩하다. 그간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에게 먼저 다가가고, 우리 모두의 인간존엄성을 일깨우고, 정의로운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한 사제단에게 우리 사회는 많은 빚을 졌다. 그러기에, 가톨릭 신도가 아닌 나도, 정의구현사제단 40주년을 맞아 꽃 한송이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 한인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