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섭 대전고검 검사가 28일 오후 탄핵 심판 2회 변론기일 출석을 위해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로 들어가며 취재진에게 입장을 밝히고 있다. 2024.5.28. [연합]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출범 이래 76년간 파면된 검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검찰이 이슬만 먹고 사는 청렴결백의 결정체이거나 무오류의 화신과 같은 집단이어서는 아니다. 헌법도 초월하는 이 '특수계급'은 그 어떤 추악한 부정·비리를 저질러도 파면되지 않는다는 '검사 방탄의 법칙'이 기득권 세력의 암묵적 담합 속에 깨지지 않는 불문율로 고착된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29일 국회가 의결한 이정섭 대전고검 검사에 대한 탄핵소추, 즉 파면 요구를 기각했다. 이 검사가 처남에 대한 경찰의 마약 수사를 무마해주고, 서울 강남구 도곡동 거주지에서 딸의 진학을 이유로 인근 아파트로 위장전입을 하고, 남의 전과기록을 무단으로 조회하고, 호화 리조트에서 재벌기업 임원으로부터 각종 접대를 받고, 선후배 검사들에게 골프장 편의를 봐주는 등 숱한 비위를 저지른 구체적 사실과 정황이 제기됐는데도 파면할 사안은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이미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유우성 씨를 '보복 기소'했던 안동완 부산지검 2차장검사에 대해서도 면죄부를 내줬던 헌재다. 일반 공무원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검사 불패'의 신화를 헌재가 앞장서서 써주고 있는 셈이다.
헌재는 이 검사를 둘러싼 의혹들에 대해 소추 사유가 특정되지 않았다거나, 직무 집행과 무관해 탄핵 사유가 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국회의 탄핵소추를 재판관 9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기각했다. 우선 소추 사유 중 ▲범죄경력조회 무단 열람 ▲리조트 이용 관련 청탁금지법 위반 ▲골프장 예약 편의 제공 ▲수사 무마 의혹에 대해 "행위의 일시·대상·상대방 등 구체적 양상, 직무집행과의 관련성 등이 특정되지 않았다"며 "형식적 적법성을 갖추지 못한 소추 사유들에 대해 더 나아가 판단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의혹의 사실관계가 불명확하다는 얘기다. 위장전입을 했다거나, 코로나19 유행 당시 집합금지 명령을 위반하고 리조트에서 사적인 모임을 가진 사실에 대해서는 "직무 집행과 관계가 없는 행위는 탄핵 사유가 될 수 없다"고 봤다. 국회는 이 검사가 과거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뇌물죄 형사재판에서 증인신문 전 증인 최모 씨를 면담해 무죄 선고의 빌미를 줬으므로 국가공무원법·검찰청법 등을 위반했다고 탄핵소추 사유에 포함시켰지만 헌재는 "이 사건 기록만으로는 사전면담이 위법하다고 보기에 부족하다"고 했다. 다만 김기영·문형배 재판관은 이 검사가 한 사전면담이 파면할 정도의 행위는 아니지만 국가공무원법상 성실 의무와 헌법상 공익실현 의무를 위반한 것은 맞다는 별개 의견을 냈다.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에서 탄핵 소추가 이뤄진 안동완 부산지검 2차장검사와 대리인인 이동흡 전 헌법재판관(왼쪽)이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탄핵심판 첫 변론에 참석하고 있다. 2024.2.20. [연합]
앞서 헌재는 안동완 검사의 심각한 위법 행위인 '공소권 남용' 및 그 '의도성'을 대법원이 확정판결로 인정했음에도 "전혀 위법하지 않거나 의도성이 없다"면서 기각한 바 있다. 대법원 판시를 정면으로 뒤집는 무리수를 범하면서까지 문제 검사를 감싼 데는 윤석열 정부 들어 '보수 우위'로 재편된 헌법재판관 구성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의 서울 법대 79학번 동기인 이종석 헌법재판관을 소장으로 임명하고 수구보수 성향으로 유명한 정형식 판사를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으로 낙점하는 등 헌재의 우경화에 가속 페달을 밟아왔다.
검찰독재정권의 아성을 헌재가 굳건히 수호해주는 형국이 되면서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이 추진 중인 후속 검사 탄핵 사안들도 전망이 더 어두워졌다. 민주당은 지난달 소속 의원 전원 명의로 강백신 수원지검 성남지청 차장검사, 김영철 서울북부지검 차장검사, 박상용 수원지검 부부장검사, 엄희준 부천지청장 등 비위 검사 4명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해놓은 상태다.
야권은 이날 헌재 결정이 나오자 즉각 반발했다. 그래도 상대가 사법부라 '매우 유감스럽다' '대단히 안타깝다' 등으로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한 절제된 표현을 썼지만 개중에는 '참담하고 분노스럽다'는 직설적인 반응도 나왔다. 야권은 납득할 수 없는 헌재 결정에도 불구하고 검사 탄핵은 계속 추진할 것이며, 국회 법사위 조사와 공수처 수사 등을 통해 진상 규명 작업도 병행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더불어민주당 조승래 수석대변인은 서면브리핑을 통해 "헌재는 이정섭 검사의 의혹에 대한 실체적 규명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우 유감스럽다"며 "애초에 검찰은 이정섭 검사에 대한 의혹 규명 요구를 검찰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협조를 거부했다. 엄연히 이정섭 검사를 둘러싸고 각종 의혹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사법 시스템을 통해서 이를 규명하고 심판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과연 헌재의 기각 결정이 국민의 법 상식에 부합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면서 "민주당은 국회 법사위 차원에서 이정섭 검사의 비리 의혹에 대한 실체 규명 노력을 계속해나가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검찰개혁 태스크포스(TF) 단장인 김용민 의원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헌재의 보수화와 검찰의 조직적 방해가 만들어낸 기각 사건"이라며 "이번 결정은 검찰개혁의 어려움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 과제는 끝까지 완수해 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또 "현재 국회에서 진행 중인 검사 탄핵에 대해 국힘과 검찰이 헌재를 믿고 방해하더라도 우리는 국민을 믿고 계속 나아가겠다"면서 "검사에 대한 징계가 일상적이고 공정해져야 억울한 국민이 안 생긴다. 그렇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종석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29일 오후 헌법소원·위헌법률 심판이 열린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심판정에 입장하고 있다. 2024.8.29 [공동취재]
조국혁신당 김보협 수석대변인은 논평에서 "대단히 안타깝다. 헌재가 기각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빈 구멍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검찰의 수사를 통해 메워져야 한다"며 "헌재의 기각 사유는 이 검사 비위 혐의의 구체적 양상과 직무 관련성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회가 헌재에 이 검사 파면을 요청하면서 제출한 탄핵소추안이 부실했던 탓"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검사의 비위 사실과 직무 관련성을 특정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쪽 소추인이 얼마나 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라며 "당시 법사위원장이 국민의힘 소속이고 이정섭 검사 탄핵소추에 소극적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짚었다.
원내 제4당인 진보당은 '추악한 공범의 사슬'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해 가장 격렬한 입장을 내놨다. 홍성규 수석대변인은 서면브리핑에서 "눈물이 나올 만큼 참담하고 분노스럽다"며 "이럴 거면 도대체 검사탄핵제도는 왜 만들어둔 것인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 무슨 죄를 지어도 번번이 벌을 줄 수 없다고 하는 법의 존재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따져 물었다. 이어 "검사불패에 다시 무릎 꿇은 헌재의 굴욕적인 결정을 강력히 규탄한다"면서 "이정섭 검사에 대한 탄핵소추 원인 사실 6가지 모두에서 도저히 눈 뜨고는 봐줄 수 없을 만큼 구린내가 진동했다. 그럼에도 법무부는 반대 의견을 제출했고, 헌재는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검찰과 법무부에 이어 헌재까지 추악한 공범의 사슬로 하나가 된 셈"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 민들레 김호경 기자 >
윤 정권 들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비방 다반사 소녀상 철거 주장하며 인증샷 찍는 '챌린지'까지
야권, '위안부 피해자법' 개정에 적극 나서 주목 피해자 명예훼손, 소녀상 모욕시 처벌 조항 신설
정의기억연대 등 시민단체 지지…예술인 성명도 전시유랑단 "21대 국회 땐 좌절, 이번엔 반드시"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이라는 단체는 전국의 소녀상을 찾아다니며 '소녀상 철거 챌린지'를 벌이고 있다. 사진=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 페이스북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이래 소위 뉴라이트 인사들이 정부 요직에 포진하고 친일매국 세력이 사회 곳곳에서 본격적으로 준동하는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비하는 일까지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 극우단체 회원들이 수요집회에 몰려가서 "위안부는 사기" "거짓말쟁이"라고 소리치며 욕설까지 섞어 조롱하는가 하면, 전국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다니며 '철거'라고 쓰인 봉지나 마스크를 씌우고 인증샷을 찍는 '소녀상 철거 챌린지'까지 벌이는 자들이 활개치는 실정이다.
이는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의 존엄과 명예를 짓밟는 행위인데다, 나아가 여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확대·재생산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강력하게 금지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관련 법규가 미비해 단속과 처벌의 실효성을 담보하기가 어려웠다. 현행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약칭 '위안부 피해자법'은 보호 및 지원 방안에 중점을 두고 있어 위안부 피해자들을 부정하고 모욕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따로 처벌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이에 원내 1당인 더불어민주당과 3당인 조국혁신당 등 야권에서 법 개정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민주당 서영교 의원은 지난 13일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훼손은 물론 '평화의 소녀상' 훼손·제거를 금지하고 조항을 신설하는 내용을 담았다. 위안부 피해를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동원되어 성적(性的) 학대를 받으며 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함으로써 입은 피해'로 규정하고 이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앞서 조국혁신당 김선민 의원도 지난 6일 같은 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역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훼손을 금지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조항을 마련했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상징물에 대한 모욕 금지' 조항을 신설해 평화의 소녀상을 손상, 제거 또는 오욕(汚辱)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 점이 두드러진다. 서 의원과 김 의원의 개정안은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진보당, 사회민주당 등 야권과 정의기억연대를 비롯한 관련 시민단체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이라는 단체는 전국의 소녀상을 찾아다니며 '소녀상 철거 챌린지'를 벌이고 있다. 사진=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 페이스북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이라는 단체는 전국의 소녀상을 찾아다니며 '소녀상 철거 챌린지'를 벌이고 있다. 사진=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 페이스북
본격적인 법 개정 움직임에 예술인들도 힘을 보탰다. '전시유랑단' 소속 작가들은 28일 위안부 피해자법 개정을 적극 지지하며 법안 통과를 강력히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전시유랑단은 화가들을 주축으로 한 참여 예술인들의 모임으로 '展示'가 아닌 '戰示'라고 표기해 거리에서 예술로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명칭에 담고 있다. <굿바이展 in 서울> <관동대지진 100년 만의 통곡, 아이고展> 등을 개최했던 '칠대삼 창작자 집단'이 전신이다.
전시유랑단은 성명서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모욕하고 평화의 소녀상을 공격하는 극우 단체들을 규탄하며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진보당 등의 새로운 법안 제정을 적극 지지한다"면서 "일부 극우 단체들은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며, 예술작품인 평화의 소녀상을 공격하는 등 극단적인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의견 표명을 넘어선 명백한 혐오와 차별의 표현이며, 피해자들의 상처를 다시 한 번 들쑤시는 가해 행위"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지난 21대 국회에서 이러한 법안들이 발의됐으나 입법 과정에서 좌절된 사실을 상기하며, 이번에는 반드시 이 법안이 통과되어야 함을 강력히 촉구한다"면서 "특히 여성가족부의 입법 취지에 대한 공감에도 불구하고 '강제동원'의 범위와 '유포' 행위의 처벌 문제를 이유로 법안이 통과되지 못한 것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 이제는 이러한 법적·기술적 논의를 넘어서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가 이루어져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법안이 조속히 통과돼 제2의 피해자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힘을 모아줄 것을 간절히 호소한다"며 "전시유랑단 작가 일동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을 잊지 않고 그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함께 할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법안이 반드시 국회를 통과해 정의와 인권의 가치를 지킬 수 있도록 모두의 관심과 지지를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채상병 청문회 외압 없었음 밝혀져" "나도 검사 때 영부인집에 가서 조사해" "김형석 몰라…광복회 보복할 일 없어"
당정도 엉망인데…"소통 잘 하고 있다" 협치 한다더니…"국회 때문에 못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집무 공간에서 국정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4.8.29 [대통령실 제공]
29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에서 진행된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시종일관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고 자화자찬·동문서답·유체이탈하거나, 남 탓하며 책임을 돌렸다. 그는 지난 5월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와 같이 집무실 책상에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라고 영어로 적힌 명패를 놓고 모두발언을 시작했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을 책임진다는 것인지, 발언마다 그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윤 대통령은 이날 국정브리핑 모두발언 시작부터 민생 고통을 외면한 채 "세계 수출 5대 강국의 자리를 바라보게 됐다"며 "과거에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일이, 눈앞의 현실이 됐다"고 자화자찬했다. 경제난과 역대급 세수부족도 외면하고 "지난 7월 IMF는 올해 우리의 성장률을 2.5%로 전망했는데, 이는 미국의 2.6%에 이어 주요 선진국 중두 번째로 높은 수준"이라며 "건전재정 기조를 굳건히 지킨 결과, 국가 재정도 더욱 튼튼해졌다"고 자평했다.
복지, 노동 등 각 분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교육 현장에선 대통령의 '수능 킬러문항' 말 한마디에 수험생과 학부모에 대혼란에 빠졌지만, 윤 대통령은 "대학입시의 킬러 문항 배제를 비롯해, 공정한 교육 기회를 박탈하는 사교육 카르텔을 뿌리부터 혁파하고 있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정부의 노조 탄압에 건설 노동자 양회동이 분신·사망했음에도 "노사법치를 확립해 노동시장의 체질을 바꿨다. 연례행사였던 대규모 불법파업이 사라졌다"고 했다.
이날 브리핑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질 것으로 알려진 연금·의료·교육 등 개혁과제에 대해선 매우 짧고 추상적인 언급뿐이었다. 특히 의료개혁과 관련해 올해 1학년 유급생과 내년 신입생 등 약 7500명이 동시에 수업을 들을 경우 사실상 교육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현장의 절규가 나오고 있음에도, 윤 대통령은 "2025학년도 의대 신입생 모집은 현재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앞으로 의학교육 선진화 방안, 전공의 수련체계 혁신 방안 등을 통해 좋은 의사가 많이 배출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열린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4.8.29. [연합]
윤 대통령의 일방적인 의대정원 2000명 증원 밀어붙이기로 인해 전공의가 집단 사직하면서 응급의료체계가 사실상 붕괴돼 국민들이 제때 치료받고 사망하고 있지만 사과조차 없었다. 오히려 윤 대통령은 "응급실 의사가 부족한 것이 근본적으로 문제다. 제가 지방에 종합병원이나 공공병원을 가 보면 응급실 응급의학과 의사가 거의 없다"며 "의료 개혁 때문에 생긴 게 아니다. 원래부터 그랬다"고 말했다. 대책도 없었다. 그는 "정부도 노력하고 국민들이 좀 강력히 지지해주면 비상 진료체계가 의사들이 다 돌아올 때까지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각종 정치·사회 현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태도였다. 책임은 없고 남탓뿐이었다. 본인의 '격노'로 시작된 채 해병 수사외압 사건에 대해선 "지난번에 채상병 특검 관련해 청문회를 하지 않았나"라며 "방송을 통해서 잠깐잠깐 봤는데, 이미 거기서 외압의 실체가 없는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시 청문회를 기점으로,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구명 로비와 관련해 부인 김건희 씨 이름까지 언급되고 있음에도 '실체가 없다'고 제멋대로 평가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경찰의 임 전 사단장 불송치 결정에 유가족이 이의신청을 하고 해병대 예비역들이 항의하는 등 거세게 반발했음에도 "채상병의 안타까운 사망 사건에 대해 도대체 어떻게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수사가 저는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지난번 경찰에서 아주 꼼꼼하고 장기간 수사해서 수사 결과를 책 내듯이 발표했고, 제가 볼 때는 언론이나 많은 국민이 수사 결과에 대해서 특별한 이의를 달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김건희 씨 명품백 수수 사건에 대해 검찰이 '황제 출장 조사'를 하며 특혜를 제공한 데 대해서도 아무런 사과가 없었다. 윤 대통령은 "저도 검사 시절에 전직 대통령 부인, 전직 영부인에 대해서 멀리 자택까지 찾아가서 조사를 한 일이 있다"면서 두둔했다. 그는 "조사 방식이라는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고, 예를 들어서 영장을 발부받아서 강제로 하는 것이라면 하겠지만, 모든 조사는 원칙적으로 임의조사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방식이나 장소가 정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열린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4.8.29. [연합]
영부인을 공적 관리할 제2부속실 설치도 김건희 씨가 검찰에서 무혐의를 받자 말을 바꾸는 모양새다. 그는 "장소도 마땅한 곳이 없어서, 외국에 가 보면, 또 가까이는 우리 청와대만 해도 대통령 배우자가 쓰는 공간이 널찍한데, 용산은 그런 공간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부속실을 만들려면 장소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마땅한 데가 없다"며 "그래서 장소가 잘 준비되면 부속실이 본격적으로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즉 장소가 없으면 추진 안한다는 것이다.
최근 친일파 파문이 일고 있는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에 대해서도, 윤 대통령은 "저도 개인적으로 전혀 모르는 분"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독립기념관장을 추천하는 위원회에서 심사하고 인터뷰도 하고 그중에서 3분을 보훈부 장관에게 추천을 하고 보훈부에서는 3분 중 1분을 대통령에게 제청하는데 보통 1, 2, 3등으로 심사한 서열을 매겨서 보내는 모양이다. 보통 1번으로 올라온 분을 제청한다"며 "저는 그런 인사 과정에 대해서 장관이 위원회를 거쳐서 1번으로 제청한 사람에 대한 인사를 거부해본 적이 없다. 제가 잘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국가교육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각종 역사기관에 이른바 뉴라이트라 불리는 친일·극우 성향 기관장들이 임명되고 있음에도 "솔직히 뉴라이트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했다. 국가보훈부가 지난 광복절 경축식 불참을 이유로 광복회를 표적 감사하고, 광복회 외에 공법단체 추가 지정을 검토하는 등 '보복성 조치'를 한다는 비판이 나오지만, 윤 대통령은 "애국자의 유족들이 모인 단체에 대해서 보복하고 이럴 일이 뭐 있겠나"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 밖에 윤 대통령은 한 대표의 2026년 의대증원 유예안을 두고 당정 갈등이 불거졌음에도 "당정 간 전혀 문제없고, 다양한 현안 관련해 다양한 의견 나오는 게 자유민주주의 아니겠나"라고 유체이탈했다. 4·10총선 참패 책임을 지고 사퇴 표명을 한 한덕수 국무총리가 아직도 직을 유지한 데 대해선 "총리는 국회 동의를 받아야 되고 많은 국정 현안과 가을 국정감사도 앞두고 있어서 그동안 잘해오셨기 때문에 당분간은 한 총리를 중심으로 한 내각 체제는 유지될 것"이라고 했다. 총선 뒤 국민에게 공개한 약속조차 지키지 않았지만, 반성하는 기색은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열린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2024.8.29. [연합]
윤 대통령은 총선 뒤 약속한 협치에 대해서도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영수회담 제안에 대해선 "영수회담을 해서 문제가 금방 풀릴 수 있다면 10번이고 왜 못하겠나"라면서도 "저도 대통령이지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과 같이 국회를 바라볼 때, 잘하고 못하고는 둘째고, (국회가) 정상적으로 기능해야 하지 않겠나. 해야 할 본연의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라며 국회로 책임을 돌렸다. 그는 "지금 인사청문회나 다양한 청문회를 바라보고 있으면 제가 이때까지 바라보던 국회하고 너무 달라서, 저도 깊이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덧붙였다. < 김성진 기자 >
지표 암울한데 경제 살아난다는 대통령은 외계인?
국정 브리핑서 사실 왜곡 자료만 나열
경제 최악인데 “크게 도약” 딴소리 집값 들쑤셔놓고 주택 공급만 외쳐
연금 개혁안도 공허한 메아리일 뿐 ‘노란봉투법’ 거부하며 노동 개혁? 재계뿐 아니라 노동계에도 귀 열라
“우리 경제가 확실하게 살아나고 있고, 앞으로 더 크게 도약할 것이라고 국민 여러분께 분명하게 말씀을 드린다.”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에서 수출 실적과 원전 생태계 복원 등을 열거한 뒤 우리 경제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내놨다. 수출 규모가 일본을 따라잡았고 원전 수출 탄력을 받고 있으며 고용률은 30개월 연속 최고이고 실업률도 역대 최저라며 외국에서도 한국 경제 성장을 놀라운 눈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2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룸에서 취재진이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브리핑'을 지켜보고 있다. 2024.8.29. [연합]
한국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는 거짓말
윤 대통령의 낙관적 전망과 달리 정부가 발표하는 경제 지표들은 암울하기만 하다. 이날 국정 브리핑이 끝난 직후 나온 고용노동부의 근로자 실질임금 통계만 봐도 그렇다. 올해 상반기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4% 줄었다. 2022년 이후 2년 6개월째 근로자 실질소득은 뒷걸음질 중이다. 29일 고용부가 발표한 사업체 노동력 조사 결과를 보면 올해 1~6월 상용근로자 1인 이상 사업체 근로자 1인당 월평균 실질임금은 354만 3000원으로 작년 상반기 355만 8000원보다 1만 5000원 쪼그라들었다.
실질임금은 근로자에게 실제로 지급된 명목임금에서 물가 변동의 영향을 제거한 값이다. 근로자 주머니에 실제로 들어오는 수입을 뜻한다. 올해 상반기 근로자들의 월평균 명목임금은 403만 2000원으로 작년 동기 대비 9만 4000원(2.4%) 늘었으나 같은 기간 소비자 물가지수 상승률은 2.8%에 달했다. 고물가 영향으로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은 2022년과 2023년 각각 전년 대비 0.2%와 1.1% 감소했다.
소득이 적을수록 실질소득 감소 타격이 컸다. 같은 날 나온 통계청의 ‘2024년 2분기 가계동향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구당(1인 이상 가구·농림어가 포함) 월평균 소득은 496만 1000원으로 1년 전보다 3.5% 증가했다. 근로소득이 전체 가계 소득을 늘린 요인이었으나 저소득 가구 사정은 전혀 달랐다.
소득 상위 20%인 5분위 가구 근로소득이 8.3% 늘어난 데 비해 하위 20%인 1분위 가구의 근로소득은 7.5% 감소했다. 1분위와 5분위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각각 115만 9000원과 1065만 2000원이었다. 기초생활보장 같은 이전소득으로 1분위 가구 근로소득 감소가 다소 보완됐으나 상위 20%의 소득을 하위 20%의 소득으로 나눈 균등화 처분가능소득 5분위 배율은 여전히 5.3배에 달했다. 경제가 나빠지는 상황에서 소득과 부의 양극화도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상용근로자 실질임금 추이
내수는 붕괴 직전, 수출도 반도체 빼면 아슬아슬
내수 경기는 말 그대로 붕괴 직전이다. 올해 2분기 소매판매액지수는 금융위기 때인 2009년 1분기 이후 15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감소하며 9분기째 내리막이다. 국내외에서 유입되는 상품을 지표화한 국내 공급지수 역시 2010년 이후 처음으로 4분기째 후진 중이다. 그만큼 소비가 저조하다는 뜻이다. 고용시장은 통계청 지표만 보면 최고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르바이트와 다름없는 단기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뿐이다.
윤 대통령이 가장 힘을 주며 자랑한 수출도 경기 사이클상 회복 국면에 접어든 반도체를 제외하면 좋아졌다고 말하기 힘들다.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올해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석 달 만에 1%포인트씩 내린 것도 경제 지표가 암울하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가 확실하게 살아나고 있고, 앞으로 더 크게 도약할 것”이라는 윤 대통령의 주장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이다.
서울과 수도권 인기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오르고 있는 집값에 대한 인식도 안이하다. “주택을 비롯한 자산 가격이라는 것은 수요·공급의 시장 원리에 따라 결정이 돼야 한다. 국민소득이 올라가고 수도권에 기업과 인력의 집중이 점점 강해져서 수요 압박으로 집값이 오르면 그건 어떻게 할 수 없다.” 전체 주택담보대출의 70~80%가 저리의 정책 자금일 정도로 부동산 시장에 돈을 마구 풀어 집값을 들쑤셔놓고 ‘시장 원리’를 운운하는 것은 파렴치하다. 최근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세가 다소 진정됐기는 했으나 여전히 불안한 상황이다.
서울 집값이 왜 올랐는지 모르고 해법도 틀려
과열된 부동산 시장에 대한 대책도 실효성이 떨어진다. “집값 상승이 경제 리스크가 될 만큼 과도하게 과열 분위기가 있을 때 공급이나 수요 정책을 관리해 조금 진정시켜야 할 필요는 있다. 정부가 일부러 재개발·재건축도 안 하고 공급도 안 하고 징벌적 과세를 때리면 시장구조가 왜곡돼서 아주 비정상적으로 집값이 오르게 되는데, 그러면 안 된다. 저희 정부는 시장 메커니즘이 충실히 가동되도록 징벌적 과세를 대폭 줄였고, 필요할 때는 적시에 주택 공급을 하기 위해서 8월 8일에 (발표한) 국토부 대책도 과거 연평균에 비해 11% 이상 공급을 확대하는 내용을 담았다.”
징벌적 과세를 때리면 비정상적으로 집값이 오르게 된다는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문재인 정부 때 집값이 급등한 이유는 초저금리 때문이었다. 무섭게 오르는 집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부동산 관련 세금을 강화했으나 금리가 너무 낮아 효과가 없었다. 징벌적 과세를 푼다는 명분으로 부동산 세금을 낮춘 건 현재 집값 상승의 또 다른 원인이다.
부동산 시장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도 없이 시장의 수요 공급 법칙에 따라 주택 공급만 하면 집값이 잡힐 것이라고 보는 인식은 너무나 단순하고 안이하다. 주택 공급은 대책이 나온 뒤 최소 3년 뒤에 효과가 나타난다. 당장 집값 상승을 막을 수 없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올해 서울 아파트 10채 중 6채는 전고점 대비 80% 이상 회복된 가격에 매매된 것으로 나타났다. 직방은 지난 1∼5월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아파트 매매거래를 분석한 결과, 전체 거래 1만4천810건 중 전고점의 80% 이상 가격에 거래된 건수는 8천939건(60.4%)으로 집계됐다고 10일 밝혔다. 사진은 이날 서울 시내 부동산중개업소에 매물정보 모습. 2024.6.10 [연합]
연금 개혁 추상적 원칙만 나열, 구체성 떨어져
윤 대통령은 연금 개혁의 3대 원칙으로는 지속 가능성, 세대 간 공정성, 노후 소득 보장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기금 소진 연도를 8~9년 늘리는 모수 조정만으로는 안 된다.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등 모수 조정과 함께 기금수익률을 높이고 자동 안전장치를 도입해 연금의 장기지속성을 확보해야 한다. 청년 세대와 중장년 세대의 연금 보험료 인상 속도 차등화와 국가가 국민연금 지급 보장을 법률에 명문화해야 한다.”
언뜻 듣기는 그럴듯 하지만 연금 개혁의 핵심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같은 모수에 있다. 공무원연금과 사학연금, 군인연금 등 다른 연금과 통합하는 구조개혁은 10년 이상 장기 계획으로 추진해야 한다. 원칙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구체적인 수치와 일정이 개혁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런데 윤 대통령 국정 브리핑엔 이 내용이 빠져있다.
노동 개혁에 대해선 노사 법치, 글로벌 스탠다드, 노동의 유연성 등을 언급했는데 대화 상대인 노동계를 배제한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사실 노동계의 현안은 윤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거부하고 있는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개정안)이다. 사측의 과도한 손해배상과 사용자 범위를 현실에 맞게 바꾸는 게 법안의 요지다. 재계만 반대할 뿐 일반 국민과 직장인 대다수는 찬성하고 있다.
노조법 2·3조 개정운동본부가 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연 '노조법 개정안 통과 촉구 100인 행동'애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3.11.2. [연합]
노동계 염원 '노란봉투법' 거부하며 노동 개혁?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노동계의 요구를 무시하고 노동개혁을 이루겠다는 건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반노동 인사로 지목된 김문수 경사노위 위원장을 고용노동부 장관에 앉힌 결정 역시 노동계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불어민주당 조승래 수석대변인은 이날 윤 대통령 국정 브리핑에 대해 “최악의 경제난으로 민생이 신음하는데 대통령은 경제 활력이 살아난다고 염장을 질렀다”며 “재정도, 복지도, 외교도, 안보도 최악인데 대통령 혼자 다른 나라에 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고 질타했다. 그는 또 “4대 개혁의 방향도 추상적이고 말만 번드르르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며 “특히 연금 개혁은 국민이 바라는 소득 보장 강화 방안은 찾을 수 없고, 국민의 일방적 희생만을 강요하는 것 아닌지 의심된다”고 비판했다. < 장박원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이 3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한덕수 국무총리,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연합]
전공의 이탈로 인한 의료 공백 사태가 6개월째 이어지지만, 의대 증원안 시행으로 상황을 촉발한 정부는 뚜렷한 대책 없이 ‘고통 감내’만 요구하고 있다. ‘의료 대란’을 겪는 각계의 원성엔 “관리 가능한 상황”이라며 귀를 막고, 정치권의 중재 움직임엔 “정부가 근거를 갖고 하는 일에 국회가 왜 나서냐”며 눈을 부라린다. 국민 불안이 커지자 야당은 물론 여당 안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이 나서서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갈수록 힘을 얻는 흐름이다.
27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기자들과 만난 한덕수 국무총리는 전공의 이탈 장기화에 따른 의료 공백 심화 우려에 “중요한 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고통스러운 개혁의 과정을 겪고 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개혁에는 당연히 고통이 뒤따르는 만큼, 의료 공백으로 인한 불편을 감내하면서 의대 증원을 계속 밀고나가겠다는 뜻이다. 한 총리는 “국가적 총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의료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 (당장은) 어려움도 있지만 우리가 겪어야 할 (과정이라) 생각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부처가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 총리의 발언은 “(의료인력 수급 문제는) 정부가 근거를 갖고 책임 있게 결정해야지, 국회가 법으로 정하거나 의료계와 협상해서 아무런 근거 없이 결정해선 안 된다”는 전날 대통령실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대통령실은 응급실 단축 운영으로 인한 의료 공백에 대해서도 “관리가 가능한 상황”이라며 큰 문제가 없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제안한 ‘2026학년도 의대 증원 유예안’에 대해선 정부와 대통령실 모두 ‘수용 불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 총리는 “(한 대표 제안을) 검토해봤는데 ‘좀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전했고,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한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증원 계획을 건드릴 수 없다는) 기존 입장에서 변한 게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정부와 대통령실의 완강한 태도에 곤혹스러워진 건 여당이다. 새 지도부 선출을 통해 가까스로 끌어올린 당 지지율 추이가 심상찮은 데다, 추석 연휴를 거치며 악화된 밥상머리 여론이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어서다. 누구보다 다급한 건 한동훈 대표다. 집권 여당 대표로서 막힌 정국을 풀어보겠다며 ‘의-정 중재역’을 자임했지만 대통령실로부터 ‘여당 대표답게 행동하라’고 핀잔만 들은 모양새가 된 탓이다. 한지아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이 이날 기자들에게 “용산은 지금 (의료계와) 대화 단절이다. (당이) 그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고 거듭 강조한 것도 한 대표의 행보에 힘을 싣기 위한 차원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의료 현장에선 정치권의 중재 움직임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 분위기다. 정형준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정치권이 중재를 하더라도 뒷북에 그칠 수밖에 없다. 갈등 초기에 증원 규모를 줄인 중재안을 들고왔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 있지만 너무 늦었다”고 했다. ‘국민 건강을 인질 삼아 밥그릇을 지켜려 한다’는 따가운 시선 속에 반년 넘게 버텨온 의사들로선 ‘증원 규모’를 건드리지 않는 한 쉽게 물러설 리 없다는 뜻이다.
문제 해결이 늦춰질수록 높아지는 건 ‘윤 대통령이 풀어야 한다’는 여론이다. 국민의힘의 한 재선 의원은 한겨레에 “이걸 당정 갈등이나 정쟁 프레임으로 봐선 곤란하다. 여·야·정이 머리를 맞대야 하는데, 현재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윤석열 대통령”이라고 했다. 조승래 민주당 수석대변인도 “대통령의 아집으로 시작된 의-정 갈등이 벌써 7개월째다. 대통령이 결자해지해야 한다”고 했다. < 한겨레 이승준 신민정 손지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