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철폐 교계와 적극 협력

● 교회소식 2013. 12. 16. 18:21 Posted by SisaHan


국가폭력 피해 치유‥ 용서와 화해로 과거사 청산
교계도 만델라 추모

95세를 일기로 소천한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 제목처럼 ‘자유를 향한 길고도 먼 여정’을 지나 삶의 굵은 흔적을 남겼다. 세계복음연맹(WEA)과 세계교회협의회(WCC) 등 전세계 기독교계는 물론 한국교회도 그의 위대한 삶을 기리면서 무엇보다 인종분리정책 철폐를 위해 교계와 협력하며 혼신을 다 했던 일은 그의 삶에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중요한 사역이었다고 회고했다.
 
만델라는 실제로 대통령에 취임한 뒤 첫 번째 해외 순방지로 스위스 제네바의 WCC 본부를 선택했으며, 1998년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열린 WCC 8차 총회 때는 총회장을 찾아 인종분리철폐를 위해 수고해준 WCC에 깊은 감사인사를 전한 뒤 총회 참석자들과 춤을 추며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고 교계인사들이 전하고 있다.
1918년 남아공 동남부 음베조에서 마을 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만델라는 백인 정권의 인종분리정책에 맞서 ‘아프리카민족회의’(ANC. 현 집권당)를 이끌며 투쟁하다 투옥돼 무려 27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남아공 정부는 1990년 국내외적인 저항과 국제사회의 압력에 인종분리정책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만델라를 석방한 뒤 ANC도 합법조직으로 인정했다. WCC는 오랜세월 이 ANC에 큰 자금을 지원해 인종분리정책 철폐 운동을 지원해 왔으며, 전 세계 교회와 국제사회의 인종분리정책 철폐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호소하며 힘을 모으는 중심에 섰었다. 특히 WCC는 ANC를 지원한 일로 “공산 게릴라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끄는 ANC는 1994년 4월 27일 실시된 선거에서 62%를 득표했으며, ANC의 지도자인 넬슨 만델라는 1994년 5월 27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일생을 백인 정부에 의해 상상하기 힘든 고난을 당했던 그였지만 대통령 취임 이후 진실과 화해위원회(TRC)를 결성하고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면서 과거사를 모두 청산했다. TRC는 성공회 주교인 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참여해 활동했으며, 수많은 과거사 관련 자료들을 수집해 조사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인종분리 시절 흑인들의 인종분리 반대투쟁에 대해 화형이나 총살 등의 잔악한 방법으로 탄압했던 가해자들이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면 사면했다. 또한 피해자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피해자 무덤에 비석을 세워줌으로써, 인종분리정책이 있던 시절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들이 역사 속에서 잊혀지는 일이 없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을 통해 만델라 대통령은 이른바 ‘무지개 국가’를 건설한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퇴임 이후에도 남아공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왔다.



한국의 ‘김장문화(Kimjang; Making and Sharing Kimchi in the Republic of Korea)’가 인류무형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으로 등재됐다.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지난 5일 열린 제8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는 “한국인의 일상생활에서 세대를 거쳐 내려온 김장이 한국인들에게는 이웃간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는 한편 그들 사이에 연대감과 정체성, 소속감을 증대시켰다”면서 “김장의 등재는 비슷하게 자연재료를 창의적으로 이용하는 식습관을 가진 국내외 다양한 공동체간의 대화를 촉진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한국이 제출한 등재신청서가 “무형유산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를 설명하기 위한 영감을 주는 모범 사례(an inspirational model)”라고 극찬했다.
이로써 한국은 종묘제례·종묘제례악, 판소리, 강릉 단오제 등에 이어 총 16건에 이르는 인류무형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무형유산위 의장단 회의는 한국의 김장문화를 대상으로 한 것이므로 영문 명칭에 ‘in the Republic of Korea’라는 말을 붙이기로 결정해 정확한 등재 명칭은 ‘김장, 한국에서의 김치 만들기와 나누기’가 됐다. 이번에 같이 등재된 중국의 주판이나 일본의 음식문화인 와쇼쿠(和食) 또한 ‘Chinese zhusuan’ ‘Japanese Washoku’와 같이 영문표기에서는 소속 국가를 명시했다.


[1500자 칼럼] 늑대가 되자

● 칼럼 2013. 12. 16. 18:03 Posted by SisaHan
There was an unmistakable note of sorrow in it now. It was no longer the loud, defiant howl, but a long, plaintive wail; “Blanca! Blanca!” he seemed to call.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의 위풍당당하던 포효가 아닌 길고 애절한 그 목소리는, “블랑카! 블랑카!” 하며 울부짖는 거 같았다.)

며칠 전에 다시 읽은 ‘커럼포의 늑대 왕, 로보’ (Lobo, The King of Currumpaw, Ernest Thompson Seton)의 문장 일부다. 사랑하는 아내 블랑카를 찾아 울부짖는 로보의 슬픈 하울링(howling)은, 언제나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어쨌거나 이 야성미 넘치는 동물에 반해서 좋아하는 동물? 하면 늑대요, 꿩 대신 닭 식으로 한때는 진돗개를 여섯 마리나 기른 적이 있었다. 회색 늑대가 사는 겨울 숲에 대한 기대감이, 캐나다 이민에 대한 선택의 즐거움이 된 것은 당연지사였고. 

늑대인지 코요테인지 확실치는 않았지만, 언젠가 겨울 캠프에서 들어봤던 생생한 하울링은 참 가슴 설레는 울림이었다. 누가 저들을 숲 속의 악마라고 했나, 자연의 정령이지!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얼뜬 시심(詩心)의 과잉 노출이라고 흉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정색을 하며 몇 마디 더 늘어놓고 싶어지는 건, 이 세상은 늑대에 관해서는 온통 잘못된 편견으로 꽉 들어찬 거 같은 묘한 억울함이 있어서다. 

몇몇을 들어보자. ‘늑대 같은 남자 혹은 남자는 다 늑대’라는 표현은, 음흉하고 능글맞은 사기꾼이나 비열하고 난폭한 깡패로 늑대를 간주하는 암시가 엿보이지 않는가? ‘늑대와 7마리 새끼염소, The wolf and the seven little goats’라는 세계명작동화는 이제 동영상으로도 만들어져서,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에 늑대를 사정없이 흉악한 동물로 꼭 새겨주고 있다. 늑대에 대한 몰이해의 극치는 1926년경 미국에서 빚어진 늑대 퇴치 사업일 것이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숲을 만들자는 취지로 늑대를 보이는 족족 죽인 결과, 숲에는 엘크 같은 초식동물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닥치는 대로 풀과 어린나무들을 먹어 치웠다. 그 결과 큰 풀이 자라지 못하게 된 숲에는 작은 새들이 둥지를 틀 수 없게 되었고, 이어서 여러 동식물이 숲을 떠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이유는 포식자의 위치에 있던 늑대가 사라짐에 따라 숲의 생태계가 무너져 생긴 결과였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캐나다에서 공수해 온 늑대를 방사한 뒤 숲은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았다. 미국 옐로우 스톤 국립공원에서 있었던 70년 만의 늑대 복원에 관한 일화다. 늑대야말로 평화로운 숲을 지켜주는 핵심종이다.

이런 늑대의 본성을 살펴보면 한결 경이로워진다. 부부가 평생을 함께하는 엄격한 일부일처제로, 1~2년 된 새끼와 일부 개체가 포함된 무리를 이루며 사는데, 무리 안에서 이뤄지는 질서와 생존방식은 이상적인 사회적 공리주의를 연상하게 한다. 가족 간의 정이 특별해서 아비 늑대의 아내와 자식 사랑은 눈물겨울 지경이다. 덫에 걸려 죽은 아내 블랑카를 찾기 위해 죽음도 개의치 않고 사냥꾼의 캠프 근처를 울부짖으며 헤집고 다니던 로보의 순애보처럼. 게다가 독립해 따로 살던 새끼들이 이따금 부모를 찾아오는 효심까지 보여준다니, 늑대의 매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러니 ‘늑대 같은 놈’이란 비난은 ‘참 멋지고 진실한 남자’라는 칭찬이 되는 셈이다.

모국의 대구동물원 늑대 우리에 이런 안내문이 붙어있다고 한다. ‘남자를 늑대 같다고 말하지 마라. 남자들이 늑대만큼 살아간다면 여자는 울 일이 없을 것이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국과 이곳 구분 없이 하루가 멀다고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유명 인사들의 숨겨진 여인, 약물 복용, 배임 횡령 등등 기사를 대하자니 절로 읊조려진다. 남자들이여, 우리 모두 늑대가 되자!

< 김준태 - 시인, ‘시.6.토론토’동인 / ‘시와 시론’으로 등단 >
펜클럽 회원,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신이 속한 국민과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 마쳤다면 그는 평안하게 안식을 취할 수 있다. 나는 그런 노력을 했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영원히 잠잘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거인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이 5일 밤(현지시각) 지상에서의 의무를 다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그의 삶은 자신의 책 제목처럼 ‘투쟁은 나의 삶’이자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이었다. 젊은 시절 엘리트 코스를 밟던 그는 안정된 길 대신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에 뛰어든다. 이 나라에서 처음 흑인 법률사무소를 연 1952년에는 전국적인 불복종 저항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민권운동의 지도적 인물로 부상했다. 이후 지하 무장조직의 초대 책임자로 임명된 그는 64년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90년까지 무려 26년 동안 복역한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이 기간에 그는 자기정진을 통해 내적인 힘과 외적인 권위를 키워 민중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는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의 진가는 94년 흑인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첫 선거에서 이겨 첫 흑인 대통령이 된 뒤에 나타난다. 그가 택한 길은 백인 사회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진실에 기초한 대화합이었다. 흑인에게 심한 탄압과 테러 등을 자행한 사람도 진실화해위원회(TRC)에 출두해 자신이 한 일을 솔직하게 밝히고 용서를 구하면 사면받을 수 있게 했다. 이 위원회에 출두한 사람이 수천명에 이른 것은 만델라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진실화해위 모델’은 부끄러운 과거사를 청산해야 하는 여러 나라에 좋은 본보기가 됐다. ‘화해의 정치’를 실천한 그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었던 연임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만델라는 아프리카 지역뿐 아니라 지구촌 전체에 큰 영감을 줬다. 그러나 그의 꿈이 남아공에서 아직 온전하게 이뤄진 것은 아니다. 국민의 80%를 차지하는 흑인은 여전히 가난에 허덕이고 있어 흑백화합이 깨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해 8월에는 광산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 집회를 경찰이 강제 해산하면서 실탄을 발사해 34명이 숨지기도 했다. 법률·제도적인 차별 철폐를 넘어 사회·경제적인 평등을 이뤄내야 하는 과제가 시급한 상황이다.
만델라의 성취가 혼자만의 것은 아니지만 ‘정의는 반드시 이뤄진다’는 그의 뚜렷한 역사관과 ‘흑인과 백인이 평화적으로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믿음이 큰 구실을 한 것은 분명하다. 여러 요인으로 갈라진 지구촌에 그가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