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직 '군복 관료'들 이번에도 전작권 환수 난색?

● COREA 2025. 8. 16. 00:3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정보 · 감시 · 정찰 타령…20년 전 반대논리와 판박이
"지휘권도 없는 군대서 별 달고 거들먹거릴 것인가"

새 정부 '임기 내 환수' 다짐, 단호한 의지엔 온도차
안보 환경 · 미국 전략 변화·환수 준비 3박자 갖춰
ISR 강화도 완숙 단계, 기왕의 계획대로 하면 될 일

 

"참여정부 초기 국방부를 찾아 협력적 자주국방을 설명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의지를 강조하자 고위급 장성들이 깜짝 놀랐다. 일제히 우려를 표하며 말 그대로 사시나무 떨 듯했다. 그런데 몇 달 뒤 다시 국방부를 찾아가 보니 같은 인물들이 이번엔 일제히 '가능하다'고 하더라. 두 번 놀랐다."

 

'대한민국 수호 예비역 장성단 모임'과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이 25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남북군사합의서 위헌 헌법소원 제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9.6.25

 

노무현 정부 국가안보회의(NSC) 핵심 당국자의 전언이다. 군복을 입었을 뿐 '하던 대로' 일하면서 밥을 버는 데 익숙한 관료적 사고의 단면이 엿보인다. '국가'를 중심에 놓고 국익을 따지기보다 '관행'에 푹 젖어 있다. 그러다가도 권력의 의지가 분명한 것 같으면 슬쩍 줄을 바꿔 선다. 오래전에 접한 말이 다시 떠오른 것은 20년의 시차를 두고 비슷한 상황이 재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정기획위원회가 13일 발표한 외교안보 국정과제의 하나로 '임기 내 전작권 전환'을 명토박았다. 국정기획위가 건의하고, 정부가 국민께 보고하는 형식을 빌었다. 수십 년 동안 '지체된 정상화'라는 점에서 관심이 집중된다.

 

국산 '군복 관료'들은 이번에도 어슷비슷한 반응을 보였다는 전언이다. 12.3 내란 수괴 피의자 정부가 임명한 국방부 고위직들이 대부분 남아 있는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이들의 유전자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학습효과를 새삼 확인하게 한다. 반대 또는 우려의 근거도 2006년과 거의 비슷하다. 바로 우리 군의 정보·감시·정찰(ISR)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군의 전투 역량이 부족하다는 말은 하지 못했고, 지금도 못한다. "미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서 계속 머물고 싶다"는 속내도 차마 드러내지 못한다. 유사시 전장에서 '눈'에 해당하는 ISR이 약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23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생태문화공원에서 노무현 대통령 15주기 추도식이 열리고 있다. 2024.5.23

 

20년 가까이 막대한 혈세를 쏟아부어 국민이 높여준 '시력'을 스스로 평가절하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은 그동안 북한 전역을 실시간 감시할 수 있는 고고도 장기체공 무인정찰기 글로벌호크(RQ-4)를 4기 도입했고, 군사 정찰위성을 4기 운용하고 있다. 올해 안에 쏘아올릴 5호기가 운용되면 북한 주요 지점을 2시간 마다 감시가 가능해진다. 2030년까지 50~60기의 초소형 위성을 발사, 한반도 재방문 주기를 30분으로 단축할 계획도 장전돼 있다. ISR은 미사일방어·킬체인·대량응징보복의 3축방어체계에도 필요하기에 진보·보수 정부를 막론하고 능력을 키워왔다. 앞으로도 투자와 대비가 필요하겠지만 ISF를 중심으로 전작권 이행 초기 미국의 보완전력(bridging capability)에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했던 과거의 국군이 아닌 건 분명하다.

 

안보 전문가 사이에서도 "국방부가 기밀에 붙이고 있지만 이미 마련해놓은 ISF 역량 강화 일정대로 필요한 무기·장비·시설을 도입하면 이재명 정부 임기 내 필요한 조건을 충족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전에 이미 준비 작업이 완숙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말해준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7월 15일 인사청문회에서 전작권 전환 시 예상되는 국방비 증가액을 "21조(원) 정도로 판단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23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을 방문해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서 헌화하고 있다. 2025.5.23 연합
 

전·현직 '군복 관료'들은 국군이 미군 망토 안에 계속 있어야 한다는 퇴행적 강박관념에 포획된 기성 언론의 엄호를 받고 있다. 이번에도 언론과 함께 공포를 유포하는 정황이 포착된다. "위험천만한 주장"이라거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전작권 전환은 곧 한미동맹의 와해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군사주권 회복 염원을 '감정의 문제'라고 폄하하면서 자신들의 '의존 근성'이 과학인 양 우긴다. "(한국군을 포함해) 75만 명의 병력이 내 휘하에 있다"라는 미군 사령관의 말이 이들에겐 지극히 편안한 자장가로 들리는 듯하다.

 

2006년과 2025년은 환경이 다르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미국의 국방전략 변화가 주한미군 역할 변경(전략적 유연성) 및 전작권 전환의 계기를 제공했다. 전작권 문제가 국방주권 확보를 위한 정신적 승리 차원에서 돌출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미국 또는 주한미군의 변화에 맞서는 방안의 하나로 한미가 합의한 사안이다. "미국이 한국처럼 부자나라를 그동안 공짜로 지켜주었다"라고 우기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조지 부시 행정부보다 훨씬 현상 변경 의지가 강하다. 구조조정 대상이 된 주한미군 사령관이나 미육군 입장에선 '고정된 항공모함'에 지상군 전력과 지위를 유지하는 게 좋겠지만, 백악관 차원의 의지를 뒤집지 못한다. 주한미군은 상징적인 인원만 남아도 미국의 국익에 충분히 봉사할 수 있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를 시작하며 신임 국무위원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5.7.29. 연합

 

최근엔 군복관료와 보수언론의 견고한 동맹에도 균열이 보인다. 주한미군 무용론 또는 현실론을 인정하고 나서는 조짐이 포착되는 것. 주한미군 스트라이커 여단은 순환근무로 반 주둔·반 철수 상태이며 한국 공군의 화력이 미7공군에 비해 5~10배의 화력을 갖고 있음을 확인한다. (조선일보 양상훈 칼럼) 미국이 북한 미사일의 사거리 안에 있는 한국 기지에 육군 병력이나 최첨단 전투기를 둘 이유가 없음도 짚었다. 북 도발은 우리가 막는 수밖에 없으며 그게 현실임을 인정했다. 물론 객관적 상황 변화를 짚으면서도 한계는 뚜렷했다. 한미가 함께 중국과 싸우자는 말인지, 주한미군의 전력 약화가 아쉽다는 말인지 당최 종잡을 수 없는 결론에서 '이른바 보수'의 고민을 대변한다.

 

모두에 소개한 전작권 환수에 대한 군복관료들이 입장을 바꾼 건 권력의 풍향에 민감한 속성을 말해준다. 그들도 대통령의 강한 의지를 넘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광복절 축사에서 처음 발표한 뒤 기회 있을 때마다 전작권 환수를 다짐했고, 끝내 미국과 합의를 이뤄냈다. 이재명 정부 역시 '임기 내 전작권 전환'을 국정과제로 보고했지만, 대통령의 의지는 다소 온도 차가 있어 보인다.

 

안 장관이 인사 청문회에서 환수 시기를 '정부 임기 내'로 밝히자 대통령실은 "시한을 대통령실이 정한 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민보고대회에서 "국정위 계획안은 확정된 정책이 아니다. 다양한 경로로 국민과 각계각층 의견을 수렴해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오는 25일 첫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구체적인 안보 현안에 대한 언급을 최소화하려는 조심성으로 읽힌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이 지난 4월 10일 상원 군사위 청문회에서 "김정은이 남침할 것으로 보나"라는 앵거스 킹 상원의원의 질문에 "그러지 않을 것 같다"라고 답하고 있다.  2025.4.10. [미상원 군사위 누리집] 시민언론 민들레 

 

안보환경의 변화와 미국의 국방전략 전환, 우리 군의 준비 태세 등 전작권 환수 조건이 무르익었다. 한국군이 능력을 갖췄으면서도 미군에 의존하려는 걸 두고 '유치원에 다니는 대학원생(미 군사전문가, 랄프 코사)'이라는 비아냥이 나온지도 오래다. '빛의 혁명'으로 12.3 내란이 차단된 덕분에 출범한 국민주권정부다. 미국과의 협의는 조용히 진행하더라도 적절한 계기에 보다 확고한 환수 의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6년 12월 27일 국방부·군 수뇌부 청와대 오찬 간담회에서 이에 반대하는 예비역 장성들의 태도를 비판하며 내놓은 일갈은 여전히 유효하다.

 

"자기 나라 군대 작전통제 한 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놓고, 나 국방장관이오, 나 참모총장이오 그렇게 별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얘기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 김진호 기자 >

 

 

양대노총 통일선봉대, 광복 80년 결의대회 열어
관세 압박하는 미국에 맞서 자주 평화 실현 강조
노동자 자주·평화·통일 운동에 함께 힘 모으기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15일 오전 서울 용산역에서 ‘8.15 광복 80년 기념 양대노총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2025.8.15. 사진=임석규 시민기자
 

광복 80주년 맞아 ‘통일선봉대’를 출범했던 민주노총·한국노총이 서울에서 함께 모여 노동자 통일운동에 함께 손맞잡기로 뜻을 모았다.

 

양대 노총 통일선봉대는 광복절 80주년인 15일 오전 9시 30분 서울 용산역 광장에 모여 '8.15 광복 80년 기념 양대노총 결의대회'를 열었다. 전국을 순회하며 통일운동 일정을 소화했던 양대노총은 함께 광복절 정신을 돌아보며 노동자의 자주·평화 실현에 함께 힘을 모으기로 뜻을 모았다. 통일선봉대 관계자는 "미국 트럼프 정부의 일방적인 관세 협상으로 대한민국의 경제·노동의 자주를 훼손하고 있다"고 규탄하고 사대굴욕외교 청산을 실현하는 것이 자주와 평화의 전제조건임을 강조하며 이재명 정부를 향해 대미 정책의 적극적인 변화를 촉구했다.

 

미국의 강압적 관세 협상 등 자주권 침해에 맞서 노동자들이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함께 힘을 모을 것이라 선언한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왼쪽)과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 2025.8.15. 사진=임석규 시민기자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다시는 강대국들에게 자주권을 빼앗기지 않겠단 결심으로 미국의 내정간섭과 경제적 압박, 분단 이데올로기에 맞서 노동자가 앞장서겠다"며 "현장 노동자들과 함께 자주·통일을 말하고,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하겠다"고 강조했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도 "국제사회 강대국의 갈등과 경제적 압박, 지난 윤석열 정권의 굴욕적 외교로 인해 민중이 고통받고 있다"면서 "한미동맹 현대화와 경제적 압력에 맞서 국익을 우선하는 자주·평화 실현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앞장설 것"이라고 밝혔다.

 

400여 명의 통일선봉대를 이끌었던 김광창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위원장(오른쪽)과 김대련 한국노총 공공연맹 수석부위원장. 2025.8.15. 사진=임석규 시민기자

 

양대 노총 통일선봉대 400여 명은 이날 발표한 결의문에서 "대한민국이 여전히 외세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고, 미국의 일방적 통상 압력과 한반도의 대중국 전쟁 시도가 외교·안보 주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의문은 이어 "자주와 평화의 실현이야말로 주권과 노동자·민중의 삶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며, 모든 침략적 전쟁 연습과 군사적 긴장 조성을 반대하고 국민과 함께 당당한 자주 외교와 평화의 길에 나서야 한다"고 선언했다.

 

한편 민주노총은 같은 날 오후 5시 서울 숭례문에서 '노동자의 힘으로 내란 세력 완전청산! 미국의 경제·안보 수탈 저지하자'라는 표어 아래 8.15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다. 이어 오후 7시 같은 장소에서 '광복 80년, 평화·주권·역사정의 실현 8.15범시민대회'를 하고, 오후 9시부터 참석자들과 함께 숭례문-서울시청-을지로 사거리-종각 사거리-안국 사거리-동십자각-미 대사관-태평로 일대 행진할 예정이다.  

(결의대회 전체실황 : https://youtu.be/TW2wNINmjtU     < 임석규 기자 >

 

광복 80주년, 태극기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 Hot 뉴스 2025. 8. 16. 00:2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소음과 폭력으로 오염된 태극기 되찾아와야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우리는 흔히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 조약이 1876년 일본과 체결했던 강화도조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아직 태극기가 등장하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조선이 이 조약을 교린관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조약체결에 반대하는 보수 유생들에게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잇는 것에 불과하다고 반박하였어요.

 

1882년 조미조약 체결 때 성조기와 함께 처음 등장한 태극기

 

그러므로 청과의 사대외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이후, 조선은 청의 속방이 되었어요. 그에 따라 청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기 때문에 독립국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내정과 외교는 자주국이었습니다. 사대외교는 전근대 사회에서 강대국과 약소국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방식이었어요. 조선의 입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강화도조약 1조에서 조선이 ‘자주지방’이라고 한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그들은 독립과 자주를 분리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라고 종용한 것도 청이었고 1881년에 「조선책략」을 통해 미국과의 수교를 주선했던 것도 청이었어요. 그들은 오히려 이런 기회를 통해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는 것을 세계적으로 과시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청이 조미수호조약 체결과정에 개입하려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속방이라는 문구를 넣으려는 이홍장의 요구도 거절했습니다. 따라서 1882년 5월 22일 조약이 체결될 때, 태극기가 미국의 성조기와 함께 게양되었어요. 조선은 엄연히 독자적인 국가라는 것을 표시한 것입니다. 당시 미국 측 대표였던 슈펠트가 보관하고 있던 문서를 통해서도 확인이 되었는데요.

 

미국에서 1882년 발간된 [Flags of Maritime Nations]에 실린 태극기.

 

이후에도 1883년 영국과 수호조약을 맺을 때, 1886년에 프랑스와 수교를 했을 때에도 태극기를 사용했습니다. 당시 조선이 제공한 태극기가 그들의 외교문서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1883년 미국에서 루시어스 푸트 공사를 조선에 파견한 것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과 홍영식 등의 보빙사가 미국에 파견되었습니다. 이들은 9월 19일 숙소였던 보스턴의 호텔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걸었어요.

 

독립의 상징 독립문 위에 새겨진 태극기

 

태극기가 조선의 국기로 제정된 것은 1883년 1월 27일이었습니다. ‘이미 국기가 제정되었으니 팔도와 사도에 알려 사용하라’는 고종의 지시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하지만 그에 앞서 1882년 9월에 일본에 파견되었던 개화파 박영효가 고베의 숙소에 태극기를 게양했습니다. 그가 남긴 기록에는 ‘일찍이 임금에게 명을 받았던 것이다’라고 해서, 독자적인 시도가 아님을 알 수 있지요.

 

고종이 1880년대에 미국인 고문관 데니에게 하사한 태극기.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 후에도 청은 끊임없이 세계 외교무대에서 조선이 속방이라는 것을 강조하려 들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상태를 유길준은 양절체제라고 설명했는데요. 그것은 청에게는 속방이면서 세계 각국과는 독립국으로 조약을 체결한 모순적인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고종은 청의 속방론에 맞서 일본과 미국에 상주 외교사절을 파견했어요.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참석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두 나라가 맺었던 시모노세키 조약의 결과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철회하였고 조선은 이제 독립국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 독립은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어진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청의 간섭 없이 조선에 대한 보호국화 정책을 시도했던 것인데요. 그러나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의 개입으로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대한제국관을 소개한 프랑스 주간지

 

아관파천으로 인해 러시아의 영향력이 극대화 되었음에도 고종의 정치적 주도권이 회복되었어요. 당시 갑오개혁의 주역들은 살해, 유배, 망명을 당했지만 구미세력과 가까웠던 개화파들이 정권에 참여하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를 구성했습니다. 이들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독립문의 건립을 추진했어요. 그래서 독립문 위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태극기는 당연히 금지되고 말았어요. 하지만 태극기는 곧 국권회복의 상징이 되었고 1919년 3.1 운동에서도 전국적으로 한국인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따라서 일제는 태극기를 '불령선인'의 상징으로 보아 제조 및 소지를 금지하였어요. 따라서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태극기가 진관사, 백양사 등에 보관되어 훗날 발견되었습니다.

 

진관사에 보관되었던 태극기

 

3.1 운동 때도, 임시정부도, 독립군도 사용한 한국인 공통의 상징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되면서 민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대한이라는 국호와 태극기라는 국기를 그대로 사용했어요.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독립군도, 미국에 이주한 동포들이 설립한 대한인국민회도 태극기를 한국의 국기로서 활용했습니다. 태극기는 한국인이라는 동질성을 확인하는 공통의 상징이 되었어요. 따라서 해방의 날을 맞이했을 때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 3.1절 2주년 기념식

 

1945년 12월 중앙문화협회가 발행했던 「해방기념시집」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24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요. 그 가운데 ‘아침’을 썼던 창원 출신의 김달진 시인은 “천길 만길 깊은 바다 밑에/ 긴 밤을 어둠 속에 몸부림 치며/ 큰 열을 가슴 속에 쌓고 달구었더니/ 집집마다 추녀 끝에 태극기 나부낀다/ 거리마다 지축을 울리는 함성/ 오늘 이땅 산천은 크게 웃었다”라고 했습니다.

 

1945년 해방기념시집

 

하지만 일장기가 게양되어 있던 조선총독부 국기게양대에 나부낀 것은 성조기였어요. 9월 8일에 들어온 미군이 군정을 실시했기 때문입니다. 태극기가 올라간 것은 1946년 1월 14일이었는데요. 김구 주석을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들이 귀국했을 때에도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을 했습니다. 이어서 열린 모든 행사에서도 태극기는 한국인을 상징하는 깃발이 되고 있었어요.

 

북한에서도 1948년 7월 10일까지 태극기를 사용했음이 당시의 모든 영상자료를 통해 확인됩니다. 그런데 1947년 소련 측이 불만을 제기하여 결국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는데요. 그 결과 1948년 7월 10일에 열린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로 교체했습니다. 태극기의 근거가 된 주역이 미신이며 일정한 표준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어요.

 

1948년 7월 1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는 국기로 태극기를 정식으로 채택하였습니다. 다만 대한민국 국기를 태극기로 한다는 조항은 헌법에는 넣지 않기로 했어요. 그런데 태극기가 구체적으로 어떤 도안인지는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확정할 필요가 있어서 1949년 1월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마침내 1949년 10월 15일에 「국기제작법」 고시가 확정되어 규격이 확정되었어요.

 

‘국기에 대한 맹세’ 강요한 박정희, 태극기에 발포한 5.18 계엄군

 

박정희 정부는 특히 새마을운동을 통해 태극기를 보급하고 국기에 대한 예절교육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유신 선포와 함께 국기게양식과 강하식을 진행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제정하여 강제로 외우게 하였지요. 1978년 국군의 날부터는 전국의 모든 방송을 통해 국기강하식과 함께 애국가를 내보냈습니다. 이는 독재정권이 자신들의 권위를 뿌리내리려는 의도가 있어 반발을 사기도 했어요.

 

그러나 이에 맞선 민주화운동 세력들도 태극기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1980년 광주민주항쟁에서는 태극기를 앞세워 자신들이 국민주권을 대변하고 있음을 나타내려 했어요. 오히려 계엄군이 시민군이 태극기를 달고 다니는 것을 폭도의 행동으로 매도했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태극기로 희생자들을 담은 관을 감싸며 애도했어요. 태극기를 든 시위대에게 발포한 것은 계엄군이었습니다.

 

5.18 당시 시신을 감쌌던 피에 물든 태극기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1989년에 규격화나 훈련을 통한 길들임을 의도한다는 비판을 받고 국기하강식은 폐지되었어요. 그리고 ‘국기에 대한 맹세’도 간소화되었습니다. 김영삼 정부에서 국기의 존엄성만 강조하지 않고 국민과 가까이 하는 상징물로 만들어가겠다고 밝힌 이후에 디자인화가 권장되었어요. 그것이 가장 극대화된 것은 2002년 월드컵에서 대대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성조기와 함께 등장한 ‘태극기 부대’

 

그런데 2016~2017년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탄핵 반대 집회와 박근혜 지지 집회를 주도하면서 ‘태극기 부대’가 나타났어요. ​이후에도 문재인 정부 퇴진 운동, 윤석열 지지 등 극우 성향의 시위와 집회에로 이어져 왔습니다. 이들은 태극기뿐 아니라 성조기, 심지어 이스라엘기를 흔들며 집회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이를 통해 보수적 개신교인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태극기 부대의 정치적 영향력은 응집력과 목소리가 크기 때문에 보수 정치권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요, 하지만 최근 직접적 영향력이나 주도권은 크게 줄어든 상태입니다. 이들이 동원한 대중들이 대단한 것 같아도 선거에 참여한 세력들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극기 부대’가 일으키는 소음과 폭력은 태극기라는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어요.

 

‘애국보수’를 자칭하지만 실제로는 한미동맹을 맹신하면서 친미사대주의를 보이고 있으며 독도나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 보상금 등 문제에서 일본에 대한 비판을 저지하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더구나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를 신봉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빨갱이로 규정하고 있어요. 따라서 이들은 애국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태극기를 모독하고 있는 것인데요.

 

<태극기 함께 해온 나날들> 특별전에서 태극기 소중함 되새깁시다

 

이제 저들에 의해 오염된 태극기를 민족 정체성과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되찾아 와야 합니다. 우선 저들에게 ‘태극기 부대’ 또는 ‘태극기 집회’라는 명칭을 부여하지 말아야 해요. 더 이상 이들이 태극기를 대표하는 왜곡된 사회현상을 방치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시대착오적인 극우 사대주의자들이 모인 것에 불과하며, 민주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곧 소멸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럴 때 우리 역사에서 태극기가 갖는 의미를 다시 한번 알아보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지금 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11월 16일까지 <태극기 함께 해온 나날들>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중요하고 뜻깊은 자료들을 많이 모아서 보여 주고 있어요.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관람해 보시기를 추천드릴게요. 특히 청소년들에게 뜻깊은 시간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