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그리스가 부럽다니…

● 칼럼 2015. 7. 10. 18:20 Posted by SisaHan

국가부도 위기에 빠져 국민투표까지 한 그리스를 보면서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IMF사태를 맞았던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우리도 한 때 그처럼 괴롭고 절박했었지. 나라가 망한다는 위기감 속에 IMF 체제에 저항은 고사하고 순응의 굴욕을 삼켜야 했으니 얼마나 창피하던가. 너도나도 금붙이를 내다 판 애국심에 눈물 쏟았던 쓰라린 시절. 그러니 그 심정 알고도 남는다.


그런데 채권단 요구를 국민투표 승부수로 되치기 해버린 그리스인들의 배짱은 대단하다. 뚜렷한 해법이 없어도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는 결기와 자존감을 엿본다. 역시 스파르타의 후예다운 오랜 민족성의 발로일까, 그런 강단과 벼랑끝 전술로 과연 곤경을 헤쳐 나갈 수 있을지, 자존의 환호 속에 나라는 망국으로 치닫는 게 아닐까. 지구촌의 연민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궁금한 것은 모국을 주시하고 있을 해외 그리스인들의 표정이다. 모국애에 불 타는 그들의 심정은 얼마나 조바심이 일까. 조국이 흥성해야 힘이 솟고, 뒤뚱거릴 때 어쩔 수 없이 덩달아 맥이 풀리는 게 해외 동포들인 것은 우리와 뭐가 다르겠는가.
정확한 반응이야 확인된 게 아니지만, 그들 역시 조마조마 가슴 졸이면서도 잘했다 박수치며 응원하지 않을까. 협박하듯 궁지로 몰아 부치며 쥐어짜는 채권단에 보기좋은 일격을 가했으니, 일단은 통쾌할 밖에.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가 아닌 국가부도 임계국면이다. 비위가 상한 채권단과의 협상이 극적 돌파구를 만들 것인지, 국민투표를 볼모로 한 ‘배째라’식 전략이 회생의 전기가 될지, 초미의 관심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부러운 것은 절벽 앞에서도 결코 비굴하거나 주눅들지 않는 그들의 기백이고, 국민의 압도적 지지와 응원을 도출해 낸 지도자의 결단과, 중차대한 국가적 대외협상에 국민의 힘을 이용할 줄 아는 지도자의 총명이다.
지난 1월 집권한 그리스의 시리자당은 2013년에야 단일정당으로 체제를 갖췄다고 한다. 불과 2년의 역사를 가진 급진정파다. 총리가 된 알렉시스 치프라스는 나이 41세의 젊은이다. 하지만 지도자의 덕목에 나이의 많고 적음, 소속 정파의 오래고 짧은 역사와 보수-혁신의 성향이 필수 사항은 아니다. 그저 국민들 마음을 읽고, 국민의 바램을 충실히 받들고 이뤄가겠다는 헌신의 자세만 있어도, 거기에 합리적인 판단력과 결단력이 뒷받침 된다면 지도자의 자격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치프라스 총리가 보여주었다는 생각이다.


국민들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할 때, 미국 대통령 골프카를 손수 운전해주며 얼렁뚱땅 수입 밀약을 하고 온 친미 대통령, 일본 총리가 자국 교과서에 독도를 자국 땅이라고 표기하겠다고 말하자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고 답했다는 친일 대통령이 우리 자존심을 멍들게 했다, 통치권의 핵심이요 나라의 주권이라 할 전작권을 되돌리지 말아달라고 애소한 대통령. 국민의 힘을 대외협상에 압박카드로 이용하기는 커녕 그럴수록 오히려 비밀협상으로 국민들 뒤통수를 치고 쉬쉬하며 변명에 급급한 지도자. 큰 참사에도 남 탓만 하는 무책임의 극치 에 국민들은 서럽기만 하다. 과연 누구를 위해 일을 하며, 누구를 이롭게 할 요량인지 알 수 없는 무늬만 지도자들이 한국과 한국인을 부끄럽게 한다.


더구나 요사이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집권한 뒤 공약 파기와 온갖 비정상적인 행태의 일상화가 피곤과 짜증을 더해준다. ‘신뢰와 원칙’을 자신만의 상징어처럼 써먹던 지도자의 불신과 원칙 묵살, ‘짐이 곧 법이요 원칙’인 듯 과거 회귀적인 군주적 모습에 탄식이 번진다. 리더쉽 부재 속의 잇단 스캔들과 후진적인 전염병 창궐까지, 나라 꼴은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되어 한국 사람들이 안팎에서 얼굴이 뜨겁다. 엄연한 삼권분립의 민주국가에서 국회 알기를 ‘입법 거수기’ 쯤으로 여기고, 모법(母法)을 어기는 행정부 시행령은 곤란하다는 국회의 지적에 되레 노발대발하는 히스테리와 적반하장, 어느 학자는 “미국이라면 코미디”라고 했던가, 집권당 선출직 원내대표 퇴출 파장만으로도 비정상과 몰상식의 민낯을 본다.
요즘 불쌍한 처지의 그리스에서 발견하는 부러운 부분은 그런 점들 때문이다. 나라가 낭떠러지에 직면했어도 국민과 고통을 함께하며 당당히 외세에 맞서는 지도자, 국민의 자존심과 나라의 체통을 세우는 지도자. 그리고 그런 지도자를 세울 줄 아는 국민들…. 우리 조국 한국인들도 그런 지도자를 택하고, 그런 지도자가 등장하기를 고대한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