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4일 그날 100만 시민의 힘이 있었기에
#1. 탄핵의 날이 밝았다.
아침 일찍 가까운 도서관에 갔다. 내가 도서관에 가는 이유는 단 하나, 신문을 보기 위해서다. 나는 방송기자였지만 신문의 잉크 냄새를 좋아한다. 지면을 넘기며 쭈욱 훑어보기만 해도 하루의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아서다.
언론은 세상을 보는 창이다. 조선일보라는 창으로 세상을 본다는 건, 조선일보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동아일보에는 동아일보의 창(논조, 시각)이 있고, 한겨레에는 한겨레의 창이 있다. 그래서 여러 신문을 비교하며 본다. 그러면 보인다. 어느 신문이 정직한지, 어느 신문이 요설로 국민을 홀리고 속이는지.
국회에서 윤석열 탄핵 소추안을 표결에 부치는 날,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국제사회는 지금 전 세계에 생중계됐던 어처구니없는 망동의 책임자가 여전히 대통령으로 남아 있는 현실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고 썼다. 탄핵하라는 거다. 한국은 ‘민주주의 복원력’이 있다는 걸 보여달라는 거다.
조선일보는 달랐다. 사설에도 칼럼에도 ‘준열한 비판’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당과 이재명을 걸고 넘어지며 ‘기승전 이재명 혐오 프레임’을 가동했다. 윤석열도 나쁘지만 이재명은 더 나쁘다, 윤석열도 싫지만 이재명은 더 싫다, 윤석열이 대통령이라는 게 쪽팔려서 끌어내리고 싶지만 그러면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니까 안 된다... 조선일보는 전가의 보도처럼 약방의 감초처럼 즐겨 애용하는 ‘이재명 혐오 프레임’을 ‘내란의 수괴 윤석열 탄핵의 날’에도 어김없이 가동했다. 악은 성실하고 꼼꼼하다는 건, 조선일보를 두고 하는 말이다.
#2. 국회 앞으로 출격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맨다. 결연한 구국의 의지가 무엇인지 보여주겠다. 오만한 권력자에게 깨어있는 시민의 힘을 보여주겠다.
주말 낮인데도 여의도로 가는 전동차 내부는 출퇴근 시간처럼 붐빈다. 경로석 쪽으로 이동하여 분위기를 탐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빨간색 해병대 모자를 쓰고 있는 분도 있어 귀를 쫑긋했는데 같은 편이다. 옆 칸의 경로석으로 옮겨 살펴보니 주눅 든 표정에 말이 없다. 국회의사당역에서 내리면서 ‘내란 수괴 척결하러 갑시다’ 외쳤더니 여기저기서 유쾌한 폭소가 터져 나왔다.
#3. 인산인해, 여의도가 이런 적은 없었다.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거대한 물결이 도도히 흐르듯 국회로 향하는 인파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여의도에서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했는데, 이런 웅장한 장면은 본 적이 없다. 뭉클하다. 국힘당 의원들과 용산의 대통령 참모들이 길가에 도열하여 이 장면을 직접 보아야 했다. 그랬다면 탄핵할 테면 해봐라, 끝까지 싸우겠다는 ‘내란의 수괴’에게 몸을 날려 입틀막으로 제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당 의원들이 탄핵에 찬성하고 대통령 참모들이 사표를 집어던지면 제아무리 고집불통인 대통령이라 해도 국민과 싸우겠다는 만용을 부리지 못할 것이다. 내란 수괴의 한밤중 난동을 막지도 못한 자들이 대통령이 탄핵되면 국정에 공백이 생긴다는 건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공갈 협박이다. 무지와 무능의 윤석열이 언제 국정을 제대로 챙긴 적이 있는가. 손만 대면 망가뜨리지 않았는가. 한덕수 총리가 맘에 들진 않지만, 그가 윤석열 대신 대통령 권한을 대행한다는 게 오히려 마음이 놓이지 않는가.
표결까지는 한 시간 넘게 남았는데, 국회 앞에서 여의도 공원까지 발 디딜 틈이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남녀노소 다양한데 젊은이들이 특히 많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모들도 많이 보인다. 여의도 공원에는 갈대숲처럼 무수한 깃발이 바람에 펄럭인다. 내 앞의 깃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맥주 마시다 뛰쳐나온 사람들, 술 좀 편하게 마시자.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한 시간에 평화롭게 맥주를 마시고 있다가 국회 앞으로 뛰쳐나온 열혈 시민들인가 보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뒤쪽에서 아이돌 노래를 따라부르는 일군의 합창이 들린다. 살짝 돌아보니 젊은이들이다. 아이돌 공연에 다니다 터득한 노하우가 있는지 복장도 소지품도 마치 완전무장한 군인 같다. 세대를 건너뛴 민주현장의 동지로서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여러분들이 광장에 나와서 윤석열은 오늘 꼭 탄핵될 겁니다. 젊은 시민들이 박수로 호응한다. 민주주의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유리그릇 같은 거구나, 그러나 시민들이 나서면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구나, 윤석열의 12.3 내란에 분노하여 광장에 나온 젊은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체험으로 배우고 있었다.
#4. 탄핵 찬성이 고작 204표라구?
표결 진행 상황이 궁금하다. 그런데 워낙 인파가 많이 몰리니 통신망에 과부하가 생겨 인터넷은 사실상 먹통이다. 2016년의 광화문 광장에는 통신사들이 중계기지국 이동차량을 배치했던 것 같은데... 박원순 서울시장이 생각난다. 지하철 운행 연장, 광장 주변 빌딩의 화장실 개방, 안전요원 배치 등등 서울시장 박원순은 시민들의 편의와 안전을 꼼꼼하게 챙겼었다.
탄핵안 통과됐다! 뒤쪽의 한 시민이 소리를 지른다. 개표 끝났대요? 몇 표래요? 그건 모르겠구요. 200표 넘었대요! 시민들이 일제히 일어나 환호성을 지른다. 덩실덩실 춤을 춘다. 박근혜 탄핵 때 SNS에서 본 유쾌한 ‘통찰’이 떠오른다. 위기 극복은 한국인의 취미 생활이다. 우리 민족의 혈관에는 위기 극복의 피가 흐른다. 그뿐인가, 광장에 나부끼는 다양한 깃발이 말해주듯 우리 민족은 풍자와 해학에 있어 우주 최강이다. 한국말을 쓰는데 한국말을 모르는 윤석열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절대 이길 수 없는 무모한 도발을 했던 거다.
그런데, 탄핵 찬성이 204표란다. 박근혜 탄핵안 표결 당시 찬성이 234표였다. 윤석열의 내란에 비하면 박근혜의 국정농단은 순한 맛이고 새 발의 피다. 그때의 교훈을 잊었는지, 여당인 국힘당에서 탄핵 찬성이 고작 12표 나온 거다. 국힘당 의원 108명 중에 85명이 윤석열 탄핵에 반대했다. 윤석열은 ‘내란의 수괴’인데, 내란의 과정을 거의 모든 국민이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지켜봤는데, 내란 피의자 신분이 된 대통령은 일말의 반성도 없이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미화하며 탄핵할 테면 해봐라, 끝까지 싸우겠다고 공갈 협박성 담화까지 발표하는 망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데, 그걸 비호하는 여당이라니!
탄핵 트라우마? 박근혜 탄핵으로 상처를 받았는데 윤석열 탄핵으로 또 상처를 받을 순 없다고?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과 석고대죄로도 모자랄 판에 상처받기 싫어 윤석열 탄핵에 반대한단다. 아이를 유괴하여 살해한 살인범이 감방 트라우마가 있어 감방 가기 싫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윤석열이 탄핵된다고 하여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게 아니다. 어쩌면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에서 탄핵까지의 과정은 이 사회의 어디가 얼마나 썩고 곪았는지 MRI와 CT 스캔으로 진단하고 배를 갈라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이제부터 할 일을? 배를 갈랐으니 곳곳에 퍼진 암세포를 제거해야지!
#5. 한강을 건너며
윤석열 탄핵에 시민으로서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고 나온 언론계 퇴직 선배들과 뒤풀이를 하였다. 기자로 살면서 평생을 ‘자유 언론’을 위해 헌신한 선배들이다. 여의도에서는 식당을 잡을 수 없어 다리를 건너 마포 쪽으로 이동했다. 200만이라고 하던가, 워낙 많은 시민들이 나온 터라 횡단보도에는 사람과 차량이 뒤섞이기도 하여 위험해 보이기도 하는데, 그 어디에도 교통경찰관이 보이지 않는다. 집회와 시위에는 민첩하게 대응하면서 시민 안전에는 왜 이리도 굼뜨고 무감각할까.
나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경찰서 출입기자를 비교적 오래 한 편이다. 사건기자의 꽃이라는 시경캡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경찰에 내 나름의 애정이 있다. 윤석열의 내란에 연루되어 경찰의 1인자, 2인자가 동시에 구속되었다. 경찰의 수치다. 치욕이다. 경찰을 위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사건기자 시절에 친하게 지내던 어느 형사가 내게 해준 말이 있다. 후배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선배였고, 그런 선배이니 높은 자리에 오르면 경찰이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는데, 그 자리에 가면 권부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다 결국 후배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변절’을 하더라, 그런 걸 반복해서 보니 경찰에 대한 회의와 냉소만 쌓이고 자포자기하게 되더라. 내란 수괴 대통령의 반헌법적 불법 명령을 거부하지 않은 조지호 경찰청장과 김봉식 서울경찰청장은 경찰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런 게 진짜 트라우마다. 민주화 이후 경찰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새로운 제도가 도입됐고 경찰의 수준도 높아졌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제도를 갖추었다 해도 성공 여부는 결국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
경찰대에서 경찰학교에서 모든 경찰관들에게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과 국민에게 충성하는 것이 다르다는 걸, 권력에게 충성하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게 아니라는 걸, 똑똑히 가르치면 좋겠다.
육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일본 육사를 나와 천황을 위해 복무하다 해방이 되자 국군으로 변신하여 부귀영화를 누린 자들을 국군의 뿌리로 섬기고 숭앙하는 육사에서 생도들이 무얼 배우겠는가. 윤석열의 12.3 내란 사태 당시 국회에 투입된 특수부대원들은 ‘내가 이러려고 그 혹독한 훈련을 견디어 냈는가’ 하는 자괴감에 몹시 괴로울 것이다. 내란 수괴의 명령에 불복한 건 어깨의 견장에 별을 두 개, 세 개씩이나 달고 있는 ‘똥별’들이 아니라 영관급 위관급의 현장 지휘관들이었다.
#6. 몇 년만의 호외인가
한참을 걸어 공덕역 인근의 식당에 모였다. 모두들 표정이 밝다. 소주도 달다. 후사가 불안하여 스치는 바람에도 칼을 함부로 마구 휘두르는 장님 무사에게서 칼을 뺏고, 지긋지긋하게 말을 안 듣고 동쪽으로 가라 하면 서쪽으로 가는 권총 든 청개구리 5세 아이에게서 권총을 뺏고, 무장 해제하여 관저에 유폐시키니 이제야 불안이 걷히고 평상심을 회복하는 것 같다. 국회 의결로 계엄은 막았지만 ‘내란 수괴’가 여전히 대통령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못내 불안했었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선배는 어디서 구했는지 ‘윤 대통령 탄핵, 직무 정지’를 알리는 동아일보 호외를 들고 와 자랑을 한다. 몇 년 만에 보는 호외인가. 인터넷 시대라 호외라는 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종이로 된 따끈따뜬한 호외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그 선배도 그러했을 것이다.
언론에서 잔뼈가 굵은 기자들은 안다. 예전의 동아일보는 어떠했는지. 동아일보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과거의 동아일보가 현재의 동아일보를 구할 수 있을까? 그리되면 참 좋겠다.
#7. 지하철 화장실에서
뒤풀이를 파하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지하철 역사의 화장실에 들렀다.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두 노인이 소변기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든다. 나라가 왜 이 모양이냐, 정치하는 놈들 치고 제대로 된 놈이 하나 없다 하더니 한동훈은 배신자라고 욕을 해댄다. 취기가 확 오른다. 아래를 털어내며 허공에 대고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곱게 늙자. 곱게 늙어야 한다. 윤석열 같은 망나니를 대통령이라고 뽑아놓고도 반성을 모른다. 그러니 나라가 요 모양 요 꼴이지.
나라가 왜 이 모양이 됐을까. 나도 기자로 살았다만, 기자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기자가 기자답게 언론이 언론답게 제 역할을 했어도 후사가 불안하여 망상에 빠진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하여 반대파들을 일거에 척결하겠다는 황당한 짓거리를 했을까. 자질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토론을 극구 피하고 예능 프로그램에나 출연하려 하던, 어쭙잖게 트럼프 흉내를 내며 선동이나 하던, 하도 말을 듣지 않아 대학생 때까지도 아버지에게 고무호스로 맞았다던, 고집불통 청개구리가 무지와 무능과 독선과 불통의 기질을 숨기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지난 대선에서 우리 언론은 어떠했던가. 윤석열에겐 서민적 풍모라느니 역대급 리더라느니 온갖 미사여구로 영웅 서사를 헌사하면서 이재명에겐 전후사정 외면하고 맥락을 무시한 사실 왜곡으로 혐오 프레임을 씌우며 악마화하지 않았던가.
총선에서는 또 어떠했던가. 민주당의 공천에는 비명횡사 친명횡재라는 악의적인 프레임을 씌워 이재명 대표에게 비호감 이미지를 덧칠하고 또 덧칠하는 반복의 세뇌학습을 하지 않았던가. 반면, 국힘의 공천은 시스템 공천이니 조용한 공천이니 하며 미화하지 않았던가. 알고 보면, 그 시스템 공천이란 게 한동훈 대표가 윤석열-김건희 부부의 개입을 막아내려는 방편이었는데, 주류 언론의 지면에서 ‘조용한 공천’의 이면을 보여주는 기사를 본 기억이 없다.
언론의 불공정하고 악의적인 보도 공습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민주당에 압도적인 승리를 안겨 주었다. 검언 합작의 마녀사냥에 쫓기고 쫓기다 정치로 뛰어든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에게도 많은 국민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른바 정치 효능감을 만끽하고 있다. 윤석열이 난데없이 계엄령을 선포한 12월 3일 밤, 민주당 의원들과 조국혁신당 의원들은 미리 알고 대기하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국회로 달려가 담을 넘어 본회의장으로 모였고, 이재명 대표는 인터넷 방송으로 야당 의원들이 국회로 집결하고 있으니 시민들도 국회로 와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국회 밖에선 시민들이 계엄군을 저지하고 국회 안에서는 두 야당의 당직자들과 의원 보좌관들이 계엄군을 막고 본회의장에서는 두 야당의 주도로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윤석열의 내란이 제 발등 찍는 두 시간짜리로 종식된 건, 그 내란이 경고용 쇼가 아니라 야당 주도의 국회가 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표결로 막아냈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군대를 동원한 친위 쿠데타로 한국을 민주주의 후진국으로 끌어내렸지만, 국회는 법에 있는 규정과 절차에 따라 계엄 해제와 내란의 수괴가 된 대통령 탄핵으로 민주주의 복원력을 보여주었다. 민주주의를 지킨 국회에 여당인 국민의힘은 없었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정당이 ‘국민의힘’이라는 당명을 쓰는 건 국민 기망이다. 국가를 무너뜨리는 국민의 짐이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국가의 적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아직 탄핵은 끝나지 않았다. 윤석열 탄핵의 끝은 사필귀정이기를. 과거의 동아투위가 오늘의 동아일보를 구하기를. < 민들레 송요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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