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칼럼] ’자기의, 자기에 의한, 자기만을 위한’
11.3 미국 대통령선거는 ‘코로나19 창궐’은 차치한다 해도 오늘의 미국이 안고있는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최첨단을 달린다는 나라의 선거 시스템과 운영이 수준이하라는 것에서부터, 세계의 모본(模本)국이라고 자부해온 민주주의가 기실은 허울이 아니었느냐는 의구심 마저 던져준다.
‘괴물 정치인’ 트럼프가 선거를 전후해 보여주고 있는 좌충우돌의 원맨쇼를 통해 미국이 얼마나 ‘속빈 강정’의 나라인지, 미국식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하지를 전세계인이 생생히 구경하고 있는 요즘이다.
1억명이나 했다는 사전투표와 우편투표를 트럼프는 사기요 부정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자기가 이긴 곳은 괜찮고 진 곳은 개표가 잘못돼 결과를 믿을 수 없다며 패한 선거구마다 소송을 걸겠다고 나섰다. 참 기이한 승부욕이 아닐 수 없다. 공자는 그의 논어 위정(爲政)편에서 “사람의 행동을 보고, 그 이유와 그가 만족하는 바를 살피면 사람됨을 알 수 있고, 숨길 수도 없다”(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라고 했다. 재임 4년 간 쉴새 없이 쏟아낸 거짓과 혐오의 발언으로 이미 본색이 드러났지만, 선거 후 불복과 마이웨이 독불장군 행보를 보면 그를 떠난 측근들과 심지어 조카까지도 ‘사이코’라고 비판한 이유를 알 만하다.
그는 대세가 이미 기울었는데도, 절대 아니라고 억지다. 경쟁상대를 적대시하며 접촉조차 꺼리면서 정권인계 인수의 ‘인’자도 꺼내지 못하게 어깃장을 놓는다. ‘한강에 화풀이 한다‘더니, 느닷없이 국방장관을 트윗 한방에 날리는 인사권 횡포로 국가안보는 안중에 없는 신경질적 감정만 드러냈다.
트럼프는 인권과 민주의 보루라고 여겨졌던 세계 최강의 자유 민주체제에서 독재와 전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아이러니를 실증해주고 있다. 그는 또한 비정상적인 일개 정치가가 국가사회와 법치의 질서를 어떻게 뒤흔들고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뼈져리게 깨우친다.
트럼프식 정치, 이른바 ‘트럼피즘’은 ‘미국 제일’이라는 미명하에 충동적 대응으로 국제질서를 망가뜨렸고 미국마저 결과적으로 쇠락을 가속시켰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오직 ’자기의, 자기에 의한, 자기만을 위한’ 정치로 삼았다. 분열과 적대, 이기의 정치가 빚어낸 극심한 차별과 대립구조가 이번 선거에서 선명히 노출된 것만으로도 그 해악은 확연하다.
트럼프를 보며 정치지도자의 덕목과 자질을 다시금 되새김질하게 된다. ‘적재적소’는 그야말로 합리이고 진리이다. 그릇에 맞게 음식을 담아야 한다.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이 앉아야 자리도 빛나고 능력이 발휘되고 배가되는 법이다. 분에 넘치는 직책, 인성과 품성, 그리고 지성의 그룻이 안되는 졸장부들이 항상 일을 내고 부작용을 낳는다. 제 잇속만 챙기는 사업가 장사꾼이 정치를 하면 세상이 온통 시장바닥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부친의 후광만 덮어 쓴 어리석은 인물이 국정농단의 죄과로 옥살이를 하고, 기업가 출신이 나라를 사기업처럼 운영했다가 사달이 나 철창신세가 된 것을 보았다. 모두가 자질에 비해 자리가 과분했던 연유다.
그러면 그런 허장성세가 언제까지 용인될까. 에덴동산에서 따먹은 선악과는 불행하게도 선함만 알면 되던 인간에게 악을 분별할 능력을 주었다. 사람들은 잠시 환호해도 이내 그 정체를 알아차리기에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포퓰리즘이 지속되지 못하는 이유다. 곳곳에 트럼프를 아쉽게 지켜보는 ‘트럼피스트’들이 많다, 유럽의 극우 정치인들,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북한의 김정은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미 존스홉킨스대의 정치학자 야스카 마운트 교수의 말처럼 “트럼프의 패배는 그들이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섰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브라질의 한 신문도 “트럼프의 패배는 문명을 공격한 데 대한 심판”이라며 보우소나루에게 교훈을 줄 것이라고 비꼬았다.
트럼프의 요즘 몽니는 그야말로 ‘뒤끝 작렬’이다. 하지만 역류가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아무리 미국이 늙은 호랑이라 해도, 바이든에, 그리고 해리스에 열광하는 깨시민 미국인들을 보면 상식과 정상의 복원력이 없을 리 없다.
인간사를 보면 독재자들 폭군들, 곧 해악의 정치인들 생명은 길지 못했다. 말로도 대부분 불행했다. 문제는 그들의 정치가 잠깐에 그친다 해도 할퀸 상처와 폐해는 간단치 않아 오래간다는 사실이다. 나치와 일제 군국주의의 잔재, 친일과 군사독재의 적폐가 뿌리깊게 살아 꿈틀대는 오늘을 보면 그 질긴 생명력을 알 수 있다. 트럼프는 가도 ‘트럼피즘’이 하루 아침에 사라질 현상은 아니라는 어두운 전망이 우리를 답답하게 한다.
< 김종천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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