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100명도 과하지 않다

● Hot 뉴스 2025. 6. 2. 01:4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문제의 핵심은 대법원의 업무과중과 부실재판

 

대법관을 지금의 13인에서 30인으로, 아예 100인으로 늘리자는 대법관 증원법안이 한동안 화제를 모았다. 시민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들은 도대체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대법관을 30명, 100명으로 늘리자는 민주당의원들이 제정신이냐고 역정을 냈다. 그런가하면 이재명 후보에 대한 속전속결 유죄취지 판결로 대선에 개입한 대법관들을 민주당의원들이 혼내주기로 작정하고 발의한 대법원 개편법안 아니겠냐며 정치적 배경과 의도를 부각시키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대법원이 처리해야하는 사건 수에 비해 대법관 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누가 봐도 대법관 증원이 필요한데 대법원이 요리저리 피하다 한방 맞은 셈이라며 민주당의원들을 옹호해주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대법관 증원법안의 불씨는 그대로 살아 있다

 

국민의힘과 보수언론은 대법관 대폭증원 법안을 이재명 방탄을 겨냥한 민주당의 사법장악기도로 규정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대법관을 30인으로 증원하면 대선개입목적의 이재명 유죄취지판결에 가담한 대법관 10인보다 훨씬 많은 대법관들을 새로 임명해서 대법원을 장악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지난총선에서 입법부를 장악한 데 이어서 이번대선에서 행정부를 장악할 것으로 예상되는 민주당이 이참에 대법원까지 장악하겠다는데 보고만 있겠냐며 유권자들의 견제심리를 자극했다.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민주당 김용민 의원과 장경태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대법관 30명, 100명 증원법안은 선거민심의 역풍을 겁낸 민주당 지도부의 개입으로 며칠 만에 철회됐다.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선고를 위해 참석해 있다. 2025.5.1 [사진공동취재단] 연합

 

대법관 증원구상이 찻잔 속의 태풍처럼 끝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대법관 대폭증원을 둘러싼 논란이 짧지만 굵게 진행된 덕분에 이제는 대법관 대폭증원 문제가 아무 때나 공론장의 중요한 의제로 재부상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됐다. 그동안 대법관 대폭증원 안은 대법원의 강력한 반대로 활발한 공론화 자체가 가로막혔다고 할 수 있다. 거대양당과 정치인들은 선거법과 정치자금법, 뇌물죄와 명예훼손죄 등 정치인 관련 사건에서 생사여탈권을 쥔 대법원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다. 대법원의 권위에 잘못 맞섰다가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두렵기 때문에 거대양당과 정치인들은 대법원에 찍히지 않도록 조심한다. 이것이 여야 모두 그동안 대법원개혁법안을 감히 내지 못했던 실질적 이유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은 정치권의 견제에서 벗어난 특권조직이 됐다.

 

조희대 대법원의 대선개입 사법쿠데타에 화들짝 놀란 민주당의원들이 제출한 대법관 대폭증원 법안들은 그간의 정치금기를 과감하게 깨고 대법원을 직접 겨냥해서 발의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용민 법안과 장경태 법안은 철회됐지만 시민의 입장에서는 여야의 진흙탕 싸움이 정리되고 기억은 생생하게 남은 지금이야말로 대법관 대폭증원이 과연 필요하고 바람직한지 차분히 따져볼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글에서 대법원 재판의 실태와 문제점이 어떠하며 그것을 정상화하기 위해 과연 대법관 대폭증원이 필요한지, 아니면, 상고법원 설치나 상고허가제 도입 등 다른 대안이 필요한지, 하나하나 따져보고 대법관 대폭증원에 의한 대법원재판 정상화방안을 옹호할 예정이다.

 

대법원이 연간 다뤄야 할 사건 수는 시민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2023년에 대법원에 접수된 상고본안사건은 민사 12,152건, 형사 21,102건, 총33,254건이었다. 그밖에도 법원의 결정이나 명령에 대한 불복절차인 재항고사건이 2,600건을 넘었다. 2023년 한 해 동안 대법원은 대략 3만 6000천 건을 받았다. 이 모든 사건은 대법관 4인으로 구성된 소재판부(소부) 3개로 넘겨져 전원일치 의견으로 인용이나 기각이 결정된다. 만약 대법관 1인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대법원장이 재판장을 맡는 전원합의체로 넘겨지는데 연간 30건을 넘지 않는다.

 

지금의 사건분장시스템에 따라 4인 소부 3개가 처리해야 할 사건 수는 대략 연간 1만2000건, 매월 1천 건이다. 모든 사건에는 주심대법관이 지정되고 그의 책임아래 재판연구관의 검토보고서가 작성된다. 소부의 대법관 4인은 1인당 매월 250건에 대해 주심으로서 책임을 진다. 소부의 4인 대법관은 격주마다 하루씩 대면 합의과정을 온종일 진행한다. 2주마다 돌아오는 합의기일마다 대법관 각자는 주심을 맡은 125건을 처리한다. 소부 전체는 500건을 떨어내야만 사건적체가 늘어나지 않는다. 소부는 합의기일의 8시간 동안 시간당 62.5건, 1분당 1건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이게 대법원재판의 실제모습이다. 물론 사실오인주장이나 양형부당주장처럼 번지수를 잘못 찾은 형사사건들은 30초도 안 걸릴 것이다. 대법관쯤 되면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법리가 명백해서 재판연구관의 검토보고서만으로도 더 따져볼 여지가 없는 심리불속행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1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과거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선고 공판에서 유죄 취지의 파기 환송 판결을 선고하고 있다. 2025. 05. 01 [MBC 화면 캡처]

 

다퉈볼 만한 사안도 사실상 3분 주심단독재판

 

문제는 법리적으로 다퉈볼 만한 10%쯤 되는 사안들도 3,4분을 넘기지 않고 판결해야한다는 데 있다. 이런 사건들만 해도 연4천 건에 육박하는데 30건 정도 전원합의체로 넘어가는 사건들 외에는 거의 모두가 3~5분 재판대상이다. 지금과 같은 사건과다 구조에서는 주심의 지휘를 받아 재판연구관이 작성한 검토보고서가 사실상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주심이 아닌 대법관 3인은 본인이 맡은 주심사건들을 준비하는 데도 시간이 빠듯해서 다른 대법관의 주심사건에 대해서는 합의기일에 주심대법관의 입을 통해 처음 접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4인 소부재판은 겉모양일 뿐이고 실질은 주심대법관의 단독재판, 그것도 3분 재판인 셈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주심대법관의 3분 단독재판 현실은 법원조직법을 정면으로 위반한다. 대법원은 재적 2/3이상 출석으로 전원합의체에 의한 재판을 하는 게 원칙이고 예외적으로 3인 이상 대법관으로 소부를 구성해서 전원일치로 판결할 수 있다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대법원사건의 99.95%를 4인 소부가 재판하고 그나마 주심대법관의 단독재판과 다르지 않으니 법과 현실의 괴리가 이보다 클 수 없다. 이대로 놔둘 수 없는 것이다.

 

대법원의 소임은 법적으로 난해한 사안에서 최종심답게 대법관들의 집단지성을 가동시켜 신중하게 사건을 처리하며 법리의 통일적 발전을 도모하는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법원은 쏟아지는 상고사건에 치여서 현실적으로는 주심대법관의 3분 단독재판을 넘어서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 결과로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현상이 대법관출신 전관예우관행이자 사법불신풍토다. 대법원 개혁이 주심대법관에 의한 3분 단독재판의 실질을 극복하는 일에 최우선적으로 집중되어야 하는 이유다.

 

세 가지 대안: 상고법원, 상고허가제, 대법관 대폭증원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다. 첫째는 대법원 아래에 상고전담법원을 별도로 설치해서 소송당사자에게 삼세번 재판받을 기회를 보장하면서도 대법원은 사실상 제4심으로서 정책법원 역할을 수행하는 방안이다. 두 번째는 엄격한 상고허가제를 도입해서 ‘묻지 마’ 상고시대를 끝내고 대법원은 고르고 고른 연간 200건쯤의 중대사건만 심층적으로 재판하는, 이른바 영미식 정책법원으로 탈바꿈하는 방안이다. 마지막이자 셋째 방안은 독일의 예를 따라 대법관을 대폭 증원하고 전문재판부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전문성과 효율성을 강화하는 가운데 다툴 만한 사안에 대해서는 집단지성에 의한 질 높은 최종심 재판을 보장하는 방안이다.

 

대법원은 세 번째 대법관 증원방안에는 한사코 반대한다. 고작 4명을 늘려서 소부 하나를 더 만드는 정도라면 몰라도 더 이상은 결사 반대할 게 틀림없다. 대법관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언뜻 보면 상고사건 수가 지나치게 많은데다 해마다 증가추세가 뚜렷해서 대법관의 대폭증원 없이도 삼세번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면서 대법관의 상고심 재판관행을 정상화할 수 있는 묘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법개혁문제, 특히 대법원개혁문제는 법조계나 대법원의 관점보다는 잠재적 이용자인 국민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해법이 보인다. 충실한 재판을 삼세번 받을 시민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대법원개혁안을 찾아내야한다는 뜻이다.

 

상고법원 신설구상은 추진동력을 잃었다

 

상고법원 설치방안은 양승태 대법원장시절에 추진했던 해법이었다. 대법관을 증원하거나 상고허가제를 도입하는 대신 대법원 아래에 상고사건만 전문으로 처리하는 상고법원을 신설하는 방안이었다. 박근혜 정권이 민감하게 여기는 몇몇 중대사건의 판결지침을 청와대와 사전에 협의한 사법농단사태는 상고법원 설치구상을 청와대에 로비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참담한 사태였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그만큼 절박했다. 그의 구상은 3만 건도 넘는 일반적인 상고사건은 고법부장 3인의 대등재판부 여러 개로 구성될 상고법원에 몽땅 떼어주고 대법원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과 판례변경을 요구하는 소수사안만 전원합의체에서 다루는 이른바 영미식 정책법원으로 개편하자는 것이었다.

 

상고법원 신설안은 대법원 아래에 상고법원을 둬서 상고사건의 99% 이상을 최종심으로 처리하게 하되 국가적, 법리적 중대사안은 지금처럼 14인 체제로 유지되는 대법원이 다루게 함으로써 대법관의 권위와 희소성을 최대로 유지하자는 공식적인 4심제 방안이었다. 나름대로 삼세번 재판기회를 충실히 보장하는데다 대법관 다음서열 자리들이 상당수 만들어지고 대법관의 권위와 위상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사법부 내부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이 방안은 사법농단사태와 결부되었기 때문에 양승태 대법원의 몰락과 함께 추진동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평가된다.

 

상고허가제는 국민들이 지지하지 않는다

 

정책법원을 표방하는 영미법계 국가들의 소인수 대법원은 예외 없이 엄격한 상고허가제를 실시한다. 수많은 사건 중에서 국가적, 공적으로 영향력과 파급효과가 큰 사안, 하급심 해석이 들쭉날쭉해서 법리의 통일성을 기해야할 필요가 있는 사안, 기존판례를 변경할 필요성이 부각되는 사안을 대략 50~200건만 골라낸다.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아무리 커도 참을 수 없는 부당함이나 부정의를 결과하지 않는 이상 상고허가이유가 되지 못한다. 상고허가제를 운영할 경우 상고사건의 99% 이상은 상고허가의 벽을 넘지 못하고 항소심 판결로 끝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상고허가제는 삼세번 재판받을 권리를 사실상 한 번의 불복기회를 포함해서 두 번만 재판받을 권리로 축소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2심제를 하자는 대안이다. 우리 국민들이 이런 대안을 지지할지 의문이다.

 

대법원의 사법행정자문회의 산하 ‘상고제도개선특별위원회’가 2021년 5월에 발표한, 상고제도에 관한 국민인식조사결과는 위의 의문에 답하는 데 도움을 준다. 비법률전문가인 일반시민 총1,135명(소송유경험자 926명, 소송무경험자 209명)과 법률전문가 총1,518명(법관 886명, 검사 83명, 변호사 408명, 법학교수 141명)이 응답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최고법원인 대법원에서 더 중점을 두어야 할 기능으로 일반시민의 과반수(50.5%)는 ‘개별・구체적 사건에서의 권리구제기능’을 꼽았다. 정책법원 기능이 중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42.5%에 머물렀다. 이와 같은 여론조사결과에 비춰볼 때 상고허가제를 실시해서 구체적 사건에서 권리구제기능을 희생하고 대법원을 정책법원으로 전환하자는 상고허가제 방안은 국민의 지지를 받거나 사회적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여론조사결과는 대법관 1인이 주심으로 처리해야 하는 연간 사건수가 4천 건에 육박한다는 사실을 일반시민들의 70.5%가 ‘모른다’고 응답했다는 점이다. 만약 이런 사실을 일반시민들이 알고 나면 어떻게 조사결과가 바뀔지 생각해보자. 특히 우리나라의 인구대비 법관 수가 44개 유럽 국가의 중위 값에 비해 1/3 수준에 지나지 않을 만큼 적다는 사실을 일반시민이 충분히 알고 나면 어떻게 바뀔까? 우리법관들이 아무리 훌륭해도 유럽국가의 판사 3명 몫을 한다는 게 재판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고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 들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대법관들이 아무리 훌륭해도 대법관 1인당 매년 3천 건 넘게, 매월 250건 넘게, 매일 12건 넘게 판결한다는 게 재판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고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 들 것이다.

 

요컨대 한국법관의 업무과중 사실을 아는 시민들이 많아질수록 지금의 1심, 2심, 3심 재판 모두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 강해질 것이다. 자연스레 하급심법관 수와 대법관 수를 대폭 늘려서 모든 심급에서 충실한 심리와 재판을 보장하라는 요구가 봇물 터질 게 틀림없다.

 

재판연구관 의존도가 높은 것도 문제다

 

우리 대법원은 소인수 대법관으로 운영되면서도 상고허가제를 실시하지 않고 상고사건만 연간 3만 건을 넘게 처리하는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대법원이다. 우리국민들은 일단 소송을 제기하면 소송을 삼세번은 해봐야 한다며 대법원판결까지 받아보자는 생각이 강하다. 대법원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엄격한 상고허가제를 운영해서 소송사건의 99%를 사실상 2심제로 끝내고 대법원을 정책법원으로 재편하자는 얘기를 꺼내지 못한다. 앞으로도 상고허가제 대안은 하급심재판의 충실화에 대한 확실한 보장책이 없는 이상 시민들이 거들떠보지 않을 게 틀림없다.

 

상고허가제를 하지 않는 대신 우리나라는 대법원에 재판연구관을 130명이나 배치해서 대법관들의 재판업무를 보좌한다. 재판에 투입되는 대법관 12인에게는 1인당 부장판사를 포함한 2인의 전속 재판연구관이 지원되고 나머지는 공동재판연구관으로 활용한다. 전속연구관이건 공동연구관이건 검토보고서를 쓰는 재판연구관은 판결문초안까지 작성하는 게 업무의 일부다. 대법원이 상고허가제도 없이 무려 3만 건도 넘는 상고사건을 받아서 모든 사건을 3개의 4인 소부에 회부하고 모든 사건이 4인 소부의 재판을 받는 것 같은 외관을 만들어내는 비결은 출중한 경력판사 100명과 유능한 헌법연구자 30명으로 구성된 130명의 헌신적인 재판연구관 덕분이다. 대법관의 재판연구관 의존도를 낮추고 대법관의 직접책무성을 높이는 것이 대법원 개혁목표의 하나다.

 

대법원 전경. 2025. 05. 09.

 

대법관을 10여 명 늘려서는 '3분 주심재판' 관행을 못 바꾼다

 

3만 건이 넘는 상고사건 외에도 재항고사건이나 명령규칙처분 심사사건 등 대법원이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상고 외 사건들이 연간 3천 건에 육박하고 상대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많다. 대법원이 처리해야 할 법정사건 수가 워낙 많기 때문에 대법관을 고작 5명이나 10여 명 늘리는 방안으로는 모든 사건의 99.9%도 넘게 처리하는 4인 소부재판의 실질적인 주심단독재판 변질사태를 피할 길이 없다. 우리나라 대법원도 법리적으로 다퉈볼 만한 대략 10%쯤 되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사법선진국들처럼 5인 대법관으로 구성된 소부에 맡기되 5인 대법관 전원이 최소한 상고이유서와 검토보고서를 읽어본 후 판결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재판효율을 위해 5인 소부의 합의방식은 대륙법계의 다인수 대법원들이 그렇듯이 겉치레 대면합의 대신 서면회람에 의한 서면심리를 허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심리불속행 결정 등 간이기각절차도 지금처럼 4인 소부의 형식 아래 주심과 재판연구관에 사실상 일임할 게 아니라 간이하게 3인 소부에 맡기되 주심이 아닌 대법관 2인도 검토보고서를 서면 회람으로 읽어보고 서면으로 동의여부를 판단하게 함으로써 대법관의 책무성을 높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법원의 성격을 이렇듯 충실한 권리구제 최종심으로 정하면 필요한 대법관 수를 어느 정도 계산할 수 있다. 최소한 지금보다 50명 넘게 늘려야만 5인 전문재판부를 10개 이상 더 만들어서 사건처리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제고할 수 있다. 요컨대, 대법관을 늘리려면 왕창 늘려야 한다.

 

독일의 성공적인 다인수 대법원 운영사례

 

대법원이 정책법원 역할에 치중할지, 권리구제 최종심 역할에 치중할지는 영미법계와 대륙법계에 따라 해법이 다르다.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영미법계 대법원은 엄격한 상고허가제를 통해서 정책법원을 지향하기 때문에 대법관을 20인 이내로 두고 연간 200건 이내의 중대한 사안만 다룬다. 반면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대륙법계 대법원은 하급심의 법리오류 제거와 개인권리 구제를 지향하기 때문에 최고법원에 두는 대법관 수가 믿기 어려울 만큼 많다. 예컨대, 독일에는 연방에만 320명의 최고법관이 민형사사건을 다루는 대법원과 전문분야를 다루는 4개의 최고법원에 흩어져있다. 이탈리아는 350명, 프랑스는 120명, 스페인은 80명의 대법관을 둔다. 한마디로 영미법계는 소인수 대법원, 대륙법계는 다인수 대법원을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영미법계 국가들은 헌법재판소를 따로 두지 않기 때문에 대법원이 사실상 헌법재판소를 겸하며 정책법원의 역할을 독점적으로 수행한다. 예를 들어 영국대법원의 관할사항 1호는 ‘헌법적으로 중요한 사안’이다. 헌법재판소라는 뜻이다. 대조적으로 대륙법계 국가들은 대법원과 별도로 헌법재판소를 두는 경우가 많아서 대법원을 굳이 정책법원으로 운용할 필요를 크게 느끼지 않는다. 적지 않은 유럽나라들의 대법원이 50명 넘는 대법관들을 두고 다수의 전문화된 재판부들을 운영하며 질 높은 권리구제 최종심으로 기능하는 이유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대표적인 보기다. 놀랍게도 오스트리아 대법원의 평균사건처리기간은 3.7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사법신뢰도 국제비교조사에서 하위권을 맴도는 우리 사법부와 달리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사법부는 언제나 상위권에 포진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법시스템의 성공사례는 일각의 강력한 반발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세부설계를 하기 나름으로는 대법관 대폭증원 안이 사법신뢰성과 사법전문성을 동시에 강화할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요컨대, 대법관 대폭증원 법안은 일부 민주당 의원들이 대법원을 겁주고 혼낼 목적으로 즉흥적으로 제출한 터무니없는 법안이나 야비한 보복법안으로 볼 것만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정확한 현실진단 아래 사법특권의 급소를 찌른 본격적인 사법개혁 법안이자 오랫동안 쉬쉬해온 근본문제에 대한 정면대결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절차적으로는 반드시 충분한 공론화과정을 거쳐야 맞고 내용적으로는 종합적인 사법개혁패키지의 일부로 추진되어야 맞다.

 

대법원개혁은 대법원이나 정치권이 앞장서면 안 된다

 

14인 대법관체제를 유지하면서 영미식 정책법원으로 가기 위해 권리구제기능을 사실상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대법관을 100명으로 증원해서라도 최종권리구제 기능을 실질화할 것인지는 국회와 대법원에만 맡기기에는 국민생활에 너무나 중대한 사안이다. 대법원 개혁입법에 관한 한 대법원은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라서 이해충돌문제가 있기 때문에 발언권이 너무 강해서는 곤란하다. 거대양당과 국회의원의 목소리가 두드러지는 정치권 역시 이해당사자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걸린 소송이 적지 않아서 생사여탈권을 쥔 대법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회도 사법개혁 입법권을 독점적, 배타적으로 행사해서는 안 된다.

 

이럴 때 바람직한 논의주체로 등장하는 것이 대통령직속 사법개혁위원회다. 판검사, 변호사, 법학교수, 사법감시단체, 사법피해자단체 등 다양한 전문가들로 구성해서 최소한 1년 이상 운영하며 공론화과정을 이끌고 종합적인 권고안을 내게 하는 익숙한 방식이다. 나는 전문가 의견만으로는 부족하고 추첨시민의회를 한 번 더 거쳐서 장시간 학습과 숙의 끝에 나온 시민눈높이 의견을 꼭 들어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서, 대통령이나 국회는 사법개혁위원회의 종합권고안을 추첨시민의회의 숙의과정에 붙여 시민눈높이 권고의견까지 받아본 후 필요한 사법개혁 입법을 추진해야 한다. 이렇게 다단계 민의수렴 입법절차를 밟아야만 그나마 여야정치권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상대적으로 수월할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대통령직속 사법개혁위를 띄우는 것은 물론이고 시민의회, 공론조사, 정책배심 등 다양한 숙의적 참여방식으로 대법원개혁을 포함한 본격적인 사법개혁방안에 대해 진지한 공론장이 활짝 열리기를 기대한다.  <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

“꼭 반드시 대통령이 되어서 우리 백성과 우리나라를 좋게 잘 살게 해주세요.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해주세요.”

 
 
전북 전주의 90살 이정례 어르신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에게 보낸 편지. 이재명 후보 페이스북

 

“사랑하고 종경(존경)하고 좋아하는 이재명 대통령 후보님. 90살 먹은 내가 이럭게(이렇게) 편지를 쓰고 간절하게 빕니다.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해주세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31일 페이스북에 공개한 한 통의 편지가 화제다. ‘전북 전주에 사는 90살 이정례’라고 밝힌 90대 어르신이 대선을 앞두고 간절한 마음을 한 자 한 자 눌러 담은 손편지다.

 

“사랑하고 종경하고 좋아하는 이재명 대통령 후보님”이라는 말로 연 편지에서 이정례씨는 “그동안 어린 시절부터 얼마(얼마나) 노력하고 힘들게 일해서 이 자리까지 오셨습니까”라고 인사를 건넸다. 이정례씨가 이 후보에게 바라는 바는 간단하지만 간절했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부디부디 꼭 반드시 대통령이 되어서 우리 백성과 우리나라를 좋게 잘 살게 해주세요.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해주세요. 90살 먹은 내가 이럭게(이렇게) 편지를 쓰고 간절하게 빕니다.”

 

이정례씨는 짧은 편지를 이 후보의 건승을 빌며 마무리했다. “한늘(하늘)에 도우심으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모드 이루어지기를 기원드립니다. 언제나 건강하세요. 늘 응원합니다. 2025년 5월23일 전주에서 이정례가 올림니다(올립니다).”

 

이 후보는 편지를 공개하며 “90세 이정례 어르신께서 보내주신 이 편지에는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이 더는 없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어 “서툰 맞춤법과 떨리는 글씨에서 어르신께서 걸어오신 인생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며 “얼마나 고심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써내려가셨을지…. 그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져 한동안 마음이 먹먹했다”고 밝혔다.

 

이 후보는 “대한민국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어르신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어르신의 당부를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엄지원 기자 >

광장에서 들었던 깃발과 응원봉 사진을 활용한 투표 인증 용지를 직접 제작해 투표 독려

 
 
                     엑스(X·옛 트위터) 활동명 내향인이 제작한 투표 인증 이미지

 

“(내향인 깃발로 유명해져서) 저도 스피커가 생겼잖아요. 이 영향력을 이용해 20·30 청년층에 유행하는 방식으로 투표를 독려하고 싶었어요. 투표를 권하고, 투표하는 것 자체가 어렵지 않은 문화가 됐으면 좋겠어요”

 

지난 탄핵 국면 광화문 집회에 ‘(내향인)입니다’라고 적힌 깃발을 들고나와 소셜미디어상에서 화제가 됐던 ㄱ씨는 6·3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향인용 투표 인증 이미지’를 만들었다. 탄핵 집회에 깃발이 재미를 더했던 것처럼 투표에도 소소한 재미 요소를 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ㄱ씨는 30일 한겨레에 “집회에서 얻은 영향력을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고 싶어 투표 인증 용지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12·3 내란사태 이후 매주 광장에 나와 “내란 종식”을 외쳤던 시민들이 광장에서 들었던 깃발과 응원봉 사진을 활용한 투표 인증 용지를 직접 제작해 투표 독려에 나서고 있다. 응원봉과 깃발로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을 뽐내며 “아무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외치던 광장의 분위기가 ‘민주주의의 축제’인 대통령 선거로까지 이어지는 모양새다.

엑스(X·옛 트위터) 활동명 아대리(@adeli_gotohome)가 제작한 투표 인증 용지

 

사전투표 마지막 날인 이날 엑스(X·옛 트위터)에는 점 복(卜)자 도장을 위한 자리가 마련된 투표 인증 용지 공유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투표 인증 용지는 ‘전국 응원봉 연대’, ‘민주노총이 길을 엽니다’, ‘불꽃남자 정대만’ 등 실제 광장에서 자주 보였던 깃발의 문구를 적어 넣어나 응원봉 이미지를 활용했다. 야구·아이돌·만화 캐릭터 등 다양한 이미지를 활용한 투표 인증 용지도 공유되는 중이다. 투표 인증 용지는 지난 2020년 제21대 총선 당시 코로나19 감염 우려로 손등에 인증 도장을 찍지 못하게 되자 대안으로 등장한 뒤 어엿한 투표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투표 문화를 조금이라도 즐겁게 만들어 투표율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증 용지 제작에 나섰다고 한다. 엑스에서 ‘아대리’라는 활동명을 쓰며 펭귄 캐릭터를 활용한 투표 인증 용지를 제작한 ㄴ씨는 “내 그림을 좋아하는 분들이 한 명이라도 더 즐겁게 투표장에 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투표 인증 용지를 제작했다”고 말했다.

 

이런 투표 인증 용지에는 광장의 바람들이 실제 변화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도 담겨있다. ㄱ씨는 “광장에서만 평등을 외치고 일상에서 외치지 않는다면 진짜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며 “‘(광장에서의) 경험을 어떻게 정치화해서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 적극적으로 투표 독려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광장에 등장할 때마다 관심을 모았던 단두대를 활용한 투표 인증 용지를 엑스에 올린 최종인(34)씨도 “‘노조법 개정과 차별금지법 제정이 나중으로 미뤄지지 않아야 한다’는 등 광장에서 많이 나왔던 이야기가 이번 선거를 통해 꼭 지켜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 정봉비 기자  김수연 기자 > 

엑스(X·옛 트위터) 활동명 후레가 제작한 단두대 투표 인증 용지에 기표해 올린 투표 인증글.

 

사전투표율 ‘역대 최고’ 행진…“내란 때문에 꼭 투표” “토론 처참”

 

 
21대 대통령 선거 사전투표가 시작된 29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주민센터 앞에서 유권자들이 투표 인증 사진을 찍고 있다. 이나영 기자

 

21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가 시작된 29일 아침부터 전국 곳곳 사전투표소는 더 나은 대한민국을 소망하는 유권자로 북적였다. 시민들은 내란 세력 응징부터 경제 부양, 소수자 배려까지 다양한 소망을 기표봉에 담아 보냈다. 이날 오후 1시 기준 투표율은 10.51%로 역대 사전투표가 적용된 전국단위 선거의 동시간대 투표율 중 최고치다.

 

이날 투표소에서 한겨레와 만난 유권자들 가운데는 ‘내란 종식’을 새 대통령의 제1과제로 꼽는 이들이 많았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 주민센터에서 만난 직장인 전혜림(33)씨는 “내란을 종식시키겠다는 마음”으로 이른 아침부터 사전투표소를 찾았다.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이 되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들어요. 새 대통령이 내란 공범들을 확실히 처벌하고 대한민국을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12·3 내란사태 이후 ‘투표의 의미’를 새삼 느꼈다는 목소리도 컸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주민센터에서 만난 직장인 양아무개(38)씨는 “계엄 때문에 꼭 투표해야겠다는 생각에 출근 전에 일찍 나왔다”고 했다. 양씨는 “지난 대선에서 부동산 세금 때문에 윤석열을 뽑았는데 계엄을 보고 나니 세금보다는 대한민국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며 투표에 임하는 소감을 밝혔다.

 

생애 첫 대통령 선거 투표에 나선 청년들은 비상계엄으로 인한 조기 대선에 대해 착잡한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국회의사당 주변에 사는 대학생 권아무개(22)씨는 이날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사전투표소에 투표를 하러 오며 비상계엄 당시 생생하게 들었던 헬기 소리를 떠올렸다고 했다. 권씨는 “이렇게 투표를 하게 된 이유가 있으니 첫 투표를 하는 마음이 좋지는 않다. 출중한 인물이 두드러지지도 않는다”면서도 “그래도 지금 이 혐오의 시대를 막을 방법은 투표뿐이라고 생각해 투표하러 왔다”고 했다.

 

선거를 앞두고 ‘네거티브’로 점철됐던 대통령 후보 토론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직장인 박아무개(30)씨는 “토론이 처참해서 보다가 껐다”며 “대선 토론에서는 헐뜯기보단 건설적인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그게 너무 아쉬워서 지지 후보를 정하는데 끝까지 고민이 됐다”고 말했다.

21대 대통령 선거 사전투표가 시작된 29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주민센터 사전투표소에서 시민들이 나오고 있다. 최현수 기자

 

극심한 혼란 끝에 이뤄지는 선거인 만큼 국민 분열을 해소해줄 대통령을 바라는 유권자들의 마음은 간절했다. 신촌동 주민센터에서 투표한 직장인 박아무개(36)씨는 “이번에는 특별히 안정적인 국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편 가르기, 갈라치기 같은 거 하지 말고 어렵겠지만 통합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대학생 손다윤(25)씨는 “여성과 약자, 소수자를 잘 대변해줄 대통령을 바란다”고 전했다. 서울 서초구 반포1동 투표소에서 투표한 고영부(25)씨도 “어떤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지 갈라치기 하지 않고 사회적 갈등을 통합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유권자들이 바라는 새로운 대한민국의 모습은 저마다 다양했다. 서울 서초구에 사는 한연나(65)씨는 “젊은 사람들이 결혼할 수 있게 집값을 낮춰줄 대통령”을, 14개월 아기와 함께 투표소를 찾은 서울 용산구 주민 고아무개(38)씨는 “우리 아기가 자라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줄 대통령”을 바란다고 했다. 학생 최아무개(21)씨는 “과학자와 연구자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줄 대통령”을 바랐다.

 

다양한 소망과 지향 속에서도, 어떤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 “잘했으면” 하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경기 고양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주홍진(60)씨는 대통령실 주변인 한강로주민센터 사전투표소장에서 투표를 마친 뒤 “누가 이기든 간에 국민을 위해서 국가가 잘 되는 방향으로 했으면 좋겠다”며 “경제가 좀 어려운데 소상공인들 살기 좋게 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 이지혜  이나영  최현수  장종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