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성시화 총력 전도대회 열기

● 교회소식 2018. 8. 13. 08:33 Posted by SisaHan

뉴욕 맨하탄에서 총력전도대회 집회를 열고있는 성도들.

토론토 전도대학 등 각지 성도들 맨하탄 집결

국제도시선교회(ICM, 대표 김호성 목사)가 6년째 벌이고 있는 “미국 재부흥 운동- 뉴욕, 미동부 성시화 운동” 총력 전도대회가 지난 7월23일부터 30일까지 뉴욕의 중심부 맨하탄에서 진행됐다. 대회에는 캐나다를 비롯해 부산 수영로교회 40여명의 학생 등 한국에서, 그리고 미국 각지에서 약 650명이 참여했다.


‘미국 재부흥 운동’은 한인 디아스포라 다음 세대들을 중심으로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미국교회에 진 복음의 빚을 갚으며 미국에 영적 재부흥이 일어나도록 성시화에 불을 붙여 세계 각 나라에 부흥의 불길이 번져나가게 하자는 운동이다.
7월28일 오전 맨하탄 29가의 렘런트교회에서 열린 뉴욕 성시화 총력전도 대회 실내집회에는 장석진·김재열·이성우 목사 등이 교계 인사들이 참석해 격려와 환영을 했다. 이어 강사로 참여한 15여명의 목회자들이 간단한 기도 메세지를 전하고 통성기도를 인도했다. 특히 캐나다에서 토론토 전도대학 성도들과 함께 참석한 박웅희 목사(온주 한인목사회장: 새빛교회 담임)는 “전도하는 일은 성공과 실패가 없다. 전도하지 않으면 실패한 것”이라며 “평생 주님오실 때 까지 복음을 힘차게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자”고 당부했다.


집회에서는 김호성 목사의 인도아래 전도훈련이 진행됐으며 참여한 모든 목사들이 공동으로 축도를 한 후, 3명씩 짝을 지어 걸어서 35분여 걸리는 타임스퀘어 광장으로 이동하며 거리 전도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브로드웨이와 42가가 만나는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태권도시범과 찬양을 하며 모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를 했다.


[1500자 칼럼] 오늘의 기적

● 칼럼 2018. 8. 13. 08:29 Posted by SisaHan

오랜만에 친지들을 만났다. 그날의 화제는 독감이 얼마나 지독한지 거의 두 달을 앓아도 완쾌되지 않는다고 했다. 독감예방 접종을 했는데도 심히 앓았다며, 젊은 시절엔 감기가 무슨 병이냐고 말했었는데 더 이상 그리 말할 수가 없단다. 그때 핼쑥한 얼굴의 한 분이 나서서 감기는 거의 회복이 되었는데 후유증으로 미각에 문제가 생겨 음식 맛을 잃었다는 것이다. 어느 음식이든 맛을 분별하지 못해 식욕이 감퇴하여 체중이 3kg이나 감소했다고 한다. 불현듯 오래 전 겪었던 악몽 같았던 시간이 떠올랐다.


어느 해 녹음이 짙은 여름 한 자락에서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린 적이 있다. 환절기도 아닌데 이 고약한 감기는 약을 먹어도 전혀 듣지를 않고 한 달 이상 끌었다. 처음에는 목이 아프고 음성이 변하더니 콧물감기로 발전을 하여 끝내 귀까지 쑤시고 욱신거렸다. 무엇보다도 괴로운 점은 냄새와 맛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감기는 거의 나았는데도 미각과 후각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혹 감기 후유증이 아닌 다른 병세인지 몰라 여러 검사를 거쳤으나 이상이 있는 기관은 없었다. 가정의는 잃은 기능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무조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2-3달이 지나도 별다른 진도가 보이지 않게 되자 걱정이 쌓여 갔다. 주부가 음식의 맛을 모르고 냄새도 맡을 수 없다니 보통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물의 영장답게 오로지 습관에 의존하여 요리를 하니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지만 일관성 없는 그 음식 맛을 짐작해 보시라.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태어날 때부터 아니면 신체의 한 기관에 이상이 생겨 미각과 후각을 잃은 경우는 반드시 정밀검사를 통해 치료방법을 찾아야 한단다. 단지 감기로 잃었을 경우는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치유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감각기관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라 뇌에서 잠시 맛과 냄새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라, 새로 맛과 냄새를 습득하는 훈련을 거치면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나는 작은 그릇에 식초, 설탕, 소금 등을 담아 하나씩 맛을 보며 신맛, 단맛, 쓴맛, 짠맛을 다시 인지하기 시작하였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네 가지의 기본적인 미각은 돌아왔으나 조리한 음식 맛은 도통 구별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소량의 마늘이 들어간 음식에서는 온통 마늘의 고약한 맛 하나로, 어떤 기름이든 기름을 넣은 음식은 모두 불쾌한 기름 맛으로만 느껴졌으니 말이다.


후각은 문제가 더 심각했다. 강한 향수 외에는 모두 휘발유 비슷한 고약한 냄새로만 인지할 수 있었으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거의 6개월이 지나 얼마간의 불편함도 익숙해질 무렵이 되니 드디어 미각과 후각이 자연적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예전만큼 완벽하진 못하다. 내가 즐기던 수박, 오이, 참외.. 이런 음식들이 고유의 맛 대신 똑같은 맛으로만 느껴져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삶을 이어가는 데는 지장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아직도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고, 다양한 음식을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설마 태어나면서부터 누려온 자신의 미각과 후각을 잃어버릴 수 있으리라 상상해본 적이 있겠는가. 대다수의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충격과 병으로 인해 얼마든지 내 신체기능의 일부를 잃을 수 있음을 남의 일로만 여기며 살아갈 뿐이다.

우리의 삶이란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는 과정’이라 말한다. 일단 태어난 후부터는 열심히 살아가지만 결국은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이니 말이다. 내 원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미각과 후각처럼 신체의 어느 부위이든 수술을 하거나 부상당한 부위는 더 이상 원상태로 복구되지도 않을 뿐더러 기능도 저하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가 맞이하는 건강한 오늘이, 지금 이 시간이, 기적의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무료한 일상조차도 더 바랄 것 없는 소중한 시간이라 여기니, 갑자기 숙연해진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한마당] 매국의 잔재들, 미완의 광복

● 칼럼 2018. 8. 13. 08:27 Posted by SisaHan

구약성경 열왕기상(3:16~28)에 기록된 두 여인의 아기 다툼에 대한 재판은 솔로몬 왕의 탁월한 슬기를 보여주는 일화로 널리 회자된다. 아울러 억울한 처지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붙잡는 희망의 등대요 정의의 보루인 법의 심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가르쳐주는 소중한 에피소드다.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여인들 사이에서 재판관이 “네 아이라고 해줄테니 내 요구를 들어라”라고 말한다면 그 재판은 어떻게 될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가 감당할 절망감은 상상하고도 남는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영화를 누린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거래와 농단 사례들이 양파껍질처럼 드러나면서 그런 비슷한 절망과 분노들이 치밀고 있다. 설마하니 국가사회의 정의를 지키는 최후의 성채인 대법원이 그랬을 리가, 대한민국 최고의 재판관인 대법관들이 그렇게 비루했을 수가…하는 배신감에 탄식이 절로 난다.

어릴 적 학교 뒷골목을 지나다 험상궂은 선배들에게 용돈 빼앗기고 얻어맞을 뻔 했던 위기의 순간에 ‘구세주’를 만난 아이들이 있다. 마침 장터를 다녀가시던 할아버지의 호통 한마디에 기가 살아나서는 ‘너희들 까불지 마’란 듯 의기양양 해졌던 학동들의 추억이다.
들판을 뒹굴며 한적을 즐기던 아기 곰이 갑자기 덩치 큰 퓨마의 공격으로 위기를 맞는 동영상도 겹쳐진다. 굶주린 퓨마가 입맛을 다시며 전속력으로 쫓아오는데 아기 곰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지만 이내 외나무다리에서 부러진 나뭇조각과 함께 급류에 떨어지고 만다. 물살에 휩씁려 가는 아기 곰을 퓨마는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마침내 바위에 걸린 아기 곰이 코앞에 아가리를 벌린 퓨마에 먹히지 않으려 저항하며 절규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돌연 퓨마가 슬금슬금 꽁무니를 뺀다. 저 뒤편에 포효하는 어미 회색곰이 나타난 것이다. 어린 곰의 울부짖음은 달아나는 퓨마를 향해 기세등등한 일갈로 바뀌고, 다가온 어미곰은 새끼를 끌어안고는 마구 핥아주며 이제 안심하라고 다독인다.


연출된 작품인지, 생생한 동물의 세계 다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슬아슬한 생과 사의 스릴과 배후에 등장한 막강 구원투수, 진한 모성애 등 감동을 주는 단막 영상물의 하나다.
국민들에게 법원, 특히 대법원은 그런 존재가 아닌가. 아니 그래야 하지 않을까. 힘들고 어려운 백성들이 마지막으로 기대고 호소할 곳, 삶의 풍랑에서 피난처요 구원투수이기를 바라는 심정은 당해 본 사람들은 다 같을 것이다.
양승태 대법원이 거래 대상으로 삼았다는 재판 사안마다 억울하게 고통을 겪은 서민들의 애끓는 간절함과 피눈물이 배어있는 것을, 최고의 엘리트 율사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국민을 개·돼지처럼 무시하고’ 자기들 허욕의 제물로 삼으려 했다니 그들은 진정 영혼없는 법관들이었고, 양심도 자비도 내팽개친 금수(禽獸)나 다름없는 법비(法匪)들이었음에 틀림없다.

일제에 강제징용 당해 가시밭길 인생을 살았던 피해자 9명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배상소송까지도 농단의 희생물이 됐다는 소식에는 할 말을 잃는다. 민족의 아픈 상처를 외면하고 이권을 다루듯 정권 비위를 맞추느라 일본을 위한 논리를 개발해 마치 일본 법원이나 늘어놓을 궤변을 내세웠다. 징용피해자들 가슴에 못을 박고 이미 노령의 원고 대부분이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는, 분노와 구역질이 날 정도다. 민족혼은 커녕 매국노들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듯 싶다.
대한제국의 매국역적들은 백성들의 ‘기댈 언덕’을 빠앗아 갔다. 일신의 영달에 눈먼 고관대작들이 일제에 영합하며 자국민을 혹독한 식민통치 수탈의 암흑기로 몰아 넣었다.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탄광과 군수공장으로 노예처럼 끌려갔다. 꽃다운 처녀들은 일제군대의 성노리개로 소중한 인생들이 망가져갔다.


그 때 한줄기 실낱같은 희망을 준 게 상해 임시정부였고, 야멸차게 이어진 독립투쟁이었지만, 해방과 새 시대가 왔음에도 독립투사들은 일제에 부역했던 자들에게 다시 탄압을 받고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친일 매국의 후예들은 간교하게도 여전히 백성 위에 군림하며, 독재권력과 족벌의 중추로 명맥을 이었다. 그 적폐들이 탄핵에 내몰려도, 사법에 은거한 뿌리깊은 인맥은 여전히 애꿎은 국민위에서 매국적 농단으로 서민의 피눈물을 자아낸 것이다.
법원은 정의로운 재판으로 국민의 권익을 지켜야 한다. 더구나 최고법원은 국가정의와 국리민복의 마지막 수호자이며 국민이 최종적으로 기댈 언덕이고 나라의 든든한 자존심이기도 하다.
법과 공의와 인권의 보루이며 민주주의 최후의 파수꾼여야 할 법원의 타락은 청산되지 못한 친일 매국의 못된 잔재들이 여전히 살아서 꿈틀대고 있다는 또 하나의 반증이며, 우리에게 진정한 광복은 아직 멀었다는 사실을 되새겨 주는 것이기도 하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