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포르투갈·프랑스·잉글랜드·체코·그리스·스페인·이탈리아
8강 22일부터 우승컵 ‘용쟁호투’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2012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2012) D조 최종전에서 8강 대열에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잉글랜드는 20일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돈바스아레나에서 열린 대회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우크라이나를 1-0으로 꺾고 조1위(2승1무)로 8강에 올라 이탈리아와 준결승 진출을 다투게 됐다. 
프랑스는 같은 시간 우크라이나 키예프 올림픽경기장에서 열린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0-2로 일격을 당했으나 1승1무1패의 전적으로 조 2위를 차지해 마지막 8강행 티켓을 차지했다.
이로써 현지시간 22일부터 격돌하는 대회 8강전은 잉글랜드-이탈리아, 스페인-프랑스, 체코-포르투갈, 독일-그리스의 대결로 압축 됐다. 공동 개최국인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는 모두 8강행이 좌절됐다.
 
8강 티켓 마지막 2장이 걸린 D조 최종전은 1~3위팀인 프랑스, 잉글랜드, 우크라이나의 승점 차가 1점에 불과해 예측 불허의 격전 양상으로 전개됐다. 어느 팀이든 패배는 곧 탈락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살얼음판 위의 공방이 이어졌다.
무승부만으로도 준준결승 진출이 가능했던 잉글랜드는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우크라이나를 맞아 전반전 내내 수세에 몰렸으나 후반 3분만에 선제 결승골을 터뜨리며 경기 흐름을 단숨에 뒤집었다.
지역예선전 퇴장으로 2경기 출전금지 끝에 처음 출전한 스트라이커 웨인 루니가 행운의 선제골을 안겼다. 
미드필더 스티븐 제라드가 오른쪽에서 올린 크로스가 수비와 골키퍼 손을 스치며 흐르는 것을 문전으로 달려들던 루니가 머리로 가볍게 밀어 넣어 골망을 흔들었다.
우크라이나는 홈 관중의 응원을 등에 업고 경기를 지배했으나 전반전 승기를 살리지 못한데다 골운이 따르지 않아 8강 문턱에서 고배를 들었다.
 
우크라이나는 후반 들어 무릎부상으로 선발에서 제외됐던 노장 스트라이커 셉첸코를 투입하며 승부수를 던졌지만, 수비 인원을 늘리면서 점수 지키기에 돌입한 잉글랜드의 수비벽을 넘지 못했다.
프랑스는 2패로 예선탈락이 확정된 스웨덴을 맞아 낙승이 예상됐으나 스웨덴의 투지에 밀려 무기력한 경기를 펼친 끝에 대회 첫 패배를 맛봤다. 스웨덴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후반 9분에 선제골을 뽑은 데 이어 후반 추가시간에 세바스티안 라르손이 쐐기골을 터뜨려 2-0 완승으로 8강행 좌절의 설움을 달랬다.


[1500자 칼럼] 다음 세대 다음 세대

● 칼럼 2012. 6. 24. 19:00 Posted by SisaHan
지난 주간 한국에 부흥회를 다녀왔다. 조크로 ‘등산을 갔다 왔다’고 했는데 부산이라는 산과 울산이라는 두 산이었다.
두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교단도 다르고 두 교회의 목사님이 서로를 전혀 모르는데 두 교회의 공통적인 교회 표어가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교회’였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다른 교회에서도 그런 표어를 읽고 들어본 적이 있었다. 실제로 나도 표어로 삼지는 않았으나 나 역시 은퇴하기 전 우리 교회도 앞으로 5 년간 교육에 투자하자며 외치던 시점이다.
 
부흥회를 다녀온 바로 그 주일 저녁 몇 목사님들과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 가장 중요하게 나눴던 대화의 주제가 다음의 세대를 위한 걱정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잘알고 있는 그대로 현재 이민 사회는 미국이나 캐나다 할 것 없이 이민이 줄어지고 있다. 이민이 들어와야 기존 교회가 성장도 하고 부흥도 하는데 오히려 역이민이 늘어나는 상태에서 이민 1세대는 점점 사그러지고 있다. 그렇게 애써 교회당도 건축하고 좌석도 늘이곤 했지만 이제는 자리를 채우는 일마저 힘들고 자연 교회 예산도 긴축으로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교회가 어떻게 살아남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교회를 개척하는 일은 요원해졌고 살아남기 위해 예산을 줄이고 힘들여 건축했던 예배당을 매각하는 경우가 흔해졌다. 그렇게 이민 1 세대는 사라지는데, 1 세는 그렇게 된다 해도 그 뒤를 이을 2 세들은 어찌 될 것인가? 마냥 교회를 떠나도록 방치할 것인가?
진정 목회자들로서는 심히 걱정되는 문제가 바로 다음 세대가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의 시대는 지나간다 해도 이민 사회만 아니라 한국 교회도 그렇고 세계 교회가 다 걱정스러운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민이 안 들어오는 것도 그렇지만 한국 교회도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을 보면 걱정하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우리는 유럽의 교회들이 문을 닫고 있는 현실에 개탄을 하면서 한국 교회를 보라고 했는데, 이제는 우리 스스로 한국 교회를 걱정할 때가 온 것이다.

영국 교회를 방문했던 한 목회자가 늙은이 몇 명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교회를 개탄하면서 어떻게 영국 교회가 이렇게 되었는가 하고 물었더니 세상이 변하는데 교회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서글픈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한국 교회도 역시 같은 길을 걷지 않는가? 세상이 그렇게도 변하는데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이민 사회나 한국의 변화를 보라. 역이민이 늘어나는 지금 그리고 경제가 곤두박질을 치는 이 시점, 한국은 진보적인 정치가 신학자들이 설치고 심지어 종북주의자들이 국회에 입성하는 현실을 보면서 과연 앞으로 교회는 온전히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앞선다. 공산당에 의해 교회가 순교의 피를 뿌렸는데 그 피의 색깔이 점점 퇴색되고 추종하는 목회자도 있으니. 교회는 점점 늙어가면서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더 이상 들어올 생각도 않는다. 앞의 두 교회를 보면서 그리고 우리 교회를 생각하면서 진짜 다급하기는 다급하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그러면서 목사님들에게 물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어떤 프로그램이나 준비된 계획이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그럼 어쩔 것인가? 마음은 급한데 뭔가 따라주지 않는 게 더 걱정이다.
우리 함께 울고 걱정해야 할 것이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우리는 이제 사그러지는 세대지만 우리의 2 세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투자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교회가 젊은이로 가득 찬 교회를 그리면서.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칼럼] ‘색깔론’의 이중성과 허구

● 칼럼 2012. 6. 24. 18:58 Posted by SisaHan
선거 때마다 터져 나오는 색깔론을 보면서 분단체제가 수구세력에게는 역시 화수분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국가와 민족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내놓고 승부하기보다는 경쟁자에게 부정적인 딱지 붙이기를 통해서 이기려는 야비한 술수가 색깔론이다. 색깔론은 건강한 사회의 바탕이 되는 상식과 합리주의를 파괴하려 든다는 점에서 망국적인 존재다.
비근한 예로 ‘종북’ 문제를 보자. 색깔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종북’이 있으면 법으로 잡아넣으면 될 일이다. 일반 형법도 모자라 국가보안법까지 갖추고 있는 나라에서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종북주의자들’이 있다면 정치인이나 언론이 주야장천 법석을 떨 일이 아니라 법으로 처리하면 될 일이다. 만약 처벌할 만한 위험한 행동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종북이 양심의 문제이거나 과장된 표현이라는 뜻이다.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종북 문제가 있다면 마녀사냥식이 아니라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건전한 토론을 통해 정리해 나가는 것이 순리다. 북한을 찬양만 해도 잡혀가는 나라에서 연일 대서특필되는 종북 얘기는 국민을 혼란스럽게 한다.
 
우리 현대사는 색깔론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역대 군부독재정권은 숱한 젊은이들을 용공으로 몰아 박해했다. 또한 많은 젊은이가 가족의 좌익 이력 때문에 사관학교나 국가 주요기관에 원서조차 낼 수 없었다. 연좌제 때문이다. 이 야만적인 제도가 얼마나 많은 청년들의 날갯죽지를 꺾어놓았는지 모른다.
지금은 널리 알려졌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젊은 시절 남로당 간부였으며,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김종필씨의 장인이 ‘대구폭동’ 때 피살된 남로당 거물인 박정희의 형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들이 권력자가 되도록 용인한 한국 현대사의 관용도에 놀랐으며, 무엇보다도 연좌제에 걸려 고통을 받던 내 또래 젊은이들과 달리 박지만씨가 버젓이 육사에 들어갈 수 있는 모순적인 현실에 분노했다. 국가를 지킨다는 구실로 만들어진 연좌제가 정작 국가를 지킬 가장 큰 의무가 지워진 자들에게는 효력 불능이었다는 이 기막힌 불평등이 법을 파괴하고 상식을 유린하며 반칙과 특권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자양분이었다.
색깔론의 비합리적인 이중성은 북한 인권 문제에서 잘 나타난다. 색깔론자들은 자유권을 억압받는 북한 주민들의 삶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다. 그 연장선에서 인도주의적 대북 식량지원은 반인권적 통치를 하고 있는 북한 정권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이라며 반대한다. 때로는 북한의 도발적 행동을 이유로 반대한다. 한쪽에서는 북한 주민의 인권을 고창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인권의 기초인 북한 주민의 생존권 보호를 위한 식량지원을 반대하는 것이다. 자기모순이다.
 
이들은 북한 인권문제 제기에 신중한 자세를 보이는 사람들을 서슴지 않고 ‘종북주의자’로 몰기도 한다. 북한 주민의 인권 현실에 가슴 아파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적대적 대결을 하면서도 평화공존을 추구해야 하는 한반도 현실에서 인권문제 제기를 내정간섭으로 여기는 북한의 특성을 고려하여 신중을 기하자는 주장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이 주장에 동의하건 않건 관계없이, 국민의 안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나온 의견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색깔론자들은 이를 엉뚱하게 ‘종북’으로 몰아간다. 우리 공동체의 안전과 이익을 기준으로 북한을 보려는 상식적인 관점을 찍어 누르고 북한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잣대로 세상을 보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들이 정치가라면 어리석게도 주객전도의 정치를 하자는 것이다.
대선 국면을 맞이해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릴 조짐을 보인다. 민주주의와 평화, 민족화해를 추구하는 후보라면 이번에는 당당히 색깔론과 정면 대결해야 한다. 자신과 다르면 ‘종북’으로 몰고 자신만이 북한 인권의 옹호자인 양 처신하며 우리 사회를 호령하려는 이 이중적인 얼굴에 당당히 침을 뱉어야 한다. 그래서 2013년부터는 북한을 가장 미워하는 척하면서도 기실은 북한 때문에 먹고살며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색깔론이 설 자리를 없애야 한다.

< 이종석 - 전 통일부 장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