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 드러나는 12·3 내란 핵심기구…그 뒤엔 ‘육사 카르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문상호 정보사령관(왼쪽부터). 한겨레 자료사진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이 주도해 만든 계엄사령부 비공식 조직 ‘정보사령부 수사2단’은 육군사관학교 출신 전현직 영관급(대·중·소령) 이상 장교들이 군의 공식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조직한 12·3 내란의 핵심 기구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정보사 안팎의 공고한 ‘육사 카르텔’이 그물망처럼 조직한 수사2단에 차출된 타 부대 요원들은, 경기 성남시 판교의 정보사 100여단장 직무대리인 육군3사관학교 출신 ㄱ 대령이 3일 밤 비상계엄 선포 뒤 부대로 복귀하자 불법적인 조직이 들통날까 우려해 ㄱ 대령의 여단 회의실 출입을 막기도 했다.

22일 정보사 사정에 밝은 군 소식통들의 말을 종합하면, 제2수사단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육사 38기)→노상원 전 사령관(41기)→문상호 정보사령관(50기)→정성욱 대령(52기), 김봉규 대령(49기)→육사 출신 중·소령급 장교→육사 출신 하급 장교 등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이 가운데 정보사에서 수사2단 요원 차출 실무를 맡은 것은 ㄴ·ㄷ 중령, ㄹ 소령으로 보인다. 내란 기획자로 지목된 노 전 사령관이 김·정 대령에게 인원 선발을 맡긴 것으로 알려졌는데, 김·정 대령은 육사 후배인 세 사람을 ‘손발’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ㄴ·ㄷ 중령과 ㄹ 소령은 김·정 대령에게 10월께 내란에 가담할 하급 장교 선별임무를 받았고, 선발한 요원들에게 ‘내란 준비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진급’을 미끼로 요원들을 포섭한 것으로 전해졌다.

비상계엄 당일인 지난 3일, 정보사는 철저히 이 사조직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수사2단 요원 가운데 38명가량이 3일 밤 11시께 정보사 100여단에 이미 모였는데, 이들은 직속상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육사 출신이 아닌 상관들은 다음날에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수사2단은 정보사 안에서도 소속이 달라 지휘권이 없는 김·정 대령의 지시로 움직이고 보고했다.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을 활용한 내란 준비 현황
 

이들은 비육사 출신인 100여단장 직무대리 ㄱ 대령의 적법한 지휘권도 통제했다. 비상계엄 선포 직후인 밤 11시18분 문 정보사령관의 비상소집령에 따라 ㄱ 대령은 소속 부대인 100여단으로 복귀했는데, 100여단 소속이 아닌 김봉규 대령이 ㄱ 대령을 여단 간부들의 비상소집 장소인 대회의실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지휘통제실에서 대기하도록 했다. 사조직이 부대를 점거하고 부대장의 이동까지 통제한 것이다.

수사2단의 임무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직원과 주요 정치인 체포였다. 이는 군의 정상적인 지휘체계에 따른 것도 아닐뿐더러, 군 수사권은 군 검찰과 국군방첩사령부에만 있다고 규정한 군사법원법에 위배된다. 이런 위헌·불법적 내란의 실행자 역할을 맡은 ㄴ·ㄷ 중령 등은 비상계엄이 해제되고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 위기에 처하자 사실관계를 은폐하고 말 맞추기를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들이 차출한 후배들에게 “비상계엄을 사전에 몰랐고, 당일에 갑자기 소집됐다고 진술해라. 그래야 우리가 피해를 안 받는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군 내부에선 최근 정 대령이 “장병에게 책임이 전가되지 않도록 바란다”며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한 것 역시 정보사 내부 육사 카르텔이 붕괴되는 것을 막으려는 차원이란 풀이도 나온다.

한편, 정보사는 수사2단과 관련한 한겨레의 질의에 “ㄱ 대령은 해당 여단의 직무대리가 맞다”면서도 “기타 질의사항은 현재 수사 중인 사안으로 확인이 제한된다”며 답하지 않았다.  < 한겨레 신형철  이주빈  김채운  권혁철 기자 >

 

법원에서 통신영장을 발부받아 윤 대통령의 통화 내역을 확보해 분석 중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 중 명태균씨와의 전화통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12·3 내란사태를 수사 중인 공조수사본부(공조본)가 윤석열 대통령의 휴대전화 통화 내역을 확보했다. 윤 대통령이 지난 3일 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를 막는 등의 내란 정황이 통화 내역을 통해 더 선명하게 드러날지 주목된다.

 경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내란 수사 협의체인 공조본은 22일 법원에서 통신영장을 발부받아 윤 대통령의 통화 내역을 확보해 분석 중이라고 밝혔다. 공조본이 분석 중인 통화 내역은 비화폰이 아닌 윤 대통령 개인 휴대전화다. 공수처 관계자는 22일 “사건 시점을 전후로 해서 (통신영장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시점을 전후로 윤 대통령이 개인 휴대전화로 누구와 통화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난 3일 밤과 4일 새벽, 국회에 투입된 병력을 지휘하던 군 지휘관들은 윤 대통령과 수차례 통화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곽종근 특수전사령관은 윤 대통령이 “의결 정족수가 아직 다 안 채워진 것 같다. 빨리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안에 있는 인원들을 끄집어내라”고 했다고 밝혔고, 이진우 수도방위사령관은 검찰 조사에서 “계엄 해제 표결이 가까워오자 윤 대통령이 전화해 ‘왜 그걸 못 끌어내냐’고 언성을 높이며 화를 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인형 국군방첩사령관도 ‘국회 상황이 어떠냐’는 윤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대부분의 통화가 비화폰으로 이뤄졌지만 급박하게 움직이던 윤 대통령이 개인 휴대전화를 사용해 중요임무 종사자들에게 내란 실행을 위한 추가 지시를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비상계엄 선포 시점을 전후한 윤 대통령의 통화 내역이 국헌 문란 등 내란의 정황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공조본은 이를 바탕으로 ‘우두머리’인 윤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내란 공모 관계 등을 추적할 계획이다. 

한편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박세현 고검장)는 비상계엄 선포 이후 정치인 체포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침탈 등을 기획·실행한 국군정보사령부에 나가 출장 조사를 벌인 것으로 이날 파악됐다. 검찰은 지난 19~20일, 경기 안양시에 있는 정보사를 방문해 비상계엄 정보사 실무진을 상대로 누구에게서 어떤 지시를 받았는지를 조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특별수사단(특수단)은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최근 참고인으로 조사하면서 비상계엄 당일 윤 대통령이 최 부총리에게 건넨 1장짜리 지시 문건 원본을 제출받았다. 최 부총리는 지난 17일 국회에서 “계엄을 전제로 한 조치사항 같은 것으로 느낌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 한겨레  이지혜  정혜민 기자 >

[편집인 칼럼] 다시 반동의 시대, 눈 부릅떠야

● 칼럼 2024. 12. 23. 14:4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다시 반동의 시대, 눈 부릅떠야"

 

 

마치 극적인 테러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공격헬기에서 뛰어내린 중무장 특공부대 군인들이 국회에 진입하는 숨가쁜 모습과 이에 맞서는 국회직원과 보좌관들의 안간힘이 영상에 생생하게 잡혔다. 대통령 지시대로 “국회의원들을 끌어내기 위해’ 본회의장으로 침투하려고 유리창을 ‘깨부수는’ 섬찍한 장면도 국민들이 직접 보았다. 나중 열린 상임위에서 군인들의 양심적 증언도 있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국회가 만의 하나, 비상계엄 해제안을 처리하지 못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무리 많은 국민들이 민의의 전당인 국회침탈 장면을 직접보았다며 피눈물로 증언해도 성공한 총칼 앞에서는 허공에 부르짖는 신음소리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내란범과 음모 세력은 눈엣가시 정치인과 언론인, 심지어 판사까지 체포조를 동원해 붙잡으려 했고, 국회의원들을 끌고가 지하벙커에 감금할 작정이었다. 병원에 병상 확보와 수혈준비, 구치소엔 감방 먀련까지 지시한 것도 드러났다. 실제 유혈사태를 예비한 것이다. 선관위는 총선을 무효로 돌리려는 서버자료 탈취작전이 벌어졌다. 전국 지자체는 포고령 발령 이후 계엄군에 행정이양을 대비한 것도 밝혀졌다.

군 통수권을 적국이 아닌 자국민 제압용으로 발동한 친위 쿠데타의 전말이 양파껍질처럼 드러날 때마다, 등골이 오싹하고 손바닥에 땀이 배어난다. 40여년 전 수많은 국민이 나라를 걱정하다 무도한 독재자의 권력욕에 짓밟혀 총칼에 목숨을 잃거나 반신불수가 되고 철창에서 고난을 겪었다. 신문 방송은 군 검열관의 통제하에 천편일률의 홍보기사로 채워졌다. 비판과 반론의 도전은 지하실 몽둥이 물고문에 목숨을 각오해야 했던, 살벌한 시절로 되돌아갈 뻔 했다는 이야기다.

천만다행, 내란수괴로 전락한 대통령 윤석열과 공범들의 처벌이 시작됐다. 국민 75%가 탄핵하라는 분노의 함성 속에 국회가 탄핵안을 가결해 ‘수괴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헌법재판소는 즉각 내란수괴 파면여부 심리에 착수했다. 반란소동이 일단락 되어 정상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순탄하게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국회 탄핵안은 겨우 4표가 넘어서 가까스로 가결됐다. 여당 108명 가운데 85명은 확실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계엄이 뭐가 문제냐, 합법적인 통치행위였다.”고 우겨댄다. “정권을 야당에 헌납할거냐”고 일부 소신파들을 윽박 지른다. 탄핵 찬성 입장이던 당대표를 쫓아내고, 찬성표 12명 색출에 나서 “쥐새끼들”라고 욕하며 탈당과 제명요구 등 마녀사냥을 하고 있다.

“끝까지 싸우겠다”고 오기를 과시한 ‘헌법 파괴범’ 내란수괴와 입을 맞춘 것처럼, ‘의회주의’의 폭파위기를 겪은 국회의원들이 불법을 합법이라고 자기부정을 하며 사죄 기색 전혀없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나섰다. 법적 권한이 없는 ‘정치검찰’의 수상한 수사 독주. 구속된 주범 국방장관이던 자는 “내란 수사가 내란”이라고 궤변을 꺼내며 돌연 진술 거부를 시작했다 한다. 광장에서는 극우 단체와 종교인 등이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헌재의 주심 재판관이 ‘내란수괴’가 임명했던 극보수 인물로 정해졌다는 뉴스까지 나오면서, 이상해진 분위기에 국민적 공포가 다시 불거지는 상황이다. 그야말로 반동(反動)의 시기, 정의와 진실과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내란동조 세력의 파렴치한 판뒤집기 시도가 본격화했다는 불안이다.

무려 100년에 가까운 반동기(反動期)로 나라와 국민이 고초를 겪은 프랑스 혁명의 사례를 들 것도없다. 우리의 민족 수난사 역시 그 반동의 환란이 불과 최근까지도 수없이 반복됐다. 해방 후 친일 매국노와 부역자를 처벌하려던 ‘반민특위’가 독재권력의 반동적 훼방으로 무산된 일, 4.19 민주혁명이 1년 만에 군사쿠데타로 무위에 그친 사실, ‘서울의 봄’과 5.8 항쟁이 전두환의 군홧발에 무참히 짓이겨진 역사, 그리고 6.10 시민항쟁이 ‘6.29 기만선언’으로 물타기 되었고, 노무현의 참여 민주주의가 탄핵위기를 겪었으며, 광우병 촛불은 명박산성과 종편허가 등이 말해주는 수구적 우경화 공세로, 2016년 촛불혁명은 잠시의 민주시대 방심에 괴물 항명검사가 치받고 나와 검찰독재와 파시즘적 군주를 꿈꾸는 상황을 맞았다. 마침내 친위쿠데타로 본색을 드러냈다가 실패한 것인데, ‘본심’을 바꿀 생각이 없는 주범은 물론 그 동조 비호세력이 궁지에 몰린 쥐떼 처럼 발악을 시작한 것이다. 불행히도 그들에게는 국민이나 나라와 민족, 역사·정의·상식 등은 안중에 없다. 오로지 권력과 이권, 일가의 안위와 호사(豪奢)가 정의이고 목적인 부류들이다. 그래서 ‘수구 반동’이 성사됐을 경우 역사 왜곡은 물론 엄청난 국가적 난맥을 초래하곤 했던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선진과 후진의 기로에 서 있다. 만에 하나 내란세력이 되살아난다면, 지난 2년반 남짓에 무너져 내린 국가적 퇴행과 손실은 급속히, 몇 배 더 심각한 풍파로 덮칠 것이며, 앞으로 수년 수십 년의 암흑기를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거듭 강조하지만 그들이 저질러 온 막가파식 반동의 폐해와 지난 민족사, 그리고 세계사가 증명하고도 남는다.

탄핵을 추동한 수백만 민주시민과 든든한 청년 학생들의 애국 열정에서 불퇴전(不退轉)의 저력과 도약의 미래 희망을 보지만, 끈질긴 반동세력에 낙관은 금물이다. 내란은 끝난 게 아니다. 부릅뜬 눈으로 감시하며 목줄을 단단히 움켜쥐지 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