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신 것을 기억하며 보내는 고난주간이다. 기독교 절기에서 가장 슬프고 우울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난주간이 단순히 그렇게 우울한 기간이 아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인지하고 있다.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이 우리에게는 구원의 길을 여신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을 생각해 본다면 고난주간은 우리에게 소망과 기쁨을 가져다 주는 특별한 주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이들은 죄를 짓고 사는 존재였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이 말은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인류는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는데, 죄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이 끊어져 버려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되었다.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것처럼 계속 죄악 속에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안타까운 인간의 상황을 해결하시려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기독교의 신비가 바로 이 십자가에 있다. 즉 고난이 없는 구원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은 필수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이 될 때 흔히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고난 없는 영광이다. 소위 말해 만사형통의 복을 받으려고 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삶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곧 깨지고 만다. 고난이 결코 빗겨가지 않고 어떤 때는 정통으로 내 머리를 치고 나를 넘어뜨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때 갈등이 찾아온다.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갈 것인지, 아니면 중간에 포기하든지 아니면 잠시 쉴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럴 때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을 닮아가고 있다고 하는 영적인 확신이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엄청난 고뇌에 찬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럼에도 그분은 고난을 피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결국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셨다고 했다. 예수님도 그러셨다고 하면 우리 역시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고난을 당함이 은혜이지만 온전한 은혜는 결국 부활의 능력에 있다. 고난이 고난으로만 끝난다면 우리는 정말 소망이 없는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이 부활로 연결되어 온전한 의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의 고난도 결국 부활의 소망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기에 우리 역시 주와 같이 될 것이다. 그 소망을 잃어버리지 말고 고난의 터널을 주의 말씀의 등불을 켜고 잘 통과하는 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 손명수 목사 - 토론토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 >


[1500자 칼럼] 그게 뭐길래

● 칼럼 2018. 4. 4. 11:02 Posted by SisaHan

성형전문의 자격을 갖고 있는 우리 가정의는 가끔 내게 묻는다. “혹 보톡스에 관심 있으면 언제든 비서에게 문의하세요”. 신 세대와는 달리 성형에 대해 알레르기를 갖고 있는 나는 보톡스라는 단어만 들어도 거부감이 생긴다. 그런 나도 캐나다에서 태어나 서양인과 결혼한 딸에게 쌍꺼풀 수술을 제안했다가 강한 항변을 되받은 적이 있다. 자기 남편은 현재의 동양적인 자신의 외모와 성품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며, 불가피한 결함이나 건강상의 문제가 없다면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 곧 최선의 자기모습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었다. 딸도 어렸을 때 서양 아이들로부터 일자로 찢어져 끝이 살짝 올라간 ‘Chinese eye’로 인해 놀림을 받았다. 다만 자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후에는 바로 그 점이 한국인인 자신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동양인의 눈을 굳이 서양인의 눈으로 바꿔야 할 명분이 없다며 잘못하면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잃기 쉽다고 말해서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본 TV 단막극이다. 제목이나 작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지만 내용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얼굴 생김새를 가진 청년이 일류대학을 나왔으나 번번히 직장 면접에서 떨어졌다. 거칠게 생긴 못난 외모가 문제였다. 그는 못난 얼굴에 대한 열등감이 죽고 싶을 만큼 컸다. 결국 자살 대신 성형을 결심하고 미남의 남자로 변신하고 만다. 그 후부터 그의 삶에도 변화가 뒤따랐다. 좋은 직장도 얻고, 미모의 여성과 결혼도 하고, 아이 아빠도 된다. 그런데 그들의 아이가 이 청년과 그의 아내를 전혀 닮지 않은 데 문제가 생긴다. 의심은 서로간에 불신을 낳아 끝내 이혼을 결심하기에 이르는데 우연히 길에서 한 성형의사를 만남으로서 그 답이 풀리고 만다. 청년은 물론이고 아내 역시 성형을 했던 것이다. 서로 상대방을 향해 “당신, 성형을 한 거야” “ 당신도?…” 외치며 자신들을 전혀 닮지 않은 갓난아이에게도 성형을 시켜야 할지 말지 난감해하는 내용으로 끝난다. 오늘까지도 시대적, 사회적 이슈를 날카롭게 지적한 좋은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멋진 외모가 한 개인의 자존감을 높여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보통사람은 생김새가 험악하거나 얼굴이 못생긴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기는 드문 일이다. 그러나 외모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에게는 최악의 외모나 결정적인 신체적 결함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실제로 우린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선천적 장애인을 돌보다 결혼하는 건강한 여인과 남성을 보면 참으로 감동을 얻는다.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본성을 뛰어넘는 숭고한 사랑의 힘이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나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중환자와도 결혼하는 날개 없는 천사들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조건과 환경을 뛰어넘어 영혼의 합일을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라 여기고 있다.

요즘은 성형이 유행이 된 시대다. 고출력 레이저로 피부관리와 피부치료도 대중화 되었기에 어쩌면 이런 글을 쓴다는 자체도 시대에 뒤떨어진 건지도 모른다. 신문기사에 의하면 성형수술로 인한 크고 작은 범법자까지 생겨났다. 너도나도 무분별한 성형을 함으로서 그 부작용이 또 다른 사회적 문제로까지 등장한 것이다. 가짜 의사가 수술을 집도하고, 부주의한 약물로 인한 수술 후유증으로 생명을 잃거나 일생을 고통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런가 하면 잘못된 시술이 불가피한 재수술로 이어져 급기야 성형중독에 빠지게 된 경우도 많다. 결국 본래 모습보다 훨씬 못한 성형괴물이 되는 폐해가 뒤따름은 기정사실이다. 범법자가 성형수술로 얼굴을 변형시켜 추적하는데 시간을 소모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5년간이나 추적해온 범인을 바로 눈 앞에서도 알아보지 못했다니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는가 말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자연스런 인간의 욕구 중 하나지만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할 수는 없다. 만약 아름다움 자체가 우리의 행복한 삶을 보장해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분명히 일시적인 기쁨과 만족은 주나 곧 한계점에 이르고 말 것이다. 현대는 개성의 시대라 예전과 달리 외모가 출중하지 않아도 자기만의 테크닉으로 연예인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자신의 개성을 살리며,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할지, 진정 고민해야 할 시대에 우리가 서있다. 이 모습 이대로 자신있게 살아가는 방법으로 외모 콤플렉스를 버리고 내면의 힘(만족, 평안, 절제)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지 싶다.

< 원옥재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칼럼] 천박과 경박을 성찰하며

● 칼럼 2018. 4. 4. 11:01 Posted by SisaHan

학력과 상관없이 천박하고, 재산과 상관없이 경박한 인간들이 있다. 명박과 친박들이 여기에 속할 것 같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들을 찬양하고 축복하던 자들도 있다. 북한의 김씨 왕조처럼, 교회를 세습하는 자들일수록 더 극성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행하는 야만과 기만을 북한이라는 그림자를 통해 발견한다. 경박, 천박한 인간은 자신의 숨기고 싶은 어둡고 수치스러운 면을 타인에게서 발견하면 참기 어려운 분노로 마구 비난을 쏟는다. 세습에 막말에 착취에… 기적을 행한다고 뻥치는 것까지, 데칼코마니 같다. 대부분 명박을 위해 할렐루야를 외치라고 강요하던 자들이다. 목탁 두드리며 명박을 축원하던 자들은 아예 입에 올리기도 싫어서 그저 말도 말기로 한다.
‘박’들 옆에 서서 호가호위했던 자들은 ‘다음에는 너희들 차례’라고 울분을 토하는데, 아무래도 그 전에 당신들 차례가 먼저일 것 같다. 적폐청산이 이명박근혜로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누구보다 그들이 더 잘 알 거다.

어쨌건 22일 저녁에는 쥐불놀이도 하고 치킨집도 불이 났다. 방문을 환영한다는 전광판으로 구치소도 예의를 표할 정도로 감사한 인사가 들어간 모양이다. 쥐불놀이 전통 축제의 시즌에, 닭집의 매상까지 한껏 올려주며 말이다. 503호의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그렇게 쥐를 잡자고 하더니 박정희의 저주인가… 하는 헛웃음 나는 아재 개그도 머릿속에서 막 창조된다.
인정한다, 내가 지금 한껏 비아냥거리고 있다는 것을. 너무 나간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이렇게 하고 싶다. 반성하지 않는 자들에게 점잖은 필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 루쉰 선생은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에서 물에 빠진 미친개는 몽둥이로 쳐야 한다고 말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미친개를 구해줘야지 왜 몽둥이로 쳐야 하냐고 묻자 선생은 대답한다. 물에서 구해줘 봤자, 미친개는 은혜를 알 턱이 없기에 구해준 사람을 물어 죽일 수 있다고. 요즘 천박한 자들이 경찰을 두고 한 이야기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탁월하다.
우리가 민주주의 하자고 촛불 들었지, 단순하게 이명박근혜 구속시키자고만 촛불 든 게 아니다. 우리가 적폐청산 하자고 그 추운 겨울에 감기 걸려가며 혁명했지, 정치보복 하자고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정치보복은 너희들이 항상 하는 거니까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되겠지.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거든.


촛불은 우리 자신의 반성이기도 했다. 잘살게 해주겠다는 사기에 현혹되어서 10년 동안 그들을 지지했던 우리의 경박함과 천박함에 대해서 통탄하며 성찰하는 경험이기도 했다. 돈이라는 권력을 탐하면서 사는 동안 약자들은 더 약해졌고, 힘없는 자들은 더 힘없는 자들을 착취하고 농락했다. 남성권력, 지식권력, 문화권력을 가진 나도 거기에서 아주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피해의 미투가 아니라 가해의 미투를 말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 더 힘을 쏟아야 할 곳이 있다. 바로 미투다.
촛불이 거대권력을 무너뜨렸다면, 미투운동은 미세권력을 전복하고 있다. 촛불이 정수리를 깼다면 미투는 작은 세포 하나하나를 바꾸고 있다. 남성 일반을 공격한다고 경박하게 발끈하지 말고, 펜스룰 뒤에 비겁하게 숨지 말고, 이제는 남성이 약자가 됐다고 스스로 ‘약자화’하며 천박해지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모든 부당한 권력이 무력화되는 그날까지 말이다.

< 이승욱 - 정신분석클리닉 대표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5~27일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했다. 2012년 집권 이래 어떤 외국 수반도 만나지 않았던 김 위원장으로서는 첫번째 정상회담이며 일부의 관측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파격적인 ‘김정은식’ 등장이다.
김 위원장의 방중은 최악의 상황에 놓인 북-중 관계를 일거에 복원하는 행보라고 할 것이다. 그동안 북-중 관계는 북한이 핵개발을 가속화하고 중국이 미국 주도의 대북 경제제재에 적극 동참하면서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지난해 11월 시진핑 국가주석의 특사인 쑹타오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평양을 찾았지만 김 위원장을 만나지 못했을 정도로 관계는 위태로워졌다.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고 있는 만큼, 북한이든 중국이든 4월 남북 정상회담과 5월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김정은-시진핑 정상회담은 김 위원장이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국제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의미가 있다. 전통적 우호관계에 있는 중국 정상과 먼저 만남으로써 남북, 북-미 정상회담 예행연습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반도에 대변동을 가져올 남북, 북-미 회담에 임해야 하는 상황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지원 세력을 확보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지명에 이어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대북 강경파 존 볼턴을 임명한 상황에서 김 위원장으로서는 중재자 역할을 자임한 한국 말고도 중국을 튼튼한 조력자로 두고 북-미 정상회담에 임하고 싶을 것이다. 또 미국과 통 큰 담판을 짓더라도 중국과의 우호적 관계는 변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중국으로서도 한반도 대격변을 앞두고 남-북-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논의에서 소외되지 않을 북-중의 전통적 우호관계 복원이 시급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북한과 중국의 관계 복원은 우리에게도 긍정적인 신호라고 할 수 있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면 중국의 적극적 역할은 피할 수 없다. 중국의 해법은 한국 정부의 한반도 문제 해결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이 정전협정 당사국 가운데 하나인데다 과거 6자회담 의장국으로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정착을 위해 노력해왔다는 점에서도 한반도 문제 해결에 관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북-중 관계가 호전되는 것은 한반도 평화체제 실현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정은-시진핑 정상회담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이라는 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