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름으로 뜨겁게 간구를”

구세군 토론토 한인교회
매일 저녁… 1월2일 시작

“목이 터져라 가슴 복받치는 뜨거움의 간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길 원하는 당신, 다시 살아 나야만 하는, 바로 당신을 위한 시간을 마련합니다”
구세군 토론토한인교회(담임 강정길 사관: 150 Railside Rd, North York, M2J 2B9)가 새해 1월2일부터 매일 저녁 뜨거운 기도와 찬양과 말씀으로 영적 부흥을 간구하는 ‘365 기도, 찬송, 그리고 말씀의 집회’를 의욕적으로 시작한다.
“누군가 해야만 하기에, 어디에선가 하고 있어야만 하기에, 우린 시작한다”고 결연하게 외치며 닻을 올리는 구세군 토론토한인교회의 ‘365 기도, 찬송, 말씀집회’는 주일을 제외한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저녁 8시마다 열릴 예정이다.
강정길 사관은 ‘365 집회’를 새해부터 시작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며 성도들의 참여와 분발을 북돋웠다.


“기도의 줄을 놓쳤나요? 기도의 목마름으로 헐떡이나요? 기도의 목청이 막혔나요?
기도에는 관심을 잃었나요? 그렇다면,‘기도하지 않으면 죽는다!’(E.M. 바운즈)…‘365 집회’를 통해 내가 살아나야만 합니다. 내가 살아야 내 가족, 자녀, 교회, 영혼들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강 사관은 이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는 성구를 인용하며 “영혼을 살려내고 하나님께 나아기를 원하는 성도들은 모두 구세군 한인교회 ‘365 집회’에 오셔서 말씀을 듣고 찬송하며 부르짖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 문의: 647-907-9391 >


딸이 엄마에게 아침에 투정을 부리며 말합니다. “엄마, 나 학교 안갈래. 애들이 나를 싫어하고 자꾸 왕따를 시켜. 가기 싫어.” 그 말을 들은 엄마는 한숨을 쉬며 가련하다는 듯이, “그래도 가야지. 넌 선생인데 매일 아침 그러면 어떡하니? 어서 밥먹고 학교 가자.” 지어낸 이야기이겠지만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잊고 삶의 의미 조차 잃고 살아가는 모습을 풍자한 대화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꿈꾸며 열심히 달려봅니다. 현존하는 기독교 최고의 변증가 중 한 사람인 오스 기니스는 ‘인생’ 이라는 책에서 만족스러운 삶에는 3가지 요건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첫째는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요, 두번째는 사명에 대한 강한 인식이요, 세번째는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인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의 두 가지 요건인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인식은 세번째 요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합니다. ‘내가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하고 사는 사람인가?’ 를 알기 전에 도대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추적하여 그 해답을 찾아내지 못한 사람은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삶에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은 인생을 허무하게 만듭니다. 청소부 (사람들이 크게 대망하는 직업이 아닐 수도 있을 직업군 중에 하나를 언급했을 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를 해도 그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으며 동시에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기쁨으로 감당하며 삽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청소부 일을 부끄럽고 하찮게 여기고 자기연민과 열등의식과 소외감을 느끼며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만족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사는 삶은 행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렇듯 같은 직업을 가지고 살아도 어떤 사람은 만족하며 살고 또 어떤 사람은 불행을 곱씹으며 삽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발견 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시적인 세상에서는 삶의 의미가 상황과 시대에 따라 수시로 바뀌기에 참 혼란스러워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도 변하고, 가치도 변하고, 정의도 변하고, 시스템도 변하고, 성공의 기준도 변합니다. 시시각각 시대에 따라 가치가 변하니 삶의 의미 뿐 아니라 나의 정체성이나 존재의 의미도 정립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100세 시대를 말하지만 60대 중반을 넘기면서는 꾸준하게 삶의 의미를 찾고 느끼며 사는 경우를 많이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끊임 없이 그 길을 묻고 확인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내 인생의 의미를 대신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각자의 것입니다. 각자는 자기 삶의 의미를 인식하기 위하여 찾고, 두드리고, 구해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이 방황 끝에 삶의 의미를 찾게 된 역사적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하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입니다. 바로 “Tolle Lege” (라틴어: “take up and read 집어서 읽어라.”) 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책을 집어서 읽었는데 성경 로마서 13장 13~14절 말씀이 눈에 들어왔고 그 말씀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 어거스틴이 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무수히 많은 증거들을 통해서 세대가 변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 가운데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4:6), 하나님 말씀 (요한복음 17:17) 그리고 성령 하나님 (요한 1서 5:6) 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셋은 서로를 증거합니다.


저희 교회는 지난 주 “하나님 앞에서” 2016년 한 해를 돌아보고 2017년을 맞이하는 사무총회를 했습니다. 아울러 벧엘교회에서의 저의 3년 3개월의 목회 여정을 돌아보았는데 부끄러운 것 뿐입니다. 실수와 모난 것 투성입니다. 자신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Back to the Basic.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속에서 목회의 의미도, 교회의 의미도, 성도다움의 의미도 찾고, 우리 모두의 삶의 의미를 찾는 항해를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다가오는 2017년 새해는 진리인 말씀을 집어들고 읽어내는 영적인 도전을 통하여 만족한 삶을 영위하는 복된 분들의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 노득희 목사 - 토론토 벧엘성결교회 담임목사 >


항일 기독교인 조명 학술토론회

● 교회소식 2016. 12. 19. 21:16 Posted by SisaHan

항일 기독교인 재조명 학술토론회에 참석한 역사 신학자들과 강사 등.

신사참배‥ 교단의 굴복에도 일부 목사들 저항
주기철·손양원·한상동 목사 등… 일부 독립유공 인정 못받아

일본 군국주의는 천황을 신격화하고 식민지 조선에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몇몇 기독교인은 이에 저항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주기철 목사가 있다. 신사참배에 저항하다 투옥된 주 목사는 1944년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주 목사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주기철 목사처럼 신사참배에 저항하고 반대 운동을 펼쳤지만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이 있다. 한상동 목사, 이인제 목사, 조수옥 권사 등이다. 이들의 신사참배 저항을 독립운동으로 재평가하고, 독립운동가로 인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12월13일 모국 국회의원회관에서는 ‘독립운동가 인준 청원을 위한 항일 기독교인들 재조명 학술 토론회’가 열렸다. 역사신학자, 독립기념관 연구원 등이 한자리에 모여 ‘일제 신사참배 거부 투쟁은 독립운동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했다.
토론회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저항운동을 펼친 한상동 목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최재건 교수(연세대 한국기독교연구소)가 ‘일제 치하의 신사참배와 한국교회’, 최덕성 총장(브니엘신학교)이 ‘한상동과 주기철 신사참배 거부 운동 무엇이 다른가’, 박희천 원로목사(내수동교회)는 ‘내가 본 출옥 성도 한상동 목사’를 주제로 발표했다.


교단과 달리 신사참배에 저항한 기독교인들
최재건 교수는 일제 치하에서 마지막까지 신사참배에 반대하지 않았던 한국교회를 지적하며 발표를 시작했다. 그는 1930년대 초반, 일제가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할 때 한국교회는 모두 반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점차 지날수록 한국교회는 일본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갔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가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에 찬성하는 안을 가결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도 같은 해 ‘신사참배가 국민의 의례이므로 참석하라’는 통고문을 전 교회에 발송했다.
교단이 신사참배에 동조했지만 개인 차원에서 끝까지 반대하는 이들은 상당했다고 최 교수는 말했다. 이들은 주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주기철(평안남도), 이기선(평안북도), 한상동과 주남선(경상남도), 손양원(전라남도), 헌트와 김윤섭과 박의흠(만주)이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최 교수는 “한상동 목사처럼 가장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저항했던 이는 없었다. 한 목사는 지역별로 조직을 만들어 거부 운동을 전개했다. 기존 노회를 파괴하고 참배 거부자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노회를 구성하자는 주장도 했다”고 평했다.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이유는 신앙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민족운동적인 측면이 있다고 최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신사참배는 한국인의 황민화를 위한 정책 일환으로 강요됐다. 참배를 거절하는 일 자체가 항일 행위였다. 한국 사학계도 이런 저항운동을 민족운동 일환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덕성 총장은 주기철 목사와 한상동 목사가 벌인 저항운동을 비교했다. 한 목사를 포함 다른 저항운동을 벌인 기독교 지도자들도 독립운동가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인들이 벌인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향한 최덕성 총장의 시각은 최재건 교수와 같았다. 일제는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국가를 전복하려는 반역자로 여겼다. 치안유지법 위반, 불경죄 등의 죄목으로 체포, 조사, 판결했다. 신사참배 거부가 항일운동이자 항일 투쟁이었던 것이다.
최 총장은 독립유공자로 인준된 주기철 목사(건국훈장 독립장), 주남선 목사(건국훈장 애국장)와 같이 한상동 목사, 이인제 목사, 조수옥 권사 등을 국가보훈처가 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 총장은 “한 목사의 신사참배 운동은 가장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었다. 그는 신사참배 운동을 ‘정치 운동’으로 전환해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했다”고 말했다.


재심 청원 위한 10만 명 서명운동
‘내가 본 출옥 성도 한상동 목사’를 주제로 발표한 박희천 목사는 직접 만나서 경험했던 한상동 목사를 회상했다. 그는 한상동 목사는 말씀에 목숨을 걸고 그대로 순종했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한 목사의 일화를 참석자들에게 들려주었다.
“한상동 목사가 신사참배에 저항하다 투옥됐을 때, 한 간수가 그를 불러 놓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구타했어요. 한 목사는 ‘내가 여기서 맞아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간수가 몽둥이질을 멈추더니 갑자기 한 목사에게 물었어요. ‘네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한 목사는 마태복음 구절을 떠올렸어요.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간수에게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했어요. 그러자 간수가 놀랍게도 ‘네가 이해된다’며 다시 감방으로 보냈어요.” 박 목사는 당시 일제에 저항하다 옥중에 갇힌 교인들이 한 목사처럼 말씀 하나에 목숨을 걸고 운명을 맡겼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항일 기독인 서훈 재심 신청 ‘10만 명 청원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평신도 글마당] Good Morning?

● 교회소식 2016. 12. 19. 21:12 Posted by SisaHan

조국의 소식에 미국 대선까지 겹쳐 정신없이 ‘속보’ 홍수 속에 살다가 좀 조용해질 줄 알았는데, 작금에는 속보가 시간 시간 터져 나오는 바람에 ‘굿모닝’ 이란 인사가 이곳 아메리카에서도 서먹해지는 요즈음이다.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공통점을 찾기 위해 노력도 해보고, 이질감으로 인한 상처도 받으면서 다시 치유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상쾌한 아침 일 수 있지만, 어떤 이는 힘든 아침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같은 ‘Good Morning’ 이지만 억양(intonation, accent)에 따라서 그 감정이 묻어 나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억압된 생활을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좀 더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 가자는 말씀이다.


지난 9월 아내의 급작스런 통증으로 인한 일주일 간의 병원생활 속에서 여러가지 느낌이 있었다.
첫째는 감사하며 살자는 생각이 더욱 깊이 자리 잡았다. 병원 응급실만 해도 정말 수많은 종류의 사건과 사고로 인하여 각종 위험한 상태의 환자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하물며 입원실에 가서 보면 말을 해서 무얼 하겠는가. 고통을 참지 못해 고함을 지르는 사람, 바쁜 간호사를 시도 때도 없이 부르는 사람, 보기에도 끔직한 상처가 있는 사람 등등…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말 할 수 있음만으로 감사하며, 심지어 감각이 있어 고통을 느끼는 것 만으로도 감사해야 함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아내의 고통이 가라앉지 않고, 수술일정도 잡히지 않아 애를 태우며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의 뱃속에서는 배고픔을 알려왔다. 참지 못하고 병원 음식코너를 찾아 나섰다. 들어서는 순간 잠시 숨을 고르고 서있었다. 왁자지껄한 소란함과 활기차게 보이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그것은 방금 전 내가 있었던 병실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내가 여지껏 살아왔던 그 모습이 아니던가. “지금 이 병원 건물 안에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도 있으며, 고통을 참지 못해 소리 치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이곳은 어디란 말인가?” 갑자기 엄숙한 마음이 되었다. 하찮은 나의 행동이 이웃에게는 반갑지 않는 행동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더욱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행히 아내는 수술을 잘 받았고 회복도 빨라 일찍 퇴원 하였고, 다시 점검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을 때 만나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을 아픔을 생각하며 좀더 조심스러운 행동을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가끔 교회에서 찬양을 인도하시는 분들이 중간 중간 멘트를 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것을 자제하라고 항상 당부하고 싶다. 예배 드리러 오신 성도들을 믿음이 약한 자로 치부(?)하는 말투, 혹은 자신의 믿음만이 진실한 믿음 같은 말투, 어색한 성경구절 인용 등은 차라리 하지 않음이 옳기 때문이다. 우환이 있어 깊이 기도하는 성도를 배려해야 하며,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성도를 배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곡도 중요하다.
인간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인간답게 사는 길이 그리 쉽지만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종교가 있고 철학이 있으며, 영원히 그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은 계속 될 것 이기 때문이다.

< 정훈태 - 동산교회 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