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가까이 모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고 우리 주위는 축하의 물결을 이룬다. 교회력으로는 대림절이 크리스마스와 함께 우리에게 다가온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는 절기로 기다림과 인내가 기독교의 중요한 부분인 것을 알려준다. 이는 4주 동안 계속되는 데 희망, 평화, 기쁨, 사랑의 주제로 매 주일 예배에서 각기 이들 주제를 중심으로 한 기도와 함께 촛불을 점화한다. 그리고 마지막 크리스마스에는 중앙에 자리잡은 예수 그리스도 촛불을 점화한다. 우리에게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와 아기 예수의 오심을 축하하는 일이 서로 상반된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두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신비롭게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축제를 이룬다. 우리가 주님 뜻대로 살아간다면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마음이나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축하하는 일은 사랑으로 조화를 이루며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은 예배, 다양한 음악회, 성극 등등을 통해서 우리의 희망, 평화, 기쁨, 사랑이 표현된다. 그러나 교회력의 의미를 생각할 때 잊어서는 안될 일이 있다.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은 왕 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통치를 기념하는 주일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거룩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그의 삶을 통해서 배우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번째 설교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 기쁨을 전하고, 포로된 사람에게 해방을, 눈먼사람에게 보임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것이 거룩한 삶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12월이 희망의 시간이고, 평화와 기쁨과 사랑이 우리의 삶가운데 가득한 계절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공동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와 계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우리 교회에, 가정에, 직장에 그리고 이웃과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와 계시는 삶은 어떤 삶인가? 우리 가운에 가장 작은 자 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 욕심에 포로된 사람, 진실을 바로보지 못하는 사람, 힘없이 억눌린 사람, 병든 사람, 외로운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항상 항께 살면서도 바로 보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이들이 우리가 섬기고 받들어야 하는 사람은 아닐까? 이렇게 우리의 시각이 달라지면 우리가 속한 공동체, 가정, 직장은 따뜻함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마음과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마음은 같은 마음이다. 이때에 마음 깊이 기억하는 희망, 평화, 기쁨,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내 뜻대로가 아니고 주님 뜻대로 사는 삶에서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는 귀한 선물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진리의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진리를 향해 나아갈 때 여기에 희망이 있다. 이러한 희망 안에서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고 이런 삶에는 기쁨이 있다. 이렇게 진리가 어우러져 있는 삶에 사랑이 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발견 할 수 있고 우리 모두는 천사의 목소리, “땅위에 평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들을 수 있다.

< 이영정 목사 - 덴토니아파크 연합교회 담임목사 >


유한한 인간들이 무한한 존재 (GOD-LORD) 를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 그것은 창조의 섭리를 통해서만이 알수있다. 이것이 <복음>의 우월성이시다. 만물의 다양성, 우수함, 질서, 아름다움, 조화, 특성, 기능, 그리고 합목적성, 이 모든 것은 창조주와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우리 인간 신체의 형태와 구조, 특별히 인간 영혼의 우월한 능력과 기능은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이 창조주는 바로 <주 하나님> 이시다. 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길이야말로 태초 이후로 있어온 탄탄대로(坦坦大路)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이미 오류의 기선(機先)을 지른지(제압) 오래인 것이다. 우리는 양심적으로 “일을 행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지혜(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우리는 “그의 도를 지켜야” 복이 있다(잠8:32).

지혜(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해야 하며 그 길의 철책안에 머물러 있어야하고 그 난간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지혜의 선로만 따라가고 그 길로 매진해야 하며 그 길에서 참고 견디어야 한다. 성서의 빛을 가진 유대인들 마저도 얼마나 우상숭배에 젖어 있었던가 하는 걸 생각한다면 이방인들의 경우에 늦게 복음을 받아 들이고, 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 역시 이상한 노릇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육감의 구렁텅이에 빠져든 타락한 인간성은 비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들의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 마음의 우매와 사악은 이지적 능력과 기능을 흐리고 어둡게 한다. 의지와 마음의 타락과 부패만큼 이해력을 멍들게 하고 삐뚤어지게 하는 것도 없다. “음심이 가득한 눈은 범죄를 그칠 줄 모른다(벧후2:14).” 우리의 판단이 일단 죄악과 일치해 버리면 이때 우리는 지옥의 문턱에 다가 서 있는 셈이다. 이세상 중에는 그릇된 일을 저지르는 데는 신속하면서 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선 우매하다니 정말로 철천지 바보가 아닐수 없다.

복음을 전파하고 소박한 신자들 앞에서 설교하는 사역자들 중에는 표리부동한 심령으로 올바르고 정직한 양심을 망각하고, 생활하는 그들의 생각과 내면적인 행동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외골길로 거침없이, 치닫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아닐가요. 그것이 바로 알면서 지은 죄, 특별히 하나님의 심판을 알면서 지은 죄의 결과는 무섭고, 칼날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만용 (蠻勇)이요, 이미 마음이 굳어져 있으며 죄의 구렁텅이에 발이 고정되어 있는, <사탄>과 다를바 없는 위장된 가짜<사역자> 들이다. 이들은 “자기 들만 행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는 자들이다. 본인이 당하는 시험에 못이겨 더러운 식욕을 한껏 채우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남들의 죄를보고 기뻐하는 짓은 죄악 그 자체를 위한 죄악의 사랑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바로 악마의 왕국과 그 이익을 위해 연합전선을 펴는 처사다.

이런 짓들이 한국사회의 실상을 넘어서, 가장 모본이 되어야 할 교계에서 밥 먹듯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며, 곧 자신들의 죄를 범할 뿐 아니라, 그걸 변호하고 정당화하며, 남들도 똑같은 일을 저지르게 북돋아 주는 것이다. 만약 타인의 죄와 동조하고, 그걸 흐뭇해 하는 가운데 우리가 있다면, 우리의 죄악의 짐은 더 더욱 무거워 가기 마련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죄로 타락해 있던 현실이라면 이방세계와 다를 바가 어디 있으며, 어떻게 어지러운 세상 질서(부도덕, 탐욕, 세습, 정직하지 않고, 못하는 사역자들, 교회연보의 사유화, 등등….)를 회복하는데 본이 되지못하고, 자신들의 부정직한 어떠한 행위로, 주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겠는가? 흔히 하나님께 대한 봉사로 수고하며, 간절한 기도를 애쓰는 <성도>들은 그 일에서 이익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신앙이 모두 잡담과 헛소리에서 끝이나고 기도는 입술의 움직임에 지나지 않게 되면 그들은 영적으로 가난하여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


[기쁨과 소망] 영적 성인아이

● 교회소식 2016. 11. 22. 21:20 Posted by SisaHan

며칠 전 목사님들과 만난 자리에서 리더쉽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리더쉽이 있는 목사라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지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카리스마가 있는 목사를 리더쉽이 있다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강력한 통솔력, 혹은 독재적 지도력이 있는 목사가 리더쉽이 있는 목사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목사님들이 인정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은 그러한 목회자를 더 좋아한다고 얘기합니다. 강력하게 성도들을 이끌어가는 목사를 좋아하여 따른다는 것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생각해 봤습니다. 민주주의적 목회자, 온순하고 평화로운 목회자, 성도들과 함께 하는 목회자는 리더쉽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강한 리더쉽, 부드러운 리더쉽으로 리더쉽의 모양과 스타일이 다를 뿐이지 리더쉽이 있다, 없다고 얘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부드러운 지도자는 나름대로 그의 지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사람들이 리더쉽이 있다는 뜻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의 스타일을 의미한다는 것에는 공통적인 견해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강력한 리더쉽을 좋아하는 것일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끌려 다니는 삶에 익숙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외부의 강력한 힘에 의하여 억지로 끌려 다니는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시키는 일을 하고, 또 맘에 안 들면 뒤에서 원망하고 비난을 하면서도 끌려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너무 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여 어떤 일을 계획하고 행하려고 할 시간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편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시키는 일만 하려고 합니다. 이민자들의 삶이 얼마나 바쁩니까? 스스로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아이디어들을 내고 그 일을 이루어가려면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귀찮은 것입니다. 그래서 강력한 지도자가 하는 일을 따라 가려고만 합니다.
셋째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할 때 그 책임이 나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강력한 지도자가 앞장서서 끌고 갈 때는 나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무조건 따라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책임은 앞장 선 지도자가 지게 됩니다. 내가 앞장섰다가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그 책임을 다 뒤집어쓰게 됩니다.


교회에서 보이는 이러한 모습을 저는 영적 성인아이(adult child)라고 부릅니다. ‘성인아이’ 란 성인의 성숙함을 이루어야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성향과 행동을 벗어버리지 못한 사람들로서 그들은 현재의 삶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고, 입히며 파괴시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딪히는 많은 일들, 책임져야 할 일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수많은 업무와 과업, 그리고 사명들을 감당해야 하는데 너무 두려운 것입니다. 너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어린 아이의 상태로 머물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엄청난 스트레스를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스스로 퇴행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못하는 이유를 스스로 정해서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현상을 영적 성인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성인인데 아직도 부모가 필요합니다. 자기들의 삶을 강력하게 야단치며 혹은 때리면서라도 이끌어 줄 지도자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 같은 이민 생활에서는 홀로 서기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의 모든 삶을 스스로 책임있게 이끌어가야 할 용기가 필요한 것이 우리 이민자들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 강성철 목사 - 우리장로교회 담임목사 >


[기쁨과 소망] 생각하며 살자

● 교회소식 2016. 11. 8. 20:45 Posted by SisaHan

칼럼을 준비하면서 ‘생각’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난 몇 주간 무엇이 바빴는지 칼럼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쓸 말이 한 동안 생각이 나지 않아 빈 깡통이 되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됩니다. ‘생각하며 살자!’


인간에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특권이고 축복인데 몇 주간 그것을 놓치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매주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나에게는 예배와 기도가 있어 참 좋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새벽기도가 있어 매일 하루를 계획할 수 있고 주일마다 예배 드리며 한 주간을 되돌아 보고 자기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설교 할 수 있다는 것. 설교를 준비하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들은 가르침은 기억에 거의 남지 않는다고 하는데 누군가와 토론한 것은 50%가 기억에 남고 누군가에 가르친 것은 90%가 기억에 남는다고 합니다. 생각해야 설교할 수 있고 남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기도와 예배생활 할 수 있고 목사로 세워주셔서 설교할 수 있고 또 이렇게 칼럼까지 쓸 수 있어 강제로라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도 섬기시는 교회에서 기회가 되시면 가르치는 자리에서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면 더욱 더 풍성하고 행복한 삶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권면 드려 봅니다.


그래도 너무 하나님 주시는 것만 거저 받아 먹는 것 같아 나도 어떤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가정에서의 더 많은 대화를 시도하려 합니다. 저희 가정은 토요일 저녁마다 온 가족이 모여 대화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두 자녀에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어려서부터 제공하기 위해 시작한 것인데 맛있는 음식을 엄마가 준비하고 식사 후 예배를 잠시 드린 후 가족을 위해 아빠가 한 사람씩 축복기도를 해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토론의 시간을 갖습니다.
한국 고등학생들의 하루 평균 공부시간이 8시간, 일본은 6시간, 유대인은 4시간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한국의 학생들이 유대인 학생들보다 우월하다 말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의 30%가 유대인, 아시아 학생은 다 합쳐도 5%가 되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4시간 공부하지만 ‘하부루타’식 공부 방법입니다. 혼자 공부하는 것이 아닌 둘 이상이 모여 토론하며 공부합니다. 시험기간 한국의 도서관은 조용하지만 유대인의 도서관은 굉장히 시끄럽습니다. 토론하려면 생각해야 하며 생각하기에 더 좋은 결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대화를 잘 하지 못합니다. 아내와 아이들과 대화하려 하면 자꾸 지시하려 하고 가르치려 하려 하고 답을 미리 정해 놓고 잔소리 하고 화부터 냅니다. 토론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또 바쁘다는 핑계로 지난 몇 주 가정의 대화 시간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명기 6장 7절 말씀입니다. 강론은 원어로 ‘다베르’, 대화와 토론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가정의 대화가 명령입니다. ‘토론하는 우리 가정 생각하는 나’ 가 되길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 박대웅 목사 - 캐나다 새순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