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남을 슬프게 하는 소식을 믿음의 친구들에게 전하는 수가 있다. 이것은 그들을 슬프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시련을 대비케 하는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 삶의 주위에서 신앙적인 노력이 헛되이 돌아가는 일은 참으로 유감된 일이다. 어떤 사역자들은 시작은 훌륭하나 드디어 그들의 모든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경우가 우리 한국교계와 이민 동포사회의 교계에서도 너무나 많음을 보았고, 보고있다. 즉 젊어서부터 계명(복음)을 지킨 소망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사랑의 억제와 주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큰 사랑의 결핍으로 모두를 상실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들 모두가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이미 얻은 바를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내세의 소망과 성령의 은사를 맛보았던’ 우리는 신앙에 대한 좋은 평판을 들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은혜와 죄악에 대한 확신, 세상의 허무성과 <복음>의 우월성,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깨달아 알게 된다. 주안에서 온전한 <상>을 얻는 길은 그리스도안에서 진실하며, 끝까지 믿음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구원과 자비와 축복은 경건한 자가 바라는 바 가장 큰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주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구속하신 분이요,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신 분이요, 나의 죄를 용서하신 분이요,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나에게 <영생>을 부여하신 <분>이시다. 주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멀리 하려는 모든 것에 반해 더욱 더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속 끝까지 순종하자! 또한 우리는 때때로 연령과 은사와 은혜와 신분에 있어서 우리들보다 우위에 있는 자들을 존경해야 된다. 그들을 시기하거나 또는 아첨해서도 안 되며, 그들이 그릇 행하고 있다고 생각될 경우 무조건 그들을 표방해서도 안된다. 교회는 남의 비밀이나 혹은 숨겨진 사실을 판단할 수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판단의 결과가 선을 이루기 보다 항상 일찌기 염려했던 바 우리의 경솔하고도 불합리한 열심이 보다 큰 해를 초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마13:29-30). 우리는 매일 매시 모순된 내 자신을 발견케 되지만 우리가 서 있는 위치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해서는 안 된다. <경건치 않은 자들>은 세상에서 주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이요, 하나님과 양심에 관한 관심이 전혀 없는 자들이다.

예를 들어 주 하나님앞에서 <기도>를 억제하는 자, 또한 자기들의 사명일지라도 그들이 받기로 되어있는 호의와 이익을 상실할까 두려워, 부한 자나 세상 권력자들에게 비난하지 못하는 자, 그리고 <주 하나님의 역사를 행하는데 게으른 자들>이다. 우리는 놀라운 은혜아래서 내 자신의 힘을 키우며, 모든 죄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출 해 내는데 가장 큰 수단이 되는 <은혜>를 무관심함으로, <은혜>를 역 이용하는 일은 죄인들의 가장 부도덕하며 악한 데로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나의 삶이 나의 믿음에 부합하도록 최선을 다하자! 순간적인 세상의 쾌락이 영원한 <불>의 심판으로부터 오는 나의 고통을 <감>할 수가 있겠는가?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시4;4). 나의 신앙이 조롱을 당하며 핍박을 당하면 당할수록 나는 그 신앙을 더욱 견고히 붙들고 고수하도록 해야 한다. <은혜가 넘치는 성도들이나 말씀을 탐구하는 성도들은 교훈과 지도와 그리고 위로를 찾을 수 있는 <샘>이 되고 <우물>이 되는 <목회자-사역자>를 찾아 가게 된다. 이런 것들이 교회 부흥의 원천이 되고 주 하나님의 공동체(교회)가 되는 것인 줄 믿는다.

<복음>을 분명히 증거하지 못하는 사역자들은 교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줄 것이 없다. 진리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생명의 <샘물>이 된다. 복음의 깊이도 별로 없고 복음 증거에 분명함이 없는 무지하고 공허한 사람들로부터 우리들이 성경 지식과 이해력을 얻어 보려고 하면 우리들의 기대는 허사로 끝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비>를 부어주는 <구름>을 따라가자! 바람에 밀려가는 구름(사역자)을 떠나자! 그 바람은 성령의 바람이 아니라 자기들의 욕망과 탐욕을 추구하는 <바람>이다. 그들은 지식(말씀)이 없고 진리가 들어 있지 않은 말로, 교훈(성경,교리)을 어둡게 한다. 우리는 막차(주님이 주신 복음적인 교회)를 잘 타야 한다. 소리는 크나 의미없는 허탄한 자랑의 말과 그럴 듯한 표현으로 교인들을 현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적 분발을 하며 살아가자! 은혜와 경건을 발전시키며 또 유지하는 일이 매우 중요 하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자! 우리의 몸은 우리 영혼의 장막에 불과하다. 우리는 육신의 장막(흙집)에서 곧 벗어나야만 한다. 임종시에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벗게 된다. 부활의 아침이 이를 때까지는 우리의 육신이 무덤속에 눕혀질 수 밖에 없다. 기록된 주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실천하고 있는 자가 곧 그 말씀대로 살수 있는 사람이다.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관론자와 낙관론자와 현실주의자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다른지를 터널에 빗대어 비유한 우화가 있는데요. 비관론자는 터널의 입구만을 보는 자입니다. 터널에 출구는 없고 입구만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두움으로 가득 차있는 곳, 소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곳으로 봅니다. 이것이 비관론자들이 삶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이와 반대로 낙관론자들은 터널의 출구를 봅니다. 터널이 제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출구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보며,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따라서 터널을 지나가는 동안 캄캄하기 때문에 넘어질 때도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고, 결국에는 환한 빛이 기다리는 출구에 도착합니다.


분명 비관론보다는 낙관론이 삶을 바라보는 더 좋은 태도인 것은 사실입니다만, 문제는 낙관론도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현실주의자의 관점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되는데, 현실주의자들은 터널의 어느 부분을 볼까요? 입구와 출구를 모두 봅니다. 그리고 터널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수많은 터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또한 봅니다. 한 부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인생에는 어두움의 입구로 들어서야 할 때가 있고, 그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환하게 볼 수 있는 형통함의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둘 다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터널 하나 통과했다고 해서, 고생 끝, 행복 영원이 아니며, 또한 그 반대로 행복은 순간이고 고생이 오래 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 역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두 겪어보아서 아시겠지만, 이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이지 않습니까? 문제가 해결되어서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렇게 좋은 때가 제법 오래 갈 때도 있지만 금세 지나가버리고 또 다른 문제 앞에 고통스러워하고 신음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잖아요. 그리고 반대의 경우, 앞이 막막하고 고생만 죽어라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행운이 찾아올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결국, 인생이란 전화위복이 되는 때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전복위화’가 될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 특별히 신앙생활을 비관적으로 바라봐서도 안되고 무조건적인 낙관론에 사로잡혀 있어서도 안됩니다. 그 대신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상황이 아닙니다. 상황을 바라보게 되면 터널의 입구를 막 통과했을 경우 낙심하거나 두려워하게 될 것이고, 출구를 막 빠져 나왔을 경우에는 긴장을 풀어버리고 기고만장해지기 쉬울 거에요. 하지만, 인생 전체의 그림을 보게 되면, 순간순간의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상황과 여건이 어떠하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 힘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고, 성령께서 우리 속 사람을 강건케 해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느냐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요. 우리의 삶이 형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든,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든, 모두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어차피 지나가는 시간, 그렇다면 상황에 따라 마음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그런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멋진 인생이고 행복한 인생이지 않을까요?

< 송만빈 목사 - 노스욕 한인교회 담임목사 >


미국의 변호사이자 미국 독립혁명의 지도자였던 패트릭 헨리는 “나는 나의 길을 인도해 주는 유일한 램프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경험이란 램프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론 이상의 경험을 요구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험은 인간에게 있어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지표가 될 수 있을 만큼 이론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조류를 따라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교회들은 신앙적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해 오고 있었습니다.

제임스 패커는 자신의 저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신앙적 경험에 대한 방향을 다음과 같이 잘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신성을 연구하는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교리들만이 아니라 그 속성을 지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이 신앙적 경험의 바른 푯대입니다.
헬라어로 ‘알다’는 ‘기노스코ginwvskw,’인데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알기 위해 배운다.’는 뜻입니다. 다음은 ‘깊이 사귀면서 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남녀 사이의 성교에 대한 유대적 표현법입니다. 제임스 패커의 말처럼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운데 그 분을 알기 위해 배우고, 그 분의 속성을 우리 삶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는 몇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친밀한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고 그 관계에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만약에 개인 경건의 시간에 위기가 찾아왔다면 속히 회복을 해야 합니다.
둘째는 경청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말씀인지 아닌지 헛갈린다고 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면 양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 듯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셋째는 조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는 우리 크기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 크기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한 믿음의 갈등에 직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아무리 우리의 지성과 경험을 다 동원해도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과 생각을 하나님께로 조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성취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나와 주변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순종입니다. 순종이란 하나님께서 내 주변에서 일하시는 것을 보고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내가 바라고 소망하는 일에 동참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방법으로 살 수 있는 믿음의 지표가 됩니다.

< 지광이 목사 - 그레이스힐장로교회 담임목사 >


성도들과 함께 출발을 앞둔 농민교회 김재철 목사.

한국 대통령 선거날, 산골·섬마을에서 유권자들 뒷바라지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뽑은 날, 오지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은 또 다른 헌신에 눈을 돌렸다.
농어촌에선 국민으로서 한 표를 행사하는 일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처럼 투표소가 가깝지 않은데다 교통수단도 부족하고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이 많다. 평소 어르신들의 손발 역할을 해온 농어촌교회 목회자들은 그래서 선거일에 더욱 바쁘다.

충북 음성군 소여리에서 목회 중인 김재철(49) 농민교회 목사는 9일 오전 8시 12인승 승합차의 운전대를 잡았다. 주민 평균연령이 80대인 지역 특성상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투표소로 모실 도우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통화에서 “어르신 대부분이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할 형편인데 댁에서 정류장까지의 이동거리, 1시간에 두 대뿐인 버스 배차시간까지 고려하면 투표소를 오가는 데 2시간이 넘게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김 목사는 새터마을 돌암마을 등 교회 주변 마을을 돌며 어르신 10명을 태워 투표소가 마련된 남신초등학교 강당으로 향했다. 그는 “18년 전 처음 소여리에 들어왔을 때 어르신들께 도움을 드리려고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다”며 “2002년 제16대 대선 때부턴 투표가 있을 때마다 고령의 성도들은 물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어르신들까지 함께 교회 승합차로 모셔다 드렸다”고 전했다.
동행한 정영자(44) 사모는 “투표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권사·집사님들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지도자가 세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말했다. 이어 “‘5월엔 부지깽이도 밭에 가서 일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농사일이 바쁜 시기인데 탄핵 정국에 이어 조기 대선까지 치러져 예년보다 주민들의 투표 참여도가 높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전남 해남군 어불도 주민들은 투표때마다 육지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어야 한다. 섬 안에는 투표소가 없어 배를 타고 육지로 나가 어란진항 인근에 마련된 투표소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홍성(63) 어불도소망교회 목사는 어린아이부터 어르신들까지 11명의 주민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장 목사는 “오늘따라 바람이 세고 파도가 높아 배에 오르내리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며 “여든 넘은 집사님을 부축해 갑판 위를 간신히 이동했다”고 전했다.
어란진항에 주차해 둔 승합차로 옮겨 탄 장 목사 일행은 어란진초등학교 투표소로 이동해 무사히 투표를 마쳤다. 장 목사는 “동행한 11명 중 9명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지만 작은 도움에도 과분하게 감사인사를 해줘 오히려 미안하다”며 “감사한 마음이 복음의 문을 열게 해주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새벽부터 비바람이 몰아쳤던 전북 진안군 진안읍에선 노 목회자가 주민들의 손발이 돼줬다. 신용발(71) 노촌교회 목사는 새벽기도회를 마치자마자 승합차에 시동을 걸었다. 신 목사는 “하루에 딱 네 번 버스를 탈 수 있을 정도로 교통편이 열악해 어르신들이 투표하는 게 여간 어렵지 않은데 날씨까지 안 좋아 더 막막하셨을 것”이라면서 “이 마을에선 아직 청년 소릴 듣는 내가 어르신들을 모실 수 있어 기쁘다”며 웃었다. 지난 3일 은퇴식을 한 신 목사는 “진안에서 여생을 보내며 주민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웃이 되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