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난쟁이지만,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다. 우리는 작지만, 때론 거인보다 먼 곳을 내다보기도 한다.」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 말을 생각해봅니다. 소설은 중세의 수도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유리세공을 하는 니콜라라고하는 인물이 수도원의 수사에게 한탄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자기는 지금 이 수도원의 유리와 같은 것을 만들수 없다면서 무려 2세기나 전에 만들어진 유리를 그저 고치는 것도 힘들어 하는 자기를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거인들의 시대는 갔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수사가 대답을 합니다. 물론 우리는 난쟁이들이라고 그러나 그것으로 실망할 필요는 없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선 난쟁이들이기 때문에 때로는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설 가운데서는 거인으로 표현되는 것이 전통일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대단한 업적이나 건축물들을 보면서 느끼는 경외심에 대한 표현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들이 보고 기대했던 것 보다 더 멀리 바라보고 더 나은 것을 만들거나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미 여러곳에서 재 사용되었습니다. 그 원 출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라는 표현은 12세기 프랑스의 수도사 베르나르 드 사르트르가 처음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누가 제일 처음 썼든지에 상관없이 이 말은 꽤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뉴턴은 자신의 업적이 이미 그 전에 수많은 이들의 연구위에 얻어진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이 말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은 분명 한 개인으로는 역량이 작은 존재들일지 모릅니다. 사람마다 편차가 있고 그 능력이나 지식에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또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이나 사회적 분위기가 다르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들 역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미 역사 가운데 살아 왔던 수많은 이들의 삶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든 싫든 그들이 이루어 놓은 사회 위에서 살아가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삶의 방식에 적응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이 발명하고 발견한 것들을 사용하여 조금 더 유익하고 편리한 것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우리가 사는 사회를 조금씩 바꾸어 가며 살아갑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은혜를 다 알아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그렇고 또 우리의 게으름이나 지혜 없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는 것을 막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브레이크를 겁니다. 그럴때에 우리들은 우리보다 먼저 믿음의 삶을 산 이들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그들이 믿고 경험한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품고 그들의 고백을 따라 그 말씀을 묵상하고 또 그 위에서 나도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은혜를 누림으로 그들보다 풍성한 믿음의 삶을 살게됩니다.
비단 우리의 선조들뿐 아니라 함께 신앙생활하는 교회의 성도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같은 도움을 얻습니다. 먼저 믿음으로 시련을 이겨낸 이들로부터 위로를 얻고 담대하게 길을 걸어가는 이들로부터 도전을 받습니다. 함께 걸어가며 손을 잡아주는 이들 때문에 오늘도 믿음의 삶을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 김요환 목사 - 런던 제일장로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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