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멀리 바라보기

● 교회소식 2016. 8. 2. 07:18 Posted by SisaHan

「우리는 난쟁이지만,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다. 우리는 작지만, 때론 거인보다 먼 곳을 내다보기도 한다.」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 말을 생각해봅니다. 소설은 중세의 수도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유리세공을 하는 니콜라라고하는 인물이 수도원의 수사에게 한탄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자기는 지금 이 수도원의 유리와 같은 것을 만들수 없다면서 무려 2세기나 전에 만들어진 유리를 그저 고치는 것도 힘들어 하는 자기를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거인들의 시대는 갔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수사가 대답을 합니다. 물론 우리는 난쟁이들이라고 그러나 그것으로 실망할 필요는 없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선 난쟁이들이기 때문에 때로는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설 가운데서는 거인으로 표현되는 것이 전통일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대단한 업적이나 건축물들을 보면서 느끼는 경외심에 대한 표현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들이 보고 기대했던 것 보다 더 멀리 바라보고 더 나은 것을 만들거나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미 여러곳에서 재 사용되었습니다. 그 원 출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라는 표현은 12세기 프랑스의 수도사 베르나르 드 사르트르가 처음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누가 제일 처음 썼든지에 상관없이 이 말은 꽤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뉴턴은 자신의 업적이 이미 그 전에 수많은 이들의 연구위에 얻어진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이 말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은 분명 한 개인으로는 역량이 작은 존재들일지 모릅니다. 사람마다 편차가 있고 그 능력이나 지식에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또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이나 사회적 분위기가 다르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들 역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미 역사 가운데 살아 왔던 수많은 이들의 삶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든 싫든 그들이 이루어 놓은 사회 위에서 살아가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삶의 방식에 적응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이 발명하고 발견한 것들을 사용하여 조금 더 유익하고 편리한 것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우리가 사는 사회를 조금씩 바꾸어 가며 살아갑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은혜를 다 알아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그렇고 또 우리의 게으름이나 지혜 없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는 것을 막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브레이크를 겁니다. 그럴때에 우리들은 우리보다 먼저 믿음의 삶을 산 이들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그들이 믿고 경험한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품고 그들의 고백을 따라 그 말씀을 묵상하고 또 그 위에서 나도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은혜를 누림으로 그들보다 풍성한 믿음의 삶을 살게됩니다.
비단 우리의 선조들뿐 아니라 함께 신앙생활하는 교회의 성도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같은 도움을 얻습니다. 먼저 믿음으로 시련을 이겨낸 이들로부터 위로를 얻고 담대하게 길을 걸어가는 이들로부터 도전을 받습니다. 함께 걸어가며 손을 잡아주는 이들 때문에 오늘도 믿음의 삶을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 김요환 목사 - 런던 제일장로교회 담임목사 >


KPCA 캐나다동노회 교육자원부가 주최한 목회자세미나에서 강의를 경청하는 목회자들

강사 김경진 교수 ‘어떻게 해석하고 설교?’ 조언


해외한인장로회(KPCA) 캐나다동노회(노회장 안상호 동산교회 담임목사) 교육자원부가 연례행사로 여는 ‘목회자를 위한 세미나’가 토론토 영락교회(담임 송민호 목사)에서 7월26~27일 이틀간 김경진 교수(백석신대 신약학)를 강사로 초청해 공관복음을 주제로열렸다.
‘공관복음의 통일성과 다양성- 어떻게 공관복음을 해석하고 설교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세미나에서 김 교수는 30여명의 참석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목회현장에서 적용할 공관복음 해석과 설교에 대해 깊이있게 조언했다.

‘공관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외에 12권의 저서와 다수의 역서를 낸 바 있는 김 교수는 총신대 신학과와 총신대 신대원(M.Div), 서울대 사범대학원(Ed.M)을 나와 University of Edinburgh, University of Glasgow(신약학 Ph.D.)를 거쳐 백석대학교 기독교 전문대학원장과 신학대학원 신약학 주임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 문의: 416-889-7700, mira0517@hotmail.com >


위정자나 사역자 (목회자) 는 보다 많은 사회 대중의 지도를 맡은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가정을 잘 교육시키는 데에 보통 이상의 주의를 기울이도록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 자녀를 아주 근엄하게 순복시키지 않고 그들의 선도에 수고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마땅히 해야할 자기의 의무를 수행할 것인가?”(딤전3:4,5). 우리는 모든 젊은이들로 하여금 그들이 어리고 젊을 때 지식과 은혜를 구비하기 위해 고심참담(苦心慘憺)하게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때가 저희들의 학습 시기이며 그때에 그들의 사상이 형성되고 무르익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자녀들’이 아니고 우리들의 자녀들 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자녀들의 어린시기는 바로 그 시기가 성공할 수 있는 가망이 극히 높은 나이이고 성공의 초행길이 되기 때문이다. “가지(柯枝)는 어리고 연할때에 잘 휘는 것입니다.” 교훈 받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은 비록 성인들 일지라도 어린 아이의 기질을 가지고 나오게 되어야되고 그들은 공손하고 유순하며 수줍어 하도록 하여야 한다. 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는 위엄과 사랑이 실려 있는 법이다. 우리는 젊은이들 앞에 모본을 보여야 됨은 먼저 우리 눈을 지켜야 하며, 우리 혀를 지켜야 하고, 또한 우리 발(언어, 행동)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 눈을 고정시키고 주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그렇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눈을 말씀의 규범과 규칙에 고착시키고 복음과 촛점을 일치시킴이 얼마나 복된 삶이 될까. 우리의 시선을 우리의 목표 곧 ‘높은 데서 부르시는 상’에 못박고 우리의 눈을 전부 그쪽으로 향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저울 한 쪽에 얹고 내가 행한 일이나 행하려고 하는 일을 다른 한 쪽에 얹어서 그 두쪽이 평형을 이루는지 살펴보자! 무슨 일이든지 경솔히 행하지 말자! 주님의 길 안에서 두 마음을 품은 사람처럼 불안정하지 않도록 하자! 두 길 사이에서 엉거주춤하니 서 있지 말고 평탄하고도 일관성 있는 순종의 길로 나아가자.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내 눈은 바로보고, 극단을 삼가하자. 왜냐하면 거기에는 악이 있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부채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큼만 지니도록 노력해야 함이 얼마나 마땅한 일 인지. ‘악을 뿌리는 자’는 부당한 이득을 얻으려는 바람에서 부정직한 일을 행하는 자요, 권세를 남용하는 권력은 권세의 지팡이가 ‘분노의 지팡이’로 변하고 그 권세는 쇠망하게 된다.

‘인자한 자’의 복됨은 가난한 자들의 허리가 그를 축복할 것이며 그 주위의 사람들이 다 그를 칭찬할 것이고, 그를 위해 드리는 많은 선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 하나님께서도 그를 축복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복을 받으리라”. 우리는 신앙생활에서나 삶속에서 늘 유혹에서 지켜줄 지혜와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이다. 경박한 처신을 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돼지에 비유하는 것이 마땅하다. 더러운 욕망의 진창(mud)에서 딩굴다가 마음과 양심까지 더럽혀진 사역자들은 씻겨 주어도 다시 진창으로 돌아가는 돼지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고 저희 처신과는 달리 거짓말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기도와 경건은 죄와 양심에 대한 위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더 나으며” 하나님과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 보다 낫다”고 말씀 하셨다. 먼저 순종의 길을 보여주는 모본된 사역자, 맡겨진 자기 울안의 형제 자매인 성도들을 골고루 사랑하는 사역자, 혹시라도 자기 습관에 대한 경계는 자기 머리에 대한 재갈이 됨을 알고있는 사역자, 또한 성도들은 사역자들의 행동과 실천에 대해 방심하지 않는 것은 손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다.

우리들의 교회는 마음의 경견한 묵상을 위축되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교화(敎化)를 위해 우리 입의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도와 찬송을 드리는 우리 입의 말들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고 마음의 묵상에서 넘쳐나온 것이어야 한다(시편45:1) 정직하지 못한 사역자를 통한 예배는 위선적 예배가 됨으로 주님께서는 그 예배를 배척하시고, 죄가 화음을 이루며 소리를 낼때 주 하나님의 귀에는 그것이 거슬리기 때문이다. ‘경건의 위장’은 이중의 죄가 된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면을 쓰고 대하며 실제로는 우리를 전혀 존경하지 않으면서 존경하는 체하는 것을 보게되면 미운 생각이 든다. “위선보다 밉살스러운 것도 없으며, 가식보다 비열한 것도 없다.” 복음으로 꽉 차있는 신앙생활과 사역안에서는 성도의 특권인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되고,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기도의 응답이 줄지어 서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구원>에로 선택받은 것이며 하늘 나라와 영광에로 부름 받은 것이다. 우리를 예정하시고, 부르시며,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이는 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과 소망에 더없이 막강한 힘이 되시는 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우리 성도들의 심령에는 평강과 기쁨이 넘치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모든 바램과 호흡의 원천이 되시는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수 있게 된다. 은혜가 약하고 애정이 메마르며 생각은 중구난방인 터에 ‘마음이 기도 하는 걸 보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주 하나님! 은혜로다, 모든것이 은혜로다, 모든것이 합력하여 그리스도와 참 신자들간의 사랑과 우정의 결속을 영원토록 깨뜨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


오래전에 저에게 영적 지도(spiritual direction)를 해 주었던 미국인 수녀님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오래 전에 자신이 우울증에 빠졌던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우울증이 지속되어서 병원에 가보고 싶었지만 수녀가 정신과 의사를 만난다는 것이 왠지 부담스럽고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동안 망설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기도 가운데 번개처럼 스쳐간 생각이 자신의 마음을 바꾸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울증도 감기나 다른 병처럼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병인데, 다른 병에 걸려서 병원에 가는 것이나 우울증 걸려서 병원에 가는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고 정신과 의사를 만나러 갔다고 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수녀들이 수녀복을 입고 생활하는 때라 수녀복을 입고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찾아갔고 그래서 적절한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분이 저에게 했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아픈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습니다. 수녀나 신부나 목사나 다 똑같습니다. 당신의 아픈 것을 내 놓을 수 있는 용기를 항상 가지세요. 그것만으로도 당신의 짐은 가벼워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우울한 기분에 있다거나 우울증에 걸려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상당히 꺼려합니다. 그러나 편견없이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기분은 감기처럼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무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 이들 모두 평생 우울증과 싸우신 분들입니다. 또한 영적으로 보면 우울은 그냥 나쁜 무드(mood)가 아닙니다. 새로운 모드(mode)로 삶을 살라고 주시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우울증에 빠져서 죽고 싶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이 그들에게 새로운 모드의 삶을 살게 되는 계기가 실제로 되었습니다. 우울한 기분이나 우울증은 어쩌면 잠시 세상의 입맛을 떨어뜨려서 진짜로 입맛 다실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내면의 움직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파커 팔머(Parker Palmer)라는 분이 있습니다. 유명한 교육자이며 영성가입니다. 그는 한창 열심히 달려가던 중년의 시기에 극심한 우울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몸과 마음을 꼼짝 못하게 하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이 터널을 다 통과한 후에 파커 말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울증은 나를 괴롭히는 적이 아니라 나를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이끄는 친구였다. 우울증이라는 어두움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되었고, 진정한 소명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난 주 저를 찾아와서 50대 남성이 이런 하소연을 하고 갔습니다. ‘목사님, 사는 것이 왜 이렇게 재미가 없죠. 요즈음 신나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아이들도 크고 이민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되고. 그러면서 내가 그 동안 열심히 해 왔던 일들이 다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마음이 자주 우울해 집니다.’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 이런 기분에 빠져있는 분이 있으시다면, 너무 어둡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잠시 삶에 대한 입맛이 떨어진 것 뿐이닌깐요. 진짜 입맛 다실 일을 찾을 때가 곧 올 것입니다.

< 고영민 목사 - 이글스필드 한인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