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한 인간들이 무한한 존재 (GOD-LORD) 를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 그것은 창조의 섭리를 통해서만이 알수있다. 이것이 <복음>의 우월성이시다. 만물의 다양성, 우수함, 질서, 아름다움, 조화, 특성, 기능, 그리고 합목적성, 이 모든 것은 창조주와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우리 인간 신체의 형태와 구조, 특별히 인간 영혼의 우월한 능력과 기능은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이 창조주는 바로 <주 하나님> 이시다. 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길이야말로 태초 이후로 있어온 탄탄대로(坦坦大路)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이미 오류의 기선(機先)을 지른지(제압) 오래인 것이다. 우리는 양심적으로 “일을 행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지혜(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우리는 “그의 도를 지켜야” 복이 있다(잠8:32).

지혜(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해야 하며 그 길의 철책안에 머물러 있어야하고 그 난간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지혜의 선로만 따라가고 그 길로 매진해야 하며 그 길에서 참고 견디어야 한다. 성서의 빛을 가진 유대인들 마저도 얼마나 우상숭배에 젖어 있었던가 하는 걸 생각한다면 이방인들의 경우에 늦게 복음을 받아 들이고, 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 역시 이상한 노릇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육감의 구렁텅이에 빠져든 타락한 인간성은 비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들의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 마음의 우매와 사악은 이지적 능력과 기능을 흐리고 어둡게 한다. 의지와 마음의 타락과 부패만큼 이해력을 멍들게 하고 삐뚤어지게 하는 것도 없다. “음심이 가득한 눈은 범죄를 그칠 줄 모른다(벧후2:14).” 우리의 판단이 일단 죄악과 일치해 버리면 이때 우리는 지옥의 문턱에 다가 서 있는 셈이다. 이세상 중에는 그릇된 일을 저지르는 데는 신속하면서 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선 우매하다니 정말로 철천지 바보가 아닐수 없다.

복음을 전파하고 소박한 신자들 앞에서 설교하는 사역자들 중에는 표리부동한 심령으로 올바르고 정직한 양심을 망각하고, 생활하는 그들의 생각과 내면적인 행동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외골길로 거침없이, 치닫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아닐가요. 그것이 바로 알면서 지은 죄, 특별히 하나님의 심판을 알면서 지은 죄의 결과는 무섭고, 칼날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만용 (蠻勇)이요, 이미 마음이 굳어져 있으며 죄의 구렁텅이에 발이 고정되어 있는, <사탄>과 다를바 없는 위장된 가짜<사역자> 들이다. 이들은 “자기 들만 행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는 자들이다. 본인이 당하는 시험에 못이겨 더러운 식욕을 한껏 채우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남들의 죄를보고 기뻐하는 짓은 죄악 그 자체를 위한 죄악의 사랑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바로 악마의 왕국과 그 이익을 위해 연합전선을 펴는 처사다.

이런 짓들이 한국사회의 실상을 넘어서, 가장 모본이 되어야 할 교계에서 밥 먹듯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며, 곧 자신들의 죄를 범할 뿐 아니라, 그걸 변호하고 정당화하며, 남들도 똑같은 일을 저지르게 북돋아 주는 것이다. 만약 타인의 죄와 동조하고, 그걸 흐뭇해 하는 가운데 우리가 있다면, 우리의 죄악의 짐은 더 더욱 무거워 가기 마련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죄로 타락해 있던 현실이라면 이방세계와 다를 바가 어디 있으며, 어떻게 어지러운 세상 질서(부도덕, 탐욕, 세습, 정직하지 않고, 못하는 사역자들, 교회연보의 사유화, 등등….)를 회복하는데 본이 되지못하고, 자신들의 부정직한 어떠한 행위로, 주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겠는가? 흔히 하나님께 대한 봉사로 수고하며, 간절한 기도를 애쓰는 <성도>들은 그 일에서 이익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신앙이 모두 잡담과 헛소리에서 끝이나고 기도는 입술의 움직임에 지나지 않게 되면 그들은 영적으로 가난하여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


[기쁨과 소망] 영적 성인아이

● 교회소식 2016. 11. 22. 21:20 Posted by SisaHan

며칠 전 목사님들과 만난 자리에서 리더쉽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리더쉽이 있는 목사라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지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카리스마가 있는 목사를 리더쉽이 있다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강력한 통솔력, 혹은 독재적 지도력이 있는 목사가 리더쉽이 있는 목사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목사님들이 인정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은 그러한 목회자를 더 좋아한다고 얘기합니다. 강력하게 성도들을 이끌어가는 목사를 좋아하여 따른다는 것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생각해 봤습니다. 민주주의적 목회자, 온순하고 평화로운 목회자, 성도들과 함께 하는 목회자는 리더쉽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강한 리더쉽, 부드러운 리더쉽으로 리더쉽의 모양과 스타일이 다를 뿐이지 리더쉽이 있다, 없다고 얘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부드러운 지도자는 나름대로 그의 지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사람들이 리더쉽이 있다는 뜻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의 스타일을 의미한다는 것에는 공통적인 견해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강력한 리더쉽을 좋아하는 것일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끌려 다니는 삶에 익숙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외부의 강력한 힘에 의하여 억지로 끌려 다니는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시키는 일을 하고, 또 맘에 안 들면 뒤에서 원망하고 비난을 하면서도 끌려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너무 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여 어떤 일을 계획하고 행하려고 할 시간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편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시키는 일만 하려고 합니다. 이민자들의 삶이 얼마나 바쁩니까? 스스로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아이디어들을 내고 그 일을 이루어가려면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귀찮은 것입니다. 그래서 강력한 지도자가 하는 일을 따라 가려고만 합니다.
셋째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할 때 그 책임이 나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강력한 지도자가 앞장서서 끌고 갈 때는 나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무조건 따라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책임은 앞장 선 지도자가 지게 됩니다. 내가 앞장섰다가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그 책임을 다 뒤집어쓰게 됩니다.


교회에서 보이는 이러한 모습을 저는 영적 성인아이(adult child)라고 부릅니다. ‘성인아이’ 란 성인의 성숙함을 이루어야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성향과 행동을 벗어버리지 못한 사람들로서 그들은 현재의 삶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고, 입히며 파괴시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딪히는 많은 일들, 책임져야 할 일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수많은 업무와 과업, 그리고 사명들을 감당해야 하는데 너무 두려운 것입니다. 너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어린 아이의 상태로 머물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엄청난 스트레스를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스스로 퇴행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못하는 이유를 스스로 정해서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현상을 영적 성인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성인인데 아직도 부모가 필요합니다. 자기들의 삶을 강력하게 야단치며 혹은 때리면서라도 이끌어 줄 지도자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 같은 이민 생활에서는 홀로 서기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의 모든 삶을 스스로 책임있게 이끌어가야 할 용기가 필요한 것이 우리 이민자들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 강성철 목사 - 우리장로교회 담임목사 >


[기쁨과 소망] 생각하며 살자

● 교회소식 2016. 11. 8. 20:45 Posted by SisaHan

칼럼을 준비하면서 ‘생각’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난 몇 주간 무엇이 바빴는지 칼럼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쓸 말이 한 동안 생각이 나지 않아 빈 깡통이 되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됩니다. ‘생각하며 살자!’


인간에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특권이고 축복인데 몇 주간 그것을 놓치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매주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나에게는 예배와 기도가 있어 참 좋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새벽기도가 있어 매일 하루를 계획할 수 있고 주일마다 예배 드리며 한 주간을 되돌아 보고 자기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설교 할 수 있다는 것. 설교를 준비하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들은 가르침은 기억에 거의 남지 않는다고 하는데 누군가와 토론한 것은 50%가 기억에 남고 누군가에 가르친 것은 90%가 기억에 남는다고 합니다. 생각해야 설교할 수 있고 남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기도와 예배생활 할 수 있고 목사로 세워주셔서 설교할 수 있고 또 이렇게 칼럼까지 쓸 수 있어 강제로라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도 섬기시는 교회에서 기회가 되시면 가르치는 자리에서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면 더욱 더 풍성하고 행복한 삶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권면 드려 봅니다.


그래도 너무 하나님 주시는 것만 거저 받아 먹는 것 같아 나도 어떤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가정에서의 더 많은 대화를 시도하려 합니다. 저희 가정은 토요일 저녁마다 온 가족이 모여 대화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두 자녀에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어려서부터 제공하기 위해 시작한 것인데 맛있는 음식을 엄마가 준비하고 식사 후 예배를 잠시 드린 후 가족을 위해 아빠가 한 사람씩 축복기도를 해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토론의 시간을 갖습니다.
한국 고등학생들의 하루 평균 공부시간이 8시간, 일본은 6시간, 유대인은 4시간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한국의 학생들이 유대인 학생들보다 우월하다 말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의 30%가 유대인, 아시아 학생은 다 합쳐도 5%가 되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4시간 공부하지만 ‘하부루타’식 공부 방법입니다. 혼자 공부하는 것이 아닌 둘 이상이 모여 토론하며 공부합니다. 시험기간 한국의 도서관은 조용하지만 유대인의 도서관은 굉장히 시끄럽습니다. 토론하려면 생각해야 하며 생각하기에 더 좋은 결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대화를 잘 하지 못합니다. 아내와 아이들과 대화하려 하면 자꾸 지시하려 하고 가르치려 하려 하고 답을 미리 정해 놓고 잔소리 하고 화부터 냅니다. 토론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또 바쁘다는 핑계로 지난 몇 주 가정의 대화 시간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명기 6장 7절 말씀입니다. 강론은 원어로 ‘다베르’, 대화와 토론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가정의 대화가 명령입니다. ‘토론하는 우리 가정 생각하는 나’ 가 되길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 박대웅 목사 - 캐나다 새순교회 담임목사 >


전도대학 10년 기념예배 드려

● 교회소식 2016. 11. 8. 20:43 Posted by SisaHan

20기까지 전도일꾼 양성 산실로

토론토 전도대학(학장 서인구 소망교회 담임목사)이 창립 10주년을 맞아 11월1일 기념예배를 드리고 전도용사 양성을 위한 새로운 도약을 다짐했다.
소망교회내 전도대학 강의실에서 열린 창립 기념예배에는 재학생과 목회자 교수진 외에 이형관 교협회장(성석성결교회 담임목사)과 최태영 목사회장(충신교회 담임목사) 등도 참석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창립 10돌을 축하했다.


전일권 목사의 찬양인도에 이어 박인기 목사(21세기 희망의 교회 담임) 사회로 드린 예배는 박웅희 목사(새빛교회 담임) 기도와 박인기 목사 성경봉독 후 학장인 서인구 목사가 ‘영적 여리고 전쟁’(수 6:15~21)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서 목사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 “어떤 일이 있어도 끊임없이 기도하며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사역을 잘 감당해 나가자”고 말씀을 전했다.
축사를 한 이형관 교협회장은 “기도가 있었기에 지난 10년의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전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전도대학이 되기 바란다”고 축원했다. 최태영 목사회장은 사행시를 통해 “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 할렐루야!”라고 축하의 뜻을 가름했다.
전도대학은 이 자리에서 서인구·양요셉(기쁨이 충만한교회 담임)·박인기 목사 부부와 허인희 장로(소망교회) 부부에게 ‘10년 개근상’을 주는 등 시상도 했다. 이날 예배는 교협 부회장인 하영기 목사(아름다운 장로교회 담임) 축도로 마쳤다.


전도대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인 복음전파와 지역 복음화를 위한 전도 및 선교 헌신자를 길러내는’비전을 내걸고 2006년 10월24일 첫 강의를 시작하며 개교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말씀을 표어로 출범해 △불신자 영혼 구제와, △토론토의 우상을 성령의 불길로 태우며, △초대교회와 같이 교회를 부흥, 성장시키는 것 등 3가지를 주제로 교회회복을 위한 전도일꾼을 훈련시켜 오며 이번 가을학기까지 20기를 맞았다.
전도대학에는 전도열정을 가진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교육과정은 전도에 대한 이론과 간증, 실제전도를 겸해 현장 전도체험에도 나선다.


< 문의: 416-391-3151, 647-207-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