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글마당] 극과 극

● 교회소식 2015. 12. 25. 11:16 Posted by SisaHan

어렸을 적 자석이 참 신기했었다. 양극이 서로 만나면, 같은 극끼리는 붙지 않는데 다른 극끼리는 서로 잡아 당긴다. 지구에 남극과 북극이 있어 서로 다른 극을 잡아당기는 자력에 의하여 지구가 존재한다. 만약 같은 극이 지구의 양끝에 존재한다면 지구는 산산이 부서져 버릴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극’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 보았더니 생각보다 많은 단어 해설이 나와 있었다. 지금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극은 뾰쪽한 상태의 끝을 이야기 함이다. 어떤 생각이나 사물, 행동 등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현상을 ‘극’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기주의가 팽배한 지금의 우리들은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현상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사회가 더욱 이기주의 같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보호하고 사랑한만큼 타인의 존재도 그만큼 보호하고 사랑하고 있다. 요즈음 전 지구촌을 불안에 떨게하고 있는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수니파 이슬람IS 는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이런 잔악함은 극을 넘어선 행위다. 세상을 살다보면,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가정안에서도 부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수가 허다하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일도 서로 옳고 그름을 놓고 다툼을 벌인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는 귀한 속담이 사라지고, 지금은 이혼율이 50%까지 올랐다하니 걱정을 하게된다. 이런 현상은 같은 극과 극이 서로 마주쳐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기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한다면 두 극은 서로 잡아당기는 힘에 의하여 하나가 되는 것을 몰라서일까? 조국을 떠나 살고있는 이민자들은 나라 걱정을 더하고 산다. 나라 떠나면 애국자가 된단 말이 헛소리가 아니다. 다른나라 사람들과 얽혀 살면서 기 죽기 싫기 때문에 더욱 조국의 발전에 기대하는 힘이 강하다. 내 나라 대통령이 이민의 나라 언론에서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정말 싫다. 들려오는 고국의 소식들이 좋지 않는 소식들로 가득하다. 서로가 잘났다고 한다. 서로가 옳다고 한다.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나라를 책임지고 좋은 나라 만들기에 온 힘을 다 해야 할 대통령은, 두 눈을 가지고 오른쪽과 왼쪽을 보지 못하고, 두 귀를 가지고 오른쪽과 왼쪽 말을 듣지 못한다면 중대한 잘못이다. 지금 맡은 직책을 잘 감당하면 나중에 역사에 자동으로 기록될 것이다.


역사는 몇 사람의 취향대로 만들어 질 수 없는 것이다. 국민이 대통령이 원하는 정책 방향으로 따라오게 만들어야 한다. 따라오라고 강요하면 안된다. 대통령의 정책을 따라 협력하여 한마음으로 나아가게 하려면, 반대 의견이 있을 때 무엇이 바른 길인지 심각하게 고민 해보아야 한다. 야당은 야당대로 정부의 일에 지킴이 역할을 해서 국민의 눈과 입이 되어야 함에도, 이미 부를대로 부른 배를 더 불려 보겠다고 밥그릇 싸움에 열심들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서로 사이가 좋은 것이 제일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성경에도 형제가 서로 화합함이 어찌 이리 아름다운가라고 기록 되어있다. 에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여덟가지 복을 말씀하시면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라 하셨다.


사람이 고집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 것은 옳은 일에 쓰여야 한다. 고집이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똥고집이라 비웃는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고, 그것을 믿어주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양치기 소년같이 맨날 “늑대가 왔어요” 라고만 외쳐대는 언론부터 똥고집 버리고 사실을 그대로 세상에 알려야한다. 세상 탓 하기 전에, 우리 교회에서도 서로 화합하여야 한다. 교회당 건물 안에 들어서면 갑자기 거룩(?)해지는 교인이 되지 않아야 한다. 세상의 빛이 되라 하셨으니 세상에서 본을 보이는, 화합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 정훈태 - 동산교회 장로 >



제 책상에는 ‘호시우보’(虎視牛步)라고 쓴 쪽지 하나가 놓여져 있습니다. ‘호랑이 눈으로 보고, 소걸음으로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언젠가 그 단어를 접하고 마음이 동해서 붙여 놓았습니다.
호랑이 눈으로 본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소걸음으로 걷는 것 또한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책을 읽다가 또 마음에 들어 온 글이 하나 있습니다.
챨스 콜슨의 “교회의 역할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개인적인 바램으로 성도들이 교회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맛 볼 수 없는 기쁨을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긴장과 경계의 끈을 풀고 평안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사회에서, 일에서...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하며, 참으로 웃을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할 교회가 그렇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에 이 마음이 더 간절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역할이 단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데 있지 않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교회는 거룩함으로 구별되어진 곳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행복해지려고 종교를 찾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행복은 포트와인 한 병으로 얻을 수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당신이 참으로 안락함을 느끼기 위해 종교를 원한다면, 나는 결코 기독교를 권하지 않겠다” C. S. Lewis의 말입니다.
두 사람 모두 교회는 행복을 지향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아니 참된 행복을 위해서라면 먼저 거룩해져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는 우리가 가진 행복으로 세상을 설득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거룩함으로 세상을 설득해야 합니다. 행복에서는 거룩함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거룩함에서는 행복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행복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하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수많은 이유로 거룩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1984년 LA 올림픽 개막식에 관한 이야기 중에 ‘벤버’라는 독수리의 이야기를 의미있게 들었습니다. 비행(飛行) 연습을 하다 스트레스를 받아 죽어 버린 독수리, 그의 이름이 벤버였습니다.
독수리는 창공을 가르고 멋있게 나를 때에 그 의미가 있는데... 나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어버린 독수리.
거룩함이 당연한 일인데, 스트레스가 되어버린 우리들의 모습 아닐런지요….
행복은 추구하지만 거룩함에는 관심없는 사람은 결코 참된 행복의 자리에 이를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016년을 목전에 두고 ‘행복한 교회가 아닌 거룩한 교회’ ‘행복한 성도보다 거룩한 성도’에 대한 부담을 가져 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호시우보’의 발걸음 잊지 않기를 소망해 봅니다. 거룩함이 우리의 참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 장성환 목사 - 런던한인교회 담임목사 >



[평신도 글마당] 타락한 인간

● 교회소식 2015. 12. 19. 10:59 Posted by SisaHan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할 뿐 아니라 마음에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기 때문에 내가 창조한 사람은 물론 모든 생물의 창조물까지 땅 위에서 쓸어버리기로 결정 하시고 매우 슬퍼하시면서 왜 이들을 창조하였는가 후회도 하셨다(창6: 5-6 참조).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사십 주야의 비를 내리게 하셔서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땅 위의 모든 창조물들을 쓸어버리셨다.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창7: 22).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몸소 만드신 인간들이 죄로 인해 타락되어 죄악이 세상에 가득할 줄 모르셨기 때문에 인간창조에 대해 슬퍼하시고 또한 후회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도저히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없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인류의 첫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죄가 들어 왔고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한 후에야 곧 바로 인간들을 구속하시기로 계획 하시고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의 벽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으로 죄를 용서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셨다고도 볼 수도 있다.


반면에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창조될 인간들이 죄를 짓고 사망에 이를 것을 다 아시고는 구속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 상에서 죽게 하셨다고도 하니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과 역사하시는 비밀들을 피조물인 인간들이 어찌 알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만이 알고 계실 뿐이다.
나의 소견으로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므로 하늘과 땅 그리고 세상만물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창조 후 또는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셔서 새 하늘 새 땅을 새로 창조하실 하나님이 이 세상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 지으심을 슬퍼하시거나 후회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된다. 만물 중 인간을 제일 사랑하셔서 창조하실 때부터 특별히 하나님의 영원한 영을 불어 넣어 주시고 자유를 주셨으며 모든 자연을 지배하는 권한까지 주셨지만 인간들이 몽매하고 우매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계속적인 사탄의 유혹으로 타락하고 악해져 가고만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슬프고 안타까워하신 것이 아닌가 사료 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오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 하나니” (렘17: 9-10).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래로 너무나 긴 세월이 흘렀다. 세상 인간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여 하는 수 없이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모든 생명들을 쓸어버리는 제1의 엄청난 심판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세상은 더욱 더 큰 죄악이 넘쳐나고 있으니 하나님의 제2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심판으로 일곱 봉인에 담긴 심판, 일곱의 나팔심판, 진노의 일곱 대접 심판이 계속된다고 성경에서 정확히 말하고 있다. 제1의 심판이 물에 의한 심판이라고 하면 제2의 심판은 불에 의한 심판임을 알 수 있다. 불에 의한 심판이 있은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마지막 죽은 자, 선자들의 영혼의 백보좌 심판으로 이 세상은 끝이 나고 영원한 하늘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탐심이 이 세상에 들어오고 탐심으로 죄를 짓고 본래 영원히 살 수 있는 인간에게 사망이 온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사탄이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에 도전한 결과이며 현재 이 시간에도 사탄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도전하고 있다. 영적 전쟁인 것이다. 영적 전쟁에서 사탄은 지금도 인간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게 하며 흑암의 세상을 건설하고 사탄의 권능과 영광을 하나님과 같게 하려는 계획으로 지금도 인간을 아담과 하와처럼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 때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망각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로 육신적 욕망대로 먹고 마시며 죄악 속에 살아가고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속으로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거짓 위선적인 믿음으로 죄를 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죄를 짓는데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음을 본다. 예로 사탄은 하나님의 진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인간으로부터 종교를 갖게 하고 종교전쟁을 일어나게 하고는 세상 인간들을 무참하게 죽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고도의 무기인 핵무기를 만들게 하고 인간 살해를 위하여 시시각각 신무기 개발에 몰두하게 하여 마지막 핵전쟁인 불 접시 심판인 불로 세상 종말이 오게 될 것이다.


기독교 내에서도 구교와 신교간의 전쟁으로 무수한 사람이 죽어 갔으며 현재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의 테러로 알라신을 위하여 라는 구호아래 무차별 많은 인간들이 죽어가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 종교전쟁으로 비화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나 사료된다. 하나님의 진리를 도용하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을 죽이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하루 속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하여 기도하여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 이외는 누구도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사탄의 유혹과 시험에서 깨어나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만 할 것이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막14: 37-38).

< 이승고 - 토론토 영락교회 장로 >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보호자 동행 없이 혼자서 기차를 탔을 만큼, 그리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본격적으로 방학 때마다 혼자 기차를 타고 외가댁을 찾아갔을 만큼, 어릴 때부터 기차 여행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조금 남다릅니다. 철길에서 올라오는 독특한 냄새를 좋아했고 열차 맨 뒷칸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좋아한 것이 기차 여행을 좋아하게 만든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각기우동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기차의 등급이 완행, 특급, 우등, 새마을호, 이렇게 4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특급 기차를 타면 대전역에서 보통 3분 정도 정차했습니다. 이 3분을 기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지루하고 따분하지만, 기차에서 내려 각기우동을 사먹게 되면 그만한 스릴감도 없었지요.
어른이면 몰라도 턱 밑에 솜털이 갓 나기 시작한 13살 소년에게는 3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뜨거운 각기우동 한그릇을 비운다는 것은 여간 만만치 않았습니다. 십중팔구는 반도 못먹었는데 3분이 지나서 기차가 움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천장이 데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없이 각기우동을 먹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기차가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급하게 우동가락을 연신 입으로 호호 불어가면서 먹었던 스릴감과 중독성 강한 그 맛은 35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은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천천히 흘러가는데, 왜 인생의 강물, 세월의 강물은 인생의 종착지에 가까워질수록 더 빨리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질까요? 그래서 한해가 지나가는 속도가 갈수록 가속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추억을 반추하며 살아간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반추할 추억이 많아지다보니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추억거리가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가요? 인생의 추억들, 그리고 신앙 여정에서의 추억들, 그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힘들고 지칠 때 잠깐이나마 얼굴에 미소를 머금을 수 있도록 해주는 삶의 청량제가 되기 때문이겠지요.


매년 이 맘때가 되면 지나간 시간의 추억에 깊이 잠기게 됩니다. 저물어가는 한해를 되돌아보며, 올 한해 어떤 추억거리가 있었는지 되새김질 해보았으면 합니다. 무슨 일들이 있었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 무엇을 남겼는지 반추해 보면서, 한해를 정리해 보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래서 “주님, 저문 해를 바라보며 당신 앞에 여전히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시처럼, 감사의 고백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쳐 나오기를 바랍니다.

< 송만빈 목사 - 노스욕 한인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