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소망] 묵은 짐과 묵은 죄

● 교회소식 2016. 1. 22. 17:49 Posted by SisaHan

지난 11월 이사를 했다. 2000년 캐나다에 와서 아홉번 째 집이요 이사로는 여덟 번째니 그만큼 캐나다 살이에 안착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싶다. 그래도 이번에는 한 집에 오래 산 편이다. 8년을 살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이번의 이사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사한 집이 전에 보다 작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세월이 그만큼 지나서 나도 아내도 몸이 느려진 탓도 분명히 있는 것 같다. 덕분에 아내는 천식까지 심해져서 병원 응급실 신세도 하룻밤 져야 했다. 아내도 이젠 약해진 것이다. 아내에겐 참 미안했다. 그나마 교우들의 돕는 손길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지금도 이사한지 두 세달이 되어가는 데도 여전히 자기 자릴 잡지못한 짐꾸러미들이 여기 저기 널부러져 있는 것이 꼭 내 영혼의 방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삿짐을 싸고 나르고 풀고 하면서, 있는지도 몰랐던 짐들이 이곳 저곳에서 나오는데 그 양이 얼마나 많고, 또 그 내용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이던지, 참 보고 있기에 돕는 손길들 보기에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목사님은 짐이 왜 이렇게 많아요!?” 하며 돕는 분들이 그냥 한 마디씩 하는데, “목사님은 참 욕심도 많은 것 같아요”하는 것같아 스스로 불편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버릴 것은 버리면서 그간의 짐들을 정리해야겠다 마음 먹었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로마서 5: 20)고 했던 바울의 고백처럼, 묵은 짐이 많은 곧에도 은혜는 있었다. 묵은 짐을 싸서 나르는 중에 내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으니,
“아! 내 속에 이렇게 묵은 죄가 많겠구나!”
“어딘 가 깊이 숨어 있어서, 그리고 오래 되어 이제는 익숙해 져서 있는 줄도 모르고, 있어도 안 불편한, 그래서 얼마든지 더 평안하고 자유할 수 있는 삶을 훼방하고 있는 이 묵은 짐과 같은 묵은 죄가 내 안에 있겠구나!” 하는 소리다.


아마도 그것은 좀 더 커지고 싶고, 좀 더 유명해지고 싶고, 좀 더 힘있어지고 싶어 하는 욕심이리라. 아마도 이런 야망은 소싯적부터 내 안에 자리잡고 어디를 가든지 내 등에 등딱지처럼 달라 붙어 따라 다니던 묵은 죄짐이지 싶다. 또 이 정도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좀 필요한 것이고 스스로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런 죄와 허물 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리고 이 짐들이 나의 삶을 고단케 했으리라 생각해 보니 작은 공간으로 옮기는 중에도 은혜가 있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새 부대를 준비할 때다. 선교 비전이라는 새 부대에 사리와 사욕이라는 묵은 죄짐이 교묘하게 끼어들지 못하도록 깨어 준비할 때다. 소유와 자기 의에 집착하여 결국 맛을 잃은 소금처럼 쓸 데 없어 밖에 버려지는 부끄러운 제자가 되지 않도록(누가복음 14: 33-35).
오늘 따라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도 바울의 믿음이 부럽다. 그리고 기도한다. “나의 영혼에 주님의 빛을 비춰 주심으로 내 안에 묵은 죄들이 드러나게 하시고, 주님의 능력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주소서.”

< 김진식 목사 - 몬트리올 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 >



사전 허락받아야… 타 교단 파급여부 주목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가 일부 목회자에 한해 또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했다.
기감은 지난 14일 경기도 성남 선한목자교회에서 제31회 총회 임시입법회의를 열어 미자립교회 담임 목회자가 소속 연회에 직종, 근무지, 근무시간을 알려 허락을 받으면 직업을 병행할 수 있도록 의회법을 수정했다.


감리회에서는 한 해 경상비 예산이 3천500만원(약 4만$) 이하인 경우 미자립교회로 분류한다. 기감이 2009년 발간한 통계 자료에 의하면 당시 연간 경상비 예산이 2천500만원인 교회가 전체의 39.8%였다. 그동안 기감 장정에서도 ‘이중 직업을 가진 이’를 불성실한 교역자로 규정했지만, 이번 임시입법의회를 통해 미자립교회 목회자에 한해 이중직을 허용키로 했다. 기감은 미자립교회 담임목사가 이중직업을 가지고자 할 경우 해당연회 감독에게 미리 직종 근무지 근무시간 등을 서면으로 신청하여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로써 이중직 금지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기감 미자립교회 목회자에게 생계유지 및 경제적 자립의 길이 열리게 됐다.


그러나 기감 회원들은 교회재정 부족으로 기초생활비를 지급받지 못하는 담임목사를 돕기 위해 신설항목으로 상정된 교역자생활지원법을 부결시켰다. 기감 회원들은 취지에 동의했지만, 법안이 부실한 관계로 좀 더 연구하여 다루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개신교 교단 가운데 가장 먼저 ‘목회 세습’을 금지했던 기감이 ‘목회자 이중직’을 처음 허용하면서 다른 교단에서도 이를 받아들일지 주목된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부교역자 949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를 지난해 5월 발표하면서 월평균 사례비가 전임목사 204만원, 전임 전도사가 148만원, 파트타임 전도사 78만원이라고 밝혔다. 또 조사 대상자 중 37.5%는 목회 외에 다른 일을 한 적이 있거나 하고 있다고 답했고, 20.4%는 향후 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한국기독교언론포럼도 지난해 개신교 10대 주요 이슈를 선정하면서 ‘공론의 장을 연 목회자 이중직’을 뽑기도 했다.
이처럼 부업이 ‘가난한 목사’들의 고민이 되고 있지만, 기감을 제외하면 공식적으로 이중직을 허용하고 있는 교단은 없는 상황이다.


조성돈 실천신학대학원대 교수는 “직업이 두 개인 목회자가 적지 않은 현실에서 교단들이 묵인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면서 “지난해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있었고 기감이 올해 이중직을 허용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지속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편 기감은 임시입법회의에서 여성과 젊은 세대의 총회 참여도 확대했다. 총대의 성별, 연령별 쿼터제가 도입된 것. 앞으로 기감 연회와 총회의 대표의 15%는 여성으로 선출하기로 했으며, 또 15%는 50세 미만의 사람 중에서 선출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기감 내부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감독회장 임기 2년 전임 후 은퇴’ 안건은 정족수 미달로 폐기됐다.



세상은 때때로 영적 축복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 계약을 맺지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흔히 이 세상의 큰 부(富)를 많이 소유하고 있다. 비록 다른 사람들처럼 많이 가지고있지는 않지만 자기가 지니고 있는 것이 넉넉하다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나는 넉넉하다,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욕심이 다른 사람의 겸손한 친절을 이용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어리석게 다른 사람의 관용에서 자기의 이익을 취득해서도 안된다. 또한 서로 불화했던 믿음의 친구들 사이의 우정이 회복되어 화목하게 되고, 사랑할 수있게 되는 것은 참으로 축복이고 즐거움이다.


우리의 신앙이 사람들로 하여금 관대하고, 마음이 자유롭고, 인색하지 않고, 유치하고 간교한 일을 경멸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 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것은 복음 안에 있는 깨(깨닫고), 충(충성하고), 사(사랑함)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불화했었던 믿음의 형제, 자매와 화해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그 우정을 더 개발하고 서로 겸양하여 더욱더 예의를 갖추는데 게을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들의 자녀의 짐은 때때로 장성하자마자 우리에게 근심 거리가 되는 때도 있다. 신앙심 깊은 부모들이나 사역자의 자녀들이 비행을 저지르기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괴로울 때, 그것이 자기들만의 유일한 경우이고 전례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선한 사람은 놀라서 아무런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람처럼, 자기 마음의 평화를 묵묵하게 지켜나간다. 아니면 <다윗>처럼 실수를 범할까 두려워서라도 그러한 사람은 침묵을 지킨다(시39:12).


그러나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어긋남에 침묵의 한계를 넘어서도 안된다. 그들 앞에 <정직>함을 보이는 것은 얼마나 크나 큰 교육인가! 부모의 권위가 가정에서 실추되면, 잘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집안 식구들은 각자 규칙을 지키고, 자녀들은 모든 중요한 일에 복종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항상 우리의 감사와 봉사는 주님의 은혜에 합당한 것이 되어야 한다. <복음>은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도록 했다. 사도<베드로>는 좀 더 높은 사랑의 차원을 향하여 순전한 마음으로 피차 뜨겁게 사랑하자고 말하고 있다. 우리 크리스천은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1:22), 율법 아래서의 레위인들의 정결케 함이나, 그 밖의 사람들의 위선적인 정결도 이 일을 해낼 수 없다. <복음>은 영원한 진리로 존속하여 거듭(중생)난 사람들의 심령에 영원토록 살아 남게된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마음은 복종의 가장 가치있는 보답이 된다. 우리가 주 하나님을 예배하면 할 수록 더욱 하도록 허락받으며 더욱 더 예배하게 될 것이다. 즉 열매를 맺는 나무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될 것이다” (요 15:2). 우리가 돌이켜 보아야 할 사건들 중에 한국 기독교의 참상을 뒤돌아 보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우리의 경제가 비록 지극히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주님의 증거로 우리들의 발을 돌이켰기>때문에, 또한 신실한 크리스천들은 주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규범으로 삼고 그 규범에 따라 행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곁길로 갔던 다른 길에서 돌아와 주 하나님의 증거로 돌이켰다. 그들은 주님의 증거로, 그들의 눈을 돌이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발도 돌이켰고, 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참회>를 실행 하도록 주님의 말씀에로 돌아왔다. 그들의 영혼이 주 하나님의 증거와 말씀을 향하여 굽혀지고 기울어 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복음>에 의해서 다스려지게 되었다.


그런 연고로 당시에 한국교회는 교회부흥의 횃불이 되었던 참회에서 <회개>로 교인들이 <성도>들로 바뀌는 부흥의 물결을 이루었다. 오늘날 우리는 바로 천국이 가까와지는, 우리들 앞에 놓여진 <참회하는 반성>으로 결국 경건한 결심을 창출하며, 세상을 향하여 모본을 보이는 <믿음(신앙)>생활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있을 때 우리는 ‘더 편안한 시기’로 그것을 미루지 말고, 쇠가 달았을 때 때려야 하듯이 신속히 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부를 때에 응답하시는 주 하나님께서는 나의 탄원을 허락하시고, 나의 호소를 판단하시는 주님이시다. “주의 긍휼하심을 인해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훌륭한 간구가 되는 것인 줄 믿는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며,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비밀을 지킴으로”우리는 바른 교훈과 선한 행실을 더욱 더 열심히 지키게 된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견고히 지키는 길은 경건한 믿음을 사수하는데 있다. 그런고로 건전한 믿음 위에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세우고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세우자!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에’ 우리의 <기도>는 가장 큰 효험을 얻게 된다.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



[기쁨과 소망] 저것은 벽

● 교회소식 2016. 1. 15. 17:49 Posted by SisaHan

저것은 벽.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벽이 가로막혀 있으면 절망스럽습니다.
저 벽은 넘기 힘들다고 느껴지면 좌절하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높고 두터운 벽들을 많이 만나게 되지요.
사람과의 관계 가운데 세워진 벽, 재정 어려움의 벽, 건강의 벽, 불가능한 꿈의 벽.

그중에서도 우리 신앙인들은 때로 ‘말씀실천‘의 벽을 만나기도 합니다.
말씀을 몰라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도 아니지만 그 깨달음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는 비애감마저 들기도 합니다. 몰라서 못하면 변명이라도 있겠지만 잘 알면서도 못하는 것에는 스스로 ‘위선‘이란 생각에 마음이 곤고해집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지식이 늘고 알아가는 기쁨이 더 큰 부담감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것은 벽,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하며 고개가 떨구어지는 때가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담쟁이는 꿋꿋이 그런 벽을 오른답니다. 담쟁이는 묵묵히 서두르지도 않고 앞으로 나아간답니다. 담쟁이는 늘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벽을 올라간답니다. 저희 집 뒤뜰에도 정확한 식물명은 모르겠지만 봄에는 담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를 기릅니다. 매일 나가보면 늘 그 자리 같지만 한 두서너 주 만에 나가볼 때면 어느 순간엔가 담을 훌쩍 넘어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높은 벽은 그렇게 넘어야하는가 봅니다.
조금씩 서두르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벅차기에 여럿이 더불어 힘을 합해 오르는 것입니다. 계속 그 자리인 것 같이 느껴지겠지만 일 년, 오년 세월이 지나 아래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히 높이 올라와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어느새 담쟁이 잎 수천 개를 거느리고 말입니다.
할렐루야!

시 한편이 주는 위로가 큽니다.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 남을 수 없는 /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노승환 목사 - 밀알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