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세상교회 4주년 감사

● 교회소식 2017. 3. 28. 20:0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온세상교회 임직식에서 서약하는 장로부부 및 권사·집사 등 임직자들.

“오직 믿음·주님 마음으로 사명을”
장로 등 임직식 가져

온세상 장로교회(담임 지근혁 목사: #1,2-1110 Finc Ave., W., North York M3J 3M2)가 3월19일 주일 오전 11시 교회설립 4주년 감사예배를 드리고 오후 5시30분에는 김선양· 임흥순 장로 및 김무창·이원린·황은석 집사와 송순옥·송영자 권사 임직 및 송병환 집사 은퇴식을 가졌다.
미주 한인예수교장로회(KAPC) 캐나다 노회 주관으로 가진 임직 및 은퇴식은 지근혁 목사 사회로 1부 예배를 드린 후 진행됐다.


예배는 최영덕 장로의 기도와 찬양대의 ‘글로리아’ 찬양에 이어 노회장인 지근우 목사(런던 안디옥교회 담임)가 ‘너 하나님의 사람아’(딤전 6: 11~12)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지 목사는 임직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았기에 이런 복된 자리에 선 것”이라며 ”오직 믿음으로 사명을 감당하고, 남을 세워주고 낫게 여기는 사람으로 교회를 세워 나가며, 서로 짐을 져주고 사랑으로 섬기는 코이노니아 공동체의 모습으로 나가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2부 임직 및 은퇴식은 임직자들과 교인들의 서약, 장로 안수기도 및 악수례, 집사 안수기도 및 악수례, 공포, 착의식 및 임직패 증정 등이 있었고 이어 은퇴식이 이어졌다.
권면에 나선 서인구 목사(소망교회 담임)는 빌립보서 2장5절을 인용하며 “예수님 마음으로 살라.‘주님의 마음을 본받은 자’라는 찬송가처럼 성도들과 교회 모두 주님 마음으로 큰 역사를 이루어가기 바란다”고 축원했다.


송병우 장로는 축사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모두의 본이 되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기에 힘쓰는 직분자를 소망한다”고 조언했다.
임직자를 대표한 김선양 장로는 답사에서 ”교만하지 않고 결코 계급장으로 여기지 않으며 먼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받는 모두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예배는 지근우 노회장의 축도로 마쳤다.


< 문의: 416-888-7078 >


캡스톤교회 최정근 담임목사 취임예배 드려

● 교회소식 2017. 3. 28. 19:5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캡스톤교회 최정근 담임목사 부부와 김희수 노회장 등 노회임원들.

“값진 목장에서 겸손한 섬김을”

캡스톤교회(Capstone Presbyterian Church: 2 Nobert Rd. M1T 1C1)가 최정근 담임목사 취임 감사예배를 3월19일 주일 오후 해외한인장로회(KPCA) 캐나다 동노회(노회장 김희수 큰무리교회 담임목사) 주관으로 성도들과 축하객 등이 참석한 가운데 드렸다.


노회 서기인 이충익 목사(시냇가에 심은 초대교회 담임) 인도로 드린 예배는 조영 목사(Young Cho: 캡스톤교회 EM)가 대표기도하고 호산나찬양대가 ‘주님 다시오실 때까지’찬양을 한 뒤 노회장 김희수 목사가 ‘어렵고 힘들어도’(시 90:10~17)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김 목사는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생활을 해나가야 한다”며 3가지 말씀을 주었다. 김 목사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세월의 빠름처럼 지나가버림을 알고, 모든 일을 하나님 뜻으로 받아들여 웃고 기쁨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하시기를 원하시고 맡겨주신 사역을 순종으로 열심히 힘써 해나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자”고 전하며 도전을 주었다.
취임식은 고승록 목사(참좋은 복된교회 담임)가 최 목사의 약력을 소개한데 이어 김희수 노회장이 취임을 선포하는 것으로 마치고 EM찬양팀 축송이 있었다.
축하 꽃다발을 받은 뒤 인사말에서 최정근 목사는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을 본받아서 캡스톤의 선한 종이 되도록 힘쓰며 토론토의 여러 형제교회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임시당회장을 지냈던 김학관 목사(토론토새문안교회 담임)는 권면과 축사를 통해 최 목사에게 축하의 뜻과 함께 “보고 듣고 말하지도 못한 헬렌 켈러 여사가 단 3일만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다고 한 일화를 생각할 때 귀하고 값진 섬김의 목장을 허락하신 하나님 축복에 감사하며, 큰뿔사슴(Megaloceros giganteus)이 계속 자라는 뿔 때문에 멸종됐다는 사실을 교훈삼아 주님이 달아주신 영광의 뿔이 잘못 사용되거나 교만으로 흐르지 않게 경계하면서 겸손히 희생하고 섬기는 목자의 길을 가라”고 권면, 같이 고민하는 선배요 동료목사로써 조언한다고 밝혔다. 최 목사는 김 목사에게 당시당회장 노고에 대한 감사패를 전했다.
이날 예배는 김기일 장로의 광고에 이어 박치명 목사(양문교회 담임) 축도로 마치고 성도들은 만찬을 함께 했다.


< 문의: 647-923-1975, 416-460-1789>


[기쁨과 소망] 생각의 상자

● 교회소식 2017. 3. 28. 19:4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세상에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알렉산더 워틀리는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평생 나무로 만든 작은 상자 안에서 살았다. 그 상자가 자신의 방이요 집이었다. 그 상자의 크기는 폭이 약 1m, 길이가 1.2m 높이가 1.5m 였는데, 그는 80세에 죽을 때까지 그 상자에 들어가 살았다. 돈이 없거나 도(?)를 닦기 위해 그런 곳에서 지낸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상자 안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여겼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의 생각이 그를 그 작은 상자에 갇혀 있게 했다.


우리는 이 사람을 비웃을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생각의 상자 안에 갇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끝까지 고집한다.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생각을 더 바꾸면 더 좋은 길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고집한다. 우리도 종종 작고 좁은 생각의 상자에 갇혀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못해, 나에게는 너무 벅차, 나에게는 너무 할 일이 많아, 난 자신이 없어.’ 이런 두려움과 어두운 생각의 상자들, 우리는 이 생각의 상자를 깨야한다. 그런데 이 생각의 상자를 깨는 일은 쉽지 않다.
줄탁동시(口卒啄同時)! 닭이 알을 깔 때에 알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기 위하여 껍질 안에서 쪼는 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 깨뜨리는 것을 ‘탁’이라 한다. 우리의 생각의 상자를 깨고 나오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의지로만 되는 것도 아니고 외부의 변화가 있다고 내 자신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외부의 자극과 내 의지가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한 시립병원 정문에 누군가가 갓난아이를 버려두고 갔다. 이 아이는 모든 것이 비정상이었다. 우유를 물려주어도 우유조차 빨지 못했다. 아마 부모는 이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어서 버리고 간 모양이다. 병원에서는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회의를 했다. 그 병원에는 52세가 된 메이 램키라는 간호사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 아이를 키우겠다고 자원했다. 메이는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자신에게 보내셨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우유도 빨지 못하는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면서 끈기 있게 기도했다. 메이는 이 아이를 레슬리라고 이름 붙였다. 레슬리는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생각도 못하는 아이 같았다.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없었다. 메이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레슬리를 돌보았다. 레슬리가 18세 되었을 때 어느 날, 메이는 처음으로 레슬리가 무엇엔가 반응하는 것을 보았다. 메이는 18세의 레슬리가 기타 줄을 손으로 튕기는 것을 보았다. 메이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레슬리를 깨우는 것은 음악이다.’ 메이는 레슬리가 음악과 함께 살도록 늘 아름다운 음악을 틀어 놓았다. 그리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레슬리를 피아노 앞에 앉혀 놓고, 그녀의 손을 들어 피아노 건반을 눌러 주었다. 그러나 기타의 줄을 한 번 튕긴 이 후로는 다른 변화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메이는 실망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면서 그녀의 일을 계속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어느 날 새벽, 메이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그것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연주곡이었다. 메이는 조심조심 거실로 나갔다. 거실의 피아노 앞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레슬리였다. 아무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고 여겼던 레슬리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놀라서 할 말을 잃고 서 있는 73세의 메이에게 레슬리가 다가와 그녀를 안고는 한 없이 울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매스컴은 메이 할머니와 레슬리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제목을 ‘사랑과 기도의 기적’이라고 붙였다. 사랑의 기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기도가 생각의 상자에 갇혀 있던 레슬리를 구한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과 간절한 기도는 우리의 좁고 어두운 생각의 상자를 깨는 힘이다. 지적과 폭력으로는 깨어지지 않는다. 헌신적 사랑과 간절한 기도, 지금 우리와 공동체에 절실히 필요한 힘이다.

< 문은성 목사 - 기쁜소래교회 담임목사 >


[평신도 글마당] 가시(可視)거리

● 교회소식 2017. 3. 24. 18:2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7박8일의 두 번 째 쿠바 여행을 마치고 돌아 왔다. 쿠바의 맑은 하늘은 달도 별도 눈 시리게 밝은 빛을 발하게 만들었다. 샛별은 마치 큰 다이아몬드를 하늘에 콕! 박아 놓은 듯 보였고, 달이 너무 밝아 렌즈에 빛이 반사되어 선명한 달의 모습을 담을 수 없게 만들었다.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 “우리의 눈은 낮에 더 멀리 볼 수 있는가? 밤에 더 멀리 볼 수 있는가?” 당연히 밝은 낮에 우리들은 사물을 더 확실하게 구분 할 수 있다. 그러나,그 빛이 너무 밝아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있다. 낮에는 볼 수 없는 별들이 밤에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러니 밤에 더 멀리 볼 수 있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의 눈도 하나님의 걸작 중의 걸작이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림으로, 사진으로 표현들 해보지만 직접 보이는 그 아름다움만큼을 절대 표현 할 수 없다. 아주 예쁜 꽃만 보아도 눈에서는 눈물이 나온다. 눈은 보아 온 결과를 축적하여 사물과 행동을 평가하게 되므로 가능한 많은 것을 보아야 더욱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바로 안목을 높이는 일이다.
안목이 좋으면 더 멀리 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을 우리는 ‘안목이 넓다’라고 말 한다. 가시거리가 넓고 깊은 사람이 되려면 많은 지식과 지혜가 함께 하여야 하므로, 우리의 눈은 정말 중요한 기관인 것이다.
여행 중에도 똑 같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보는 눈이 있고, 별로 눈에 띄는 것이 없는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 많아 눈에 담기에 바쁜 데, 어떤 이는 그저 생각없이 사물들을 훑어보는 것으로 시간을 채우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들의 눈은 어차피 가시거리가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가까이 보고자 현미경을 만들었고, 더 멀리 보고자 망원경을 만들었다. 현 시대의 과학이 최첨단이라 하지만, 지금의 변화하는 속도를 보아서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참으로 예측하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일까, 요즘에도 사주를 보고 궁합을 보는 젊은이들이 있다 하니,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눈으로 보는 거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거리까지 내다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눈으로 착하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였으면 좋겠지만, 세상이 모두 그렇지가 아니하다.
문득 예수님의 눈을 생각해 보았다. 예수님께서 이 시대를 보시는 눈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예수님의 눈에는 사물보다는 내면을 더 잘 들여다 보는 눈을 가지셨다고 생각해 본다. 우리들도 겉 모습 만을 보는 눈이 아니라 그 겉모습 속에 감추인 보화를 찾아내는 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쿠바의 남루한 모습 속에 감추인 그들의 슬픈 사연도 함께 공감하면서, 자연을 사랑하고 잘 지켜내고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냈을 때 느끼는 기분은 참으로 짜릿한 기쁨이었다. 가시거리만을 따지자면, 사실 눈을 뜨고서는 멀리 보지 못한다. 눈을 감았을 때에야 우리는 한없이 넓은 세상과 미래, 그리고 지나온 과거,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운 내 고향 산천까지 볼 수 있게 된다. 가끔 한 번씩 눈을 감고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꺼내어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만이 누릴수 있는 하나님의 기막힌 선물을 누려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내 눈이 볼 수 있는 가시거리는 한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시간을 잠시 누려 보았다.

< 정훈태 - 동산교회 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