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교회 담임목사를 사임한 노승환 목사가 미국 뉴저지의 대표적 한인교회 중 하나인 미국장로교 동부한미노회 소속 찬양교회(Praise Presbyterian Church: 담임 허봉기 목사, 15 Cedar Grove Lane, Somerset, NJ 08873 USA)에 청빙이 확정됐다.
찬양교회는 지난 10월17일 주일 ‘동사목사’ 청빙을 위한 특별공동의회를 열고 노승환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정했다. 투표에는 찬성 360, 기권 4표 외에 반대자는 한명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교회 허봉기 담임목사는 내년 3월 은퇴할 예정이어서 노승환 목사는 동사목사로 청빙된 뒤 오는 12월말 부임해 허 목사가 은퇴하기 일주일 전 후임 제4대 담임목사로 위임될 예정이다. 노 목사는 12월 초 미국장로교 노회의 허락을 받고, 12월 중 밀알교회를 떠나 마지막 주일에 찬양교회에 부임할 예정이라고 교회측이 밝혔다.
노승환 목사가 부임할 찬양교회의 허봉기 담임목사는 22년여 동안 시무왔으며, 65세 조기은퇴를 선언했으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은퇴가 2년여 미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원로목사 추대나 은퇴식도 없이 조용히 은퇴할 것으로 전해진 허봉기 목사는 연세대 신학과와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1999년 11월 뉴저지 찬양교회 3대 담임으로 부임했다.
허 목사는 신실한 리더십으로 교인들의 신뢰 속에 뉴저지를 대표하는 대형교회로 성장시켰으며, EM 독립과 교회 내 파격적인 직분제 및 호칭제 도입 등으로 주목을 받는 등 현지 교계에서는 “찬양교회와 허봉기 목사는 뉴저지 교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교회로 성장했다”는 평가가 전해진다. < 문의: 732-805-4050 >
포스트 코로나 시대 변화된 상황 속에서 한인교회와 목회의 새로운 방향을 고민하고 모색하는 목회자 컨퍼런스가 본 한인교회(담임 고영민 목사) 주최로 지난 10월17일 주일 오후 7시부터 온라인 화상모임으로 열렸다.
온타리오 한인교회협의회(회장 이요환 소금과 빛 염광교회 담임목사)가 후원하고 한국 포항제일교회 박영호 담임목사(시카고대학 박사, 전 한일장신대 교수)와 목회데이터연구소 지용근 대표(지앤캠 리서치 대표)를 강사로 열린 이날 컨퍼런스에는 온타리오 각지는 물론 캐나다 동-서부 전국에서 40여명의 한인 목회자가 참여해 3시간 가량 심도있게 진행됐다.
모임은 고영민 목사의 사회로 이요환 목사가 개회인사와 시작기도를 하고 박영호 목사가 ‘포스트 코로나시대의 교회론’제목의 강의를 한 뒤 최재만 목사(한우리교회 담임)의 논찬이 있었다. 이어 지용근 대표의 ‘코로나 이후 목회방향’강의와 노희송 목사(큰빛교회 담임)의 논찬, 그리고 질의응답을 가진 뒤 송민호 목사(토론토 영락교회 담임)가 격려인사를 한 후 마무리 기도로 마쳤다.
이날 박영호 목사는 코로나 팬데믹을 전후한 경제 사회적 변화 속에 달라진 인류의 삶과 가치관 및 탈종교화 추세 등에 직면해있는 교회의 현실을 분석하고, 급변하는 패러다임에 어떻게 적응해 나갈 것인지를 제언하는 주제를 다뤘다. 지용근 대표는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통계분석 자료를 제시하며 교회와 목회가 처한 상황과 미래를 조망하면서 활로를 찾아야 할 과제와 도전을 주었다.
논찬과 질의응답에서는 이민교회의 특성과 디지털 및 노령화 시대 교회와 목회의 방향, 신앙성숙을 위한 방법론 등이 논의됐다.
행사를 주관하고 진행한 고영민 목사는 이번 컨퍼런스에 대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 목회를 고민하는 데 귀한 조언과 화두를 던져주었다고 본다”고 자평했다. 고 목사는 이어 “앞으로의 목회방향을 공동으로 모색해 나가는 또 다른 시작이었으면 좋겠다”면서 “선교적 목회, 소그룹, 제자훈련 등 중요한 목회적 이슈들을 나누는 지속적인 모임이나 포럼으로 발전시켜 캐나다 전체의 이민목회 생태계를 건강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하며, 구체화에 노력하겠다”고 밝히고 한인 목회자들의 관심과 참여를 당부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교회론’ 주제 박영호 목사 강의 요지
"성장문화 선도한 교회, 이젠 그 역풍 직면... 겸손해져야"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바벨론 포로시대는 수십 년을 견뎌야 하는 상상하기 힘든 시기였는데, 예레미아 29장 7절 말씀은 그들의 탁월한 현실적응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언제일지 모르는 고난이지만 삶에 최선을 다하며 지나고 보니 하나님의 역사였고, 모른 채 따라가다 보니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알게 되는,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옥에서 나와 깨달은 것 같은 압축적인 성경의 예시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포로상황에서도 하루 3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습성을 견지한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교회의 여러 현실을 보자. 한국 뿐 아닌 세계교회 모두 구심력이 약화됐다. 온라인이 일상화되면서 예배를 꼭 교회에서, 그 시간에 드려야 하나, 목사만 설교해야 하나 등 교회의 거버넌스에 문제가 생겼다. 개신교는 그 부분에 탁월하다고 믿었는데, 코로나 상황 속에 가톨릭보다 못한 상황으로 침몰한 것이다.
경제성장 신화의 첨병으로 자본주의적 인간형의 사고와 문화를 만드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교회였다. 성장신화와 ‘복 받음’의 혜택을 누려오다 극심화된 상황에서 코로나가 닥쳤고, 방역에서 최우선 가치가 경제 지키기, 곧 돈이다 보니 이제 교회는 그 뒷전으로 밀려나는 상황으로 본질이 드러난 것이다. 그렇잖아도 전세계적 탈종교화에서 한국은 가장 속도가 빠른 곳이다. 거기에 코로나 방역에서 가장 앞선 한국, 코로나 걱정도 세계 최고인 한국인들의 비난 문화에서 교회가 방호막이 되어주기는 커녕 일부 교회의 감염문제로 오히려 비난이 교회에 쏟아지며 당황하게 되었다.
전세계적으로 이젠 ESG(Environment 환경, Social 사회, Governance 지배구조) 지속가능한 투명 경영문제가 기업 뿐 아니라 각 부분으로 확산되면서, 교회에도 신학적 충돌과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요구되는 시대에 와 있다.
또한 다음세대는 청소년이 아니라,노년이라는 시대가 오고있다. 고령화 사회 속에 이민사회의 경우 언어와 문화적 고충, 디지털 문화 열등감 등의 고민에 싸인 노년세대를 잘 품고 가야하는 것도 교회의 과제인데, 은퇴 후 30~40년 사는 노년세대에 대한 연구가 너무 부족하다.
1인 가구의 증가현상도 있다. 요즘엔 가족을 강조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코로나 이후에는 인간론적 담론, 기본적인 인간의 본성과 생태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대처해야 하는데, 보수적 교회일수록 예수 말고는 달라질 게 뭐냐는 문화적 충격에 직면한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성장과정에 서구문화를 바탕으로 가장 앞서있던 교회가 이제는 가장 뒤진 집단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최근 한국의 문화콘텐츠가 세계를 휩쓸면서 이민교회가 이를 잘 활용하면 젊은이들의 문화적 자부심을 높이고 교회로 인도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현대 경제번영의 시대에 종교의 역할은 ‘떡’으로 만이 아닌 뭔가 공감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인데, 성경적 코이노니아가 바로 중요한 본질적 지혜가 되진 않을지. 코로나 격리로 인해 커진 만남의 그리움을 실천하는, 마스크 벗고 율법적이 아닌 진짜 친밀하고 신실한 소그룹 모임을 갖는다면 바로 모세의 친족개념이 아닐까.
한국교회는 또한 너무 추상적이고 아이디얼 하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구름잡듯 하는 이상적 교회를 말들 해 듣기에는 그럴싸하나, 학자나 지식인이 비판하기는 쉬워도 추상적인 담론에 그칠 뿐이다. 그래서 현실적이고 실제적으로 ‘건물이 교회가 아니다
라고할 때 출발점은 겸손한 교회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킨다며 교만해지고 갈등이 커지는 만큼 내 눈의 들보를 보는 태도로 겸손해져야 함이 중요하다.
우리는 각자의 현실에 맞게 서로 영감을 주면서 방법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본다.
[논찬] 최재만 목사
포스트 코로나 시대 목회의 실제를 함께 고민할 다양하고 방대한 실천적 제안을 해주어 감사하다. 아쉬운 점은 한국과 북미교회의 현실이 다르다는 점에서 이민교회가 직면하는 색다른 문제들을 좀더 다뤄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 개개인의 밀접한 친밀도로 성장한다는 목표를 세운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 실제적인 연합의 방법은 뭘까 고민되는 데, 각자의 삶과 상황에 맞게 찾아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바벨론포로 된 유대인들 공동체,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고난 중에도 예배의 관습을 이어감으로서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는 말씀인가.
‘코로나 이후의 목회방향-한국교회 변화와 추적’ 주제 지용근 대표 강의요지
"온라인 예배 새 포맷 필요...소그룹 활동 강화도 활로"
한국은 출산율이 최저수준이다. 지난해 30만명 아래 27만명, 올해는 24만명으로 예상된다, 반면 고령화는 빠르게 진척돼 2045년 65세 이상이 37%, 2067년에는 국민 반이 될 것이다. 30년 뒤 2050년 경제활동 가능인구가 51%로 줄어들어 젊은이 한명이 노인 한 명을 먹여살려여 한다. 개신교도 고령화로 60대 이상이 23%인데 10년 후에는 34%로 증가가 예상된다. 따라서 교회의 노년층 사역이 중요해지고 있다.
코로나 블루로 20~30대의 우울증 위험군이 지난 한해 사이 18%에서 23%로 늘었다. 자살률은 OECD 1위로 연간 1만3천여 명에 달하며, 20대가 가장 많다. 소득 양극화로 하위 20%의 순자산에 비해 상위 20%의 순자산은 167배나 된다. 이런 가운데 탈종교화가 심화돼 무종교가 60%에 달한다.
코로나 이후 교회의 사역은 20~30% 수준으로 줄었고 주일학교는 42.2%가 감소해 가장 심각하다 .장년은 30%, 헌금 25%, 구제 봉사는 37.2%가 줄었다. 신앙도 약해졌다는 응답이 30%나 된다. 코로나 이후 신앙도 양극화가 심화됐다. 특히 온라인 예배자의 신앙약화가 두드러진다.
코로나 이후 3명중 2명, 66%는 온라인으로 주일예배를 대체할 수 있다고 했고, 그 중에 51%는 타교회의 온라인 예배를 들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가나안’성도의 온라인 참여율은 지난해 21%에서 올해는 36%로 늘어난 점이 눈에 띈다. 온라인 예배 만족도는 83%로 높은 편이다. 현장예배는 89%, 가정의 방송예배는 66%가 만족스럽다고 했고, 예배를 드리며 찬양을 함께 하는 경우는 58%, 가만히 듣는 경우는 42%였다. 온라인 예배자를 위한 별도의 포맷을 개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종식 후 현장예배에는 78%가 참석할 것이라고 답했고, 5%는 온라인을 계속하며, 15%는 현장과 온라인을 병행하겠다고 말했다.
목회자들은 코로나 이후 교인이 감소할 것이다 57%, 변함 없을 것이다 25%, 증가할 것이다 16%등으로 예상했다. 그에따라 목회중점은 주일 현장예배를 강화하겠다 45%, 공동체성을 강화하겠다 29%, 온라인 강화 13%, 온라인 시스템 구축과 콘텐츠 개발 38% 등으로 답변했다. 또 주일예배를 계속 중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52%가 현장과 함께 하겠다고 답했고, 현장예배만 드릴 것이라고 한 비율은 41%였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온라인을 끊으면 30%가 교회에 가지않겠다고 말한 점이다.
교회학교 감소 속도는 일반 학령인구 감소보다 6배나 빠르다. 이는 부모 자신과 청소년 모두 신앙생활이 소홀해졌다고 답한 경우가 53%에 이른 것에서도 볼 수 있다.특이한 것은 코로나 이후 부잣집 아이들의 신앙이 좋아졌다는 사실이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청소년의 대부분은 예배 전 72%, 후 85%가 유튜브로 음악과 게임, 오락 드라마 등을 본다고 했다. 그에 맞는 대책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유튜브 선호가 강해서 10~20년 후에는 온라인을 하지않는 교회는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부모가 자녀들이 신앙을 잘 이어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는 19%였고, 비슷할 것 47%, 못할 것 27% 등 이었는데, 부모가 자녀의 신앙교육 방법을 잘 모른다 48%, 자녀 신앙교육 방법을 받은 경험이 없다는 부모는 73%나 돼 교회의 부모대상 자녀 신앙교육이 절실함을 나타냈다. 자녀 신앙교육 영향은 어머니가 32%, 아버지 13%로 1,2위였고, 그 다음이 목회자였다. 그리고 주일예배를 드리는 가정의 자녀들의 긍정적 지표가 다방면에서 높게 나와 가정예배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코로나 이후 교인들의 소그룹 활동이 크게 위축됐는데, 개인 신앙유지에 가장 도움을 받은 것은 소그룹이고 리더와 멤버로 섬김이라고 했다. 정기적인 소그룹 활동자들의 가정 신앙지표가 긍정적이라는 답변이 10%에서 30%가 높았다. 미국 남침례교단의 톰 레이너 박사가 5년을 추적 조사한 결과 소그룹을 통해 교회 활동이 5배나 늘고 86%의 성도가 교회에 남아 교회가 건강해지면서 ‘교회의 뒷문을 닫게’도와준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큰 교회들의 소그룹활동과 성과가 두드러진데, 작은 교회들에게 더 소그룹 활동이 대안이 아닌가 여겨진다.
[논찬] 노희송 목사
캐나다를 보면 주류교단이 먼저 쇠퇴하고 그 여파가 이민교회에 몰려오는 것 같다. 탈종교화하는 이들, 특히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코로나 이전부터 이미 노년세대 기성세대가 교회를 지탱해왔고, 청년과 여성리더십 보다 목회자 중심 주입식이 아니었나 부족을 고민한다. 다니엘이나 느헤미야 같은 디아스포라적 신앙생활로 이민교회가 한국교회에 희망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예배자가 아닌 시청자로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는 이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겠다. 한국교회의 소그룹이 큰교회에서 더 잘 이뤄지는 것은 작은 교회들이 적극 시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인가.
인간의 탐욕을 소재로 만든 드라마가 인기다. 저마다 인생의 쓰라린 고통을 당하지만, 자신들 또한 456억원에 눈이 멀어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고 게임에서 이겨야만 살아남는다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 이야기다. 왜 이 드라마가 한국을 넘어 80개국이 넘는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고 동시에 드라마 부분 시청 1위가 됐을까? 단순히 황금 만능 시대의 부패와 잔인함 그리고 인간의 얕은 속셈을 적나라하게 또 재미있게 표현 해서일까? 사람마다 관심도 다르고 보는 관점도 다 다르니 그 해답도 한 두가지는 아닐 것 같다.
내 관심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게임들이다. 줄다리기, 구슬치기, 달고나 뽑기, 오징어 게임 등은 내 어린 시절에도 매일 즐기던 ‘일상 놀이’였다. 요즘 아이들이 컴퓨터 앞에서 키보드와 마우스를 누르며 게임의 세계에 점점 빠지듯이, 나는 매일같이 흙을 밟고, 제치고, 친구들과 뒤엉켜서 세모와 네모 그리고 동그라미 속에서 열심히도 뛰어 놀았다. 이렇게 놀이를 하다보면 승자도 있고 패자도 생긴다. 하지만, 놀이가 끝나면 승부는 지워지고 함께 어울렸던 짜릿함과 따뜻한 여운만 남는다.
놀이는 혼자 할 수 없다.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재미가 없다. 함께 할 상대가 있을 때, 놀이의 진면모를 누리고 즐길 수 있다. 옛 놀이들도 하나같이 함께 어울려 했던 놀이다. 그런데 사는게 힘들고 바쁘다 보니 함께 어울려 놀던 일들은 점점 잊혀지고 멀어져 추억의 한 켠에만 남아있다. 정작 외로운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이 어울림 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다 큰 어른에게 무슨 놀이이고 어울림일까? 싶다가도 놀이의 모양만 다를 뿐 어울림은 어른이나 아이들이 일상에서 누리고 또 결핍되면 아쉬움의 그늘이 드리워지게 마련이다. 어린 자녀가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만큼 속상한 일도 없듯이,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 어울릴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아담이 하와를 만나 그렇게 커다란 행복감을 느꼈듯이 말이다.
그러나 코로나가 막아온 지난 2년의 시간은 어울림 대신 격리와 비대면, 혼자 지내는 시간이 더 좋다! 는 편한 것 같지만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안겨주었다. 가족도 애인도 심지어 부모 자식도 함께 어울리지 못했다. 물론 바이러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부작용은 앞으로 확진자 숫자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피해를 입힐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불행의 시작은 끝없는 욕심에서 비롯된 악과 더불어 잃어버린 어울림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생각과 감정으로 전해지는 외로움도 있지만, 오히려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 즉 영혼의 외로움이 이 놀이와 어울림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이 어울림의 부재는 점점 인간을 고립되게 하고 결국 세상의 쓰레기 매립장에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태워져도 점점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할 것이다.
이제 다시 어울림을 회복해야 할 때이다. 영혼의 외로움을 채울 어울림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어울림을 가장 쉽게 시작하는 방법이 놀이다. 그 드라마에 등장하는 죽이고 빼앗기 위한 놀이 말고, 친구들과 손잡고 웃고 환호하며 어울렸던 그 놀이 말이다. 놀 때는 몰랐지만 아이들은 그 놀이를 할 때마다 운동하지 않아도 운동이 되었고, 공부하지 않아도 계산하게 되었다. 동물적 판단과 지혜를 놀이를 통해 저절로 배우고 몸으로 익힌 것이다. 내 영혼의 외로움도 마찬가지 아닐까? 채우려고, 살려고 하는 놀이가 아니라, 놀이를 하다 보니 저절로 영혼에 활기가 들고 하나님과 또 사람들과 함께 잘 어울리는 일상이 되지 않을까?
시대의 목마름과 코로나로 잃어버린 삶의 빈자리를 채울 어울림과 놀이가 필요하다. 목사들의 목사라고 부르는 유진 피터슨은 ‘현실, 하나님의 세계’에서 놀이와 어울림을 신자들이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영성으로 꼽는다. 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 (프랑스, 20세기)가 그린 ‘춤’을 떠올려보면 함께 어울려 손을 잡고 놀이할 때 영혼에 채워지는 풍성한 기쁨이 그 안에 있음을 본다.
올 가을은 코로나로 찌그러진 이마를 조금이나마 펼 수 있는 어울림과 놀이로 가득한 최상의 놀이터가 되기를 기도한다.
도시를 조금 벗어나서 운전을 하고 달리다보면 광활한 땅, 다양한 자연의 모습이 어울려 장관을 연출해 냅니다. 빠르게 달려서 그럴까요, 순식간에 지나쳐버리는 크고 굵직굵직한 배경에 자연스레 눈이 갑니다. 우리의 인생 여행 마찬가지로, 그럴싸 해보이고, 화려해 보이고, 조금만 시선을 움직여도 보이는 그런 배경을 마음에 담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달리던 자동차에 문제가 생기고 맙니다. 갑작스럽게 속도가 줄더니 이내 차가 멈추어 서고, 갓길에 세워놓은 차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결국 어딘가에 있을 서비스 차량을 부릅니다. 그리곤 언제나 올까 발을 동동 굴리다가 이내 길가에 털썩 주저앉고 맙니다.
그런데 그 때 생각지도 않았던 무언가로 시선이 갑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작은 들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생각보다 예쁘고, 귀엽기도 합니다. ‘넌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고, 돌봐주지도 않는데, 어쩜 이렇게 예쁘게 피었니? 이렇게 차가 멈추지 않았다면 나조차도 너를 봐주지 않았을 텐데… 그럼 아마 세상 누구도 너를 봐주지 않았을지도 모를 텐데… 그래도 넌 여기에 변함없이 피어있겠지?’ 빨리 달리던 차에선 시선조차 갈 수 없었던 길가의 들꽃, 하지만 시련이 오고, 여정이 멈추어 섰을 때, 비로소 그 들꽃이 눈에 들어왔고, 몰랐던 들꽃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됩니다. 어느새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차를 고쳐줄 사람을 기다리던 조급함은 어디에 갔는지… 알 수 없는 평온함이 내 마음에 자리하게 됩니다.
인생의 여행 속에서 하나님을 마치 차 안에서 바라보는 광활한 대지와 푸르른 하늘, 그럴싸하게 농장을 달리고 있는 말들처럼, 크고 화려하고, 눈에 잘 띄는 무언가를 통해 본다고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실상 분주하게 살아가며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정직하게 돌아보면, 뜻밖에도 그 광활한 자연과 화려한 배경의 모습은 하나님이었기보다, 내가 얻으려 애썼던 것들, 분주히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며 더 크게 얻으려 했던 내 인생의 욕심, 필요에 대한 절실함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소위 만족할만한 인생의 결과를 두고, 그 속에서 어쩌면 하나님을 찾으려 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멈추어선 자리… 그리고 돌아보게 된 들꽃… 거기에서 우리는 그동안 놓치며 살아왔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지내온 시간들이었습니다. 길 바닥 옆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들꽃의 존재, 하지만 내가 몰랐고, 내가 찾지 않았을 뿐,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자리하고 있던 들꽃입니다.
이제서야 그 들꽃을 바라보며, 분주하고 안절부절 못하던 내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들꽃의 아기자기함을 통해 이전에 누리지 못하던 평안과 기다림의 여유를 가져다 줍니다. 그리곤 무릎을 탁 칩니다. ‘그래, 바로 이것이었어. 나는 저 광활하고 화려한 무언가로 부터만, 그리고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볼 수 있는 무언가로 부터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그곳에서만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바로 여기, 아무도 관심갖지 않던 이 자리, 조용히 분주함과 내 욕심을 내려놓고, 내 삶의 힘을 빼고, 이렇게 아래를 바라보면… 여기에도 하나님은 계셨어.’ 하나님을 놓치고 살아가기 쉬운 분주하고, 인간의 열심이 가득한 이 세상, 그런 세상에 살다보니 우리가 놓치고 있던 하나님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들꽃의 자리였던 거죠. 오늘도 분주한 세상,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화려함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 시선을 돌려 낮은 곳, 구석진 곳, 힘겹고 외로운 곳, 그곳에 피어 있는 들꽃을 봅니다. 그곳에 변함없이 피어 있는 들꽃을 통해 나를 향한 주님의 마음으로 다시 힘을 내어 여행을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