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학회 강연차 와 있는데 마음은 온통 서울에 가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전해오는 ‘미투 운동’ 소식 때문이지요. 정치판이 아무리 이상한 동네라고 해도 사람에 대한 검증이 이렇게 되지 않는 동네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예술계가 아무리 독특한 인간들이 모인 곳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폭력이 난무하는 동네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87항쟁 이후 여자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도 못 본 척, 오히려 멋진 옷을 입었다고 칭찬을 해온 그들/우리는 무슨 귀신에 씌어 있었을까요?
신자유주의 광풍이 심하게 불어닥친 지난 십여년, 적나라한 사냥꾼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의 세상이 펼쳐지면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익혔던 유가 전통의 나라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수신’과는 거리가 먼 사냥꾼들이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배제와 억압이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된 차별이라는 이야기를 구태여 꺼낼 필요는 없겠지요. 호모 사피엔스가 ‘소통과 상생의 사회’를 만들어 지금껏 살아온 것은 인간의 아기는 독립적 생존이 불가능한 무력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력한 생명을 돌보면서 산모와 산모의 친밀한 가족들, 그녀의 어머니와 할머니, 여형제와 남형제와 산모의 남자친구 - 아기 아버지일 가능성이 높은 - 는 함께 돌봄과 소통의 식탁 공동체를 만들어 세대를 이어가며 살아왔습니다. 돌봄 공동체가 많아지면서 그들을 연결하는 공공영역이 생겨났고 그 영역의 어른들은 아이를 기르는 일상에서 조금 자유로운, 그러나 돌봄 공동체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지혜로운 남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상과 신에게 감사의 제사를 지내고 풍요를 기원하며 장례와 혼례식을 주관하였지요. 영겁으로 이어질 자손들의 세상을 축복하면서 예술적으로,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스스로를 승화시키는 수양과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 공공영역이 돌봄 공동체와 분리되면서 인류의 불행은 시작되었습니다. 성장과 진보의 이름으로 끝없는 이윤추구의 장으로 전락한 공공영역은 사기꾼과 거간꾼이 득세하는 영역이 되어버렸습니다. 인류가 지구상에 살아남은 것은 자신이 처한 환경의 불확실성을 줄이면서 지혜롭게 적응해왔기 때문인데 이 사냥꾼들은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인류사상 참으로 기이한 시스템이 생겨나 버린 것이지요. 더욱이 돈이 국경을 넘어 권력이 된 ‘금융 자본주의’는 그간의 영토화된 영역을 탈영토화하면서 영토 안의 국민들을 난민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습니다.


미디어 연구자 프랑코 베라르디는 괴물이 된 권력 마니아들이 판을 치는 이 시대는 범죄, 자살, 광기로 치닫고 있다면서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으로부터의 자율을 추구하는 일은 그칠 수 없다면서 “미래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저항해야 하고 사회적 연대, 인간적 공감, 무상의 활동, 자유, 평등, 우애 등에 관한 의식과 감수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근대의 미래’ 다음에 올 텅 빈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저항이 나/우리 스스로가 평화로워지는 유일한 길이기에 “자기애의 이름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투 운동은 이런 시대적 맥락에서 일고 있는 인류사적 운동이고 아주 긴 여정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정의는 공공선을 위한 지속적 돌봄이다”라는 돌봄 민주주의 운동이며, <세상의 모든 딸들> - 석기시대 인류의 돌봄 공동체를 그린 엘리자베스 토머스의 소설 제목입니다 - 과 아들들과 함께 벌여온 돌봄 공동체 운동일 것입니다.


영화인들이 임순례 감독과 심재명 대표를 중심으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을 만들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습니다. ‘든든’을 통해 앞으로는 범죄와 광기를 부추기는 배설의 영화를 안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저마다 가슴속에 원망과 원한을 안고 고독한 삶을 마감하는 시대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삼삼오오 모여서 자기 동네에 폭력을 당하는 이가 없는지 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세상을 위해 서로를 돌보며 즐겁게 싸워가야 합니다.

< 조한혜정 - 문화인류학자, 연세대 명예교수 >


제주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범국민위)가 ‘제주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라는 릴레이 캠페인을 지난달부터 펼치고 있다. 올해 제주4·3 70주년을 계기로 삼은 이 캠페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란 말이 언뜻 국가주의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4·3 피해자 다수가 국가폭력에 희생된 것을 고려하면,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강조하는 게 이치에 맞느냐는 의문이 들었다.


또 제주도가 분리 독립한 ‘탐라국’도 아니고 엄연히 대한민국 땅이다. 따라서 제주4·3은 당연히 대한민국 역사의 일부다. 범국민위는 이 당연한 이야기를 왜 강조하는 것일까?
범국민위는 4·3이 대한민국의 역사로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현실을 드러내는 역설적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4·3은 ‘제주만의 역사’로 갇혀 있다. 상당수 국민들은 4·3에 대해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
지난해 11월 제주4·3평화재단이 국민 1천명을 조사했더니, 응답자의 3분의 1은 4·3이 무슨 일인지조차 몰랐다. ‘4·3을 알고 있다’고 응답한 68.1%를 대상으로 4·3 발생 시기(1948년)를 물었더니, 한국전쟁(1950~1953년) 후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49%였다. 28.3%만이 한국전쟁 전이라고 정확하게 답했다. 또 국민(제주 제외) 인식조사에서, 4·3에 대해 ‘관심 없다’(50.2%)는 답변이 절반을 넘었다.


70년 동안 4·3은 침묵, 금기, 왜곡에 포위됐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울음마저 죄가 됐다. 1954년 1월23일 ‘아이고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날 4·3 때 600명 이상이 희생된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마을 사람들이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군대에서 숨진 이 마을 청년의 장례절차를 밟고 있었다. 한 주민이 “오늘은 6년 전 마을이 불탄 날이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6주년 기념일이니 당시 희생된 영혼을 위해 묵념하자”고 제안했다. 설움에 복받친 주민들이 “아이고아이고”라고 대성통곡을 했다. 이 일로 경찰에 불려간 주민들은 ‘다시는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80년대 군사독재 시절까지 4·3에는 ‘빨갱이 폭동’이란 딱지가 붙었다. 소설가 현기영 선생은 지난달 범국민위가 연 4·3 70주년 기념행사 보고대회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기득권, 서울의 역사로, 민중의 역사가 없었고 3만명 대학살이 벌어진 제주4·3의 역사는 부정되고 외면당해왔다”고 말했다. 현 선생은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라는 캠페인 구호에 대해 “이제 제주4·3도, 민중의 역사도 인정해달라는 것”이라며 “제주4·3이 제주만의 역사가 아니기에 분단과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고 기억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런 설명을 들으니 제주 여행 때 들렀던 4·3 유적지에 어김없이 걸려 있던 태극기가 기억났다. 서귀포시 성산읍 터진목 학살터, 서귀포시 대정읍 섯알오름 4·3 유적지 등의 국기게양대에는 깃봉에서 내려진 태극기 조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유족들이 돈을 모아 세운 희생자 추모시설에 태극기는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다시 생각해보니 이 태극기들이 70년간의 왜곡·편견, 무지·무관심에 맞서 ‘제주4·3이 대한민국의 역사’임을 알리고 명예회복을 외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아닐까 싶다.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4·3의 전국화, 세계화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 권혁철 - 한겨레신문, 사회2 에디터 >


[1500자 칼럼] 우리의 소원은

● 칼럼 2018. 3. 21. 14:47 Posted by SisaHan

우리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다닐 때는 자주 불렀던 노래였다. 이 노래를 부르노라면 어린 마음에도 왠지 숙연해지며, 마치 우리 손으로 통일을 이루겠다는 듯이 그리고 그 일이 가능한 것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곤 했다. 그리고 특히 이곳 토론토에서는 작곡가인 안병원 선생님께서 사셨던 연유로 모임이 끝나면 ‘고향의 봄’을 같이 부르기도 했지만 선생님께서 직접 나오셔서 지휘하면서 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르기를 잊어버렸다. 아마 우리 살아 생전에 통일이 되기는 어렵다고 판단을 했기 때문일까? 통일의 날은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지난 10년 보수정권 아래서 남북간의 소통이 단절된 채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북한은 핵실험을 가속하여 경쟁의 면으로 치달았고 남한 정부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통일이나 북한과의 대화를 논할 게재가 아니었다. 한때는 조금만 말을 잘못하면 종북으로 몰아 부치던 때도 있었다.


오히려 요즘 들어서는 통일이 된다기보다 전쟁이 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핵전쟁이… 만약에 핵전쟁이 나면 승자도 패자도 없이 둘 다 파멸 당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북한이 핵개발에 집중을 하고 미국에 대륙간 탄도탄을 발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미국이 나름대로 선제공격을 할지 모른다는 설이 지난 연말까지 심각하게 제기된 상황이었다. 한국신문 보다 이곳 신문에서 더 심각하게 다루어 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평화의 올림픽으로 기억될 평창올림픽도 끝나고 패럴림픽이 열리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 보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남도 아닌 우리의 야당 정치인들이 평창올림픽을 ‘평양올림픽’으로 부르며 틈만 나면 꼬투리를 잡아 꼭 망하기를 바라는 듯한 발언들을 서슴없이 해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동계 올림픽은 흥행하기 힘든 올림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물론 경제적인 손실은 나중에 다시 계산해 보아야 할 일이지만 큰 탈없이 세계의 언론들이 칭찬하는 올림픽으로 끝났고 뒤늦게라도 우리 국민들이 참여하고 즐기는 올림픽으로 끝난 점이 다행이라는 이야기다. 사실 개막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무관심했고 남의 일 보듯 한 것도 사실이다.

신년사로 김정은이 올림픽에 참가한다는 발표를 했을 때, 나의 솔직한 느낌은 그것이 진심일까 하는 의심이었다. 한마디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과의 전쟁이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림픽이 끝나면 연기되었던 한미군사 훈련이 재개되고, 북한은 그걸 빌미 삼아 다시 원점으로, 냉전상태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이 나의 추측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의외로 빨리 돌아가 특사가 파견되고 남북간의 정상회담, 그리고 북미정상회담의 가능성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이런다고 곧 통일이 된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시점에서 북한이 원하는 것은 남북회담 보다는 북미회담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들의 체제 보장을 원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미국의 군사적인 위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도 높은 경제적인 압박에 체제유지의 한계를 느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그들은 미국의 압박에 의한 중국의 경제적인 압력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현실이다.


북미정상회담이 꼭 성공리에 이루어져 그 반사이익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남한과의 평화관계를 유지한다면 그 보다 좋은 일이 있을 수가 없다. 어차피 통일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질 수 없으며, 한쪽이 다른 한 쪽을 쉽게 통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먼저 서로 적대감을 버리고 평화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아직도 통일의 길은 멀지만, 이 번 일을 기회로 잊혀진 통일의 노래를 부르며 통일의 불씨를 살렸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우리의 소원은…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한마당] 안보팔이들의 심통

● 칼럼 2018. 3. 21. 14:45 Posted by SisaHan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가시화되면서 한반도가 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곧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던 험악한 위기가 맴돌다 하루 아침에 평화무드로 급변했으니, 다들 이야기 하듯 ‘격세지감’이란 말이 실감날 뿐이다.
정세분석가들은 한국정부가 끈질기게 대화와 설득노력을 편데다, 문재인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외교전략이 주효했다는 평가도 한다. 또 예측불허의 인물 김정은과 트럼프의 돌출과 파격성, 영웅심리 등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어느 쪽이든 통크게 결단하면서 남북과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의 기운이 감돌게 된 것은 분명하다. 전세계 지도자들과 언론들이 긍정적인 기대를 표하는 것도 평화의 희망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그동안 남북대치를 조장하며 ‘안보장사꾼’이라는 별칭까지 붙은 수구세력들은 당황한 나머지 ‘안보 쇼’라는 둥 헐뜯으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춰 세우려 용을 쓰고 있다. 역시 북핵 위기를 호재로 짭짭한 ‘안보팔이’와 군국주의 망령에 젖어있는 일본의 아베 정부 정도가 탐탁치 않은 표정을 드러냈다. 한국의 수구세력과 아베정권이 ‘위안부 합의’에 이어 남북 화해에도 딴쭉걸기로 서로 죽이 맞으니, 그 본색이 무엇인지 의구심이 커진다.
돌이켜 보면 지난 10년의 철저한 남북간의 단절과 힘겨루기가 남긴 것은 감정대립의 격화와 엄포대결, 위기와 신경전의 에스컬레이트로 인한 피로감 외에 달리 무엇이 있었던가 싶다. 계속 압박하고 조이면 무너져 망하고 흡수통일이 되겠지 하는 참 허망한 기대감 말고는 평가할 만한 소득이 없었다. 오랜 남북대결의 역사에서 반복된 압박과 제재의 악순환이 교훈을 남겼는데도 소위 보수정권은 그런 단선적 논리에 매몰돼 강박일변도의 대북정책을 가속했다. 그 결과는 북핵과 탄도미사일 고도화라는 결말로 드러나며 위기를 키웠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안보 등 여러 측면에서 북한 리스크만 커져가는 아이러니에 국민들만 피곤해졌고 오히려 위기에 무뎌지는 학습 역효과까지 나타났다.


물론 남북간, 또 북미간에 정상회담이 열린다 해서 무조건 평화시대가 도래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간의 깊어진 감정의 골과 불신을 고려한다면 단숨에 우정의 다리를 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의 돌변한 대화공세에 경계심을 표하며 주의를 경고하는 시각도 이해해야 한다. 저들의 벼랑 끝 전술에 번번이 당했던 기억, 시간벌기식 대화전략에 기만당한 사례들이 그런 우려를 부추기고도 남는다. 사실 북한의 외교와 대남전술은 만만치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들은 항상 체제위기를 안고있는 정통성 없는 세습정권이다. 생존을 배수진 친 독재권력, 거기에‘외교 일꾼’들은 길게는 20년 30년씩을 외길로 매달린 전문‘기술자’들이다. 지난날 남북간 회담장 취재의 경험을 돌아보아도 남측의 대표나 실무자들은 정권교체에 따라, 혹은 근무 기간에 따라 얼굴이 바뀌지만, 북측은 거의 변함없는 같은 인물들이 회담장에 나오곤 했다. 그러니 오가는 언사나 담판에서 항상 녹록치 않은 상대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들을 외면하고 ‘철의 장막’에 가둔 채 압박만 하는 것이 최선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역사가 깨우치고 가르쳤다. 지난 10년의 대북강박이 부른 전쟁위기를 우리 모두가 보았다. 설령 저들에게 교활한 속셈이 있다고 해도,‘만나야 별을 보든 뽕을 따든’뭔가 할 수 있는 법이다. 폭탄을 쥔 인질범을 무조건 자폭으로 내몰아서는 안되는 거와 같다. 만나서 들어보고 으르고 달래다 보면 돌파구가 보일 것이다. 단지 정상 간의 만남을 예약한 것 뿐인데도 대결과 대치가 대화와 화해로, 위기가 기회로 바뀌는 것을 보고있지 않는가. 설령 ‘쇼’라고 해도 거기에 평화와 통일의 염원이 담겼다면 적대와 전쟁 공포보다 백 배는 낫다. 단단히 채비하고 지혜롭게만 대처한다면 만남을 꺼리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거나 비겁한 일인 것이다.
더구나 남과 북은 한핏줄 한 뿌리의 같은 민족이다. 당연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통일이 되어야 한민족이 제대로 된 역량을 발휘하고 국제사회에서 명실상부한 선진대국으로 자리매김할 수가 있다. 벌써 70년이 넘었다. 통일을 위해 씨름하고 지혜를 짜내야 한다.


그런데 ‘통일은 대박’이라고 큰소리치던 지난 정권의 후예들이 통일의 첫걸음이 될지도 모를 정상대화를 무조건 비틀고 반대하는 속셈은 무언가. 그들은 미국을 신주단지처럼 받들더니 이제는 트럼프가 김정은을 만나겠다고 선언하자 놀란 나머지 미국마저 믿을 수 없다는 식이다. ‘뼛속까지’물들었다는 사대주의를 청산하겠다는 바람직한 신호라고 봐야 할지, 아니면 그저 놀부 심통인지, 나라와 민족의 장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전혀 없이 몽니를 일삼는 저들의 말로를 지켜 볼 일이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