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도널드 트럼프의 패밀리 비즈니스

● 칼럼 2018. 6. 12. 16:5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주 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의 통신장비 업체인 중싱이 어려움에 처해 중국의 일자리가 줄었다고 걱정하는 트위트를 올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윌버 로스 상무장관에게 중싱을 도울 방법을 알아보라고 했다. 워낙 ‘깜짝 행동’을 뿌듯해하는 대통령이긴 하지만 이 트위트는 아주 의외였다. 중국 일자리를 걱정하는 건 그가 취임 연설에서 자랑스럽게 선언한 ‘미국 우선’ 철학과 180도 다르게 보여서다.
미국의 단기적 이익을 최우선 정책 순위로 본다면 중국의 일자리 감소가 어떻게 핵심 관심사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대중 무역 적자를 줄인다는 것은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중국의 일자리를 미국의 일자리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싱의 고용 전망을 걱정하는 게 엉뚱해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중싱이 어려움에 처한 것은 북한·이란에 대한 국제적 제재를 위반해 징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트럼프는 언제든 모호한 ‘국가 안보’를 이유로 무역 파트너와 동맹국에 일방적으로 징벌적 관세를 부과할 준비가 돼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관세는 동맹국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 일자리 감소는 부적절한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트럼프가 무역 적자를 줄이는 방식일 뿐이다.
트럼프의 갑작스러운 중싱 일자리 걱정은 며칠 뒤 중국 국영기업들이 인도네시아의 트럼프 리조트에 수억달러를 빌려줄 것이라는 사실이 공개된 뒤 다시 보게 됐다. 중싱을 도와주려던 게 인도네시아 사업 지원에 대한 보답이었나? 트럼프의 행동이 자신이나 그 가족의 사업을 도우려는 노력과 연결되는 경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4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위안화 가치 문제를 제기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트럼프는 시진핑이 북한 문제에서 자신을 도울 것이라고 말하면서, 왜 환율 문제를 꺼내 시진핑을 귀찮게 하느냐며 그 질문을 무시했다. 트럼프는 대선 캠페인 때 중국을 “세계적 수준의 환율 조작국”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던 그가 중국의 환율 문제에 대해 갑자기 관심이 줄어든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시진핑을 만난 날 중국 정부는 그 회담에 동석한 트럼프의 딸 이방카에게 의류 액세서리에 대한 상표권 세 개를 승인했다. 이들 상표권은 당연히 이방카에게는 상당히 값나가는 것이었다.


물론 중국 국영기업들의 인도네시아 투자와 이방카 상표권 승인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가 가족의 사업을 유리하게 하려고 공개적으로 대통령직을 이용한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그게 아니라면, 트럼프가 오랫동안 중국에 대해 지녀온 비판적인 태도를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그런 점에서 다른 대통령들과 확연히 다르다. 대통령은 자신의 재산이 그의 정책에 쉽게 휘둘리지 않도록 재산을 백지신탁하거나, 팔아서 국채나 인덱스 펀드 등의 자산으로 보유하는 게 오랜 규범이었다.
트럼프는 오랜 규범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는 사업 운영을 자녀들에게 넘겼지만, 언제든 되돌릴 수 있는 옵션을 갖고 있다. 게다가 그는 가족 사업이 보유한 자산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 트럼프는 엄청난 부자이기 때문에 돈이 적었던 전임 대통령들보다 사업에서 완전히 손 떼는 게 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더 이상 수익을 내지도 손실을 보지도 않는 방식으로 사업에서 스스로를 분리할 수 있는 비교적 간단한 해법들이 있었다.


외국 정부가 트럼프의 사업에 유리한 행동을 할 때는 트럼프 쪽의 정책적 양보에 대한 대가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트럼프의 외교 정책 의제나 개인적 철학을 이해하려고 해서는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혹은 다른 나라들에 대한 그의 행동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의 정책들은 사업을 위한 것이다. 트럼프가 움직여서 어떤 나라가 유리해지는지 알고 싶다면 그의 사업을 누가 가장 많이 도왔는지를 보라. 트럼프에게 국민 다수를 위한 의제라는 것은 없다. 주머니에 돈을 채우는 것만 있을 뿐이다.

< 딘 베이커 - 미국 경제정책 연구센터 소장 >


[1500자 칼럼] 다름과 잘못

● 칼럼 2018. 6. 12. 16:5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오랜 만에 만난 지인이 내게 넌지시 권한다. ‘구자억 목사’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해봐요. 재미있을 걸요.” 얼핏, 처음 듣는 이름이라 쇼맨십이 강한 설교로 유명한 목사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예상을 한참 벗어나 그는 뽕짝(트로트)가수 목사라 한다. 어떻게 평신도도 잘 부르지 않는 뽕짝을 목사가 대중 앞에서 부르며 교단에 설 수 있을까? 일단 인터넷에 올라온 그의 노래도 듣고, 목사로서 왜 뽕짝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는지 그 동기도 알아보고, 설교도 여러 편 들어보았다. 확실히 날라리 목사는 아니다.

구자억 목사는 일반 뽕짝 가수와는 다르다. 곡명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뽕짝 노래지만 가사는 복음적으로 바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왜 목사로서 세상과 구별되지 못한다는 오해와 거룩한 강단을 더럽힌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그 일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는 감리교신학대학을 거쳐 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감리교 소속 목사로 안수도 받았다. 전도사 때, 청소년들의 열광적인 찬양예배를 문 밖에서 서성대며 흥미롭게 바라보는 장년과 노년층을 목격하면서 비로소 깨닫게 된다. 오늘 날 교회 문화가 젊은 세대에 치중하여 어르신들이 소외된 것을 보고, 그들과 비신자들을 위한 사역으로 방향을 전환하기에 이른다.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교회 울타리 안에만 있지 말고 울타리 밖의 험난한 세상살이(고통 받고, 병들고, 위로가 필요한)에 지친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회봉사 대부분이 자족적인 교회 안 사역에만 있기에 자신은 교회 밖의 사역을 만들어 예수그리스도와 사람 사이에 이음새가 되는 목회를 하겠다는 꿈을 펼치게 된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보수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래서인지 45년째 서양문화 속에 살면서도 아직도 예배만큼은 보수적 정서를 선호하고 있다. 나름대로 목사에 대한 선입견도 철저하다. 그런 면에서 뽕짝 가수 목사는 큰 실망을 준다. 아무리 신앙 안에서 소신이 뚜렷하다고 해도 평신도인 나도 뽕짝을 멀리하고 있는데 어떻게 목사가? 경박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요즘 추세가 클래식보다 가요가 훨씬 대중화된 점을 고려한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또한 과거의 문화와 가치만을 고집하는 단단한 벽을 한번 허물어 보려고 한다.

한때 다른 교단에 속한 교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교회생활 중 나를 가장 낯설게 만든 것은 찬양이었다. 기존 찬송가 대신 복음성가를 주로 불렀고 가끔 율동도 했는데 내가 자라온 예배정서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찬송가를 누구보다도 좋아하고 그것도 조용한 반주로 들을 때 가장 감동을 받는 나였으니 교인 등록을 앞두고 망설일 수뿐이 없었다. 이 갈등에 대해 상담을 했는데 이런 설명을 들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객은 모두 한 코스로만 올라가지 않는다. 여러 코스를 통해 똑같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데 자기와 다른 코스로 올라왔다고 잘못된 등산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잘못(Wrong doing)과 다름(difference)을 구별하라는 조언이었다.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다름을 받아들이는 훈련도 필요하다는 설득력에 낯선 예배에 익숙해지려 노력했으나 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다만 바르게 살아가는 분별력의 잣대로 ‘잘못과 다름의 구별’이란 명제가 가슴에 남았을 뿐이다.

뽕짝 가수 구 목사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세상이 폄하하는 뽕짝이 경건한 예배와 강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면 가능하리라. 한때 내게 낯설었던 복음성가나 흑인교회의 열광적인 찬양과 춤을 곁들인 예배도 지금은 부담 없이 받아들여지듯 말이다.
오늘도 많은 기독교인으로부터 이해 받지 못하고 혐오의 대상이 될 때가 많아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구 목사에게 응원은 못해도 돌은 던지고 싶지 않다면, 내가 지나친 것일까?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1500자 칼럼]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스케치-(1)

● 칼럼 2018. 5. 23. 13:1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오랫동안 염원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지 8일 째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부터 설레임보다 걱정이 더 앞섰다. 한달 이상의 기간 동안 무려 800km가 넘는 길을 무거운 배낭을 메고 무난히 소화 할 수 있을지, 숙식은 매일 어떻게 해결하며 하루의 일정은 어떤 식으로 조정해야 할지, 아득하기만 했다. 물론 순례길에 대한 책도 몇 권 읽고 여러 사이트를 통해 정보 수집도 많이 했지만 그저 이론에 불과 할 뿐 실전과는 거리가 먼 듯했다.
드디어 첫 날, 순례길 사무실에서 전 구간을 세분화하여 짜여진 일정표와 각 지역에 산재한 숙소리스트를 받아들었다. 그리곤 자원 봉사자와 함께 순례자 여권에 첫 스탬프를 찍으면서 우리의 긴 여정은 시작되었다. 조가비 문양따라, 노란 화살표 따라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그 길에 첫 발을 내딛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버스에서 함께 내렸던 십여 명의 초보 순례자들은 어디로 흩어져 갔는지 바람부는 언덕길을 우리 부부만 호젓하게 올랐다.

침대 윗칸에서 들썩거리는 소리에 깨어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 조금 넘었다. 잠을 좀 더 청하려는데 여기저기서 바스락거리는 소리하며 일부는 배낭을 메고 살그머니 문을 나선다. 깜깜한 신 새벽에 길을 나서는 사람들, 참으로 대단한 열성이다. 나도 잠자기를 포기하고 단숨에 일어나 어둠 속에서 살금살금 짐을 꾸린다. 한 일주일 간 이런 생활을 계속하다보니 환경에 적응하는 눈이 열린 듯하다.
다국적 사람들이 모인 주방에서 시리얼로 아침 요기를 하고 준비해 둔 점심을 챙겨 대문을 나선다. 새벽 공기가 제법 쌀쌀하여 옷깃을 여미는 사이 “부엔 까미노”(좋은 순례길 되세요) 하며 몇 사람이 우리를 스쳐 간다. 채비를 마친 우리도 그 사이에 끼어 길을 잡는다. ‘시작이 반’ 이라는 옛말이 어쩜 이리도 명쾌한지 일단 시작하고 나니 그 많던 걱정들이 눈 녹듯 사라지고 오로지 걷는 일에만 전념한다.
 
마을 길을 꼬불꼬불 돌아 산길로 접어들자 가까운 능선위로 검붉은 해가 막 떠오른다. 오늘 하루도 저 태양처럼 뜨겁게 살기를 다짐하며 한 컷 담는다. 우리의 뒤를 따르던 필립 씨도 월출 광경에 연신 셔터를 누르며 흥얼거린다. 그와는 며칠 전 비 내리는 피레네 산맥 줄기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중 산행을 함께 한 처지라 그의 환호에 충분히 공감한다. 길 위에선 조그만 인연이 긴 호흡으로 이어져 동행이 되고 때론 동지가 되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 한다.
일회용 밴드로 물집 잡힌 양 발을 도배하고 나선 이 아침도 마음은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상큼하게 걷는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내려야 하는지 같은 고답적인 물음은 시간이 해결 해 주리라 믿고 소풍 길 가듯 밀밭과 포도밭 사이를 걸으며 동행들과 담소도 하며 자유를 만끽한다.

오늘은 로스 아르코스를 향하여 30킬로미터 남짓 걸었다. 얕으막한 산을 몇 구비 넘고 하산 길도 꽤나 어려웠는데 무난히 잘 마쳐 뿌듯하다. 갈 길이 멀어 가능하면 무리하지 않으려하나 조용한 숙소를 찾다보니 발을 꽤나 고생시켰다. 다행히 산중턱 조그만 성당에 숙소를 잡았고 저녁 식사는 십여 명의 순례객과 성당 관계자들이 함께 만들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그리곤 다락방으로 올라가 각자의 방식대로 기도를 드리고 앞서간 순례자들이 남긴 편지를 자신들의 언어로 낭독했다.
‘날이 거듭될수록 다리는 튼튼해지고 가슴은 더 뜨거워 질 것’ 이라는 멘토가 진실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내일을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듯하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칼럼] 진로교육이라는 이름의 폭력

● 칼럼 2018. 5. 23. 13:1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요즘 아이들은 꿈이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똑같은 질문을 자꾸 받으면 정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마련이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진짜 꿈을 이야기하다가(‘마법학교에 다니고 싶다’) 점점 어른들의 기대에 맞추어 대답을 바꾼다(‘해리 포터를 뛰어넘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아이들의 꿈의 세계를 이렇게 식민화하는 일이 진로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요즘은 한술 더 떠서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려면 초등학생에게 창업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진로를 일찍 결정하는 것이 과연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될까? 4차 산업혁명이 예고하는 변화의 핵심은 직업구조의 전면적인 재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직업의 40%가 사라질 거라는 비관적인 예측도 있다. 그 말은 특정한 직업을 준비하는 데 청소년기 전체를 바치는 것은 위험한 전략이라는 뜻이다.


만일 어떤 학생이 통역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고등학교 내내 준비했는데, 졸업할 무렵 이 직업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장래 희망을 3년 내내 통역사로 적어 냈고 동아리 활동과 봉사활동도 모두 거기 맞춰서 했다. 그가 뒤늦게 진로를 수정한다 해도, 이런 학생부를 가지고 ‘학종’으로 원하는 과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은 평생 5~6개의 직업을 갖게 되리라고 한다. 현재의 진로교육은 그중에서 첫번째 직업에만 초점을 맞출 뿐이다.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여러 나라는 교육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방향은 우리와 크게 다르다. OECD 국가들의 일반적인 전략은 기초교육, 특히 수학, 과학 교육을 강화하고 성인의 재교육을 쉽게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수학 시간이 전반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트래킹이 약화되고 있다. 트래킹(tracking)이란 실업계와 인문계, 영재 코스와 일반 코스 등으로 트랙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트래킹은 학업성취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독일은 2000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OECD 국가 중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냈는데, 인문계와 실업계의 구별이 너무 일찍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 원인이었다. 폴란드는 15세에 이루어지는 트래킹을 16세로 늦추는 것만으로도 PISA 점수가 크게 올랐다. 핀란드는 영재코스를 따로 만들지 않고 앞서가는 아이가 뒤처지는 아이를 도와주게 하는데, 덕택에 핀란드 아이들은 다들 수학을 잘한다.
한국은 세계적인 추세와 반대로, 수학 시간을 줄이고(현재 OECD 국가 중 한국이 제일 수학 시간이 적다) 트래킹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수능에서 기하를 뺀 것이 그 예다. 다른 나라의 고등학생들은 기하를 배우는데 우리나라 고등학생들만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여기에 대한 교육부의 대답은 이렇다. “수학은 똑똑한 애들만 하면 된다.” 사실 수능은 ‘영재 트랙’에 들어가지 못한 평범한 학생들을 위한 제도로 바뀐 지 오래다. 수능을 치지 않는 영재고 학생들은 이러나저러나 기하를 공부할 것이다.


한국의 교육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1%의 영재가 99%를 먹여살린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나는 부디 그들이 이 말을 한 사람이 이건희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수학 공부를 1%의 영재에게 맡기는 한 진보적인 정치인들은 기술관료주의에 종속될 수밖에 없으며, 최종 심급에서 ‘삼성의 지배’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핀란드가 어떻게 노키아 없이 살아남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 김현경 - 문화인류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