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다시 연말연시의 소망

● 칼럼 2017. 12. 28. 18:17 Posted by SisaHan

다시 ‘연말연시 증후군’ 이다. 무심하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세월의 구비와 너울을 지켜보며 아쉬움과 기대가 교차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해마다 이 맘 때면 찾아드는 어김없는 감상이다. 한 해가 가고 또 온다는 시간 규범에 떠밀려 모처럼 삶과 세상을 향한 성찰의 시간을 마주하는 것이다.
실상은 아무런 공간적 구획이 그어진 것도 아니요, 영속하는 시간의 인간적인 단락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우주 순환의 이치를 슬기롭게 원용한 인간다운 지혜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일년이 끝없이 이어져서 새해라는 개념이 없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끔찍할까. 쑥쑥 자라야 할 아이가 학년 승급이 없이 늘 유치원생이고, 초등학생이고 평생 중학생에 머문다면 정말 최악일 것이다. 해가 바뀌어 의젓한 고등학생이 되고, 2학년 3학년생에 이어 대학생이 되며 알게 모르게 부쩍부쩍 자라 영역을 넓히는 것이 인간적인 성장과 성숙의 오묘한 비결이기도 하다. 세상 운행과 자연의 섭리가 바로 그런 단락을 쌓아가며 발전하고 도약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세월이 가고 해가 바뀐다고 어디 저절로 인간다움의 성숙이 찾아오던가. 돌아보고 깨우치고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는 승급에서 내적 성장과 성숙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해가 바뀌는 데도 한 단계씩 올라가지 않고 마냥 그대로의 수준과 상태가 유지된다면 어떻게 될까. 마치 만년 유치원생에 머물거나, 알을 깨고 나올 줄도, 날아 오를 줄도 모르는 부화 미숙란처럼 사실상 정체된 모습 말이다. 세월의 강물은 흘러가는데 아무런 변화도 성숙도 없다면 그것은 사실상 퇴보를 뜻하는 것이니, 죽은 상태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세월은 가는데도 죽은 상태처럼 변화가 없다면 그처럼 불행한 일이 또 있을까. 가정이나 개인적 인생의 행로이든, 어느 인간사회 수준이든, 또한 나라의 운명이든, 나아가 세계 정세나 인류사에 있어서든… 새로운 날들을 맞으며 무언가 좋아지고 새롭게 변화되고 진전하기를 바라는 것은 인류 공통의 염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난 한해는 얼마만한 진보를 이뤘고 사람들 마음이 편안해지고 삶이 호전되었는가.

이제 다시 연말연시와 송구영신의 능선을 하나 또 넘어서며, 얼마나 성숙하고 변화되고 새로워졌는지를 살펴보면, 역시 아쉬움과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른다. 지구상에 평화의 지수는 전혀 높아지지 않았고 불안과 위기의 지수가 더 높아졌음을 느낀다. 경거망동의 지도자들이 적대와 불안을 부추기고 곳곳에서 살상과 혈투가 격화하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난민은 급증했다. 천재지변과 인재의 환란 또한 빈발했다. 빈부의 격차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벌어져 상위 10%의 부유층이 나머지 90%의 재물과 삶을 쥐어짜는 현실이라는 지적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대립과 무력의 위협도 결코 낙관으로 흐르지 않았다. 남북간의 평화와 화해는 진전이 없었고, 통일담론은 꺼내지도 못했다.
촛불혁명 이후 나라다운 나라로, 사람 대접받는 나라로 정치가 혁신되리라는 기대는 실망에 가깝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 적폐의 장본인과 부역자들이 사죄나 참회는커녕 온갖 뻔뻔한 궤변과 선동으로 저항하고 훼방하는 철면피 작태가 사람들 가슴에 다시 울화의 기운을 북돋우고 있다. 인류가 좀더 평안해졌다고 좋아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살기 좋아졌고 맘 편하다고 웃음짓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래도 이제 다시 새해를 앞두고 작은 희망의 불씨를 살려보자고,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리 서로의 가슴을 다독여야 하지 않을까. 해마다 비슷한 꿈을 꾸고, 다시 반복해 성을 쌓아올리기만 하는 또 하나의 시지푸스가 될지언정, 시도와 도전 자체로 살아 숨쉬는 삶과 존재의 의미, 공동선을 향해 전진하는 인류의 꿈을 살려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그럼에도 다시 촛불을 켜고, 나태와 허욕과 이기로 얼룩진 어두운 내면의 터널들을 비춰보았으면 좋겠다. 지난 후회를 반추하고, 잘못을 용서 빌고, 교만을 회개하면서 새 날들을 맞는다면 더 이상 좋을 게 있겠는가. 이 혼란스럽고 사악하기 그지없고 적대와 분노가 가득한 세상에, 작지만 진심과 사랑으로 켜는 등불들을 한사람 한사람씩 내걸기 시작하면, 세상이 차츰 밝아지고 선해지고 평안을 노래할 수 있지 않을까.
 
성탄절을 맞으며, 어둡고 혼탁한 세상에 빛으로, 사랑으로 임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삶을 음미하는 시간이 되기를 간구한다.
낮아지고 작아지고 비우고 내려놓은 숭고한 성육신의 스토리를 성경의 일화나 세속화된 절기의 내력으로만 접할 게 아니다. 낮아짐이 높임이며 작아짐이 커짐이요 비움이 채움임을 깨닫고 확인하는 계기로 다가오기를 기원해 본다. 희생과 속죄가 중생을 이루고, 이웃을 향한 공의의 배려와 섬김이 평화와 번영과 행복의 길임을 새기는 크리스마스, 그래서 스스로 참회하고 좀더 겸손해지는 연말연시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그럼에도 검찰개혁

● 칼럼 2017. 12. 28. 18:16 Posted by SisaHan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결국 구치소에 수감됐다. 집요한 검찰 수사를 방어하느라 본인도 많이 지쳐 있었을 것이다. 그의 옛 검찰 동료는 “차라리 진작 (구치소에) 들어가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구속영장 청구가 두번 세번 이어지면서 새로운 혐의가 계속 추가되어 우 전 수석으로선 더 불리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도 일부의 진실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수사 초기에 전 정권의 검찰 수뇌부가 의지만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혐의가 일찍 드러났을 가능성이 크다.


일부에선 검찰의 과도한 영장 청구 관행을 비난하는데 옥석을 가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특히 무슨 쿠데타라도 났느냐며 힐난하는 사람들이 일부러 생략하는 대목이 있다. 압도적 여론으로 대통령이 탄핵될 만큼 박근혜 정부 시절 엄청난 규모의 불법 행위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단죄하다 보니 갑자기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피디수첩> 광우병 보도 사건이나 미네르바 사건처럼 없는 죄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짧은 기간에 수사할 게 너무 많아서 최순실 일가의 재산 형성 과정이나 국외은닉 의혹 같은 건 손도 대지 못하는 실정이다. 어떤 정권도 임기 초 사정 작업을 이렇게 대대적으로 한 적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리로 답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이렇게 방대한 불법과 탈법 행위를 저지른 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가 과도하다는 비판에 대해 검찰은 전체 사건에서 차지하는 구속인원 점유율이 1%대(2016년 1.3%)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국정농단 사건과 국정원·군사이버사의 선거개입 및 여론조작, 국정원 특수활동비 횡령 및 뇌물수수 사건이 1%에 속하는 중대 범죄임은 분명하다. 더구나 이들은 대체로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증거인멸 우려가 농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과 임관빈 전 국방부 정책실장을 구속적부심에서 석방한 신광렬 판사의 결정은 사법 불신을 부추기는 데 한몫했다고 본다. 사법부 독립이라는 것은 여론과 공중의 지지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법원 내부에서조차 비판이 나올 정도로 관행을 어겨가며 무리하게 할 일이 아니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로서의 권한을 과도하게 행사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검찰의 적폐수사를 비난하는 주장은 아전인수와 ‘내로남불’로 가득 찬 것이 많지만 귀담아들을 대목이 없는 건 아니다. 구속 여부를 중시하는 인식과 관행에 대한 지적이 그렇다. 검찰이나 언론이나 일반 국민이나 마찬가지다. 서구의 형사사법체계를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겠지만, 우린 기소 전의 구속 여부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 구속=유죄, 불구속=무죄로 여겨지기도 한다. 헌법의 무죄 추정 원칙이나 공판중심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 역설적으로 이런 인식과 관행 탓에 영장청구권을 독점하고 있는 검찰의 권력이 더욱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권력이 집중되면 반드시 썩는다.


우린 지금 검찰의 손을 빌려 적폐를 청산하는 중이지만, 바로 그 검찰이 적폐의 본산이었음을 잊어선 안 된다. 검찰 권력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국정농단 사태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갖고 있으면서 영장청구권을 독점하는 한 제2의 우병우는 언제든 다시 나올 수 있다. 정말 검찰의 과도한 수사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권한 행사가 가능한 현재의 독점 구조를 깨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정권만 바뀌면 내로남불과 아전인수로 서로를 비난하는 퇴행적인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이다.

< 이재성 - 한겨레신문 사회 에디터 >


[1500자 칼럼] 기다림의 끝

● 칼럼 2017. 12. 13. 13:39 Posted by SisaHan

식품점에서 특가로 판매하는 자반고등어를 마주하니 퍼뜩 지난 여름이 떠오른다. 퀘벡주가 자랑하는 아름다운 관광지의 하나인 가스페 반도는 한번쯤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장거리 운전에 대한 부담으로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지난 7월 초에 그곳을 다녀올 기회가 생겼다.
순전히 낚시에 조예가 깊은 문우(文友) 남편 C씨의 배려로 시작하여 세 부부가 일단 날짜를 정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리스트를 적어가며 조목조목 준비를 시작하였다. 특히 남편들은 고등어 낚시에 관심을 갖고 있어 각 집마다 바다 낚시 도구와 잡은 고등어를 집까지 가져올 아이스 박스(2개)와 플라스틱 용기(20개)까지 철저하게 준비하여 짐은 산더미처럼 늘어나 차 안의 좌석조차 불편할 정도였다. 그래도 자반 고등어를 선물로 받고 행복한 미소를 지을 친지들을 그려보면서 9박10일간의 먼 노정은 야무진 꿈으로 활기가 넘쳐흘렀다

퀘벡 주 세인트 로렌스 만을 끼고 북쪽 해안선을 따라 협곡을 돌 때마다 만나는 빼어난 풍경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숲을 가득 채운 녹색의 활엽수와 소나무의 신비한 조화, 수평선이 보이지 않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옥색의 망망한 바다, 물밀듯이 밀려왔다 흰 거품을 남기고 훌쩍 돌아서는 거센 파도, 바다를 배경으로 우뚝 솟은 교회의 철탑과 방금 페인트를 마친 듯 아담하고 예쁜 마을정경에 매혹되고도 남았다. 온 몸과 마음에 가득 담긴 바다의 강렬한 남빛으로 인해 오가는 내내 평안에 푹 빠져 대화마저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가스페 반도의 유명한 관광지인 페르세 (Perce)에서 7일간을 머물렀다. 마침 우리가 숙박한 아담한 캐빈에서는 이 고장의 명물인 코끼리 모형을 닮은 페르세 바위(Perce Rock) 전면을 바라볼 수 있는 행운도 잡았다. 바다 위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돋이와 훌쩍 사라지는 해넘이도 충분히 구경할 수 있는 좋은 위치였으나 여독에 지친 우리는 번번이 기회를 놓쳐 아쉬움을 남겼다. 캐빈과 모터홈이 즐비한 샛길을 따라 산책을 하거나 바다가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동산에 앉아 동심으로 돌아간 우리의 대화는 나날이 깊어만 갔다. 60여 년 살아온 세월을 더듬기도 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번뜩이는 혜안을 서로 나누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선명한 색채로 남아 내 영혼이 파도 칠 때마다 한번쯤 돌아보고 싶은 정다운 곳이 되었다.

낚시는 기다림이다. 고등어 떼를 기다리고 배를 띄우기에 안전하고 쾌적한 날씨를 기다려야만 했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이 대어(大魚)를 낚기 위해 84일간을 기다렸듯이 우리도 5일간을 무료하게 기다렸는데, 무지개 빛 희망 하나만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유독 변화가 심한 금년의 날씨 탓인지 시간은 흘러가는데 고등어는 전혀 얼굴을 내밀지 않아 우리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내들은 가벼운 자유와 대화의 즐거움에 만족했지만 남편들은 달랐다. 바다는 연일 그들의 속타는 심정도 모른 채 안개만 자욱해서 앞이 분별 안되거나, 강한 바람이 만든 거센 파도로 배를 띄우지도 못하고, 기온이 내려가 고기잡이에 적절치 못한 날들만 계속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여러 날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돌아오기 전날에서야 최적의 날씨를 만났으나, 우리의 철저한 준비가 일을 그르쳤는지 고등어는 도통 물리질 않았다. 그런 중에도 경력 있는 낚시꾼은 알아보는지 간간히 우리의 선장인 C씨의 낚시대만 흔들렸고, 여러 번 허탕 끝에 잠시나마 고등어를 낚는 희열을 모두 맛보게 된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겨우 두 번의 수확은 계획했던 것에 비해 형편없이 초라해서 그간 소요한 경비와 시간을 계산하면 야무진 꿈은 무참하게 부서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낚시 시즌이 빗나간 결과이니 누구를 탓하랴. 그러고 보니 우리들이 삶 속에서 때를 놓치고 뒷북 친 일이 어찌 이번 한번뿐인가 싶다.

여행은 목적 자체보다 누구와 동행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우리 역시 함께 간 세 부부들이 서로를 알아가고, 기다리며 인내를 배우고, 무슨 일이든 함께 헤쳐나갈 수 있는 끈끈한 동지애로 뭉쳤으니, 이것이 이번 여행의 큰 결실이다. 더군다나 보트까지 매달고 자동차 두 대가 안전운행을 할 수 있었으니 어찌 70대 남편들을 노년이라 치부만 할 수 있으리. 비록 고등어를 향한 일시적 꿈은 사라졌다 해도 그들은 이 여행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젊음의 활기와 자신감을 되찾은 듯 하다.
<노인과 바다>에 남긴 헤밍웨이의 명언으로 마음을 달랜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하는 일에 있지 않고 하고자 노력하는데 있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칼럼] 지금이 맞으면 그때는?

● 칼럼 2017. 12. 13. 13:38 Posted by SisaHan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청원 및 제안’이라는 난이 있다. 어떤 청원을 해서 일정 수 이상 추천받으면 정부 및 청와대 관계자의 답을 받을 수 있다. 최고권력자와 국민이 직접 소통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좋은 제도다.
‘청와대에 상주하는 기자단을 해체해 달라’는 청원이 있다. 추천을 많이 받은 순서로 열 손가락 안에 든다. 5만명 가까운 이들의 추천을 받고 있다. 왜 이리 많은 추천을 받고 있을까?
주장의 취지는 이렇다. ‘청와대가 대통령 일정을 페이스북에서 생중계했다. 이에 대해 기자들은 자신들에게 공지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청와대가 기자들 영역을 침범했다고 항의했다. 대통령 일정을 생중계하는데 왜 기자들 허락을 받아야 하나? 기자들이 박근혜 정부 때는 아무 말 못 했는데, 이런 항의를 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를 만만하게 보기 때문이다. 이런 청와대 기자단의 갑질을 막을 방편으로 청와대 기자단을 폐쇄해야 한다’고 한다.


청와대 기자단이 이른바 ‘갑질’을 한다는 데 대해 언론사와 기자들은 억울해하는 눈치다. 청와대와 국민이 직접 권력기관이 내보내는 일방적인 주장만 국민에게 전달되어 언론의 비판기능이 작동되지 않는다고 한다.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언론사의 존재 의의가 권력기관에 대한 감시·비판이니만큼 언론사의 검증은 필요하다. 문제는 이런 주장을 하는 언론사들이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 때는 대통령에게 질문을 하기는커녕, 대통령이 말하는 내용을 받아쓰는 데 급급했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일부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 정부 때 출입기자와 현재 출입기자가 다르다고. 예전에는 잘못했다는 말로 들리기는 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단지 출입기자가 달라져서인가? 그 기자들이 소속된 언론사는 그대로인데? 이래서는 곤란하다. 예전 정권 때는 기자들이 잘못했다. 그 점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고 국민께 사죄를 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지금의 맞는 행동을 이해받을 수 있다.


또 하나의 장면.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수석부와 영장전담판사들이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정도다. ‘적폐 판사’, ‘꼴판’이라는 말까지 등장할 정도다. 반면에, 비판을 넘어서 판사 개인의 신상을 터는 것은 과도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맞는 말이다. 주권자가 비판할 대상은 잘못된 권력행사이지 사람 자체는 아니다. 신상털기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예전 모습을 보자. 2004년. 한 판사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무죄판결을 했다. 많은 언론들이 이 소식을 1면 머리기사로 전했다. 그랬던 언론사 중 한 곳이 보도 태도를 바꾼다. 그 판사가 특정한 연구회 소속인데, 그 연구회는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법원이 좌파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내용이었다. 명백한 왜곡·날조 보도다.


재미있는 것은, 판사 신상털기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언론사와 특정 판사에 대해 좌파라고 신상털기를 하며 왜곡보도를 한 언론사가 동일하다는 점이다. 물론 기사를 쓴 기자는 다르다. 하지만 그 언론사는 과거에 자신들이 자행했던 판사 신상털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런 사과나 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 아니, 입장이 바뀐 경위를 밝히지도 않고 있다.
기자가 바뀌었다는 변명은 가당치 않다. 지금의 모습이 맞으면, 그때의 모습은 틀렸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기레기’라는 경멸적인 용어가 왜 나왔는지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 이정렬 - 전 부장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