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MB) 소환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검찰은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놓고 한창 여론 수렴 중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지난 13일 실시한 정례여론조사에선 국민의 74.2%가 구속에 찬성했다. 검찰은 그가 ㈜다스의 ‘실주주’라고 이미 못박았고,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빼돌린 김백준 전 기획관 공소장엔 그를 ‘주범’으로 표시했다.


원세훈 국정원과 군사이버사령부가 정치·선거에 개입하는 과정에도 그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정원은 ‘에스엔에스(SNS)의 선거 영향력 진단 및 고려사항’(2011.11.8 작성) 문건으로 여당의 선거운동 방법을 제안하고 ‘10·26 재보선 선거사범 엄정처벌로 선거질서 확립’(2011.11.7 작성)해야 한다며 검경의 야당 압박 방안까지 청와대에 올렸다. 박원순 서울시장 등 야당 단체장들을 규탄하는 우익단체 집회나 광고도 배후조종했다. 하나같이 청와대에 보고하며 진행한 일들이다.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문화·연예계 인사 퇴출 공작도 청와대 민정·홍보수석의 깨알지시를 받고 진행했다. ‘일일 청와대 주요 요청 현황’에 따라 ‘브이아이피(VIP) 일일보고’ 한 기록까지 남아 있다. 과연 엠비가 몰랐을까.
그는 수사망이 좁혀오자 “노무현 대통령 죽음에 대한 정치보복”이라며 반발했다. 특수공작비 10억여원을 빼돌려 ‘김대중·노무현 비자금’ 소문 추적하고 ‘김대중 노벨평화상 취소 요청’ 공작까지 벌인 게 원세훈 국정원이다. 노 전 대통령 표적 세무조사에 이은 표적수사가 이명박 청와대 재가 아래 진행됐다면 두 공작도 엠비에게 보고됐다고 보는 게 상식에 맞는다. 2012년 대선 때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까지 여당에 보내 색깔론 소재로 써먹었다. 죽음으로 내몬 것도 모자라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을 겨냥한 심리전단의 사이버 음해까지, 할 수 있는 공작을 다 동원했다.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가해자가 먼저 ‘정치보복’이란 말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다스가 100억원 이상 별도 비자금을 조성했다니 실소유주인 엠비에게 횡령·탈세죄가 적용될 수 있다. 소액 투자자들에게 돌아갈 140억원을 대통령 권력을 이용해 빼앗은 것도 모자라 그 소송비용까지 재벌사에 대신 물렸다. 그의 행태로 보면 사면권으로 거래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어 보인다. 간첩 잡으라는 국정원 특활비가 가족들에게 흘러간 정황도 뚜렷하다.
그러나 그 무엇도 20년간 온 국민을 속여온 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1992년 전국구 의원 때부터 총선, 서울시장 선거, 대통령 선거까지 최소한 네차례 이상 가짜 재산등록으로 온 국민을 속였다. 다스뿐 아니라 언론 추적보도로 드러난 차명 부동산도 여러건이다. 지금까지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소송으로 틀어막았다. 비비케이 수사도 넘겼으니 이번에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보수 언론·야당까지 정치보복이라며 자기편 들어줬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제 가면이 벗겨지고 벌거숭이가 됐는데도 임금님만 모르는 것 같다. 청와대 시절 참모들만 연일 불러들여 괴롭히고 있다. 법대로 하겠다며 ‘차명재산 관리인들이 거짓말한다’는 논리로 꼬리 자르기에 나섰다. 이미 구속된 부하들에게 책임 떠밀고 혼자 살아보겠다는 발버둥이다. 법대로 하겠다면 그렇게 해줄 수밖에 없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 1258명이 법원에 넘겨져 대부분 벌금형 이상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중 일부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재판에 시달리고 있다. 임기 만료 25일 전 최시중·천신일씨 등 측근까지 셀프사면하면서도 촛불시민들은 끝까지 보복했다. 그게 엠비 방식이다. 그대로 돌려줘야 공평하다.


그가 전직 대통령의 명예라도 지키겠다면 마지막으로 할 일이 남아 있다. 감사원이 이명박 청와대의 책임이라고 한 4대강 공사 때문에 수자원공사가 진 빚 갚아주는 데만 매년 3천억원 안팎의 세금이 들어간다. 복원 예산도 만만찮다. 세금 축낸 것만이라도 결자해지하기 바란다. 다스 주식에 차명부동산 일부만 내놔도 재원은 충분할 거다. 그가 거부하면 법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 딱 맞는 법도 이미 박주민 의원 등이 발의해놓았다. ‘재정민주화를 위한 국민소송법’은 위법한 재정사업으로 생긴 손해의 배상 책임을 정책당사자에게 물을 수 있게 했다. 국회라도 나서야 한다.

< 김이택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를 집단학살한 장면이 담긴 충격적인 영상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27일 열린 ‘한·중·일 일본군 위안부 국제콘퍼런스’에서 공개된 19초 분량의 흑백영상은 1944년 중국 윈난성 텅충에서 패주하는 일본군에게 위안부들이 총살당한 뒤 버려진 참혹한 모습을 담고 있다. 영상은 당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미·중 연합군이 촬영했다고 한다. 이런 영상을 앞에 두고도 일본은 계속 ‘위안부 책임’을 회피할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일본군이 ‘위안부’들을 성적인 도구로 사용하다 학살했다는 증언과 보고는 다수 있었지만 관련 물증은 충분히 확보되지 못했다. 이번 영상을 발굴한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은 2016년 위안부 학살 현장 사진를 찾아낸 뒤 발굴 작업을 계속해 사진 속 주검과 옷차림이 똑같은 여성들의 학살 영상을 찾아냈다고 한다. 미·중 연합군 기록 문서에는 “(1944년 9월13일 밤) 일본군이 조선인 여성 30명을 총살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어 이 영상을 뒷받침한다. 영상이 공개된 이상, 이제 일본 정부가 답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학살은 말할 것도 없고 위안부 강제동원조차 부인하다가 관련 증거가 나오면 마지못해 사과하는 수준에서 사태를 무마하려 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12·28 위안부 합의’ 때도 형식적인 사과와 면피성 태도로 일관했다. 지난해 말 문재인 정부가 ‘12·28 합의 검토 결과’를 발표해 합의 내용과 과정의 문제점을 밝혀낸 뒤에도 일본 정부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우리 정부에 오히려 합의를 지키라고 윽박질렀다. 이런 적반하장식 태도는 지난 26일 강경화 외교장관이 유엔인권이사회 연설에서 12·28 합의에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 결여됐다’고 밝혔을 때도 그대로 되풀이됐다.


위안부 문제는 외교 문제이기 이전에 인류 보편의 인권 문제다.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일은 소멸 시효가 없으며, 국가 간의 적당한 정치적 타협으로 끝날 수도 없다. 일본 정부가 진솔하게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적인 사죄와 함께 배상을 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올바른 시작이다. 그러지 않는 한 위안부 문제는 가해국 일본의 멍에로 남을 뿐이다. 충격적인 학살 영상까지 드러난 마당에 일본 정부는 이제라도 태도를 바꿔 인류 양심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한다.


[1500자 칼럼] 닫히며 열린 창

● 칼럼 2018. 2. 27. 20:44 Posted by SisaHan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활짝 웃으며 “안경을 안 쓰니 썼을 때보다 훨씬 예쁘네” 한다. 듣기에 좋아 정말 그런가 싶어 마음이 흡족해졌다. 어느 날 다른 친구가 “안경을 벗으니 전혀 너 같지가 않아. 안경 쓴 네 모습이 훨씬 보기가 좋아”하는 게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기실 내 생애 반세기 동안 안경을 써왔으니 당연한 코멘트라 여기면서도 왠지 안경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음이 복잡해왔다.
불현듯 이솝 우화 ‘당나귀를 팔러 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떠올라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남의 말만 듣고 당나귀 등에 아들을 태우고 아버지는 걷다가 다시 아들은 걸리고 아버지만 당나귀를 타고, 또 다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당나귀 등을 타고 가다가 끝내 당나귀를 그들의 등에 짊어지고 장터로 가던, 줏대 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말이다.
작년에 백내장 수술을 했다. 4년 전부터 시작한 백내장으로 시간이 갈수록 사물이 뿌옇게 보이며 시력장애가 심해졌다. 워낙 약시인데다 설상가상으로 백내장까지 있게 되어 더 이상 안경으로 내 시력을 조절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백내장 수술 시 근시를 조절하는 인공렌즈를 삽입하게 되었다. 오른쪽 눈을 먼저 수술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창 밖의 불빛마다 빛 무리가 큰 원처럼 매달려 번쩍번쩍 강한 빛을 발하였다.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대신 여태 안경을 끼고도 읽을 수 없었던 TV 화면글씨를 읽을 수 있었고, 창 밖 먼 거리에 있는 희미하던 집과 숲도 선명하게 보여서 마치 딴 세상 같았다. 단지 아직 수술을 안 한 왼쪽 눈과 인공렌즈로 바꿔 낀 오른쪽 눈의 시력차이로 초점 맞추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다른 쪽 눈의 백내장 수술을 2주 만에 신속하게 해줘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문제는 전과 달리 돋보기 없이는 책을 읽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수술 전에는 근시가 아무리 심했어도 가까운 거리는 안경만 벗으면 작은 글씨도 읽을 수 있었는데, 수술 후 그 반대 경우가 된 것이다. 불편하고 난감했다. 전에 잘 보이던 글자를 돋보기를 껴야만 읽을 수 있고, 전에 못 보던 먼 곳은 안경 없이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라 해야 할지 잘못된 일이라 해야 할지… 신문과 책을 자주 읽는 내겐 마치 재난처럼 느껴지기만 했으니 말이다.

흔히 신체의 창을 눈이라고 비유한다. 나도 이 창을 통해 세상을 보고 즐기며, 일하며 살아가는데 그 창에 문제가 생긴 셈이다. 백내장 수술 후 검안을 하니 한쪽 눈에 난시까지 생겨 두 시력차이로 돋보기를 새로 맞춰야 했다. 50년이나 써온 돗수 높은 안경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게 된 점은 분명 신기하나, 한편으론 작은 글씨 하나라도 읽으려면 돋보기를 찾아야 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다.
이제 보니 각종 서류 글씨는 어찌나 작은지 아예 읽으려는 시도도 할 수 없다. 나이와 함께 온 퇴행성 증세의 하나로 알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마치 더 이상 쓸모 없는 사람이 된 무력감이 느껴질 때가 더 많으니 말이다. 그래서 삶 속에는 새로 얻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게 있기 마련임을 일깨우고 있다.


새 창으로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안경 없이도 하늘과 숲이 선명하게 보인다. 불현듯 내 젊은 날에 먼 거리를 볼 수 없었던 것 같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도우며 살았던 적이 없었던 점이 떠오른다. 오로지 나, 내 가족, 내 교회, 내 친구들만 챙겼지 싶다. 얼마나 근시안적인 행동이었는지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어쩌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라도 새 창으로 바꿔 끼워야 했던 게 아닐지. 이제부터라도 나 아닌 이웃들에게 관심을 갖고 바라보며 도우라고, 또 그들의 처지와 입장을 돌아보며 나 자신만을 보듬지 말라는 충고로 이해하고 싶다면 지나칠까. 그래서 멀리 볼 수 있는 창은 넓게 열리고, 더 이상 나만 보지 말고 이기적이지 말라고 가까운 창은 닫혀 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 참으로 공평한 처사가 아닌지…이제부터라도 젊은 날에 잘못 생각하고 행동한 것들을 고쳐 나가라고 새 창은 내게 그리 충고하는 것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닫히며 열린 세상, 바로 이것이 백내장수술 후 내가 깨달은 세상이치다.

드디어 새 안경을 맞췄다. 수술한지 일년이 되면서부터 조금씩 난시가 생기긴 하였으나 마침내 내게 익숙한 안경 낀 내 모습을 되찾았다. 다만 전과 달리 가끔은 안경을 벗고도 세상을 바라보며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점차적으로 돋보기 사용도 익숙해가고 있다. 열린 창에 가득 채운 밝은 빛으로 활기찬 오늘을 맞는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칼럼] 적폐는 한판 승부가 아니다

● 칼럼 2018. 2. 27. 20:42 Posted by SisaHan

이재용 항소심 선고가 나던 날은 종일 머리를 얻어맞은 듯 몽롱했다. 정신없이 기사를 마감하고, 이튿날 판결문을 뜯어봤다. 화가 치밀었다. 판결 비판 기사로 며칠을 보냈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났으니, 명절 때 받은 가족의 따사로운 기운에 기대어 찬찬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법조팀이 썼던 기사도 다시 살펴봤다. 감정이 뚝뚝 묻어났다. 누구를 향한 분노였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수감되고 이 부회장이 1심에서 실형을 받는 걸 보면서 내 딴엔 그림을 너무 크게 그렸던 것 같다. 대한민국의 근대를 주물렀던 ‘박정희’와 그가 고속성장의 적토마로 키운 ‘재벌’. 두 존재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래도 박정희가 안 굶게 해줬다”는 기성세대의 부채감과 “삼성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다”는 실체 없는 두려움. 이런 걸 던져버리게 되길 바랐던 것도 같다.
과도한 의미부여였고, 호들갑성 자가발전이었다. 고백하자면, ‘박정희 왕조’의 최후가 빚은 노을에 취해 있었다. 그들이 낳은 더 강력한 ‘삼성 왕조’에 나라가 단단히 덜미 잡혀 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판결문이 ‘삼성 왕조’의 우위를 확실히 일깨워준 뒤에야 애써 외면했던 몇 장면이 떠올랐을 뿐이다.


“아버님께 야단을 맞은 걸 빼고는 야단맞은 기억이 없는데, 여자분한테 싫은 소리를 들은 게 처음이어서 당황했다.”
1심 재판 때 이 부회장은 법정에서 박 전 대통령과의 독대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싫은 소리’라고 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대통령의 겁박’으로 포장했다. ‘상왕’ 외엔 누구도 못 건드린 그가 대한민국 대통령을 ‘여자분’이라고 칭한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그 ‘여자분’은 5개월 뒤 자필로 쓴 탄원서를 이 부회장 재판부에 내는 놀라운 장면을 보여줬다. 자신 때문에 줄줄이 옥살이하는 참모들 재판에 탄원서 한장 낸 적이 없는 그였다. 그때 ‘우주의 기운’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봤어야 했다.
그 기운은 판사들에게도 미친 듯하다. 삼성의 해외 송금 당시엔 뇌물 공여 의사가 없었다는 ‘관심법’이 등장했다. 송금한 돈은 최순실이 ‘쓸’ 돈이어서, 뇌물로 ‘쓴’ 것은 아니라는 헷갈리는 말로 형량을 줄였다. ‘삼성 합병’ 등의 청탁은 1, 2심과 최순실 1심을 거치며 ‘세상에 없는’ 일이 됐다. 동시에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으로 손해가 난 서민 노후자금 1300억원은 우주로 사라졌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이 부회장을 풀어준 정형식 재판장은 다음날 <조선일보>에 판결문에 담지 못한 말을 했다.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 생각이 정리되면 판결에 대해 담담히 얘기할 수 있을 때가 올 거라 믿는다.” 역시 그는 탁월했다. 판결 직후 느꼈던 막연한 분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와 판결을 감싸고 나선 동료 언론들. 박씨 왕조를 버리고 “판결에 경의를 표하는” 보수정당들. “1년 감방 살았으면 됐다”는 주변의 수많은 정형식들. 십자포화를 퍼붓고도 어쩌면 속으로 ‘할 만큼 했다’며 돌아서고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
이 모든 게 맞물려 저렇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판결이 나왔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담담히 얘기”하자는, 망각을 강요하는 듯한 조롱도 그래서 가능했을 것이다.
역시나 수십년 켜켜이 쌓인 부조리를 깨부술 ‘한판 승부’는 없었다. 한 방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인정하고, 다시 공허한 마음을 추스를 수밖에.
쓸쓸하고 스산한 2월이 가면 꽃피는 춘삼월이 언젠가는 올 테니.

< 석진환 - 한겨레신문 법조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