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평창, 평화의 축제로

● 칼럼 2018. 1. 30. 20:26 Posted by SisaHan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난 2년 간의 한국은 격동기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자고 나면 터지는 대형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평창올림픽이 금년 2월에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이제 바로 코 앞에 다가온 시점에서 국가적인 행사에 제대로 준비가 되어있는지 염려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두 해 전에도 사실 부정적인 면에서 말이 많았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개최하기에 준비가 안돼있어 몇 경기를 일본에서 개최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 뿐 아니라 대회 조직위원장이 분명한 이유 없이 바뀌고, 주요경기장의 건설에 최순실이 개입했다는 말까지 떠돌았다. 그리곤 사람들이 급변하는 정세에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이제 올림픽 개막을 눈 앞에 두고 있는데… 북한의 핵미사일 발사와 그에 맞서 미국의 선제 공격이 거론되며, 일촉즉발의 전쟁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었다.

그런 이유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 미국, 일본, 중국이 평창올림픽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말이 떠돌기까지 했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떠도는 이런 뉴스가 소위 말하는 가짜 뉴스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그럴 듯 하게 들리기도 했다. 러시아는 지난 소치올림픽에서 선수들의 약물복용 때문에, 일본은 군대위안부 협상 문제로 아베 총리가 참가하는 축제를 원하지 않고, 미국은 자국 선수들의 안전 때문에 선수들이 불참할지 모른다는, 중국은 사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그리고 북한은 올림픽을 앞두고 또 다시 핵무기 폭발실험을 하여 긴장감을 조성시킬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주최국인 한국민들의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촛불집회 이후의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이 국민들로 하여금 대통령의 탄핵과 선거 그 이후의 적폐청산 또는 정치보복에 쏠려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한국민이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세계 어느 나라에서 관심을 가질까? 그리하여 평창 올림픽이 망할 수 박에 없는 올림픽이라고….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의 신년사는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선수단, 응원단 그리고 예술단을 파견한다면. 핵 미사일을 쏘아 올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너무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기쁘기도 하지만 왠지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한미 군사훈련이 연기되고, 미국 부통령이 오고, 북한에서도 고위관료가 내려와 북미협상이 있을지 모른다는 추측보도에 오히려 혼란스럽기 조차 하다, 중국의 시진핑은 자신이 직접 오지 못할지라도 고위간부를 보낸다고 약속했다. 상황이 이렇게 변하면 개막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한 아베 총리만 난처하게 되는 셈이다. 정말 너무 빨리 사태가 변하여 머리가 어지럽고, 사실인지 믿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평창 올림픽에 관한 것들을 유튜브에서 찾아보았지만 의외로 올라온 게 없었다.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없었다는 증거이리라. 그러다 나는 우연히 ‘원바디! 꼴찌들의 반란’ 이라는 한국여자 아이스 하키팀에 관한 프로를 보았는데, 정말 감동적이었다, 한국에는 여자 아이스 하키 팀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이 국가대표팀이라고 한다. 초등학교는 물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도 팀이 있는 캐나다와 비교할 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자 초등학교 팀과 시합을 해서 패하기도 한다, 국제대회에 나가 중국에게 20:0으로 패하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었다. 그런 팀이 성장하여 작년에 북한과 중국에 이겼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다. 선수들의 피땀 어린 노력의 결과라 하겠다. 그런데 북한과 단일팀으로 출전할지 모른다고 한다. 남북 평화와 화해라는 목표를 위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까만, 그럴 경우 많은 선수들이 시합에 뛰지 못할 것이다. 선수들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올림픽을 목표로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얼마 전만 해도 한반도의 전쟁위기설이 떠돌았는데, 이제 전세계인이 모여 평화스럽게 올림픽을 치르면 얼마나 좋을까? 올림픽의 목표는 평화와 화합이다. 지구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분단 국가인 한국에서 진정한 평화를 향한 세계인의 축제가 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역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역사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그런 역사에 대한 관심은 역사현장에서 일어나고 진행되는 어떤 현상이 위기적이라고 판단되고, 그 위기적 현상에 대해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고 어떤 답을 찾아나서야 하는가를 고민할 때 부쩍 증폭한다. 그런데 어떤 현상을 위기로 보느냐, 그리고 그 현상의 어느 점을 위기요소로 보느냐 하는 판단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래서 같은 사건에 대해서 정반대의 방향으로 대응하기도 한다. 그런 대조적 반응을 우리는 지난 겨울부터 한 해 동안 멜 라스트만 광장에서 몇 차례 열렸던 동포들의 시위에서 어떤 이들은 ‘박근혜 탄핵’ 피켓을 들었고 어떤 이들은 태극기를 드는 것을 통해서 실증적으로 보았다.


그렇게 하나의 사건을 놓고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것을 보노라면, 역사란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처럼 속에 담고 있는 어떤 일정한 법칙을 따라 진행되는 것일까, 아니면 해가 지구를 도는 것처럼 인간들의 일상성 속에서 그냥 우연히 발생하는 흔적들의 누적이라고 봐야 할까 하는 질문을 만나기도 한다. 누구나 알듯이 지구가 태양을 돌아서 사계절이 생기고 자전을 통해서 주야가 생긴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그냥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맞이하고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이면 해가 지는 일상 속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생활 패턴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바로 그런 식으로 살아온 인간들에 의해 역사는 오늘까지 흘러온 것이 아니겠는가 싶기도 하다. 그러니 위 질문에 대해 뭐라고 답해야 할지 상당히 난감한데, 그러나 두어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모든 생명체들이 진화라는 법칙을 타고 살아왔듯이 역사도 진화의 법칙을 타고 오늘까지 전진해 왔다는 점이다. 모든 생겨난 존재들, 심지어 지구 같은 무생명체까지도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진다. 그리고 그것들의 그런 생멸(生滅)의 사이 과정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변화과정인데, 생명체들의 변화는 어떤 연유 때문인지 모르나 필연적으로 꼭 그래야 하는 것처럼 진화의 형식과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것이 모든 생명체들의 흐름을 끌고 가는 법칙인데, 인간들이 엮어온 역사라는 것도 인간이란 생명체 자체가 그래왔던 것처럼 진화의 법칙을 따라 흘러왔음을 우리는 본다. 물론 경우에 따라 앞으로 전진했다가 뒤로 미끄러지기도 했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역사는 꾸준히 앞으로 전진해왔고 진화해왔다. 그리고 역사를 그렇게 진화의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힘은 말할 나위 없이 바로 인간에게서 나왔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만한 점은, 역사(history)란 학자에 따라 다르게 쓰여지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다시 쓰여지기도 하는 영역이지만, 그러나 결국은 보편적인 하나의 모습으로 종합된다는 점이다. ‘역사’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 자체를 역사(Geschichte)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난 사건을 관찰하고 해석해서 기록으로 쓴 것을 역사(history)이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란 역사학자들이 자료를 모으고 조사 탐구해서 기록한 역사책을 통한 역사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똑 같은 사건이라도 다른 시대적 위치, 다른 지리적 위치, 다른 견해적 위치에서 다른 내용의 역사를 기록하기도 하고 다시 고쳐 쓰기도 한다. 그래서 실제로 한 사건에 대해 다르게 기록된 역사(history)들이 비일비재하다. 가령 일제시대 때의 위안부에 관련된 사실에 대해 한국인이 쓴 역사와 일본인이 쓴 역사가 다른 것이 그런 한 예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계는 어떤 역사(Geschichte)적 사건을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의 통일된 보편적 기준으로 평가하게 되고 그래서 드디어는 그런 보편적 가치기준으로 평가된 통일된 역사(history)를 기록하는 쪽으로 간다.

그것은 세상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이란 존재에 적용하는 공통분모적 기준가치가 개인차원에서는 자유로, 공동체 차원에서는 평등으로 통일되어 자리매겨져 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간이란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얻고자 꾸준히 투쟁해 온 역사현장적 존재이기도 하고, 그 투쟁의 모습을 계속 진화되어 온 기준으로 새롭게 들여다보고 기록해 온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앞으로 한국에서 인간이 어떻게 대접받고, 인권이 어느 만큼 신장될지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려운 고개들을 넘기도 하겠지만, 상당히 발전된 대접을 받는 쪽으로 가지 않겠는가 예측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런 예측은 말할 나위 없이 한국국민들이 2017년 한 해 동안 내내 보인 촛불로 상징된 눈부신 역사관심 및 행동양식을 통해 화려하게 승리를 거둔 정치적 및 사회적 현실에서 나온 예측이다.

< 윤용섭 - 전 언론인 >


북한의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를 앞두고 남북 실무접촉이 진행중이다. 그런데 남북 공동입장 때 한반도기를 드는 문제를 비롯해 벌써부터 야당과 보수언론의 사사건건 트집 잡기가 심하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를 비롯한 야당 인사들은 한반도기 드는 것을 이런저런 이유로 반대만 한다. 도대체 북한 선수들이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란 건지 묻고 싶을 정도다.


국제스포츠대회에서 남북이 공동입장한 것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시작으로 2007년 창춘 겨울아시아경기대회까지 모두 9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남북은 한반도기를 함께 들고 입장했다. 국내에서 열린 국제대회인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에서도 한반도기를 사용했다. 국제대회에서 ‘한반도기’는 남북화해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그것이 어찌 태극기를 홀대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


대규모 예술단 참가를 놓고도 벌써 시비다. 북한 공연이 체제 선전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북한은 그러고 싶어 할 것이다. 북한은 이번 기회를 통해 남한을 포함한 국제사회에 이미지를 제고하고, 대북 제재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려 애쓸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공연을 통해 ‘체제’를 선전한다 해서 우리나라 국민 중 혹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아직도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그렇게 없는 것일까. 공동입장, 단일팀, 예술단 참가 등에서 확정도 안 된 세부안을 놓고 사사건건 시빗거리 찾느라 혈안이 된 듯한 속 좁은 자세가 보기 딱하다.


남북이 만나면 조금은 큰 소리도 나고 불편함도 생기는 게 사실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간 갈등만 키워왔으니 더욱 그렇다. 이젠 그런 걸 겪어내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키워나가야 한다. 그것이 ‘평화와 공존’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자세일 것이다. 조금의 불편함이나 양보 없이, 어떻게 만남을 이어갈 수 있겠는가. 개최국답게 너그럽고 성숙한 자세를 보여야 할 때다.


시사 한겨레가 캐나다 땅에 첫 선을 보인지 어언 열 두 해가 됐습니다. 척박한 이민사회에서 지나 온 발걸음들이 어찌 순탄하기만 했겠습니까. 초창기 다소 생경한 신문논조에 곱지않은 시선을 보낸 이들도 있었고, 거북한 말투로 걸려 온 전화도 귀에 생생합니다. 모처럼 제대로 된 기사들을 본다며 반가워하고 힘내라고 격려 해준 분들도 물론 많았습니다. 그렇게 비판이든 응원이든 모두가 관심과 배려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려니, 돌아보면 정말 고맙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이제 12살 연륜을 쌓은 오늘의 시사 한겨레는 바로 그런 모든 분들의 은덕으로 풍랑을 헤치고 눈비 속에 담금질 해왔다고 믿어, 먼저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처음 닻을 올리면서부터 저희가 간직해 온 소망이 있습니다. 여건이 녹록치 않고 체구는 작을지 몰라도 본령에 충실한 참 언론의 모습입니다. 바르고 정의로움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당돌한 꿈입니다.
우리 주변은 언론과 정보가 넘쳐납니다. 매섭고 값진 기사가 있는 반면에, 눈속임의 달콤한 독성뉴스, 치우친 보도로 판단을 흐리고 여론을 호도하는 신문들, 이념과 권력에 경도된 관변언론까지, 독자들을 오도하고 마비시키는 언론 홍수가 가치판단과 분별의 지혜를 요구합니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에 치열한 보수와 진보의 논전만 보아도, 한 쪽만 비대하고 자기들만 선(善)을 주장하는 상태가 지속됐습니다. 양 날개가 조화롭게 견제와 균형을 이룰 때 ‘우리’라는 공동체가 건강하게 날아오를 텐데 말입니다. 기울어지고 홍수난 운동장에는 바로 잡고 일깨울 파수꾼의 외침이 절실합니다. 진정성 있는 외침이라면 비록 작은 목청일지라도 귓전을 때려 호응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지, 저희의 꿈이 바로 그런 겨자씨 같은 역할이었으면 하는 비전에 다름 아닙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이민 1세대는 애국 향수와 독재 시대에 익숙했던 사고의 경향이 강합니다. 정통성 없는 역대 정권들의 공공연한 작용도 무관치는 않습니다. 그렇게 소위 보수 편향의 풍토에, 종래와는 결이 다른 논조의 신문으로 변화의 씨를 뿌려보겠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모험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 날개론’의 관점은 물론이려니와, 의식의 다변화 기회를 제공하여 우리들 사고 수준의 ‘업그레이드’라는 기대효과까지 고려한다면, 정말 의미있는 도전이 아니겠습니까?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신문은 사회의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저희 신문의 지난 면면들을 살펴보면 우리네 발자취가 시사 한겨레라는 소박한 거울에 투영된 모습들을 엿볼 수 있을 겁니다. 독자 여러분의 판단은 어떨지 자못 궁금합니다. 많은 분들이 시사 한겨레에 익숙해져서 친근감을 느끼고, 양호하다 평가하신다면, 기울어진 언론지형에 긍정적 변화의 조짐은 아니겠는지요. 신문에 비친 사회상에 눈을 돌려 봅니다. 최근 한국의 격동 정국에서 정권이 세월호 은폐에 몰두할 때 이 곳에서 규탄과 진상규명의 목소리가 줄기차게 이어졌습니다. 탄핵을 외치며 해외 어느 지역보다 뜨겁게 타오른 촛불의 열기에서도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들을 읽는다면 ‘아전인수’의 시각일 뿐인지…, 물론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말입니다.

1700만 촛불혁명으로 한국은 이제 정상화의 길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양파껍질처럼 드러나는 지난 정권들의 적폐는 상상 이상입니다. 국민과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 헌신했어야 할 지도자와 그 정부의 행태는 그야말로 구멍가게 수준이었습니다. 공적 시스템과 국민세금을 사적 이익추구의 방편으로 사용하며 불법과 편법을 남발했습니다. 그러고도 뭘 잘못했느냐는 적반하장입니다. 저들의 그런 불법과 편법, 뻔뻔함은 도대체 어디에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일까요? 그 키워드가 바로 ‘언론장악’임은 공지의 사실입니다.
권력의 일탈에 눈감고, 나팔수에만 충실했던 방송과 신문들. 그 훼절과 굴종의 모습들은 “이게 나라냐”는 질타를 빼닮은 “그게 언론이냐”라는 말에 압축됩니다. 언론이 제 기능을 못하고 권력에 야합하면서 감시와 비판은 사라졌고, 권력의 폭주에 편승해 소수의 가진 자와 누리는 자들만의 편리한 도구로 전락한 폐해는 해외 한인사회에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신문을 사회의 거울이라고 한 것은 지면에 사회상을 담기도 하지만, 사회에 ‘빛’을 비춘다는 뜻도 있을 겁니다. 그동안 일부 언론은 기득권과 권력중심, 가진 자 위주의 기사들로 편향된 시야만을 보이면서 자기들만의 세상에 화려한 빛을 비췄습니다. 그러나 바른 언론의 모습은 그게 아닙니다. 그래선 안될 것입니다. 보수나 진보를 떠나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 풀뿌리 민초들의 소리를 담아내며 사회정의와 공동선을 설파해야 합니다. ‘정론직필(正論直筆)’이라고 합니다. 옳고 바르게, 선하고 정의로운 기사로 어두움에 빛을, 후패하는 곳에 소금이 되라는 것입니다.
요즘 모국의 사정이 말해 주듯이, 모든 것이 정상화되고 파사현정(破邪顯正) 하려면, 적폐 세력과의 철저하고 중단없는 싸움이 불가피 합니다. 참된 언론의 길도 가시밭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과 행동하는 정의감으로 꿋꿋이 헤쳐 나가야 할 명제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바른 언론의 소임이 시대나 지역, 사세가 크고 작음에 좌우될 리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의 마음으로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언론과 언론인의 최우선 덕목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되새기는 저희의 다짐도 ‘빛과 소금’의 덕목입니다. 지금까지 간직해 온 참 언론의 소담한 꿈을 더 키우며 한걸음씩 묵묵히 나아가고자 합니다. 열악한 여건에서 멀고 험한 길이지만, 독자 여러분의 응원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나아가려 합니다.
옷깃을 다시 여미는 시사 한겨레에 변함없는 편달과 성원을 당부드립니다.

< 김종천(金鍾天)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