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진화론을 설파한 찰스 다윈은 진화는 생명체들이 긴 세월 자연환경에 적응해가는 동안 조금씩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자연선택 현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진화학자들 중에는 진화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어떤 내적 또는 외적 요인으로 인해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돌연변이적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생각해보면, 그런 돌연변이 현상은 단지 생명체들의 진화과정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인류가 엮어온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숱하게 일어났음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가령 원시시대에 채취농업에서 재배농업으로 진화시킨 농업혁명이라든가, 고대사회에서 문자를 창제하여 전사시대를 마감하고 유사시대를 창조한 문자혁명이라든가, 근세에 들어와 왕성한 발견과 발명 활동을 벌여 인류사를 과학문명시대로 진입시킨 과학혁명 같은 것 등이 인류역사상에서 일어난 굵직한 돌연변이적 진화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런 대 혁명적 역사발전 외에도 조그만 개혁운동이 중간 중간에 수시로 일어나곤 했었는데, 최근 모국에서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진행된 촛불봉기와 대통령 탄핵과 정권교체와 그리고 그런 연쇄적 역사진행의 마무리활동으로 행해지는 적폐청산 작업 등 일련의 과정도 그런 돌연변이적 현상, 즉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돌발적 현상이 아니겠는가 싶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그가 남긴 긍정적 업적과 부정적 폐해 때문에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가 한국의 산업과 경제에 엄청난 개혁과 발전을 가져다주었다는 점이라든가. 그의 사후에 한국사회가 과학기술 면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기반을 닦아놓았다는 점은 결코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국가운영 면에서나 정권연장 면에서 권력을 초법이고 무법적으로 휘두른 점 등은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정치행위로서 그냥 적당히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에서 힘(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힘)이 월권적이거나 불법적으로 관행처럼 자행되어 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한 번도 바르게 청산되지 못하고 계속 적폐로 쌓여온 것도 그가 남긴 부정적 영향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봐야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적폐청산을 말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적폐를 청산은커녕 오히려 더 쌓아올리기만 했다. 최근에 거의 매일 새롭게 드러나고 있는 그녀와 그녀의 주변인들이 저지른 권력남용 행태를 보노라면, “어떻게 저렇게 까지 할 수 있었지?”싶은 만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결국은 그 만행은, 평화롭게 표현되긴 했지만 강력한 힘으로 분출된 국민의 분노를 넘지 못하고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첫 번 째로 탄핵된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그런데 국민들이 이 시점에서 명심해야 할 점은, 그런 비극을 단지 박근혜 대통령의 사적인 불행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국민은 그녀의 비극적 행로를 보면서 새로 들어선 정부는 한국사회에서 관습적으로 저질러져 온 범법적 권력행태의 실상과 원인을 찾아서 그런 일들이 앞으로 더는 일어나지 않도록 야무지게 방역활동을 펴도록 촉구하고 격려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사회가 제대로 개혁되어 한 차원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점을 첨언코자 한다. 법적 관점에서는 죄는 반드시 처벌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 영역으로 들어가면 처벌은 용서와 관용이라는 방법으로 조율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 한국사회의 상황은 안팎으로 직면한 문제점들 앞에서 여야는 물론이고 나아가 온 국민들도 되도록 합심하고 협력하는 것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온 국민이 주목하는 가운데 실행되는 적폐청산은, 과정과 절차는 법적으로 엄격히 밟지만 마무리는 유연하게 이루어지도록 정치적 융통성이 발휘되었으면 한다.

< 윤용섭 - 전 언론인 >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개된 재판에 두차례 불출석하자 재판부가 28일 궐석 재판을 진행했다. 지난 10월에 재판부가 추가 구속영장을 발부하자 박 전 대통령은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보복’ 운운하며 재판 거부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비슷한 주장을 펴며 변호인단이 사퇴했던 전두환·노태우씨도 법정에는 나왔다. 박근혜씨의 재판 거부는 한때나마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금도마저 벗어난 일이다. 그동안 압수수색영장과 법원의 구인영장을 무시하고 재판을 지연시키더니, 이제는 아예 재판까지 보이콧하니 국정농단에 이은 ‘막가파식 사법농단’이라고밖엔 달리 할 말이 없다.


아마도 혐의를 법률적 다툼으로 방어하는 건 역부족이란 판단을 했을 법하다. 기존의 뇌물수수 등 혐의에 이어 최근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사적 용도로 가져다 쓴 사실이 드러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문고리 3인방인 이재만·안봉근 전 청와대 비서관에 이어 전직 국정원장들까지 자신의 특활비 전용 사실을 구체적으로 진술하자 더이상 빠져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치적 지지자들을 겨냥한 그의 옥중 정치투쟁은 그런 점에서 매우 정략적이다. 국민들에게 더 큰 죄를 짓는 일일 뿐 아니라 대다수 국민의 공분을 일으켜 결국은 법적으로도 더 큰 단죄를 불러올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의 ‘정치투쟁’에 발맞춘 듯 일부 수구보수 세력이 적폐청산의 발목을 잡기 시작한 것은 매우 우려할 만하다. 친박 인사를 중심으로 ‘정치보복’이란 주장을 펴오더니 검찰 수사를 거부하는 사례도 생겼다. 기획재정부 장관 때 국정원 특수활동비 1억원을 받은 혐의로 소환된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은 버티다 뒤늦게 번복했다.


군 사이버사령부 정치개입 수사는 일부 야당과 언론에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 구속을 비난하더니 11일 만에 구속적부심에서 석방 결정이 내려졌다. 이미 부하인 이태하 전 심리전단장에게 1·2심에서 유죄 판결이 내려졌고 구속 이후 아무런 사정 변경이 없었는데도 “범죄 성립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석방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법원이 군을 정치에 끌어들인 국기문란 범죄의 중대성을 간과하고, 본질을 호도하는 ‘정치보복’ 프레임을 들이댄 수구보수 언론과 야당 주장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국정원 댓글공작만으로도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마땅할 이명박 전 대통령과 측근들이 “우리도 과거 정권 적폐를 갖고 있다”는 등 시정잡배식의 협박정치에 나선 것도 국민을 우롱하는 행동이다.
검찰은 이런 정치공세에 흔들리지 말고, 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이명박 비자금’ 등 모든 의혹을 성역 없이 파헤치기 바란다.


자유한국당이 뜬금없이 검찰의 특수활동비(특활비)를 물고 늘어지고 있다. 홍준표 대표는 검찰 특활비가 매년 법무부에 건네졌다며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수사를 요구했다. 23일엔 박상기 법무부 장관을 불러 이 문제로 현안질의를 벌인다고 한다. 국정원 특활비 사건의 본질을 덮고 쟁점을 흐리게 하려는 ‘물타기’ 아닌지 의심스럽다.
물론, 검찰의 특활비 가운데 일부가 법무부로 반환돼 사용됐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검찰 몫으로 배정된 특활비 가운데 일부가 관행적으로 법무부에 반환돼 장관과 검찰국장 등에게 전달돼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액수가 얼마인지, 누가 어디에 썼는지는 정확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런 잘못된 관행은 뿌리 뽑는 게 옳다. 특활비가 더 필요하다면 떳떳하게 예산을 편성해 국회 심의를 받아서 써야 한다.


하지만 명백한 불법행위인 국정원 특활비 상납을 검찰의 특활비 문제와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청와대에 건네진 국정원 특활비는 ‘검은돈’이다. 5만원권 현금 뭉치가 007가방에 담겨 몰래 청와대에 전달됐다. 조금이라도 떳떳한 돈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했겠는가 싶다. 대통령과 몇몇 측근들이 마음대로 쓰고 요령껏 나눠 가졌다. 어디에, 어떤 목적으로 돈을 썼는지 알 수 없고, 개인적 용도로 유용된 돈도 적지 않을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법무부가 검찰 몫으로 책정된 특활비 285억원 가운데 106억원을 썼는데, 이는 ‘횡령’이자 ‘국고손실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본적 사실관계부터 잘못돼 있다. 검찰에 배정된 올해 특활비는 179억원이며, 법무부가 쓴 특활비 106억원은 원래부터 출입국관리사무소, 교정본부, 감찰관실 등 법무부 산하기관에 배정된 것이다. 예산 편성 때부터 법무부 몫이니 ‘눈먼 돈’도 아니요, ‘검은돈’과도 거리가 멀다.


국정원 특활비가 국회 쪽으로도 일부 흘러들어갔다는 검찰 수사 내용이 흘러나오자, ‘물귀신 작전’을 하듯 검찰 특활비 문제를 들고나온 점도 석연치 않다. 검찰은 20일 오전 국정원 특활비 1억원을 받은 혐의로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의 자택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같은 시각,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국회 법사위에서 검찰 특활비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검찰 수사를 방해하려는 정치적 의도라고 의심을 살 만하다.


[칼럼] 보수들의 골방 정신승리

● 칼럼 2017. 11. 29. 12:38 Posted by SisaHan

대한민국 보수는 지금 사상 최대 위기를 겪는 중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여전히 모르는 것 같다.
대표적인 사례가 요즘 적폐청산에 대해 보이는 그들의 태도다.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한 것도 모자라, 발각된 뒤에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세금으로 대통령에게 뇌물 좀 줬다고 전 정권의 국가정보원장을 한꺼번에 세명씩이나 구속하겠다는 건 심하지 않냐고, 지금 혁명 중이냐고 투정 부린다. 나라 지키라고 만들어놓은 국정원과 군대가 국민을 편 갈라 이간질하고 심지어 선거에까지 개입했다가 걸렸는데 이런 위헌적 행위에 대한 검찰 수사를 정권의 하명수사이며 정치보복이라고 비난한다. 이게 과연 ‘법과 원칙’을 중시하고, (국가를) ‘보전하여 지킨다’는 보수가 할 짓인가. ‘피디수첩’이나 ‘미네르바’ 사건처럼 ‘없는 죄’도 만들어내던 사람들이 ‘있는 죄’를 모른 척하라고 강변하는 꼴이다.


‘하명수사’ 프레임은 ‘도둑이 제 발 저린’ 사고방식의 전형이다. 그런 식의 하명수사가 이 정부에선 통하지 않는다는 걸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일까. 현직 청와대 정무수석의 비리 혐의에 대한 수사를 법무부나 청와대에 사전 통보 없이 시작할 정도로 검찰의 중립성은 잘 지켜지고 있다. 전병헌 전 수석 본인은 억울하다고 하는데도 면직부터 시킬 정도로 지금 청와대는 결벽증이 있다.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자신에 대한 내사를 벌였다는 이유로 국정원을 동원해 사찰하고 내쫓았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청와대와는 판이한 대응이다. 이제 우 전 수석 같은 독재적 발상은 꿈도 꾸지 못할 시스템이라는 걸 하명수사를 말하는 사람들 스스로 더 잘 알 것이다. ‘정치보복’ 주장도 마찬가지다. 정치보복이란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정연주 전 <한국방송>(KBS) 사장처럼 일부러 먼지를 털기 위해 국세청이나 감사원 등을 동원해 벌이는 표적 수사에나 해당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국정원의 천인공노할 불법행위가 먼저 있었고, 그걸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전 정권과 전전 정권의 비리를 흐름에 따라 수사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누굴 타깃으로 하는 보복 수사와는 거리가 멀다.


가장 한심한 것은 변창훈 검사의 죽음을 이용하는 이들의 행태다. 고작 한다는 얘기가 ‘같은 식구끼리 너무한 것 아니냐’는 논리인데, 그럼 검사라고 특별 대우해야 한다는 말인지 되묻고 싶다. 검찰이 전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됐던 이유가 바로 ‘제 식구 감싸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벌써 잊었는지 의문이다. 변 검사의 선택은 너무나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지만, 국정원이 법을 준수하는지 지켜보라고 파견한 검사가, 오히려 국정원의 불법행위를 수사하는 검찰을 속이고 따돌리는 불법행위에 앞장섰는데 그걸 봐주란 말인가.


보수세력이 여전히 잘 모르는 게 하나 더 있다. ‘박근혜 탄핵 촛불’ 이전의 대한민국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거의 다른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수세력이 집권을 위해 불법과 탈법을 동원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런 무리수를 동원해 지켜야 할 정권이 고작 박근혜 정권 수준이라면 더이상 지지하지 않겠다는 보수층이 생겨난 것이다. 촛불집회의 성격에 대해 여러 분석이 있었지만, ‘이게 나라냐’는 물음에는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고 지키려는 보수적 가치가 담겨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보수의 토양이 바뀐 것이다. 적폐청산을 지지하는 국민이 여전히 3분의 2나 되는 건 적지 않은 보수층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골방에서 정신승리에 열중하는 한 자칭 ‘보수’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 이재성 - 한겨레신문 사회에디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