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국격’은 어디서 오나

● 칼럼 2017. 7. 19. 14:18 Posted by SisaHan

이달 초 독일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는 미국의 영향력 쇠퇴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양대 주요 의제인 ‘파리 기후협약’과 ‘자유무역’이라는 국제규범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참가 20개국 가운데 19개국이 한 목소리를 낸데 반해 미국만이 ‘협약 탈퇴’와 ‘보호무역’이라는 독자노선을 고수해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어 버렸다. 현지 발 통신들은 19대 1의 ‘반 트럼프 전선’이 형성됐다고 전했다. 미국의 새 지도자인 트럼프가 국제사회의 이단아로, 더구나 지구환경의 미래에 관한 문제와 글로벌 무역장벽 해소라는 보편적 ‘공동선’에 반기를 들고 나와 ‘왕따’를 당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퇴조는 세력권에 있어서 위축이라는 가시적 현상 보다는 ‘도덕과 철학’이라는 가치의 평가에서 하대(下待) 당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즉 지구오염과 온난화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데도 공동의 대처를 외면하고 혼자만 편하겠다는 ‘나 몰라라’식 태도에다, 무역에 있어서도 혼자만 득을 보겠다는 심보의 발로여서, 한마디로 더 이상 세계 최고의 가치와 국격을 지닌 나라가 아닌, 이기적이고 경박한 미국으로 보는 시각인 것이다.
그 연원이 바로 도날드 트럼프라는 인물 한사람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온갖 기행과 튀는 언동으로 미국과 세계를 당황케 한 그는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국제적 지도력을 기반으로 공조·구축한 규범의 틀을 깨고 무너뜨리기에 바쁘다. 외교적인 매너 조차 엉망이어서 악수 때문에 구설이 잇달고, 다른 지도자들을 밀쳐내고 포토라인에 서는 등 상식마저 초월하고 있다.


‘이제 미국에만 의존할 때는 지났다“라고 선언한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이번 정상회의를 주관하면서 트럼프와 대비되는 든든하고 신뢰할 만한 지도자로 우뚝 섰다. 덩달아 독일의 국격과 지도력 또한 위상이 한층 높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원래 독일의 국력과 유럽연합 내에서의 지도적 위치 등이 우월했다고는 하겠지만, 독일의 국격 상승은 역시 메르켈이라는 탁월한 지도자 한 사람의 품격과 지도력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아니할 수가 없다.
소탈하고 소통에 능한 것으로 인기를 끄는 메르켈은 일찍이 ‘탈 원전’으로 미래를 위한 안전과 청정의 환경 정책을 전개했다. 그는 유럽의 각국이 난민 수용을 회피할 때, 더욱이 국내적인 반발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과감하게 난민을 받아들이는 용단으로 ‘인류애’를 보여주었다. 그는 끊임없이 나치의 죄과를 반성하고 회개하며 혹여라도 나치의 전쟁범죄를 찬양하거나 나치를 옹호하는 세력에는 강력 대처하는 역사의식과 민주체질을 지녔다. 일본을 방문했을 때 과거사를 사죄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지도국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충고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수준높은 가치와 철학을 지닌 정치인이요 내실있는 민주적 지도자인 것이다.


메르켈 총리가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을 정성껏 환대했다는 소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지구촌을 놀라게 한 촛불혁명에 큰 관심을 보였고, 부패 무능한 권력자를 탄핵한 뒤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새 지도자, 민권변호사 출신이며 큰 국민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문 대통령에게 깊은 관심과 동지애를 드러냈다는 분석들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그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해 각별하게 챙겼다는 견해도 덧붙였다. 이번 G-20에서 많은 나라 정상들이 문 대통령과의 회동을 원하는 이례적인 인기를 끈 것도 같은 이유라는 것이다.
지난 번 미국 방문에서 한인동포들이 다들 기뻐한 것도, 이번 독일 방문에서 만난 재독 동포들의 감격과 눈물도 바로 그런 가슴 뿌듯한 자긍심에서 비롯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온갖 정치공작과 국정농단, 민생피폐의 음습한 국내정치와 민주주의 파괴적 행태들을 일삼으면서도 무역규모가 10위권이며 국민소득이 얼마라는 등을 자랑한 물량주의적-가시적인 국격은 얼마나 천박한 허세에 불과한지,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물론 여전히 그런 맘몬주의적 허상숭배를 버리지 못하고 저질의 뻔뻔한 우월감과 고집에 빠져있는 자들도 많은 현실이지만…. 이제, 한 국가의 국격은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고 정의와 도덕과 철학이 존중되며 구현되는 데서 출발함을 거듭 되새기는 시절이다. 그런 수준높은 국격은 지도자의 따뜻하고 바른 품성과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가치관에서 지도력이 발휘되는 나라, 국민들이 그런 지도자를 택하고 함께 힘을 모으는 나라의 몫 임을 독일의 메르켈과 함께 한국의 문재인이 새삼 강조해 주고 있는 요즘이다. 문 대통령의 지지도가 80%를 오르내리는 걸 보면 한국민들도 ‘지도자다운 지도자, 나라다운 나라’의 실상과 의미를 실감하고 있는 듯 해서 다행이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적반하장의 세력들

● 칼럼 2017. 7. 19. 14:17 Posted by SisaHan

1649년 1월20일, 영국. 국민의 대표들은 국왕 찰스 1세에 대한 재판을 열었다. 국왕은 대헌장과 권리청원을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대표인 의원을 무단체포하려고 의회에 난입하기도 했다. 국왕에게 적용된 죄명은 ‘대역죄’였다. 국왕은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의회의 사법권 행사를 부인하면서 법정의 권위를 부정하였다. 당시 영국에는 법원이 존재하고 있기는 했다. 하여, 국왕의 논리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찰스 1세는 가장 큰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다. 평시가 아니었다. 두 차례의 내전에서 국왕과 왕당파는 패배하였고, 국민의 대표인 의회파가 최종 승리를 거둔 상태였다. 바야흐로 주권자가 국왕에서 국민으로 바뀌는 때였다. 이에, 국왕으로부터 그 권한을 부여받았을 뿐인 법원의 사법권은 부인될 수밖에 없었고, 오로지 국민의 대표만이 입법·행정·사법의 국가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혁명적 시기였던 것이다. 국왕에게는 이러한 역사인식이 없었다.


찰스 1세는 1649년 1월27일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사흘 후인 같은 달 30일 그 형이 집행되었다. 후세는 이를 일컬어 ‘청교도 혁명’이라 한다. 국왕이 처형되자 영국은 왕국에서 공화국이 된다. 그러나, 왕당파는 완전히 소탕된 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도전에 의해 결국 공화국은 1660년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한다. 새로운 왕이 추대되고, 혁명 지도자들은 사형, 종신형을 선고받거나 심지어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했다. ‘왕정복고’라 불리는 청교도혁명에 대한 반혁명이었다.
영국의 민주주의는 결국 1688년이 되어서야 ‘명예혁명’이라 일컬어지는 무혈혁명으로 완성된다. 국왕의 처형이라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지만 혁명의 마무리에는 무려 40년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난겨울, 연인원 1600만명의 국민이 촛불집회를 열어 당시 행정부의 수반을 몰아냈다. 그는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처형되었던 영국의 찰스 1세처럼 자신의 혐의를 부인함은 물론이고, 심지어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도 한다. 국정 파탄의 수괴뿐만 아니라, 주요임무 종사자 대부분이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빠져나갈 궁리를 뻔뻔하게 하고 있다.
이들만이 아니다. 국정 파탄의 공범자들이 포함된 촛불집회의 방관자들은 정·관계, 경제계, 언론계 등에 여전히 건재한 상태다. 이들은 국민의 요구를 무시함은 물론, 그들의 남은 힘을 모아 촛불시민들의 성과를 언제든지 무위의 것으로 돌리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들도 찰스 1세처럼 ‘기존 질서에 따른 적법성’을 내세운다. 현행법에 따른 권한, 사유재산권, 언론의 자유 운운한다. 혁명적인 상황임에도 기존 질서에 따라 적폐를 청산하려는 촛불시민들의 호의를 역으로 이용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들은 판결문을 위법하게 유출하는가 하면, 인사청문의 대상도 아닌 행정관을 사퇴하라고 요구하기도 하고, 증거 조작도 했으며, 국민을 고소하는 겁박을 자행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피해자인 양 행세한다. 유사 이래 국민에 대해 가장 큰 가해를 했던 자들이 자숙하기는커녕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촛불혁명에 대한 반혁명이 시작되었다는 조짐으로 보인다. 촛불혁명은 아직 진행 중이다. 영국에서는 국왕을 처형하는 극단적인 과정을 겪고도 혁명 완수에 40년이나 걸렸다. 하물며, 우리는 체제의 변화 없이 기존 질서와 법률로써 혁명과업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니, 더 어려울 수 있다. 역사인식이 결여된 자들의 반혁명적인 행태에 대응하고 이를 응징할 대비를 해야 할 때다.

< 이정렬 - 전 부장판사, 국민TV이사 >


[한마당] 성경과 적반하장의 데자뷰

● 칼럼 2017. 7. 5. 13:47 Posted by SisaHan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로마서 2장 5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브리서 12장 17절).


이들 성경구절은 죄를 짓고도 회개와 용서를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경고가 담겨있다. 즉 죄를 지었어도 제 때에 깨달아 진실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이다. 성경에는 이처럼 죄와 회개에 대한 언급이 무수히 나온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이르는 장면이 묘사된 누가복음 23장에는 중죄를 지어 예수와 함께 십자가 참형을 앞둔 강도가 참회하여 용서받고 낙원에 이르게 되는 극적 반전이 기록돼 있다. 설령 살인 강도범일지라도 진심으로 사죄하면 단번에 죄 사함을 받아 천국 입장권도 얻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는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다.
그런데 이같은 죄의 고백과 회개를 통한 용서의 원리가 단지 신앙과 영성적인 측면에만 그치는가. 그렇지 않음은 누구나 잘 안다. 실제로 세상 법정에서 눈물로 후회하며 용서를 비는 피고인이 감형과 선처를 받는 사례는 흔하다. 인간사회의 도덕과 윤리 기준에서도 얼마든지 통용되는 정리(情理)이기도 하다.


좀 더 비약해보면, 가령 독일은 나치의 역사적 죄과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무릎꿇고 사죄하여 용서와 화해의 배려를 얻었을 뿐만아니라, 이제는 도덕적으로 수준높은 지도적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이웃 일본은 전혀 그렇지 못해 경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경과는 거리가 먼 질 낮은 나라와 민족으로 인식되고 있다. 자의식도 책임감도 없는 도덕 불감의 뻔뻔한 국민, 국가철학의 수준이 형편없는 나라. 그러다 보니 정치수준도 민주주의도 후진을 벗어나지 못하는 ‘살찐 돼지’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애틀란타 인근에 ‘평화의 소녀상’이 6월30일 미국에서 세 번째로 제막될 예정인 가운데 일본의 그 지역 총영사가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저질 망언을 늘어놓아 공분을 샀다는 소식이다. “일본군이 성노예로 삼았다는 증거가 없고, 소녀상은 예술 조형물이 아니라 증오의 상징이며 일본에 대한 분노의 상징물”이라는 것이다. 아베 총리 조차 과거 일제의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를 표명한다고 소위 ‘불가역적 최종적 위안부문제 정부간 합의’라는 것에 담아서 발표하고 지키라고 윽박지르면서도, 자기들끼리 앞뒤가 맞지 않은 망발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했듯, 스스로 소녀상을 ‘증오와 분노의 상징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망언을 내뱉는 사이 일본 외무차관은 미국 국무부장관을 만나 “한일간 위안부 합의 이행이 중요하다”며 동의를 구걸했다니 정말 저급한 나라의 외교관들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마침 미국의 하원 외교위원장은 독일의 사례를 상기시키면서 “아베총리는 역사를 직면해야 하고 정직하게 대해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고 한다. 그는 “일본은 침략과 위안부와 같은 인권유린의 역사를 젊은이들이 배우는 역사에 집어넣는 것이 중요하다”고 훈계를 덧붙이며 “독도는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에 자신들의 영토라고 지도에 기록했을 뿐 과거에도 한국의 영토였고, 지금도 한국의 영토”라고 강조, 우리가 할 말을 속시원히 대변해 주었다는 보도다.
‘이전에 언젠가 경험하였거나 보았던 것처럼 여겨지는 느낌 혹은 착각’을 프랑스어로 ‘데자뷰’라거나 ‘기시감(旣視感)’이라고 한다. 마치 일본이 과거사를 깔아뭉개며 적반하장인 것과 너무도 닮은 행태들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요즘 한국의 일부 야당에게서도 바로 그 억지의 기시감을 실감하곤 한다.


압도적인 국내·외 한인들의 선택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 높은 지지율 속에 50일을 맞고 있다. 그런데 헌정유린과 국정농단으로 탄핵당한 전 대통령의 지지그룹인 한 야당은 여지껏 반성의 기미조차 없이 무조건적으로 국정을 걸고 넘어지는 후안무치를 뽑내고 있다. 그런가하면 법의 심판대에 선 탄핵대통령의 재판정에서는 “우리 대통령님”을 외치고 법관들에게 “예의를 갖추라”고 호통을 치는 막무가내 신봉자들의 허망한 목소리도 들린다. 토론토에서도 “탄핵은 무효다, 석방하라”고 열을 올리는 이들이 있다하니, 그들의 심중과 가치관은 과연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성경은 또 이렇게 말씀했다.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에스겔 18장 30절) 잘못을 회개하고 반성하면 결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거듭된 가르침이다. 그런데도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고 과오 덮어버리기와 변명에 급급한 모습은 마치 썩어 문드러진 우상을 붙잡고 구세주라고 외치며 매달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십자가에서 극적으로 구원받은 강도의 깨달음이요, 깨닫지 못한 자들에 대한 징벌의 경고이며 지극히 합당한 지적이다.


< 김종천 편집인 >


조선은 27대 518년을 이어온 왕조다. 이 정도면 세계 기록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에서는 단연코 가장 오랫동안 이어온 왕조다.중국에서 가장 길었던 왕조로 알려진 당은 20대 289년 밖에 안된다. 조선 왕조의 절반 조금 넘는 셈이다.
이것이 자랑거리일까 아니면 수치스런 일일까? 내 생각으로는 둘 다이지 싶다. 유교 전통에 기반을 둔 충효 절개와 신의가 유별나서 그렇게 오래도록 이어갈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자랑거리. 수치스럽다는 것은 주군에 거머리처럼 달라 붙어서 배를 채우며 부와 권세를 자손대대 누리려는 기득권 무리들이 많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조선조에 역모를 꾸미는 것을 보면 특이한 점 하나가 눈에 띈다. 즉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역모를 꾸미는 사람 자신이 스스로 왕이나 황제임을 선포하고 역모 행동에 나선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역모를 꾸미는 사람들이 임금 자리에 앉을 왕족 혈통을 가진 사람을 미리 골라서 점 찍어놓고 역모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말들이 많다. 내가 보기에 그는 사악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주위 몇몇 사람들과 자기 보좌관들에게 미구 휘둘린 대단히 어리석은, 그러나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 같다.


오늘도 박근혜 대통령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던 고위 관리 몇 사람들이 법의 심판을 받으러 법정을 드나드는 것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쳤다. 모두 잘 먹고 잘 입고 얼굴에 번지르르 기름기가 도는 인사들. 이들에게 현대판 간신이란 칭호를 갖다 붙인 언론도 있었다. 이들이 간신이냐 아니냐는 좀 더 무겁게 생각해 봐야 하겠지만, 쌓이고 쌓인 울분이 터지고 말아서 그렇게 되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박근혜 대통령을 보좌하는 고등관리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 자신을 그 상황에 대입시켜보는 버릇이 있다.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가 나의 핵심 윤리 기준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라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했을까? 아니면 “나 이것은 못하겠소” 하고 일어서서 나와 버렸을까. 아마도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나올 용기는 없는 위인이니 시키는 대로 꾸역꾸역 일은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느 교수처럼 조교를 시켜 시험지를 갈아 끼운다거나 어느 보좌관처럼 차명폰을 주선해 줄 주제도 못되는 인물이니 직위는 항상 제자리걸음, 더 높은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에게 까지 돌아올 쇠고랑이 어디 있겠는가.
테두리 밖에서 용감해지기는 쉽다. 그러나 조직 안에 있는 동료들과 등을 지며 “나 이거 못하겠소” 하며 내 던지고 초연히 걸어 나오기는 세상 어려운 일일 것이다.


오늘 지나친 충성으로 쇠고랑을 차고 감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어린 시절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도 학창시절에는 불의에 분노하고 자기가 앞으로 커서 사회에 나가면 불의와 싸우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여러 번 다짐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젊은 시절의 포부는 크면서 세상만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분개…, 이런 경험을 수없이 되풀이 하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이해타산 따라 잔머리를 굴리다 보니 오늘에 이른 것.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 것이다.
간신은 최고의 권좌에 앉은 지도자의 능력 부족으로 생길 때가 가장 많다. 현명한 군주는 간신을 두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예는 조선 제 22대 임금 정조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정조는 임금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홍국영이라는 능력이 뛰어나고 패기에 찬 젊은이로부터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에서 여러 번 구제를 받았다. 홍국영이 없었더라면 정조가 임금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의심이 갈 정도다. 정조가 임금이 되고 홍국영은 서른도 못 된 나이에 총무, 재무, 병무, 의무, 학무의 실무 권리를 모조리 거머쥐게 된다. 조선왕조의 첫 세도 정치가 시작 된 것이다. 그는 몸과 마음을 바쳐 일편단심으로 임금 정조를 떠받들었다.


그러나 정조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는 홍국영을 아꼈지만 냉정하게 그의 성향과 기량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홍국영이라는 사람은 덕망과 어진 인품으로 자신을 도와서 천하대사를 이끌어 갈 위인은 아닌 것으로 보았다. 이제 그는 더 큰 비극이 오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그를 불러 은밀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정조는 그 자리에서 홍국영에게 은퇴를 권고하였다. 박근혜로 말하면 김기춘이나 우병우를 해고한 것이다. 박근혜는 정조처럼 사람 보는 식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역모의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다면 모르지만 주군을 위해서 한마음 한 뜻으로 몸 바쳐 일한 홍국영은 충신인가, 아니면 간신인가? 내 대답은 간단하다. 이쪽에서 보면 충신이요, 저쪽에서 보면 간신이다. 역사는 진 자가 아니라 이긴 자에 의해 쓰여진다. 간신으로 말하면 조카 단종을 임금자리에서 쫒아내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을 음흉한 생각을 품은 수양(세조)을 따를 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수양을 간신이나 부르는 사람은 없다.
오늘도 텔레비전에서는 법정으로 향하는 박근혜 보좌관들의 얼굴을 보여준다. 이들이 충신인가, 아니면 간신들인가? 얼른 판단이 나질 않아 몇 자 적어보았다.

< 이동렬 - 웨스턴 온타리오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