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27대 518년을 이어온 왕조다. 이 정도면 세계 기록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에서는 단연코 가장 오랫동안 이어온 왕조다.중국에서 가장 길었던 왕조로 알려진 당은 20대 289년 밖에 안된다. 조선 왕조의 절반 조금 넘는 셈이다.
이것이 자랑거리일까 아니면 수치스런 일일까? 내 생각으로는 둘 다이지 싶다. 유교 전통에 기반을 둔 충효 절개와 신의가 유별나서 그렇게 오래도록 이어갈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자랑거리. 수치스럽다는 것은 주군에 거머리처럼 달라 붙어서 배를 채우며 부와 권세를 자손대대 누리려는 기득권 무리들이 많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조선조에 역모를 꾸미는 것을 보면 특이한 점 하나가 눈에 띈다. 즉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역모를 꾸미는 사람 자신이 스스로 왕이나 황제임을 선포하고 역모 행동에 나선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역모를 꾸미는 사람들이 임금 자리에 앉을 왕족 혈통을 가진 사람을 미리 골라서 점 찍어놓고 역모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말들이 많다. 내가 보기에 그는 사악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주위 몇몇 사람들과 자기 보좌관들에게 미구 휘둘린 대단히 어리석은, 그러나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 같다.


오늘도 박근혜 대통령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던 고위 관리 몇 사람들이 법의 심판을 받으러 법정을 드나드는 것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쳤다. 모두 잘 먹고 잘 입고 얼굴에 번지르르 기름기가 도는 인사들. 이들에게 현대판 간신이란 칭호를 갖다 붙인 언론도 있었다. 이들이 간신이냐 아니냐는 좀 더 무겁게 생각해 봐야 하겠지만, 쌓이고 쌓인 울분이 터지고 말아서 그렇게 되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박근혜 대통령을 보좌하는 고등관리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 자신을 그 상황에 대입시켜보는 버릇이 있다.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가 나의 핵심 윤리 기준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라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했을까? 아니면 “나 이것은 못하겠소” 하고 일어서서 나와 버렸을까. 아마도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나올 용기는 없는 위인이니 시키는 대로 꾸역꾸역 일은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느 교수처럼 조교를 시켜 시험지를 갈아 끼운다거나 어느 보좌관처럼 차명폰을 주선해 줄 주제도 못되는 인물이니 직위는 항상 제자리걸음, 더 높은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에게 까지 돌아올 쇠고랑이 어디 있겠는가.
테두리 밖에서 용감해지기는 쉽다. 그러나 조직 안에 있는 동료들과 등을 지며 “나 이거 못하겠소” 하며 내 던지고 초연히 걸어 나오기는 세상 어려운 일일 것이다.


오늘 지나친 충성으로 쇠고랑을 차고 감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어린 시절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도 학창시절에는 불의에 분노하고 자기가 앞으로 커서 사회에 나가면 불의와 싸우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여러 번 다짐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젊은 시절의 포부는 크면서 세상만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분개…, 이런 경험을 수없이 되풀이 하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이해타산 따라 잔머리를 굴리다 보니 오늘에 이른 것.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 것이다.
간신은 최고의 권좌에 앉은 지도자의 능력 부족으로 생길 때가 가장 많다. 현명한 군주는 간신을 두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예는 조선 제 22대 임금 정조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정조는 임금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홍국영이라는 능력이 뛰어나고 패기에 찬 젊은이로부터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에서 여러 번 구제를 받았다. 홍국영이 없었더라면 정조가 임금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의심이 갈 정도다. 정조가 임금이 되고 홍국영은 서른도 못 된 나이에 총무, 재무, 병무, 의무, 학무의 실무 권리를 모조리 거머쥐게 된다. 조선왕조의 첫 세도 정치가 시작 된 것이다. 그는 몸과 마음을 바쳐 일편단심으로 임금 정조를 떠받들었다.


그러나 정조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는 홍국영을 아꼈지만 냉정하게 그의 성향과 기량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홍국영이라는 사람은 덕망과 어진 인품으로 자신을 도와서 천하대사를 이끌어 갈 위인은 아닌 것으로 보았다. 이제 그는 더 큰 비극이 오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그를 불러 은밀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정조는 그 자리에서 홍국영에게 은퇴를 권고하였다. 박근혜로 말하면 김기춘이나 우병우를 해고한 것이다. 박근혜는 정조처럼 사람 보는 식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역모의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다면 모르지만 주군을 위해서 한마음 한 뜻으로 몸 바쳐 일한 홍국영은 충신인가, 아니면 간신인가? 내 대답은 간단하다. 이쪽에서 보면 충신이요, 저쪽에서 보면 간신이다. 역사는 진 자가 아니라 이긴 자에 의해 쓰여진다. 간신으로 말하면 조카 단종을 임금자리에서 쫒아내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을 음흉한 생각을 품은 수양(세조)을 따를 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수양을 간신이나 부르는 사람은 없다.
오늘도 텔레비전에서는 법정으로 향하는 박근혜 보좌관들의 얼굴을 보여준다. 이들이 충신인가, 아니면 간신들인가? 얼른 판단이 나질 않아 몇 자 적어보았다.

< 이동렬 - 웨스턴 온타리오대 명예교수 >


[칼럼] 한미동맹, 누가 평가하는가

● 칼럼 2017. 7. 5. 13:42 Posted by SisaHan

서울에는 한국은 미국과 철저하게 공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철저함” 속에는 “동맹 차원”의 결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믿는다. 이들 가운데 “천성적으로 미국의 모든 것에 동조적(naturally sympathic to all things American)인 사람들”도 있다. 이 말은 2006년 7월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본국에 보낸 외교 전문에 나오는 표현이다. 한국의 소위 주류 외교안보 전문가들을 묘사하면서 사용했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중국이나 일본 전문가 그룹보다 수적으로 빈약하다. 그들은 한국 언론매체의 영문판 뉴스와 번역 서비스를 이용하여 한국의 소식을 듣는다. 이들의 지식과 의견은 한국 뉴스와 언론에 도드라지게 등장한다. 마치 그들이 미국의 정책이고 대표적 의견인 듯 말이다.


이들은 북한과 협상은 불가능하며, 더 강력한 제재를 통해 북한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이 곧 붕괴할 것이라고 믿는 전문가들도 꽤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과 천성적으로 미국에 동조적인 전문가들은 끈끈한 유대와 연대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같은 학교를 다녔거나, 오랜 기간 세미나에서 교류했거나, 정책 용역을 공동으로 진행했거나, 아니면 단순히 서로 간의 필요가 맞아떨어져서 매우 세밀하고 조직적인 연결망을 유지한다.
이 연결망이 사실상 동맹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한-미 관계의 평가가 180도 뒤바뀔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무현 정부 시기, 한-미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평가는 이들이 생산해 놓은 그들의 담론이다. 양국 간의 공조가 흔들렸고, 동맹이 약화되었다고 주장한다. 동맹 공조가 흔들렸다면, 어떻게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었으며, 왜 한국이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규모의 지상병력을 이라크전에 파병했으며, 어떻게 미국의 지원 없이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되었을까? 이들이 한-미 간 공조가 흔들리고 동맹이 약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면은 노무현 정부가 대한민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과 다른 의견을 피력하고 상호호혜적인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협상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정부가 미국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들은 여전히 건재하고 강력한 담합체제를 유지한다. 자신들의 사고와 접근법을 일종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그 이외의 것들은 반동맹적인 방안으로 아주 불손하게 취급한다. 최근 문정인 교수(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가 미국 학회에서 했던 “사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미 동맹이 깨진다는 인식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게 무슨 동맹이냐?”라는 발언으로 촉발된 소동이 아주 전형적인 예이다. 서울과 워싱턴의 전문가들은 한-미 동맹이 굳건하다면서 한국이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거나, 합의가 바뀔 경우 동맹의 기초가 흔들린다고 역설한다. 그 역설의 핵심은 “미국 말 잘 들어”라는 심리가 가득하다.
곧,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마주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끔찍하게 나쁘다고 생각하는 미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동맹에 무임승차 중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국민의 안전과 한반도의 평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한국의 대통령은 당당히 협력외교를 할 것이라고 피력한다. 이 회담을 통해 한반도 문제에 대한민국이 주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길 바란다. 그것이 이 회담의 목적이어야 할 것이다. 동맹이 “천성적으로 미국의 모든 것에 동조적인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 최종건 - 연세대 교수, 정치외교학과 >


[1500자 칼럼] 아름다운 동행

● 칼럼 2017. 6. 28. 13:29 Posted by SisaHan

적막한 숲속에서 길동무를 만났다. 덩치 좋은 황갈색 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리를 따른다. 첫 만남에서 너무 요란을 떨어 미안했는지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녀석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우리의 성화엔 아랑곳 않고 그저 앞만 보고 묵묵히 걷는다. 가끔 지루하다 싶으면 벌렁 드러누워 애교를 부리기도 하고 한 동안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하며 우리의 이목을 최대한 집중시킨다. 의례히 그랬던 것처럼 지나는 행인을 열심히 따르는 이 녀석은 고립된 숲속생활에서 많이 외로웠나보다.
길을 걷다보면 예기치 않은 만남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만남이 있는가 하면 외면하고 싶은 만남도 있고 짧은 순간이나마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상대가 있는가 하면 시시콜콜 궁금증을 유발하는 만남도 부지기수다.
사람은 길 위에서 성숙해간다는 말이 있듯이 갖가지 만남 속에서 사유가 깊어짐은 물론 내면 깊숙이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길, 오늘 이 이름 모를 견공과 동행하는 길은 어떤 가르침이 예비되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친구들과 2박3일간의 캠핑을 마치고 남편과 단 둘이 자유 시간을 가졌다. 언젠가 꼭 900 km에 달하는 브루스 트레일 완주를 꿈꾸며 조금씩 이어가는 길, 토버머리 제로 포인트에서의 남하는 우리의 꿈을 실현하게 될 얼마 남지 않은 구간이다.
오늘 두 번째 같은 길 위에 섰다. 처음처럼 숲은 으슥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하이커들의 이용 빈도가 낮아서 자연그대로인 숲에 바위투성이 길하며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만나는 묘지는 대낮인데도 기분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화기애애하던 일행들과 헤어진 후의 적막감과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위축되어 걸음만 재촉하고 있을 즈음, 갑자기 늑대만한 개 두 마리가 요란하게 짖으며 우리에게 덤벼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제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남편은 에워싸는 개들을 피해가며 목청껏 주인을 불렀고 나는 짚고 있던 스틱을 접으며 대항 할 의도가 없음을 보여주러 애썼다. 그리고 가장 낮고 온순한 자세를 취하며 녀석들의 분위기를 살폈다. 다행히 짖어대는 소리만 요란할 뿐 사람을 해치지 않았고 한동안 왕왕거리던 녀석들이 제풀에 지쳐 느슨해졌다. 뒤 늦게 먼 곳 외딴집에서 녀석들을 불러들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만 진땀을 흘렸을 뿐 그들의 행위는 자연의 일부분처럼 극히 자연스러웠다.


소란하던 숲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두 놈 중 검둥이는 주인의 부름에 순순히 응하여 돌아가고, 나머지 한 놈은 어불성설 우리와 동행하게 되었다. 지나는 행인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 놈이 무슨 염치로 동행을 자처했는지, 뒤뚱거리며 걷는 폼은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표현이 아닐까 상상하며 따라붙는 녀석을 쫒아 보내려 애를 썼다. 하지만 집이 멀어져가도 돌아갈 기미가 없는 녀석, 더 이상 불러들이기를 포기한 주인, 하루 이틀 겪는 일이 아닌 듯 했다.
우리는 뜻하지 않은 견공을 앞세워 전진을 계속했다. 뭔가 으스스했던 느낌도 적막했던 기분도 일순간 사라지고 녀석과 함께라면 마냥 걸어도 좋을 것 같은 든든함 마저 들었다. 애완동물 다루기에 서툰 나에 비해 그이는 녀석과 순간순간 즐거운 교감을 이어갔다. 갑자기 사라졌던 녀석이 휘파람 소리에 비호처럼 달려오기도 하고 갈림길에서는 길 안내를 자처하는 영민함도 보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위해 사력을 다 하던 녀석이 금방 반전되어 길동무가 되어 주다니,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마지막 인사까지 감동적으로 하고 집으로 돌아간 녀석, 아름다운 동행으로 기억될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묵묵하게 제 갈 길 열심히 가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칼럼] 지금 그가 왜 필요한가

● 칼럼 2017. 6. 28. 13:28 Posted by SisaHan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외교부에 호의적이지 않다.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외교전에서도 그렇지만, 국외에서 자국민을 보호하는 일에 무능하고 무정한 외교부의 행태 때문에 억장이 무너졌던 적이 많다. 그런 이유로 7년 전 바로 이 ‘사람그물’ 칼럼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외무고시는 고시계의 꽃으로 불릴 만큼 최정예 엘리트를 선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선발·육성된 외교관들 스스로 제일 중요하게 꼽는 능력은 조국애와 인류애다. 하지만 순혈주의로 상징되는 자폐적 내부소통이 관성으로 굳어진 탓에 외교관들이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일에 대한 개념이 거의 상실된 것처럼 국민의 눈에는 비친다.”
자기들끼리 통속에서만 주고받는 게 몸에 배어 있으니 외교전도, 자국민 보호도 잘될 리 없다. 그럼에도 지극히 전문적이고 폐쇄적이어서 당사자들이 나서지 않는 한 검찰이나 국정원만큼 개혁이 어려운 집단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강경화라는 사람이 외교부 장관 후보자가 된 것이다.


강경화는 비고시, 비서울대 출신에 사상 첫 여성 외교부 장관 후보자다. 오랫동안 국외에서 근무해 국내 인맥은 거의 없다. 이른바 약한 고리의 전형이다.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해도 편들어줄 자기편이 없다. 예상대로 강경화는 총력 낙마 대상으로 집중포화를 맞았다. 청문회 대상인 다른 후보자들에 비해 흠결이 더 중대해서가 아니라 약한 고리라서 그렇다. 야비하고 잔인한 관행이다. 결국 야3당은 강 후보자를 부적격자라고 몰아세우며 청문회 보고서를 채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여성단체 등 시민 2만명이 강 후보자 지지 선언을 했다. 더 의미있는 지지 선언은 외교부 내부에서 나왔다. 전직 외교부 장관 10명이 강 후보자가 누구보다 외교부 장관 적임자라고 지지 의사를 밝힌 것이다. 놀랍게도 외교부 공무원노조는 강 후보자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를 선언했다. 노조는 외교부 내 폐쇄적인 조직문화와 순혈주의 타파를 언급하며 지금이야말로 외교 패러다임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필요한데 그 적임자가 강경화 후보자라고 논평했다. 외교부 안팎과 위아래로부터 이토록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장관 후보자가 있었던가. 없다. 일부 내부 구성원들만 감지하던 위기감이 ‘강경화’를 방아쇠 삼아 터져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이제 외교부가 자기들만의 통을 부수고 세상 밖으로 나오겠다는 성찰과 개혁의 선언으로 읽힌다.


5대 흠결 인사 배제 원칙으로 인한 논란은 문재인 정부에서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다. 그 희생양이 강경화가 될 이유가 없다. 시대정신이나 상징성으로 본다면 다른 후보자를 포기하더라도 강경화를 지키는 게 맞다. 약한 고리 동정하는 식이 아니라 실제 능력 면에서도, 상징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강경화에 대한 안팎의 지지 선언과 지지 서명이 그걸 증명한다. 여론도 강경화 임명 찬성이 62%(12일 발표된 리얼미터 조사)로 반대 의견의 2배가 넘는다.
강 후보자 지명 철회를 고려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정한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무려 89.4%다. 요즘 국민 유행어인 ‘우리이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경쾌한 표현 속엔 그간 우리가 목말라했던 나라다운 나라에 대한 순정한 염원이 담겨 있다. 대통령을 향한 전무후무한 국정지지율은 혹시라도 강경화 지명 철회 같은 과거의 악몽이 되풀이될까봐 압력성 뒷배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방패연처럼 떠오르는 현상이다. 강경화는 여러 측면에서 새날을 여는 방아쇠다. 꼭 외교부 장관에 임명되어야 한다. ‘강경화’가 옳다.

< 이명수 - 심리기획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