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여의도법연구회

● 칼럼 2017. 10. 2. 16:38 Posted by SisaHan

#1.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선 초·재선들이 31년 판사생활을 한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의 경력이 부족하다고 호통쳤다. 초·재선의 연부역강을 반긴다면 착각이다.
당 돌아가는 꼬락서니에는 입도 벙긋 못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정작 본인들은 변변한 당직 경험도 없다. 그러니 방약무인이란 소리나 듣는다.
여의도에서 말하는 경력이란 게 뭔가 싶다. 자유한국당은 불과 1년여 전 20대 국회 원구성 협상을 하며 8선의 서청원 의원을 국회의장으로 내세우려 했다. 30여년 국회의원이 직업이고, 당대표도 했고, 친박계 좌장이니, 친박연대라는 현대정치사를 코미디로 만든 당명을 내세워 공천헌금 받아 감방에 갔다 온 일은 적당히 덮을 수 있겠다 싶었을 것이다. 그러더니 이제 와서 당을 망친 주범이라며 그에게 나가란다. 범죄 경력도 경륜이라며 입법부 수장으로 세우려 했던 자유한국당이 사법부 수장의 경력 부족을 말한다. ‘여의도법’은 이런 식이다.


#2. 2011년 7월 국회는 법원조직법을 개정해 대법원장과 대법관의 임용자격을 강화했다. “법원이 국민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사법부 인사제도 개선”이 개정 이유였다. 20년(기존 15년) 이상 판사·검사·변호사 경력이 있으면서 45살(기존 40살) 이상인 사람 중에 대법원장을 지명하도록 했다. 김 후보자는 임용자격을 갖췄다.
한 해 전인 2010년 당시 한나라당 사법제도개선특위는 법원 내 연구모임인 우리법연구회의 좌편향을 주장하며 “법원조직법을 개정해 해체시키겠다”고 공언했다. 그런 한나라당이 왜 법원조직법을 개정할 때 대법원장 임용자격 조항(42조)이나 금지사항 조항(49조)에 ‘특정 연구단체 회원 제외’ 문구를 넣지 못했을까. 말이 안 되는 ‘여의도법’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을 이은 자유한국당은 우리법연구회를 “법원 내 하나회”라 부른다.
애초 법조계에서 ‘법원 내 하나회’라는 말은 우리법연구회가 아닌 ‘민사판례연구회’를 지칭하는 말이다. 모임 운영 과정의 배타성이 입길에 오르며 ‘사법부 하나회’로 불렸다. 현 양승태 대법원장이 민판연 출신이다. 김 후보자가 우리법연구회 출신이어서 대법원장이 될 수 없다면, 양 대법원장도 그런 황당한 주장을 피해갈 수 없다. 양 대법원장은 6년 임기를 채웠다.


#3. 2014년 12월19일 통합진보당이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해산됐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 2주년 기념선물이냐는 말도 나왔다. 자유한국당에서 통합진보당 해산에 반대하는 소수의견을 냈다는 이유로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를 비토했고, 국회 본회의 표결에서 인준안이 부결됐다. 자유한국당은 “민의를 대표하는 국회가 부결시켰으니 재판관직도 사퇴하는 것이 도리”라고 주장한다. 헌재 해산 결정은 국회 인준안 표결처럼 무기명이 아니다. 김 재판관이 홀로 소수의견을 낸 것은 세상이 다 안다. 자유한국당은 지난 3년 뭘 하다 이제 와서 난리일까. ‘여의도법’이다.


“완벽하게 합의할 수 있을 때까지 싸움을 벌여야 한다면 평화는 요원하다.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계에서 합의하는 것이 헌법을 제정하는 방법이다. 합의하지 못한 부분은 입법자가 법률의 제정을 통해 마무리할 것이라고 전제하고 정하는 것이다. 헌법재판관들의 의견이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으로 갈라지는 것은 정해져 있는 답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정답이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진한, <헌법을 쓰는 시간>)
자유한국당 ‘여의도법연구회’ 회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 김남일 - 한겨레신문 정치팀 기자 >


[긴급 제언]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 칼럼 2017. 9. 27. 16:10 Posted by SisaHan

한인요양원 우리 누구나 관계될 일
인수모금 운동 모든 가정 동참했으면

며칠 전 모 신문 광고를 보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 이상 남의 일로만 생각하고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절실하게 한인요양원의 필요성을 깨달았던 경험은 어디로 사라지고 벌써 그 때를 잊고 있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나의 노년은 요양원과 관계가 없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미 수 년 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께서는 생의 마지막 일년을 요양원에서 지내셨다. 심장마비를 겪으신 후라 일반 가정에서는 돌봐드리는 일에 한계가 있어 결국 요양원으로 모셔야 했었다.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죄송함에 영어로만 소통이 되는 곳이었기에 자식들의 마음고생이 어머니 당사자 못지 않게 만만치 않았다. 당시엔 무궁화 요양원이 없었기에 캐슬뷰 양로원을 택했다. 비록 외국인 시설이라 해도 3층은 한인 노인 70여명이 수용되어 있어 전혀 한인이 없는 곳보다는 나았다. 24시간 한국어 TV 방송을 시청할 수도 있고, 가끔 한국음식도 접할 수 있고, 주말마다 예배도 보고, 머리도 자르고, 손톱 발톱도 잘라주는 한인 자원봉사자들의 따뜻한 손길이 있어서 가족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비록 그렇다 해도 내 집을 떠나 사는 외로움과 불안, 그리고 불편함을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언어와 음식문화가 달라서 누구나 몸이 아프고 외로움 때 찾게 되는 음식은 가족이 사랑으로 만든 따뜻한 한국음식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육신의 고통을 간호사들과도 소통할 수 없었으니 매사에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


몇 년이 더 흘러 한인 전용의 무궁화 요양원이 문을 활짝 열었다. 작년에 그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곳은 비록 작은 규모일지라도 한국어로 간호사와 소통하고 한식이 삼식 제공되고, 각종 예능 프로그램이 모두 한국어로 진행되는 걸 보니 가족 같은 분위기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안심이 되었다. 그때서야 외국인 요양원에서 한인 노인 한 분이 겨우 3개월 만에 한국어를 모두 잊어버렸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젠가 오타와에 사는 손주들의 수영레슨을 같이 간 적이 있다. 그 수영장은 웅장한 시설에 보안까지 철저했는데 외형으로만 보아도 규모가 대단했다. 아들에 의하면 유대인 커뮤니티 소속 건물이라고 하는데 근처에는 그들만의 학교, 은행, 요양원, 도서관 등등 모든 공공시설이 함께 모여있다고 한다. 가슴이 멍멍할 정도로 감동에 젖어, 과연 우리는 언젠 이런 커뮤니티 시설을 모두 갖출 수 있을지 잠시 생각해본 적이 있다. 물론 그들이 이 땅에서 축적한 부와 명예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겠다. 헌데 우린 천신만고 끝에 세운 기존의 작은 한인요양원조차도 지켜내지 못한 상태이니 부끄럽지 않겠는가. 기실 노년기에 들어선 한인노인 인구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한인요양원이 더 필요한 실정인데 말이다.


한인요양원 건립은 일찍이(1993년) 동포들의 노력과 성금으로 시작하였으나 어려움에 봉착하면서 오랜 시간에 걸려 어렵게 우리에게 다가온 곳이 무궁화 요양원이다. 겨우 60 침상의 작은 규모로 개원(2011년)한지도 몇 년 안 되었는데 잠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가 끝나면서 다시 법원명령으로 공개입찰에 의한 매각절차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것도 온주 정부가 소수민족 복지정책의 하나로 한인사회에 제공 되었던 것이니, 우리가 끝까지 우리 힘으로 지켜내야 할 명분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


이제 우리 부모님 세대는 거의 떠나시고 이민 1세들이 서서히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이곳에서 30-40년을 살았어도 아직도 한국말, 한국음식을 먹으며 작은 한국을 이루며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무궁화 요양원이야말로 바로 백세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 미래의 마지막 거주지인 것이다. 다행히 1.5세와 2세 전문인 중심으로 인수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9월말까지 모금을 한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미 뜻있는 동포들 중 큰 마음으로 앞장을 선 분들이 많으나 아직도 입찰주정 금액 600만불 중 필요한 최소 금액 350만불(나머지는 대출)을 모금하려면 갈 길이 멀다는 소식이다. 우리 속담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지 않던가. 각 가정당 200불씩 범교민 모금운동이 9월말까지 계속되니 가족 외식이나 각종 야외행사를 줄여서라도 모든 가정이 참여하길 바랄 뿐이다. 이는 우리의 프라이드를 지키는 일이며, 부모님 사랑을 위해서 아니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실천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 생각한다. 결코 불구경하듯 남의 일로만 여기지 말자. 동포들의 동참을 진심으로 호소한다.

< 원옥재 - 전 문협회장 >


[한마당] 믿음과 착각의 상식

● 칼럼 2017. 9. 27. 16:08 Posted by SisaHan

싱끗 웃으며 지나가는 여인의 미소에 돌연 맥박이 빨라지는 남성들이 없지 않다. 어디 남성들 뿐이랴. 여성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늘 착각에 빠져 살아간다. 저 사람은 돈이 많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그는 같은 학교 동창이고 동향이니 언제나 내편일 거야, 그 사람 얼굴이 잘 생겼으니 마음도 착하겠지, 믿음이 좋으니 늘 선행만 할거야…. 때로는 선입견 때문에 그렇게 믿어버리기도 하고, 반대로 늘 불신하고 미워해버리는 사례도 많다. 경험칙에서 비롯된 엉뚱한 단정과 착각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냥 착각하고, 알고도 속으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 착각 속에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괴로워하고, 목숨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친 아들처럼 아끼던 부루투스에게 살해당한 카이사르는 “부루투스, 너 마저도!”라는 역사적 외마디를 남기고 쓰러졌다.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잡으려다 능지처참을 당한 사육신은 믿었던 동지 김질의 밀고로 천추의 한을 남겼다. 동학혁명의 전봉준도 믿고 아꼈던 부하 김경천에게 배신을 당해 붙잡혀 꿈이 짓밟혔다.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팔아 넘긴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믿음이란 한낱 착각의 연장선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단 인간관계에서 만이 아니다. 국가간 관계에도 그렇다. 일본은 조선 사람들을 수백년간 못살게 굴었으니, 무슨 일을 해도 밉고 괘씸하다. 도대체가 못믿을 존재라는 것이다. 반면 6.25 때 유엔군과 함께 달려와 구해준 미국은 ‘무조건’ 좋은 나라요 은인이라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촛불집회 당시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 성조기가 이례적으로 동반되었겠는가. 미국을 한국의 수호신처럼 생각하는 단정적인 믿음, 무조건 내 편이라는 선망기대치가 집합을 이룬 한국사람들의 의식구조다.


최근 북한의 핵실험으로 한반도정세가 날카로워진 와중에 미국, 엄밀히는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가 논란이 되고 있다. 북한의 벼랑 끝 전술에 놀아나며 국제적 위기의 변수로 되레 위상을 높여준 럭비공 같은 트럼프가, 대북 압박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한국을 비판하며 북핵공조와 동맹에 균열이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대화론이 잘못된 것이라느니, 한국과의 FTA(자유무역협정)를 폐기한다는 둥 그의 생뚱맞은 언설(言舌)들이 자극적으로 전해졌다.
미국은 과연 불변의 혈맹이고 뗄레야 뗄 수 없는 한국의 수호국인 걸까? 그 답은 유감스럽게도 아니라는 것을 바로 트럼프의 언행들에서 확인하게 된다. 북한 핵 위기를 빌미로 한국에 막대한 무기를 사도록 만드는 장사꾼의 전형을 지적한 전문가들이 한 둘이 아니다. 미국 언론들은 트럼프 발언들이 한미동맹에 금을 가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현실도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미국은 국익 추구의 실리와 실용의 나라다. 한국을 사랑하고 아끼며 위해서가 아니라,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은 종속변수의 하나로만 취급하었음을 사실(史實)들이 증명해 준다.


조선말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대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해 주었다. 이른바 ‘카쓰라 태프트 밀약’이다. 나중 일본의 한국병합에도 한 몫을 한 미국의 기여가 됐다. 해방 이후는 어떤가. 미군정은 한국통치에 일본 잔재세력들을 끌어들였다. 친일청산이 아닌 친일세력들의 권력유지에 발판을 만들어 준 것이다. ‘애치슨 라인’은 북의 남침을 불렀다는 분석을 낳았고, 1951년에 맺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애매하게 만들어 일본이 두고두고 트집을 잡는 빌미가 됐다.
북한의 ICBM과 핵 위협이 자국 본토에 이를 만큼 커지자 신경에 거슬린 미국은 북폭 등 소위 선제공격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 태도를 보인다. 한국이 싫다는 사드배치를 강박해 미국을 향하는 탄도탄 방공망을 강화하고, 전술핵 배치를 들먹이며 값비싼 무기들을 사라고 압박한다. 자국방어에 무기판매까지, 꿩먹고 알먹자는 이기적 보신(保身)의 민낯이 드러난다.


미국을 반대하고 적대하자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우리의 강력한 우방임에는 틀림없다. 여전히 상호 방위조약은 유효하다. 우리의 전시 작전지휘권을 쥐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다만 막연하게 저들이 전적인 수호자라는 의존감은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미국은 미국의 국익이 최우선이고 미국에게 한국은 자신들이 전작권을 가진 만만한 나라, 전략적 최전선 방어기지의 하나로 인식할 수 밖에 없는 냉엄한 현실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살 길은 우리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고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상식이다. 그런데도 미국이 다 해주고 미국이 최고의 선인 듯 믿는 무조건의 확신에 빠진 한국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걱정이다.


< 김종천 편집인 >


그녀는 캐나다에서 26년을 살았다. 어린 두 아들이 초등학생 때 이민을 왔는데 그들이 벌써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았다. 그녀 역시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느라 24시간 여는 커피점, 건강식품, 컨비니언스를 거처 지금은 그랜 밸리(Gland Valley)라는 작은 마을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다. 나와 그녀와의 인연은 10년 전 호반문학제에서 룸메이트로 만나며 시작되었다. 부드러운 마음씨에 순박한 미소, 조용한 음성에 경상도 억양이 깔린 진솔한 대화로 우린 첫 눈에 반하고 말았다. 하루 밤을 지새운 우정이 후에 문협 임원진의 팀원으로서 신뢰를 돈독하게 쌓으며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을 지녔는데 결코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않는 여유까지 겸비하고 있어서 일에 몰두한 내 옆에서 동반자로 믿음직한 아우가 되어주었다.


그녀가 얼마 전에 첫 수필집 ‘석류, 그 풍요한 주머니 속엔’을 냈다. 마치 석류를 쪼개면 새콤달콤한 보석 같은 알갱이들이 흰 꺼풀 안에 촘촘히 감춰있듯이 한 작품씩 읽어갈수록 필자의 숨겨진 모습이 빛을 발하며 달려든다. 이제껏 내가 미쳐 몰랐던 부분들까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부러움과 감동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녀는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이 고향이다. 몇 년 전 내가 남해안에서 만난 통영은 바다의 땅으로 에머랄드빛 코발트블루의 바다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해양관광도시로서 참으로 인상적인 수채화를 남겼다. 그곳에서 자라나 향토색이 짙은 그녀는 아직도 연중행사로 장을 담그고, 막걸리를 빚고, 직접 따서 만든 국화차를 끓이는 전통적인 한국여인으로 살아간다. 층층시하의 시집살이와 맏며느리 노릇에 치어 이민을 결심했을 법도 한데, 아직도 친정 할머니와 어머니의 빼어난 손맛과 나전칠기 장인이신 아버지의 비범한 손놀림과 눈썰미를 익혀 그 재주가 비상하다. “각박한 삶에 넉넉한 향기를 채우는 나만의 비법…”으로 만든다는 막걸리는 이미 문협행사 때마다 인기몰이 된지 오래고, 그녀가 만든 콩 된장은 나처럼 감지덕지 얻어먹는 친우들도 여럿이 된다.


그녀는 온순하고 다정하여 관계를 중요시하며 살아간다. 녹록하지 않은 이민생활 속에서 가족은 물론이고 이웃과 손님과도 특별한 관계를 맺어가기에 다수의 그들이 그녀 글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매 글마다 사물에 대한 애정과 사려가 깊다. 변화 없는 일상에서도 긍정적이고 후덕스런 여인의 슬기가 엿보여 글의 감칠맛을 더해주고 있다. 감히 신세대 며느리의 징검다리가 되어주고 싶다고 외친 용감한 아날로그 시어미가 그녀인데, 장남 결혼식 하객들에게도 이 수필집을 증정했다니 얼마나 참신한 발상인가 싶다.
학구적인 그녀는 가게를 팔고 잠시 쉬는 기간을 이용해 캐나다 고교과정 학점을 이수하는가 하면, 잠시도 안주하지 않고 사이버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4년간 공부한 보기보다 당찬 끈기와 도전정신이 넘치는 여인이다. 부부간의 정(情)도 각별하여 결혼생활 38년간 부부싸움을 한 적이 없다 한다. 흔히 싸움을 못 하는 부부야말로 서로간에 소통할 기회를 잃은 문제부부라고도 말하는데, 이들이야말로 흔치 않은 부부다. 그만큼 대화도 많이 하고 일도 같이 하고 취미도 같아서 매 주말마다 온타리오 하이킹 코스를 누비는 하이커들이다. 일년에 한 두 차례는 북미주의 유명 하이킹 코스를 섭렵하여 몸과 마음이 함께 카타르시스를 맛보는 재미에 빠진다고 한다. 뒤늦게 그녀가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남편의 특별한 배려와 도움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서로 홀로 설 수 있도록 채워주며 성장을 돕는 부부야말로 최상의 부부가 아닐까 한다.


오늘도 그녀와 다를 바 없이 치열한 생업 전선에서 틈틈이 집안 일을 해가며 자식들의 엄마 노릇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녀처럼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발휘하며 살아가긴 어려운 일일 것이다. 넉넉한 그녀, 소박한 그녀, 슬기로운 그녀, 재능이 넘치는 그녀가 쓴 글의 특징은 마치 석류의 외형은 수수하나 그 안에 숨겨진 핑크빛 알갱이가 특별한 풍미(風味)를 지닌 것 같이 삶의 이야기를 세련된 어휘와 유연한 문장과 다양한 주제로 독자를 휘어잡는데 있다고 본다. 바로 그녀가 시사한겨레 <삶과 글> 칼럼니스트 임순숙 수필가다. ”인생은 반전의 묘미로 더 살맛이 난다”는 그녀의 성숙한 고백처럼 어떤 경우라도 삶의 의미와 통찰이 가득한 별처럼 빛나는 글쓰기가 계속되길 바라며, 첫 수필집 출간을 축하한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