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케묵은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워낙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어서 다시금 음미하고 싶은 발언이 있다. 그것은 “다시 태어난다면 과학자가 아니라 상인이나 배관공이 되고 싶다”고 한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발언이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아인슈타인의 이 말은 그 자신이 원자폭탄이라는 미증유의 대량살상무기가 세상에 출현하는 데 일조를 했다는 무거운 죄책감의 소산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가 주요 계기가 되어 맨해튼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이 원폭 제조에 돌입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그 편지는 히틀러의 세계정복 야욕을 패퇴시켜야 한다는 절박한 시대적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나치독일은 미국의 원폭이 완성되기 전에 패망했고, 그 몇 달 뒤 일본이 항복한 것도 (오늘날 역사가들의 증언에 의하면) 기본적으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 때문이 아니라 소련군에 의한 일본열도 점령이라는 임박한 위협에 대한 극도의 공포감 때문이었다.


파시즘을 괴멸시키는 데 실효가 있었든 없었든, 핵무기란 인류사회가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될 끔찍한 괴물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전쟁이 끝난 뒤에는 마땅히 폐기됐어야 했다. 그럼에도 전후에 열강 간의 가공할 핵무기 개발 경쟁이 격화되었고, 그 상황에서 아인슈타인은 누구보다 고통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1955년에 철학자 러셀과 함께 핵무기 개발 중지를 호소하는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발표했던 것인데, 저 ‘배관공’ 이야기는 그런 배경 속에서 나왔던 것이다. 아인슈타인뿐만이 아니다. 맨해튼계획 이후 현대과학이 타락 일변도로 변질돼온 현실에 절망을 느낀 과학자들은 실제 한둘이 아니다. 어떤 경우이든, 그러한 자세는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을 함부로 건드림으로써 자연과 생명의 질서를 근원적으로 망가뜨려온 현대의 과학기술에 대한 쓰라린 회의, 절망, 깊은 죄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지금 여기서 아인슈타인이나 비주류 시민과학자들의 입장이 반드시 옳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양식과 정직성을 소유한 과학자라면, 현대과학이 저질러온 ‘죄’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현대과학의 죄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것은 과학자들이 자신의 전문영역을 넘어 월권을 행사해왔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원자력발전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잘 알다시피 원전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게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무수한 ‘타자’를 희생시켜야 비로소 성립 가능한 심히 폭력적인 시스템이라는 데 있다. 주의할 것은, 이런 문제들은 전부 원자력공학, 물리학, 화학 등등 전문분야의 좁은 식견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흔히 원자력 관련 과학자들은 원전문제는 무조건 자기들의 소관사항이고, 결정권도 자기들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원전의 안전성에 관한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성, 방사능 의료문제, 심지어 윤리문제에 관해서도 그들은 마치 최종적 권위자인 것처럼 행세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 6월 말,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의 수반답게 대통령이 고리원전 1호기의 영구정지를 선포하며 ‘탈핵국가’를 향한 시나리오를 제시한 이후, 관련 학(업)계와 수구언론들은 봇물처럼 반대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그들은 대통령 1인의 ‘제왕적’ 결단으로 국가 중대사가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물론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제왕적 결정을 그만두자는 게 바로 문재인 정부가 내놓은 제안의 핵심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현재 건설중인 신고리 원전 5, 6호기의 공사를 일시 중단하고, 그 기간 동안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무작위로 뽑힌 시민배심원단을 구성하여 그 시민배심원단이 숙의와 토의 끝에 최종적 결정을 내리면 그것을 따르겠다는 게 정부의 공표된 입장인데도, 그것은 무시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원자력계가 대통령의 ‘제왕적’ 결정 운운하는 것은 초점이 빗나간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그들도 모를 리 없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완강히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실은 국가의 중대사를 ‘전문가’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이 결정한다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구두를 만드는 것은 장인의 몫이겠지만, 구두를 신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구두를 신는 당사자가 결정할 문제라는 것은 너무도 정당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게 어째서 틀렸다는 것인가.

<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


[칼럼] 대학개혁은 사회개혁의 출발점

● 칼럼 2017. 7. 26. 17:42 Posted by SisaHan

문재인 정부는 재벌개혁, 검찰개혁 등 사회개혁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대학개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대학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대학개혁에 대한 의지가 없기 때문은 아니리라 믿고 싶다.
오늘날 한국 대학은 사회의 모든 모순이 집적된 적폐의 하치장이 되었다. 대학은 기회의 평등을 확대하기보다는 부와 신분의 세습을 정당화하는 통로로 변질되었고,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기보다는 기득권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관으로 전락했으며, 진리보다는 영리를 추구하는 조직으로 타락했다. 오죽하면 “한국 대학은 민주주의 적”(김종영)이라는 비판까지 나오겠는가.
이 지경이 된 대학을 방치한 채 사회개혁을 운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대학은 모름지기 최고학문기관으로서 국가의 정체성과 사회의 지향성을 규정하는 담론을 생산하는 기관이기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라는 혁명적 시대정신에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대학개혁을 사회개혁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독일 현대사는 대학개혁이 사회개혁의 토대이자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프로이센 군국주의와 나치즘의 비극적 역사에서 보듯이 유럽에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전통이 가장 빈약했던 독일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정치제도와 복지체계, 사회의식을 갖춘 나라가 된 것은 무엇보다도 대학개혁의 성공에 힘입은 바 크다.
오늘날의 독일은 68혁명의 여파로 이루어진 대학개혁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개혁의 결과 독일 대학은 완전히 새로운 기관으로 탈바꿈했고, 그 새로운 대학이 새로운 독일을 만들어냈다. 대학은 사회의 다양한 조직 중에서 가장 민주적인 조직으로 바뀌었고, 사회적 정의가 가장 잘 구현된 기관으로 변했으며,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는 도덕적 권위의 중심이 되었다.
부연하면, 대학개혁을 통해 독일 대학은 ‘학문공동체’의 3주체인 교수, 학생, 강사/조교가 권리를 똑같이 나누어 갖는 ‘3분할원칙’에 입각하여 가장 민주적인 공동체가 되었으며, 학생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국가가 떠맡아 모든 사회계층이 차별 없이 교육받을 수 있는 사회정의의 실현 공간이 되었고, 진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권력을 비판하고 이상사회를 기획하는 사회 변혁의 거점이 될 수 있었다. 대학은 “미래의 유토피아를 선취하는 소우주”여야 한다는 훔볼트의 염원이 마침내 현실이 된 것이다. 오늘의 독일은 이렇게 개혁된 대학에서 성장한 젊은 세대가 ‘제도 속으로의 행진’(루디 두치케)을 감행하여 만들어낸 신독일이다.


독일과 비교해 보면 우리의 현실은 실로 참담하다. 한국에서 대학은 미래의 유토피아를 선취하는 공간은커녕 가장 후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사회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초등학교 반장도 선거로 뽑는 시대에 지성인을 자처하는 구성원들이 자신의 대표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비민주적인 조직이 한국 대학이고,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과 착취가 가장 자심하게 자행되는 곳이 한국 대학이며, 자본과 국가 권력에 굴종하며 일체의 비판정신과 변혁의식을 거세당한 곳이 한국 대학이다. 대학이 이처럼 남루한 흉물로 퇴락한 결과 한국 사회는 비판의 정신도, 정의의 언어도, 변혁의 전망도 상실한 절망사회로 추락했다.
문재인 정부가 진정한 사회개혁을 바란다면 대학개혁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개혁의 장애물로 전락한 대학을 이제 개혁의 동반자로 변화시켜야 한다. 대학이 진보의 길잡이가 되지 못하고 퇴보의 앞잡이가 되어버린 사회에 미래는 없다.

< 김누리 - 중앙대 교수, 독문학 >


[1500자 칼럼] 한 여름 밤의 추억

● 칼럼 2017. 7. 19. 14:20 Posted by SisaHan

사면은 아득하고 고요했다. 가끔 발자국 소리에 놀란 날벌레가 튈 뿐 그 어떤 소리도  깊은 어둠에 묻혀 버렸다. 갑자기 촛불 심지처럼 불을 밝히며 눈 앞에서 날아다니는 귀엽고 신기한 물체가 나타났다. 반딧불이었다. 도시에선 본 적이 없는 그것은 밭과 논길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어둠에 익숙해질 무렵에는 손을 뻗으면 머리 위에서 만져질 듯한 별무리가 가로등인양 반짝이며 앞서 길을 밝혀 주었다. 한적한 농촌에서 맞이한 여름 밤은 감상적이고 매혹적이나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다. 지금쯤이면 하루의 마무리 회의를 기다리면서 앞마당은 떠들썩해야 마땅한데 우리 대원들이 묵은 숙소로부터 인기척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에 남녀 8개 고교생들이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농촌계몽 활동이 목적인 클럽에 참여한 적이 있다. 여름방학이 시작된 7월 중순경 30여명의 대원들이 7박8일 일정으로 지금은 마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충북의 한 농촌으로 떠났다. 마침 장마철이 지나간 직후라 크거나 작거나 모든 도로가 패이고, 개울물이 넘쳐 네 시간 넘게 돌아가는 산길이 험악하고, 후덥지근한 찜통 더위에 입은 옷이 땀으로 젖어 들어 불쾌지수가 만만치 않아 순간적으로 후회가 앞서곤 하였다. 그곳은 60년대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 모습을 담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밭과 논을 에워싼 나지막한 산이 있고, 그 산밑으로 옹기종기 초가집들이 사이 좋게 웅크리고 있던 고즈넉한 곳이다. 우리 숙소는 마을 중심지에 자리잡은 마을회관이다. 주민들은 그곳에 모여 회의도 하고 마을 잔치도 연다고 했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우리는 여러 그룹으로 나눠져, 낮에는 동네 산등성이에서 마을 아이들을 맡아 율동과 학습을 지도하고, 집집을 방문하여 약품도 나눠주고, 집 안팎을 소독도 해주고, 일손이 딸리는 밭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준비해간 시멘트로 주민들과 함께 도로 보수에 참여하기도 했다. 밤에는 청•장년부와 처녀반, 부녀반을 열어 주민의 어려운 애로점을 듣고 배우며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도시생활에 익숙한 우리로선 농민을 계몽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농촌을 경험하는 유익한 기회였지 싶다.


나와 한 팀을 이룬 동갑내기 Y는 말이 없으나 체격이 좋은 호남아였다. 사춘기의 남녀 학생들이라 엄격한 통제 아래 그와 나는 처녀반을 맡아 당시 사회문제로 떠오르던 <시골 처녀들의 무작정 서울 상경>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하며, 문맹자들이 있는 만큼 <한글을 깨우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 날도 여름 밤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고 Y와 나는 수업을 마치고 곧장 숙소로 돌아왔는데, 이미 가지런하게 놓인 대원들의 신발을 보니 뭔가 잘못된 것을 직감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이 몽롱해오며 퍼뜩 짚이는 게 있어 시간을 확인했다. 분명히 9시쯤 되었어야 하는데 수업 중에 한번 들여다본 똑같은 시간인 7시30분이 아닌가. 농촌봉사대를 이끌고 온 단장은 대원들 앞에서 지금 10시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계가 고장난 줄도 모른 채 규정대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것을 증명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규칙을 어기고 둘이 데이트하다 돌아온 것으로 간주될 판이었다. 아마도 로맨틱한 농촌의 밤이기에 그리 상상하고 싶었으리라. 대원들의 표정은 은근히 우리가 걸려들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는데 단장만이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나는 멈춘 시계를 풀어 확인을 요청하며 수업 도중에 딱 한번 확인한 시간과 똑같음을 정직하게 말했다. 얼마간 정적이 흐른 후, 결국 우리는 무죄를 선고 받았다. 만약 유죄가 인정되었다면 일주 내내 식사당번과 반성문 제출을 해야 하고, 심하면 클럽에서 불명예 퇴출되는 벌칙을 당할 수 있었는데,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래도 진실이 통할 수 있던 시절이었기에 지금까지도 위로가 된다. 황당했던 그 추억은 문득 Y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킨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 아직 건강하게 살아나 있는 걸까?...


내 잃어버린 시간 속을 더듬다 숨은 그림 하나를 찾아낸 것이다. 때묻지 않은 그 추억은 방금 피어난 꽃처럼 싱그럽다. 오해는 불신으로 치달아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일깨워준 나의 첫경험인 그 날의 추억! 그 후 5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삶은 내게 가르쳐 주었다. 진실이 왜곡되었을 때는 반드시 그 진실이 밝혀질 것을 믿고 때를 기다려야 하며, 아무리 하찮은 경험일지라도 결코 인생에 무의미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모처럼 추억 따라 귀여운 반딧불과 어울려 농촌의 밝은 달빛 아래 논길을 걸으니 은은한 그리움이 바람결에 일렁인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한마당] ‘국격’은 어디서 오나

● 칼럼 2017. 7. 19. 14:18 Posted by SisaHan

이달 초 독일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는 미국의 영향력 쇠퇴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양대 주요 의제인 ‘파리 기후협약’과 ‘자유무역’이라는 국제규범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참가 20개국 가운데 19개국이 한 목소리를 낸데 반해 미국만이 ‘협약 탈퇴’와 ‘보호무역’이라는 독자노선을 고수해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어 버렸다. 현지 발 통신들은 19대 1의 ‘반 트럼프 전선’이 형성됐다고 전했다. 미국의 새 지도자인 트럼프가 국제사회의 이단아로, 더구나 지구환경의 미래에 관한 문제와 글로벌 무역장벽 해소라는 보편적 ‘공동선’에 반기를 들고 나와 ‘왕따’를 당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퇴조는 세력권에 있어서 위축이라는 가시적 현상 보다는 ‘도덕과 철학’이라는 가치의 평가에서 하대(下待) 당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즉 지구오염과 온난화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데도 공동의 대처를 외면하고 혼자만 편하겠다는 ‘나 몰라라’식 태도에다, 무역에 있어서도 혼자만 득을 보겠다는 심보의 발로여서, 한마디로 더 이상 세계 최고의 가치와 국격을 지닌 나라가 아닌, 이기적이고 경박한 미국으로 보는 시각인 것이다.
그 연원이 바로 도날드 트럼프라는 인물 한사람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온갖 기행과 튀는 언동으로 미국과 세계를 당황케 한 그는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국제적 지도력을 기반으로 공조·구축한 규범의 틀을 깨고 무너뜨리기에 바쁘다. 외교적인 매너 조차 엉망이어서 악수 때문에 구설이 잇달고, 다른 지도자들을 밀쳐내고 포토라인에 서는 등 상식마저 초월하고 있다.


‘이제 미국에만 의존할 때는 지났다“라고 선언한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이번 정상회의를 주관하면서 트럼프와 대비되는 든든하고 신뢰할 만한 지도자로 우뚝 섰다. 덩달아 독일의 국격과 지도력 또한 위상이 한층 높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원래 독일의 국력과 유럽연합 내에서의 지도적 위치 등이 우월했다고는 하겠지만, 독일의 국격 상승은 역시 메르켈이라는 탁월한 지도자 한 사람의 품격과 지도력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아니할 수가 없다.
소탈하고 소통에 능한 것으로 인기를 끄는 메르켈은 일찍이 ‘탈 원전’으로 미래를 위한 안전과 청정의 환경 정책을 전개했다. 그는 유럽의 각국이 난민 수용을 회피할 때, 더욱이 국내적인 반발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과감하게 난민을 받아들이는 용단으로 ‘인류애’를 보여주었다. 그는 끊임없이 나치의 죄과를 반성하고 회개하며 혹여라도 나치의 전쟁범죄를 찬양하거나 나치를 옹호하는 세력에는 강력 대처하는 역사의식과 민주체질을 지녔다. 일본을 방문했을 때 과거사를 사죄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지도국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충고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수준높은 가치와 철학을 지닌 정치인이요 내실있는 민주적 지도자인 것이다.


메르켈 총리가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을 정성껏 환대했다는 소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지구촌을 놀라게 한 촛불혁명에 큰 관심을 보였고, 부패 무능한 권력자를 탄핵한 뒤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새 지도자, 민권변호사 출신이며 큰 국민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문 대통령에게 깊은 관심과 동지애를 드러냈다는 분석들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그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해 각별하게 챙겼다는 견해도 덧붙였다. 이번 G-20에서 많은 나라 정상들이 문 대통령과의 회동을 원하는 이례적인 인기를 끈 것도 같은 이유라는 것이다.
지난 번 미국 방문에서 한인동포들이 다들 기뻐한 것도, 이번 독일 방문에서 만난 재독 동포들의 감격과 눈물도 바로 그런 가슴 뿌듯한 자긍심에서 비롯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온갖 정치공작과 국정농단, 민생피폐의 음습한 국내정치와 민주주의 파괴적 행태들을 일삼으면서도 무역규모가 10위권이며 국민소득이 얼마라는 등을 자랑한 물량주의적-가시적인 국격은 얼마나 천박한 허세에 불과한지,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물론 여전히 그런 맘몬주의적 허상숭배를 버리지 못하고 저질의 뻔뻔한 우월감과 고집에 빠져있는 자들도 많은 현실이지만…. 이제, 한 국가의 국격은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고 정의와 도덕과 철학이 존중되며 구현되는 데서 출발함을 거듭 되새기는 시절이다. 그런 수준높은 국격은 지도자의 따뜻하고 바른 품성과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가치관에서 지도력이 발휘되는 나라, 국민들이 그런 지도자를 택하고 함께 힘을 모으는 나라의 몫 임을 독일의 메르켈과 함께 한국의 문재인이 새삼 강조해 주고 있는 요즘이다. 문 대통령의 지지도가 80%를 오르내리는 걸 보면 한국민들도 ‘지도자다운 지도자, 나라다운 나라’의 실상과 의미를 실감하고 있는 듯 해서 다행이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