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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럼에도 검찰개혁

● 칼럼 2017. 12. 28. 18:16 Posted by SisaHan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결국 구치소에 수감됐다. 집요한 검찰 수사를 방어하느라 본인도 많이 지쳐 있었을 것이다. 그의 옛 검찰 동료는 “차라리 진작 (구치소에) 들어가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구속영장 청구가 두번 세번 이어지면서 새로운 혐의가 계속 추가되어 우 전 수석으로선 더 불리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도 일부의 진실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수사 초기에 전 정권의 검찰 수뇌부가 의지만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혐의가 일찍 드러났을 가능성이 크다.


일부에선 검찰의 과도한 영장 청구 관행을 비난하는데 옥석을 가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특히 무슨 쿠데타라도 났느냐며 힐난하는 사람들이 일부러 생략하는 대목이 있다. 압도적 여론으로 대통령이 탄핵될 만큼 박근혜 정부 시절 엄청난 규모의 불법 행위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단죄하다 보니 갑자기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피디수첩> 광우병 보도 사건이나 미네르바 사건처럼 없는 죄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짧은 기간에 수사할 게 너무 많아서 최순실 일가의 재산 형성 과정이나 국외은닉 의혹 같은 건 손도 대지 못하는 실정이다. 어떤 정권도 임기 초 사정 작업을 이렇게 대대적으로 한 적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리로 답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이렇게 방대한 불법과 탈법 행위를 저지른 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가 과도하다는 비판에 대해 검찰은 전체 사건에서 차지하는 구속인원 점유율이 1%대(2016년 1.3%)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국정농단 사건과 국정원·군사이버사의 선거개입 및 여론조작, 국정원 특수활동비 횡령 및 뇌물수수 사건이 1%에 속하는 중대 범죄임은 분명하다. 더구나 이들은 대체로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증거인멸 우려가 농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과 임관빈 전 국방부 정책실장을 구속적부심에서 석방한 신광렬 판사의 결정은 사법 불신을 부추기는 데 한몫했다고 본다. 사법부 독립이라는 것은 여론과 공중의 지지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법원 내부에서조차 비판이 나올 정도로 관행을 어겨가며 무리하게 할 일이 아니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로서의 권한을 과도하게 행사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검찰의 적폐수사를 비난하는 주장은 아전인수와 ‘내로남불’로 가득 찬 것이 많지만 귀담아들을 대목이 없는 건 아니다. 구속 여부를 중시하는 인식과 관행에 대한 지적이 그렇다. 검찰이나 언론이나 일반 국민이나 마찬가지다. 서구의 형사사법체계를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겠지만, 우린 기소 전의 구속 여부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 구속=유죄, 불구속=무죄로 여겨지기도 한다. 헌법의 무죄 추정 원칙이나 공판중심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 역설적으로 이런 인식과 관행 탓에 영장청구권을 독점하고 있는 검찰의 권력이 더욱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권력이 집중되면 반드시 썩는다.


우린 지금 검찰의 손을 빌려 적폐를 청산하는 중이지만, 바로 그 검찰이 적폐의 본산이었음을 잊어선 안 된다. 검찰 권력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국정농단 사태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갖고 있으면서 영장청구권을 독점하는 한 제2의 우병우는 언제든 다시 나올 수 있다. 정말 검찰의 과도한 수사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권한 행사가 가능한 현재의 독점 구조를 깨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정권만 바뀌면 내로남불과 아전인수로 서로를 비난하는 퇴행적인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이다.

< 이재성 - 한겨레신문 사회 에디터 >


[1500자 칼럼] 기다림의 끝

● 칼럼 2017. 12. 13. 13:39 Posted by SisaHan

식품점에서 특가로 판매하는 자반고등어를 마주하니 퍼뜩 지난 여름이 떠오른다. 퀘벡주가 자랑하는 아름다운 관광지의 하나인 가스페 반도는 한번쯤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장거리 운전에 대한 부담으로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지난 7월 초에 그곳을 다녀올 기회가 생겼다.
순전히 낚시에 조예가 깊은 문우(文友) 남편 C씨의 배려로 시작하여 세 부부가 일단 날짜를 정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리스트를 적어가며 조목조목 준비를 시작하였다. 특히 남편들은 고등어 낚시에 관심을 갖고 있어 각 집마다 바다 낚시 도구와 잡은 고등어를 집까지 가져올 아이스 박스(2개)와 플라스틱 용기(20개)까지 철저하게 준비하여 짐은 산더미처럼 늘어나 차 안의 좌석조차 불편할 정도였다. 그래도 자반 고등어를 선물로 받고 행복한 미소를 지을 친지들을 그려보면서 9박10일간의 먼 노정은 야무진 꿈으로 활기가 넘쳐흘렀다

퀘벡 주 세인트 로렌스 만을 끼고 북쪽 해안선을 따라 협곡을 돌 때마다 만나는 빼어난 풍경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숲을 가득 채운 녹색의 활엽수와 소나무의 신비한 조화, 수평선이 보이지 않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옥색의 망망한 바다, 물밀듯이 밀려왔다 흰 거품을 남기고 훌쩍 돌아서는 거센 파도, 바다를 배경으로 우뚝 솟은 교회의 철탑과 방금 페인트를 마친 듯 아담하고 예쁜 마을정경에 매혹되고도 남았다. 온 몸과 마음에 가득 담긴 바다의 강렬한 남빛으로 인해 오가는 내내 평안에 푹 빠져 대화마저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가스페 반도의 유명한 관광지인 페르세 (Perce)에서 7일간을 머물렀다. 마침 우리가 숙박한 아담한 캐빈에서는 이 고장의 명물인 코끼리 모형을 닮은 페르세 바위(Perce Rock) 전면을 바라볼 수 있는 행운도 잡았다. 바다 위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돋이와 훌쩍 사라지는 해넘이도 충분히 구경할 수 있는 좋은 위치였으나 여독에 지친 우리는 번번이 기회를 놓쳐 아쉬움을 남겼다. 캐빈과 모터홈이 즐비한 샛길을 따라 산책을 하거나 바다가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동산에 앉아 동심으로 돌아간 우리의 대화는 나날이 깊어만 갔다. 60여 년 살아온 세월을 더듬기도 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번뜩이는 혜안을 서로 나누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선명한 색채로 남아 내 영혼이 파도 칠 때마다 한번쯤 돌아보고 싶은 정다운 곳이 되었다.

낚시는 기다림이다. 고등어 떼를 기다리고 배를 띄우기에 안전하고 쾌적한 날씨를 기다려야만 했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이 대어(大魚)를 낚기 위해 84일간을 기다렸듯이 우리도 5일간을 무료하게 기다렸는데, 무지개 빛 희망 하나만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유독 변화가 심한 금년의 날씨 탓인지 시간은 흘러가는데 고등어는 전혀 얼굴을 내밀지 않아 우리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내들은 가벼운 자유와 대화의 즐거움에 만족했지만 남편들은 달랐다. 바다는 연일 그들의 속타는 심정도 모른 채 안개만 자욱해서 앞이 분별 안되거나, 강한 바람이 만든 거센 파도로 배를 띄우지도 못하고, 기온이 내려가 고기잡이에 적절치 못한 날들만 계속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여러 날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돌아오기 전날에서야 최적의 날씨를 만났으나, 우리의 철저한 준비가 일을 그르쳤는지 고등어는 도통 물리질 않았다. 그런 중에도 경력 있는 낚시꾼은 알아보는지 간간히 우리의 선장인 C씨의 낚시대만 흔들렸고, 여러 번 허탕 끝에 잠시나마 고등어를 낚는 희열을 모두 맛보게 된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겨우 두 번의 수확은 계획했던 것에 비해 형편없이 초라해서 그간 소요한 경비와 시간을 계산하면 야무진 꿈은 무참하게 부서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낚시 시즌이 빗나간 결과이니 누구를 탓하랴. 그러고 보니 우리들이 삶 속에서 때를 놓치고 뒷북 친 일이 어찌 이번 한번뿐인가 싶다.

여행은 목적 자체보다 누구와 동행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우리 역시 함께 간 세 부부들이 서로를 알아가고, 기다리며 인내를 배우고, 무슨 일이든 함께 헤쳐나갈 수 있는 끈끈한 동지애로 뭉쳤으니, 이것이 이번 여행의 큰 결실이다. 더군다나 보트까지 매달고 자동차 두 대가 안전운행을 할 수 있었으니 어찌 70대 남편들을 노년이라 치부만 할 수 있으리. 비록 고등어를 향한 일시적 꿈은 사라졌다 해도 그들은 이 여행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젊음의 활기와 자신감을 되찾은 듯 하다.
<노인과 바다>에 남긴 헤밍웨이의 명언으로 마음을 달랜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하는 일에 있지 않고 하고자 노력하는데 있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칼럼] 지금이 맞으면 그때는?

● 칼럼 2017. 12. 13. 13:38 Posted by SisaHan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청원 및 제안’이라는 난이 있다. 어떤 청원을 해서 일정 수 이상 추천받으면 정부 및 청와대 관계자의 답을 받을 수 있다. 최고권력자와 국민이 직접 소통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좋은 제도다.
‘청와대에 상주하는 기자단을 해체해 달라’는 청원이 있다. 추천을 많이 받은 순서로 열 손가락 안에 든다. 5만명 가까운 이들의 추천을 받고 있다. 왜 이리 많은 추천을 받고 있을까?
주장의 취지는 이렇다. ‘청와대가 대통령 일정을 페이스북에서 생중계했다. 이에 대해 기자들은 자신들에게 공지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청와대가 기자들 영역을 침범했다고 항의했다. 대통령 일정을 생중계하는데 왜 기자들 허락을 받아야 하나? 기자들이 박근혜 정부 때는 아무 말 못 했는데, 이런 항의를 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를 만만하게 보기 때문이다. 이런 청와대 기자단의 갑질을 막을 방편으로 청와대 기자단을 폐쇄해야 한다’고 한다.


청와대 기자단이 이른바 ‘갑질’을 한다는 데 대해 언론사와 기자들은 억울해하는 눈치다. 청와대와 국민이 직접 권력기관이 내보내는 일방적인 주장만 국민에게 전달되어 언론의 비판기능이 작동되지 않는다고 한다.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언론사의 존재 의의가 권력기관에 대한 감시·비판이니만큼 언론사의 검증은 필요하다. 문제는 이런 주장을 하는 언론사들이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 때는 대통령에게 질문을 하기는커녕, 대통령이 말하는 내용을 받아쓰는 데 급급했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일부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 정부 때 출입기자와 현재 출입기자가 다르다고. 예전에는 잘못했다는 말로 들리기는 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단지 출입기자가 달라져서인가? 그 기자들이 소속된 언론사는 그대로인데? 이래서는 곤란하다. 예전 정권 때는 기자들이 잘못했다. 그 점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고 국민께 사죄를 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지금의 맞는 행동을 이해받을 수 있다.


또 하나의 장면.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수석부와 영장전담판사들이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정도다. ‘적폐 판사’, ‘꼴판’이라는 말까지 등장할 정도다. 반면에, 비판을 넘어서 판사 개인의 신상을 터는 것은 과도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맞는 말이다. 주권자가 비판할 대상은 잘못된 권력행사이지 사람 자체는 아니다. 신상털기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예전 모습을 보자. 2004년. 한 판사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무죄판결을 했다. 많은 언론들이 이 소식을 1면 머리기사로 전했다. 그랬던 언론사 중 한 곳이 보도 태도를 바꾼다. 그 판사가 특정한 연구회 소속인데, 그 연구회는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법원이 좌파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내용이었다. 명백한 왜곡·날조 보도다.


재미있는 것은, 판사 신상털기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언론사와 특정 판사에 대해 좌파라고 신상털기를 하며 왜곡보도를 한 언론사가 동일하다는 점이다. 물론 기사를 쓴 기자는 다르다. 하지만 그 언론사는 과거에 자신들이 자행했던 판사 신상털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런 사과나 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 아니, 입장이 바뀐 경위를 밝히지도 않고 있다.
기자가 바뀌었다는 변명은 가당치 않다. 지금의 모습이 맞으면, 그때의 모습은 틀렸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기레기’라는 경멸적인 용어가 왜 나왔는지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 이정렬 - 전 부장판사 >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 칼럼 2017. 12. 6. 14:57 Posted by SisaHan

어머니를 하늘나라에 보내드리고 한국에서 50일 만에 돌아왔다. 이제 일상이 회복되고 있는데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실감은 여전히 와닿지 않는다. 돌아보면 마치 미리 예정됐던 일정이 하나씩 이루어진 것만 같았던 어머니와의 마지막 시간들은, 오묘하고 신기한 은혜의 체험들이었던 것 같다. 짧지만 강한 여운으로 뇌리에 남은 장례기(葬禮記)를 외람된 공유의 글로 올린다.

가까이서 모시지 못하는 죄스러움에 가능하면 매년 추석과 설 명절에 모국을 찾아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가곤 했다. 하지만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후에는 거동이 불편하셔서 여의치가 않았고 병원을 오가며 2~3주 돌봐드리는데 그쳐야 했다. 그마저 지난 설에는 가 뵙지 못했기에, 올해 추석에는 모처럼 아내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만남은 언제나 기쁨과 안도감을 주어도, 작별은 미안함과 아쉬움으로 가슴을 짓누르곤 한다. 추석을 어머니와 함께 잘 보내고 난 후, 일 때문에 아내가 먼저 출국했고 이제 내가 어머니께 작별을 고할 시간이 이틀 후로 다가오고 있었다.
“앞으로 답답하고 무료한 나날을 또 어떻게 보내실까. 이젠 성경 보시는 것도 힘들어 지셨는데…” 그런 상념이 오갈 때였다. 갑자기 요양병원 간호사 연락이 왔다. 감기가 심해져서 폐렴으로 번진 것 같고, 열이 올라 의식이 없으셔서 어머니를 급히 집중치료실로 옮겼다는 것이다.
눈앞이 깜깜해진다. 밤새 안녕이라더니, 옆자리 할머니가 독감에 걸려 불안하긴 했었지만 하룻사이 옮아서 그렇게까지 나빠질 수가 있는지. 의식이 없으신 어머니 얼굴을 산소호흡기가 덮고 있다. 팔에는 몇 갈래 수액을 꽂고, 몸 곳곳에 부착한 센서들이 머리맡에 놓인 생체신호 계측기에 연결돼 숨가쁜 그래프를 그려내고 있었다. 주치의인 병원장 말로는 폐가 많이 상하셨고 대개 연만한 노인들은 진행이 빨라 회복을 장담을 할 수 없으니 “준비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추석을 앞두고 모처럼 아내와 함께 어머니를 휠체어에 모시고 병원 밖으로 나갔었다. 자녀들이 모인 저녁식사에서 어머니는 이것저것 정말 잘 드셨다. 그리고 당신이 계시던 집에 오랜만에 돌아 와 하룻밤을 잘 묵으셨다. 내 집에 왔다는 편안함에 푹 젖어드신 걸까. 밤 사이 화장실 한번 안가고 단잠을 주무셨고, 아침에 정성껏 차려드린 곰국을 맛있게 드셨다. “너희들이 고생 많았다”고 나와 아내를 칭찬하시고는 “병원이 편하다”며 어서 가자고 하신지가 겨우 열흘 전. 그런데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지시다니…
내일로 닥친 비행기 출발을 허겁지겁 뒤로 미루고, 초초하게 어머니 병상 옆을 지키는 긴 시간이 시작됐다. 의식이 돌아 온 어머니는 식사도 좀 하시고 어눌하지만 “캐나다 왜 안갔어?” “밥 먹었어?” 하고 물으신다. 늘 하시던 아들 걱정을 다시 들으니 그저 너무 반가워 눈물이 난다. 하지만, 이튿날은 다시 종일 눈을 뜨지 못하는 상태에, 기관지로 넘어간 음식이 가래에 섞여 나오는 바람에 전면 금식 조치했다는 의료진의 설명으로 답답한 시간이 이어졌다.
병원장은 어머니가 ‘대단하시다’고 했다. 다른 90 넘은 노인 같으면 이미 가셨을 텐데, 잘 이겨내고 계시다는 것이다. “아직 살려는 의지가 강하시고, 아마 멀리 있던 아들이 옆에 와 있어서 그러시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럴 리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그는 임상경험으로 볼 때 그런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많은 자녀들이 나이든 부모가 위급해지면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고 냉정하게 요청해 의사입장에서 갈등을 겪을 때가 많다는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비행기를 두차례 미루고 중환자실에서 희망과 절망을 오가기를 2주일 째 되던 날, 혹시 병원에서 긴급호출이 오지나 않을까 긴장 속에 밤 늦도록 토론토와 연락하며 신문 마감을 몇 시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자정을 넘긴 새벽 1시께 덜컥 비상이 걸렸다. 혈압이 떨어지고 숨도 이상하니 어서 와서 임종하시는 게 좋겠다…. 자녀들이 달려 와 눈물을 쏟고있을 때 어머니 교회의 목사 일행이 급히 도착해 임종예배를 인도해 주었다. 목사님은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침상의 의식이 없는 어머니 귀에 대고 성경을 봉독하며 영원한 천국의 삶을 열성을 다해 말씀으로 들려주어 감동과 위안을 주었다.
의료진이 강심제를 투여하기는 했지만, ‘예배의 기적’이 일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이후 호흡과 맥박, 모두가 정상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들을 내쉬었고, 누나들은 마감을 앞둔 신문제작을 어서 끝내고 오라고 재촉했다. 그렇게 신문을 만들 수 있도록 무언의 배려를 해주신 어머니는 좀 호전 되어 눈을 뜨시고 고개도 끄덕이는 희망어린 이틀 뒤에 다시 반응이 없는 상태를 반복했다.

설마 했던 임종예배를 계기로 비로소 장례준비가 현실로 다가왔다. 원래 계시던 일반병실의 어머니 물품을 챙기고, 식장을 답사하고…. 병실 서랍에는 고이 모셔둔 찬송가가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갈피에 끼워진 몇 장의 낡은 메모지였다. 거기엔 앞뒤로 빈틈을 찾을 수 없이 어머니가 쓴 성경구절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엽서에 깨알글씨로 옥중서신을 써보냈다는 어느 정치인에 비견해야 할지. 정성을 들인 작고 예쁜 글씨들이 행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성구들을 적어놓고 있었다. 집에 보관해 두신 3차례 성경 필사본 10여권과는 또 다른 감동으로 밀려온다.
그런데 내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다른 갈피에서 발견 된 ‘신앙고백’이라고 쓴 작은 쪽지였다. 거기엔 “밝고 아름다운 소식 널리 전하는 신문되길”이라는 친필 문구가 선명했다. 심장을 망치로 치는 듯한 글자 하나 하나. 신문을 만드는 아들을 얼마나 걱정하며 기도하셨기에 그런 글귀를 꾹꾹 눌러 써서 성경에 꼭꼭 간직해 두셨을까. 순간 가슴에 밀려드는 벅찬 회한이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솟아난다. 세상에 위대하지 않은 어머니는 없다지만, 위대하신 우리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을 깨닫기나 했던가, 평생 마음 편하게 해드리지도 못하고 늘 걱정만 끼쳐 드렸는데, 어머니는 몸이 불편해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시면서까지 날마다 성경을 붙들고 깨알 필사를 하면서 아들 걱정으로 지내 오셨으니, 어찌 그 보은을 다 한단 말인가.


어머니는 그렇게 며칠을 더 버티시다가, 10월31일 새벽 마침내 향년 92세로 하늘에 가셨다. 너무나 평온하고 깨끗한 얼굴로, 좋은 날을 택해서 떠나셨다. 집안에 보관돼 있던 수의를 꺼내보니 상자 겉면에 ‘2004년 10월31일’이라고 큼직하게 써있는 게 아닌가. 당신이 직접 수의를 마련하며 정확히 13년 후의 10월31일을 벌써 알고 계셨던 것처럼 놀랍게도 같은 날이었다.
어머니는 예감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멀리 갈 아들을 보내기 싫으셨고, 이틀 뒤 캐나다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당신이 중환자실로 가는 극한상황으로 아들을 붙잡아 두신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20일간 폐렴과 씨름하며 아들을 옆에 두셨으니, 생의 마지막이 되신 꼭 40일간 사랑하는 아들에게 생전의 시중을 들게 하시고는 홀연히 가신 것이다. 시골 부농의 외동딸로 태어났지만 순탄치 않은 삶의 여정 가운데 고난과 시대적 아픔을 오직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며 살아오신 신실하고 강직하신 어머니-!,
교우들과 가족의 눈물 섞인 찬송가 고별로 하관을 마친 뒤, 놀랍게도 온화하던 날씨가 급변하더니 잠시 가을 비가 지나간다. 하늘의 복을 받은 분이라고들 했다. 잔디를 살릴 단비라며….
뒤이은 유품정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또 한번의 아픔이었다. 당신의 손때 묻은 가재도구와 남기고 가신 오밀조밀한 살림살이들…. 곳곳에 배인 어머니 숨결에 순간 순간 눈물을 쏟아야 했고, 삶을 향한 지혜와 열정을 떠올리며 어머니 재발견의 감탄과 그리움을 삭여야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런 사랑과 기도로 오늘 우리가 복을 누리는 거였음을 다시금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사랑하는 어머니를 허허로이 보내드리고, 나와 아내와 아들은 가슴에 어머니와 할머니를 품고 토론토로 돌아왔다.
이제 육신의 어머니는 흙으로 돌아가셨고 영의 어머니는 영원한 하늘 나라에 올라 가셨다. 밤낮없이 걱정하시며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챙겨주시던 어머니의 빈자리는 너무 크고 허전하다. 세상에 계실 때 좀 더 잘 해드릴 걸 하는 후회도 깊다. 멀리 있어도 늘 들려주시던 “건강 잘 챙겨라. 하나님만 의지하며 기도 열심히 하고”라는 귀에 쟁쟁한 육성은 이제 영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남기신 삶의 발자취와 믿음의 유훈은 가슴에 살아 숨쉰다. 그 뜻과 유산을 열심히 받들고 살려나가는 모습들을 보실 때 우리 곁에 늘 살아계실 하늘의 어머니가 정말 기뻐하시리라는 믿음을 갖는다.
자랑스런 어머니의 천국 안식을 기원하며, 다시한번 절묘하고 빈틈없으신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에 감사와 찬송을 올려 드린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