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적폐는 한판 승부가 아니다

● 칼럼 2018. 2. 27. 20:42 Posted by SisaHan

이재용 항소심 선고가 나던 날은 종일 머리를 얻어맞은 듯 몽롱했다. 정신없이 기사를 마감하고, 이튿날 판결문을 뜯어봤다. 화가 치밀었다. 판결 비판 기사로 며칠을 보냈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났으니, 명절 때 받은 가족의 따사로운 기운에 기대어 찬찬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법조팀이 썼던 기사도 다시 살펴봤다. 감정이 뚝뚝 묻어났다. 누구를 향한 분노였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수감되고 이 부회장이 1심에서 실형을 받는 걸 보면서 내 딴엔 그림을 너무 크게 그렸던 것 같다. 대한민국의 근대를 주물렀던 ‘박정희’와 그가 고속성장의 적토마로 키운 ‘재벌’. 두 존재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래도 박정희가 안 굶게 해줬다”는 기성세대의 부채감과 “삼성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다”는 실체 없는 두려움. 이런 걸 던져버리게 되길 바랐던 것도 같다.
과도한 의미부여였고, 호들갑성 자가발전이었다. 고백하자면, ‘박정희 왕조’의 최후가 빚은 노을에 취해 있었다. 그들이 낳은 더 강력한 ‘삼성 왕조’에 나라가 단단히 덜미 잡혀 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판결문이 ‘삼성 왕조’의 우위를 확실히 일깨워준 뒤에야 애써 외면했던 몇 장면이 떠올랐을 뿐이다.


“아버님께 야단을 맞은 걸 빼고는 야단맞은 기억이 없는데, 여자분한테 싫은 소리를 들은 게 처음이어서 당황했다.”
1심 재판 때 이 부회장은 법정에서 박 전 대통령과의 독대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싫은 소리’라고 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대통령의 겁박’으로 포장했다. ‘상왕’ 외엔 누구도 못 건드린 그가 대한민국 대통령을 ‘여자분’이라고 칭한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그 ‘여자분’은 5개월 뒤 자필로 쓴 탄원서를 이 부회장 재판부에 내는 놀라운 장면을 보여줬다. 자신 때문에 줄줄이 옥살이하는 참모들 재판에 탄원서 한장 낸 적이 없는 그였다. 그때 ‘우주의 기운’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봤어야 했다.
그 기운은 판사들에게도 미친 듯하다. 삼성의 해외 송금 당시엔 뇌물 공여 의사가 없었다는 ‘관심법’이 등장했다. 송금한 돈은 최순실이 ‘쓸’ 돈이어서, 뇌물로 ‘쓴’ 것은 아니라는 헷갈리는 말로 형량을 줄였다. ‘삼성 합병’ 등의 청탁은 1, 2심과 최순실 1심을 거치며 ‘세상에 없는’ 일이 됐다. 동시에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으로 손해가 난 서민 노후자금 1300억원은 우주로 사라졌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이 부회장을 풀어준 정형식 재판장은 다음날 <조선일보>에 판결문에 담지 못한 말을 했다.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 생각이 정리되면 판결에 대해 담담히 얘기할 수 있을 때가 올 거라 믿는다.” 역시 그는 탁월했다. 판결 직후 느꼈던 막연한 분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와 판결을 감싸고 나선 동료 언론들. 박씨 왕조를 버리고 “판결에 경의를 표하는” 보수정당들. “1년 감방 살았으면 됐다”는 주변의 수많은 정형식들. 십자포화를 퍼붓고도 어쩌면 속으로 ‘할 만큼 했다’며 돌아서고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
이 모든 게 맞물려 저렇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판결이 나왔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담담히 얘기”하자는, 망각을 강요하는 듯한 조롱도 그래서 가능했을 것이다.
역시나 수십년 켜켜이 쌓인 부조리를 깨부술 ‘한판 승부’는 없었다. 한 방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인정하고, 다시 공허한 마음을 추스를 수밖에.
쓸쓸하고 스산한 2월이 가면 꽃피는 춘삼월이 언젠가는 올 테니.

< 석진환 - 한겨레신문 법조팀장 >


사상 최초의 올림픽 남북 단일팀인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이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세계인들 앞에 큰 감동을 전해주며 20일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스웨덴과의 7~8위 결정전에서 단일팀은 14일 일본전에 이어 두번째 골을 성공시키는 등 막판까지 최선을 다했다. 종료 휘슬이 울리자, 북쪽 황충금 선수가 남쪽 최지연 선수에게 달려가 포옹했다. 관중석엔 한반도기가 나부꼈다. 선수들은 링크 중앙에 함께 둘러서 “하나 둘 셋, 팀 코리아”라는 구호를 외치며, 짧았지만 큰 울림을 준 ‘팀 코리아’ 일정을 모두 마쳤다. 돌아보면, 숨가쁜 순간의 연속이었다. 대회를 한 달 남겨두고 급작스레 단일팀이 결정돼 선수들은 당혹스러워했다. 여론도 찬반양론으로 나뉘어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러나 남북 선수들은 함께 훈련하며 금세 ‘언니, 동생’이 되어 서로 돕고 감싸안았다. ‘승리’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질주하며 울고 웃었다. 여기에는 세라 머리 감독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 논란 초반에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자’며 선수들을 다독이는 한편, “선수를 고르는 건 내 권한”이라며 중심을 잡아 남북 선수들이 모두 믿고 따를 수 있게끔 했다.


단일팀을 바라보는 시선은 각자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우리는 하나다’라는 외침 속에 ‘작은 통일’의 감격을 누렸을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정치와 이념을 떠나 젊은이들이 스포츠를 통해 하나 되어 땀 흘리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을 수 있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남북 단일팀은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했다”며 “이것이야말로 올림픽 정신”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앞으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다시 만들어질지는 알 수 없다. 애초 단일팀을 제안했던 르네 파젤 국제아이스하키연맹 회장은 “2022년 베이징 올림픽 때도 단일팀이 출전할 수 있다면 돕겠다”고 말했다. 2021년 겨울 아시아경기대회의 남북 공동개최가 성사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단일팀 논의가 다시 이뤄진다면, 이번 사례를 본보기 삼아 관계 당사자들과 일찍부터 깊이 있게 논의하는 등 차근차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한 ‘팀 코리아’ 모두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이들이 안긴 감동은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평창 겨울올림픽이 성큼 다가왔다. 9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17일 동안 세계인의 눈과 귀가 평창에 쏠릴 것이다. 남북이 함께하는 ‘평화 올림픽’이 성사돼 더욱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됐다. 한반도에 어른거린 전쟁 그림자로 미국조차 참가를 머뭇거리던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감회가 새롭다.


평창 올림픽을 단순한 스포츠 행사로만 취급하기엔 한반도 정세가 너무나 엄중하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내에서 펼쳐지는 첫 정상급 다자외교 무대라는 외교적 의미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21개국 26명의 정상급 인사가 한국을 찾는 가운데, 문 대통령은 13명의 정상급 인사와 회동한다. 미국과 중국, 일본 등 한반도 주변 주요 국가의 정상급 인사와 북한 대표단장이 함께하는 자리도 마련될 것이다.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적 해법을 모색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를 흘려보내지 말아야 한다. 평창 올림픽이 북-미 대화로 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는 적극적 태도가 중요하다. 북한과 미국의 최고위급 인사가 얼굴을 맞대는 것 자체가 상징적 의미가 크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북-미 대화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도록 외교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 문 대통령이 2일 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통화해 “마이크 펜스 부통령 방한이 한반도 평화 정착의 중요한 전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그런 노력의 하나일 것이다. 미국은 여전히 제재·압박을 강조하지만 북-미 대화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한 건 아니다. 언제 다시 대화의 모멘텀을 찾을지 기약하기 어려운 만큼, 정부는 북-미 대화의 실마리라도 마련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쉬운 것은 아직도 ‘평양 올림픽’ 운운하며 평창 올림픽 깎아내리기에 열중하는 일부 보수세력의 태도다. 자유한국당은 평창 올림픽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연일 ‘평양 올림픽 타령’이니 개탄스러운 일이다. 홍준표 대표부터 “‘평양 올림픽’이 끝나면 문재인 정권은 민노총, 전교조, 좌파 시민단체, 문슬람, 탈취한 어용방송, 좌파신문만 남을 것”이라며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퍼붓는다. 언 손 비벼가며 차질 없는 준비에 여념이 없는 평창군민과 강원도민을 깔보지 않는다면 이럴 수는 없다. 잔칫상에 손님 불러놓고 우리끼리 삿대질하는 행태는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평창 올림픽은 세계에 한국의 참모습을 알리고 국가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더없이 소중한 기회다. 온 국민이 소망하는 평창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정부는 준비를 철저히 하고 정치권도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칼럼] 화해와 치유의 출발점

● 칼럼 2018. 2. 12. 20:11 Posted by SisaHan

젊은 날 가정교사를 전전한 헤겔은 여유가 없어 양말을 기워 신기도 했던 것 같다. 젊은 철학자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 “찢어진 양말은 기워 신으면 초라하고 볼품없지만, 정신은 찢어진 상태를 극복하면 찬란해진다.” 이 ‘찢어진 양말’의 모티프가 자라나 뒷날 <정신현상학>이 됐을 것이다. 정신은 자기의식을 갖추게 되면 체세포가 분열하듯 스스로 갈라진다. 자기 내부에서 찢겨 피투성이가 된 정신은 불화와 상쟁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상처를 극복하고 온전한 하나를 이룬다.
헤겔의 정신은 개인의 정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개별 정신들의 집합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공동체도 겨레도 개인의 의식처럼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면 찬란해진다. 그러니 헤겔의 찢어진 양말, 찢어진 정신에서 한반도의 남과 북을 떠올려봄직도 하다.
일흔 해 전인 1948년 2월10일 백범 김구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3천만 동포에게 울며 고함’을 발표했다. 반도가 두 동강 날 위기 앞에서 백범의 말은 통절하게 울렸다. “마음속의 삼팔선이 무너지고서야 땅 위의 삼팔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백범은 그해 4월19일 삼팔선을 넘어 북행길에 올랐으나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김구의 뜻은 속절없이 꺾였고 남과 북은 참혹한 골육상쟁을 벌였다. 삼팔선이 휴전선으로 바뀐 뒤에도 반목은 끊이지 않았다.
1993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김영삼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이 말은 김영삼이 정치인으로서 남긴 가장 숭고한 말일 것이다. 김영삼의 이후 행보는 스스로 뱉은 말을 배반했지만, 이 말을 실천에 옮긴 사람은 김대중과 노무현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집권기는 분단 70년사에서 남과 북이 통일에 가장 가까이 간 때였다. 남북의 정상은 손을 맞잡고 서로 포옹했다. 통일 한반도의 토대를 닦고 남북협력의 길을 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에 불어닥친 한파는 짧은 화해를 시기하듯 애써 키운 꽃들을 휩쓸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이뤄낸 성과들은 흩어지고 뿌리가 뽑혔다.
문재인 정부는 이 반동과 역풍이 남긴 유산을 물려받았다. 겨레를 공멸로 몰아넣을지도 모를 이 유산을 청산하려면 한반도 남북 모두에 그 어느 때보다 큰 지혜와 인내와 아량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평화는 단순히 전쟁 없는 상태의 지속이 아니다. 평화는 적대와 미움의 상처를 치유하고 남북의 상생 구조를 만들어가는 동적인 과정이다. 평화를 향한 가장 큰 도약은 한반도 경제공동체 건설일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개성공단 진출과 노무현 정부의 서해평화협력지대 합의로 밑그림은 진작 그려졌다. 한반도 남쪽과 북쪽이 경제협력으로 긴밀히 결속할수록 전쟁 가능성은 줄어들고 평화의 틀은 튼튼해진다. 남북이 함께 북방으로 가는 통로를 뚫게 되면 부산에서 출발한 철도가 시베리아를 넘어 유럽의 끝에까지 가 닿게 된다. 그렇게 되면 휴전선에 막혀 섬처럼 갇혔던 우리의 상상력도 해방될 것이다.
‘평창’이 출발점이다. 남과 북이 함께하는 올림픽은 작은 통일의 실험이다. 한반도가 반목으로 찢겨 있는 한, 우리의 생존과 번영은 끝없이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평창의 실험이 실험으로 끝나지 않고 화해와 치유로 가는 길을 열어주기를, 불화의 긴 시간을 이겨내고 찬란해지는 그날을 불러오기를 소망한다.

< 고명섭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