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천박과 경박을 성찰하며

● 칼럼 2018. 4. 4. 11:01 Posted by SisaHan

학력과 상관없이 천박하고, 재산과 상관없이 경박한 인간들이 있다. 명박과 친박들이 여기에 속할 것 같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들을 찬양하고 축복하던 자들도 있다. 북한의 김씨 왕조처럼, 교회를 세습하는 자들일수록 더 극성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행하는 야만과 기만을 북한이라는 그림자를 통해 발견한다. 경박, 천박한 인간은 자신의 숨기고 싶은 어둡고 수치스러운 면을 타인에게서 발견하면 참기 어려운 분노로 마구 비난을 쏟는다. 세습에 막말에 착취에… 기적을 행한다고 뻥치는 것까지, 데칼코마니 같다. 대부분 명박을 위해 할렐루야를 외치라고 강요하던 자들이다. 목탁 두드리며 명박을 축원하던 자들은 아예 입에 올리기도 싫어서 그저 말도 말기로 한다.
‘박’들 옆에 서서 호가호위했던 자들은 ‘다음에는 너희들 차례’라고 울분을 토하는데, 아무래도 그 전에 당신들 차례가 먼저일 것 같다. 적폐청산이 이명박근혜로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누구보다 그들이 더 잘 알 거다.

어쨌건 22일 저녁에는 쥐불놀이도 하고 치킨집도 불이 났다. 방문을 환영한다는 전광판으로 구치소도 예의를 표할 정도로 감사한 인사가 들어간 모양이다. 쥐불놀이 전통 축제의 시즌에, 닭집의 매상까지 한껏 올려주며 말이다. 503호의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그렇게 쥐를 잡자고 하더니 박정희의 저주인가… 하는 헛웃음 나는 아재 개그도 머릿속에서 막 창조된다.
인정한다, 내가 지금 한껏 비아냥거리고 있다는 것을. 너무 나간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이렇게 하고 싶다. 반성하지 않는 자들에게 점잖은 필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 루쉰 선생은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에서 물에 빠진 미친개는 몽둥이로 쳐야 한다고 말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미친개를 구해줘야지 왜 몽둥이로 쳐야 하냐고 묻자 선생은 대답한다. 물에서 구해줘 봤자, 미친개는 은혜를 알 턱이 없기에 구해준 사람을 물어 죽일 수 있다고. 요즘 천박한 자들이 경찰을 두고 한 이야기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탁월하다.
우리가 민주주의 하자고 촛불 들었지, 단순하게 이명박근혜 구속시키자고만 촛불 든 게 아니다. 우리가 적폐청산 하자고 그 추운 겨울에 감기 걸려가며 혁명했지, 정치보복 하자고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정치보복은 너희들이 항상 하는 거니까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되겠지.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거든.


촛불은 우리 자신의 반성이기도 했다. 잘살게 해주겠다는 사기에 현혹되어서 10년 동안 그들을 지지했던 우리의 경박함과 천박함에 대해서 통탄하며 성찰하는 경험이기도 했다. 돈이라는 권력을 탐하면서 사는 동안 약자들은 더 약해졌고, 힘없는 자들은 더 힘없는 자들을 착취하고 농락했다. 남성권력, 지식권력, 문화권력을 가진 나도 거기에서 아주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피해의 미투가 아니라 가해의 미투를 말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 더 힘을 쏟아야 할 곳이 있다. 바로 미투다.
촛불이 거대권력을 무너뜨렸다면, 미투운동은 미세권력을 전복하고 있다. 촛불이 정수리를 깼다면 미투는 작은 세포 하나하나를 바꾸고 있다. 남성 일반을 공격한다고 경박하게 발끈하지 말고, 펜스룰 뒤에 비겁하게 숨지 말고, 이제는 남성이 약자가 됐다고 스스로 ‘약자화’하며 천박해지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모든 부당한 권력이 무력화되는 그날까지 말이다.

< 이승욱 - 정신분석클리닉 대표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5~27일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했다. 2012년 집권 이래 어떤 외국 수반도 만나지 않았던 김 위원장으로서는 첫번째 정상회담이며 일부의 관측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파격적인 ‘김정은식’ 등장이다.
김 위원장의 방중은 최악의 상황에 놓인 북-중 관계를 일거에 복원하는 행보라고 할 것이다. 그동안 북-중 관계는 북한이 핵개발을 가속화하고 중국이 미국 주도의 대북 경제제재에 적극 동참하면서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지난해 11월 시진핑 국가주석의 특사인 쑹타오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평양을 찾았지만 김 위원장을 만나지 못했을 정도로 관계는 위태로워졌다.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고 있는 만큼, 북한이든 중국이든 4월 남북 정상회담과 5월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김정은-시진핑 정상회담은 김 위원장이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국제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의미가 있다. 전통적 우호관계에 있는 중국 정상과 먼저 만남으로써 남북, 북-미 정상회담 예행연습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반도에 대변동을 가져올 남북, 북-미 회담에 임해야 하는 상황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지원 세력을 확보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지명에 이어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대북 강경파 존 볼턴을 임명한 상황에서 김 위원장으로서는 중재자 역할을 자임한 한국 말고도 중국을 튼튼한 조력자로 두고 북-미 정상회담에 임하고 싶을 것이다. 또 미국과 통 큰 담판을 짓더라도 중국과의 우호적 관계는 변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중국으로서도 한반도 대격변을 앞두고 남-북-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논의에서 소외되지 않을 북-중의 전통적 우호관계 복원이 시급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북한과 중국의 관계 복원은 우리에게도 긍정적인 신호라고 할 수 있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면 중국의 적극적 역할은 피할 수 없다. 중국의 해법은 한국 정부의 한반도 문제 해결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이 정전협정 당사국 가운데 하나인데다 과거 6자회담 의장국으로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정착을 위해 노력해왔다는 점에서도 한반도 문제 해결에 관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북-중 관계가 호전되는 것은 한반도 평화체제 실현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정은-시진핑 정상회담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이라는 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한마당] 참회를 모르는 장로님

● 칼럼 2018. 3. 27. 18:44 Posted by SisaHan

AD 54년부터 69년까지 재위한 네로는 로마의 악독한 황제로 꼽힌다. 자기 어머니와 아내를 죽이고 스승인 세네카를 자살로 내몰았다. 로마를 불바다로 만들고는 이를 빌미로 기독교인들을 학살하고 짐승 다루듯 탄압한 악명 높은 군주였다. 방탕과 폭정을 거듭하다 비참하게 생을 마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그런 희대의 폭군도 업적이 있었다. 행정조직을 정비하고 직접세와 관세를 철폐해 자유무역의 토대를 놓았다. 노천극장을 만드는 등으로 문화를 꽃피우며 상당기간 나라가 태평해 이른바 ‘네로니아(Neronia)’ 시대였다는 평가도 한다. 심지어 마시모 피니라는 한 작가는 네로가 희대의 악한 괴물이 아니라 아주 진취적이고 업적이 많은 군주였다는 책까지 냈으니, 역사해석의 아이러니다.


조선시대 최악의 폭군으로 남은 연산군도 재위 12년간 끊임없이 악행만을 일삼은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좋은 시절은 있었다.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국정을 제법 살폈고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을 방비하는데 힘을 기울인 국방강화책은 잘한 일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는 또 포악한 성격자로 여겨지지만 시집을 낼 정도로 문예에 능하고 감성적인 면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잔혹한 폭군으로 역사에 남은 로마의 네로 황제나 조선시대의 연산군도 기록을 뒤져보면 몇몇 업적을 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써 크든 작든 책임감을 가졌다는 뜻이고, 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기 나라와 백성의 안위에 대한 최소한의 책무와 의무감은 지도자라면 너무 상식적인 소양이라고 우리는 이해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은 지도자가 그런 업적이나 소양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면 무슨 변고가 난 것일까. 정권이 아닌 ‘이권’을 잡은 거였다고 할 정도라면, 전제 왕권시대의 군주도 아니요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도대체 이해할 수 있는 일인가.


촛불혁명으로 탄핵당한 끝에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대통령에 뒤이어 철창 신세가 확실해진 그의 선배 대통령 이야기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요사이 세계적인 토픽과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오히려 한 술 더뜨고 있어서 한국인들을 저마다 낯 뜨겁다며 가슴마다 분을 삭이는 중이다. 그가 재임 중 한 일이라고는 마치 금전에만 눈독을 들인 듯, 국민을 속이고 나라를 자기 식구들의 ‘족벌기업’처럼 운영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어서다.
이미 3년 전 ‘MB의 비용’이란 책을 낸 16명의 학자들은 그가 재임 중에 탕진한 국민세금이 “최소한 189조원”이라고 주장했다. 허공에 날린 자원외교에서 42조원, 국토를 짓뭉갠 4대강 사업에 84조원, 대기업 법인세를 낮춰준 ‘부자감세’ 선심으로 63조원에, 원전비리 등을 합치면 천문학적인 국고를 날렸다는 것이다. 요즘 매관매직과 세금횡령, 정경유착, 권력남용 등 20개를 오르내리는 그의 혐의들을 보면 그저 날린 것이 아니라 소문처럼 해외 곳곳에 숨겨 챙기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나올 만 하다.


돈 문제 말고 혹시 미미한 업적이라도 없을까 되짚어 보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다. 국가기관의 댓글공작과 방송장악, 블랙리스트 등 비판 탄압에서 남북관계 파탄까지, 국민을 이간질 하고 ‘나라를 절단 낸’ 일들 외에 잘한 일은 도무지 찾기가 힘들다. 특히 그가 ‘장로님’인 탓에 기독교에 끼친 해악 또한 막대하다. 불교 인사들을 380명이나 캠프에 끌어들여 불법 선거운동을 시켰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교회들은 하는 데 불교단체는 뭐하느냐”며 당선 축하금을 가져오라고 했다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직분자의 양심은 어디로 내팽개친 것일까. 기독교는 회개와 용서와 사랑의 종교다. 그가 잘못을 회개하고 깊이 사죄의 모습을 보였다면 일말의 동정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그에겐 반성하고 되돌릴 기회가 여러번 있었다. 광우병 파동으로 광화문에 백만 항의인파가 몰렸을 때, 청와대 뒷산에서 다짐했다는 회심을 그는 곧 언론탄압과 정치보복으로 되치기 했다. 임기 말에 순리를 따랐으면 될 일을 무리한 선거공작으로 정권창출에 매달렸다. 그리고 본색이 드러난 지금도, 그는 참회가 아닌 떠넘기기와 회피의 비겁한 모습만을 보인다.
어쩌면 ‘맘몬의 우상’을 좇고도 회개와 사죄를 모르는 그에게서 기독교는 항존직(恒存職)이라는 장로직을 면탈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감옥이 그런 그에게 내리는 하늘의 징벌인지도 모르지만…. 위선과 탐심으로 점철된 MB의 말로를 보며 한국민 모두가 다시금 지도자의 덕목과 철학, 소양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우치는 자책의 시절이다.


< 김종천 편집인 >


미국에 학회 강연차 와 있는데 마음은 온통 서울에 가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전해오는 ‘미투 운동’ 소식 때문이지요. 정치판이 아무리 이상한 동네라고 해도 사람에 대한 검증이 이렇게 되지 않는 동네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예술계가 아무리 독특한 인간들이 모인 곳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폭력이 난무하는 동네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87항쟁 이후 여자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도 못 본 척, 오히려 멋진 옷을 입었다고 칭찬을 해온 그들/우리는 무슨 귀신에 씌어 있었을까요?
신자유주의 광풍이 심하게 불어닥친 지난 십여년, 적나라한 사냥꾼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의 세상이 펼쳐지면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익혔던 유가 전통의 나라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수신’과는 거리가 먼 사냥꾼들이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배제와 억압이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된 차별이라는 이야기를 구태여 꺼낼 필요는 없겠지요. 호모 사피엔스가 ‘소통과 상생의 사회’를 만들어 지금껏 살아온 것은 인간의 아기는 독립적 생존이 불가능한 무력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력한 생명을 돌보면서 산모와 산모의 친밀한 가족들, 그녀의 어머니와 할머니, 여형제와 남형제와 산모의 남자친구 - 아기 아버지일 가능성이 높은 - 는 함께 돌봄과 소통의 식탁 공동체를 만들어 세대를 이어가며 살아왔습니다. 돌봄 공동체가 많아지면서 그들을 연결하는 공공영역이 생겨났고 그 영역의 어른들은 아이를 기르는 일상에서 조금 자유로운, 그러나 돌봄 공동체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지혜로운 남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상과 신에게 감사의 제사를 지내고 풍요를 기원하며 장례와 혼례식을 주관하였지요. 영겁으로 이어질 자손들의 세상을 축복하면서 예술적으로,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스스로를 승화시키는 수양과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 공공영역이 돌봄 공동체와 분리되면서 인류의 불행은 시작되었습니다. 성장과 진보의 이름으로 끝없는 이윤추구의 장으로 전락한 공공영역은 사기꾼과 거간꾼이 득세하는 영역이 되어버렸습니다. 인류가 지구상에 살아남은 것은 자신이 처한 환경의 불확실성을 줄이면서 지혜롭게 적응해왔기 때문인데 이 사냥꾼들은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인류사상 참으로 기이한 시스템이 생겨나 버린 것이지요. 더욱이 돈이 국경을 넘어 권력이 된 ‘금융 자본주의’는 그간의 영토화된 영역을 탈영토화하면서 영토 안의 국민들을 난민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습니다.


미디어 연구자 프랑코 베라르디는 괴물이 된 권력 마니아들이 판을 치는 이 시대는 범죄, 자살, 광기로 치닫고 있다면서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으로부터의 자율을 추구하는 일은 그칠 수 없다면서 “미래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저항해야 하고 사회적 연대, 인간적 공감, 무상의 활동, 자유, 평등, 우애 등에 관한 의식과 감수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근대의 미래’ 다음에 올 텅 빈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저항이 나/우리 스스로가 평화로워지는 유일한 길이기에 “자기애의 이름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투 운동은 이런 시대적 맥락에서 일고 있는 인류사적 운동이고 아주 긴 여정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정의는 공공선을 위한 지속적 돌봄이다”라는 돌봄 민주주의 운동이며, <세상의 모든 딸들> - 석기시대 인류의 돌봄 공동체를 그린 엘리자베스 토머스의 소설 제목입니다 - 과 아들들과 함께 벌여온 돌봄 공동체 운동일 것입니다.


영화인들이 임순례 감독과 심재명 대표를 중심으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을 만들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습니다. ‘든든’을 통해 앞으로는 범죄와 광기를 부추기는 배설의 영화를 안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저마다 가슴속에 원망과 원한을 안고 고독한 삶을 마감하는 시대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삼삼오오 모여서 자기 동네에 폭력을 당하는 이가 없는지 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세상을 위해 서로를 돌보며 즐겁게 싸워가야 합니다.

< 조한혜정 - 문화인류학자, 연세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