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에 오른 지 어언 이십여 일째 접어들었다. 푸석한 눈밭을 헤치며 피레네 산맥을 엉금엉금 기어서 오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봄의 한가운데를 건너고 있다. 거북이 걸음으로 두 계절을 넘어서니 뿌듯함과 함께 결코 만만하지 않았던 날들이 그림자 되어 내 뒤를 따른다.


초보 순례자를 그토록 고생시키던 발의 물집도 이젠 굳은살로 박혀 견딜만하고 겉돌기만 하던 묵직한 배낭도 신체의 일부분인양 착 달라붙어 중심을 잡아준다. 내 삶을 지탱하는 일용품들을 온전히 내 몸에 실어서 천천히 살아보리라는 애초의 의지대로 행하고 있음에 자부심을 가지며 하루하루의 고통을 인내로 다스리며 나아가고 있다.
오늘은 큰 도시 레온(Leon)에서 그동안 누적된 피로도 풀고 에너지 충전도 할 겸 일정을 평소 거리의 절반으로 짰다. 처음부터 예상은 했지만 매일 바뀌는 낯선 잠자리와 끼니를 더할수록 허기를 부르는 순례자 식단으로 강도 높은 행군을 감당하기엔 역부족 이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감내해야 할 부분임을 인지하며 적응해 왔으나 현저히 떨어지는 체력은 어쩔 수 없다.


모처럼 휴일을 맞은 기분으로 가볍게 숙소를 나섰다. 매일 노상에서 일출과 일몰의 경이로움을 체험했던 그간의 떨림은 잠깐 접어두고 오늘은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던 즐거운 소일거리를 떠올리며 경쾌한 걸음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질투라도 하듯이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바람마저 거세게 일어 마음처럼 걸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거기다가 코스는 왜 그렇게 오르내림의 연속인지 반나절동안 가해지는 운동의 강도는 하루치와 다를 바 없었다. 느슨해진 마음을 다독이며 서울에서 온 O씨 부부와 앞 다투어 난코스를 해결해 갈 즈음 이번엔 우려했던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우의를 꺼내 입으며 앞 뒤 동행들을 둘러보았다. 그들도 일상처럼 우의를 챙겨 입고 묵묵하게 가던 길을 계속한다. 그런 모습들이 한없이 고독해 보이기도 하고 또 자유로워 보이기도 했다.


어려운 여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동행들 중 특히 애착이 가는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함께 출발점에 섰던 사람들이다. 몇 구간만 안보여도 혹시 탈이 난 건 아닌지 염려되어 그들의 안부를 수소문하고, 어쩌다 같은 숙소에 들기라도 하면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마음이 푸근해진다. 꼭 같은 길을 걸었어도 각자 체험한 세계가 다르다보니 대화의 끝은 쉽사리 나지 않은 채 다음을 기약하기 일쑤다. 우리들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은, 신앙심 고취, 한 걸음 도약을 위해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도전,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등 다양한 이유로 이 길에 들어섰건만 이내 그것들마저 내려놓고 오로지 걷기에 함몰되어 버린다는 요지는 충분히 공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팔백 킬로미터 순례길의 중간 지점이자 교통의 요충지인 부르고스(Burgos)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빠져나간 대신 더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어 길은 풍성한 움직임으로 생기가 넘쳤다. 새로운 사람들 중에 유독 눈에 띄는 한 그룹이 있어 그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다섯 명의 프랑스 할머니들로 구성된 일명 ‘할미꽃 그룹’은 만날 때마다 유쾌한 웃음을 선사하여 지루함을 덜게 해 주었다. 평균 연령이 칠십 세라는 그들은 일 년에 보름씩, 삼년에 걸쳐 순례길을 완주할 계획이라며 지친 기색이라곤 내내 찾아볼 수 없었다. 비결을 물었더니 십 수 년 동안 프랑스 전역을 돌며 함께 하이킹을 다닌 결과라고 했다. 건강과 친구 그리고 그들이 함께 할 아름다운 시간들이 함박꽃처럼 화사하게 클로즈업 되어왔다.


드디어 고된 행군을 마치고 목적지 레온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섰다. 비록 거리는 멀지만 오랫만에 보는 도시가 얼마나 반가운지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었다. 늘 복잡한 곳이 싫다고 하면서도 막상 떠나 있으니 그리움이 배가되어 오전 내내 청사진만 그렸다. 우선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도시 초입에서 정갈한 숙소를 마련하고 곧장 슈퍼마켓으로 가서 쇼핑을 해야겠다. 쌀, 삼겹살, 채소, 과일 등등. 그동안 잊고 지냈지만 결코 놓지 못한 식품들을 마음껏 요리하여 거나한 상을 차리리라. 그리곤 모아둔 옷가지들을 손빨래하여 뒤꼍에 널어야겠다. 햇볕이 도와줄지 모르지만. 내일은 더욱 새로워진 마음과 함께 발걸음이 훨씬 가벼울 것 같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칼럼] 훈련 중단과 비핵화

● 칼럼 2018. 7. 18. 10:54 Posted by SisaHan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돈이 많이 든다며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정당화한 건 좀 아귀가 잘 안 맞는다고 느꼈다. 안보 문제를 돈 문제로 단순 환원해 설명하는 방식에서 장사꾼 냄새가 짙게 풍겨 더 거북했던 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연합훈련에 드는 실제 비용이 얼마인지 언급하진 않았다. 미군 당국이 따로 공개한 적도 없으니 정확한 비용을 알긴 어렵다.
그러나 지난달 미국 방송 <CBS>의 보도를 보면 어림짐작할 대목은 있다. 방송은 미 공군 관계자를 인용해 ‘비행시간당 운용(작전)비용’(OCPEH)이 B-1B가 9만5758달러고, B-2A가 12만2311달러, B-52H가 4만8880달러라고 보도했다. 이들 폭격기가 괌과 한반도를 오가는 왕복비행을 13시간으로 적용하면, 전체 비용은 347만337달러(38억원)로, 2019 회계연도 국방예산 6811억달러(752조원)에 견주면 아주 적은 비용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이 비용마저 절약될지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이들 폭격기는 비행이 취소되기보단 한반도 대신 다른 곳으로 비행 훈련을 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미 간 연합연습 및 훈련 중단으로 군의 전력 약화와 대비태세 공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평상시 대비하지 않으면 후회한다는 유비무환의 가치를 들먹이는 논리부터, 연합훈련 중단이 결국 한-미 동맹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걱정까지 이어진다. 통상 2~3년씩 순환보직을 맡는 군 인사의 특성상 훈련 공백의 장기화는 군의 기본적인 전투력 유지에도 장애가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군 내부 논리로는 한 치의 틀림이 없는 이야기 같다. 훈련은 당연히 평상시 군의 직분이다. 그러나 군의 존재 근거가 국가안보에 있는 한, 더 큰 틀의 안보 차원에서 좀 더 유연해질 필요도 있다. 연합연습 중단은,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의 지난달 28일 발언을 빌리면 “한반도 내 문제들이 가장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외교관들의 협상이 더 잘 이뤄질 수 있는 기회를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고,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의 하루 앞선 연설에 따르면 “신뢰 구축이 중요한 시기에 불필요한 자극이나 도발적 면모를 보이는 연습을 중단하는 것”이다.


논리를 단순화해보자. 만약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잘 이뤄져 북핵 문제가 해결된다면 우리에게 그보다 더 큰 안보이익이 있겠는가. 핵이 없는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은 우리 수준에서 충분히 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한 예비역 해군 제독에게 최근 사석에서 이런 얘길 들었다. “1999년 6월 제1연평해전 당시 이미 남북 함정 간 전력의 차이가 많이 났다. 우리 함포는 컴퓨터로 자동 통제돼 정확한 반면 북한군 함포는 수동으로 정확도가 떨어졌다. 이후 우리는 차기 고속정을 새로 개발해 배치하는 단계인데 북쪽은 아직도 당시 경비정이 주력이다. 그때보다도 남북 간 격차가 더 벌어진 셈이다.” 이런 상황이 어디 해군뿐이겠는가?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은 지난 6~7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방북 협상을 계기로 본격 막이 올랐다. 협상에 숨결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잠시 훈련을 유예하는 게 당장 큰 문제가 되겠는가. 군 당국에 따르면 모든 훈련을 중단한 것도 아니다. 브룩스 사령관은 “혁신적 방법으로 연합훈련을 추진해 대비태세를 유지할 것이다. 훈련 규모나 연습 시기, 연습 시나리오를 조정해 도발적이지 않은 훈련을 계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 조금만 인내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

< 박병수 - 한겨레신문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


국군기무사령부가 지난해 3월,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탄핵 기각’ 결정을 전제로 탱크와 장갑차, 특전사 병력을 동원해 시위 군중을 진압하고 언론 통제와 정부부처 장악까지 계획한 문건이 공개됐다. 댓글공작과 세월호 유가족 사찰 등 수많은 불법행위를 저지른 기무사가 촛불시민의 저항을 마치 1980년 신군부처럼 무력 진압하려 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고 경악스럽다.
이철희 의원(더불어민주당)과 군인권센터 등이 5, 6일 잇따라 공개한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 문건을 보면, 기무사는 ‘박근혜 탄핵 기각’에 따른 시위 확산과 폭력사태로 사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위수령 발동과 계엄 선포 계획을 마련했다. 계획서는 특히 경비계엄 선포 시 기동성 등을 고려해 기계화 6개 사단, 기갑 2개 여단, 특전사 6개 여단으로 계엄군을 구성한다고 명시했다. 이어 경찰의 소요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무기 탈취 등 혼란이 발생해 비상계엄을 시행할 경우, 중령·대령급 요원으로 24개 정부부처를 지휘·감독하기로 했다.


또 보도검열단과 언론대책반을 운영해 언론을 통제하고, 시위 선동 등 포고령 위반자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폐쇄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평화적인 촛불집회를 펼칠 때 기무사는 국민을 잠재적 폭도로 규정해 유혈 진압하고 정부·언론을 장악하는 사실상의 ‘친위 쿠데타’ 시나리오를 만든 셈이다. 1979~80년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12·12 쿠데타와 광주학살의 행태를 답습한 것으로밖엔 달리 볼 수가 없다.
문건 작성을 주도한 인물들이 여전히 군 요직을 장악하고 있다. 현재 5천여명인 인력과 조직도 그대로다. 1990년 윤석양 이병에 의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사실이 드러나자 기무사로 이름만 바꾼 채 여러 악행을 끊임없이 계속해왔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댓글공작, 보수단체 지원 등 정치 공작 기획자가 기무사라는 건 이미 확인된 바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함께 책임자 처벌이 따라야 한다. 아울러, 다시는 이런 반헌법적 쿠데타 시도를 할 수 없도록 대수술을 해야한다. 현 기무사의 해체와 축소·재편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또 3대 기능인 방첩, 일반정보, 대전복 임무 가운데 방첩을 뺀 다른 기능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부당한 권력에 충성하며 국민에게 총구를 돌리는 계획을 서슴지 않는 기무사 폐지를 더는 주저할 이유가 없다.


[한마당] 뿌린대로 거두는 경기

● 칼럼 2018. 7. 11. 14:47 Posted by SisaHan

러시아 월드컵에서 한국대표팀은 16강에 오르지 못하고 일찌감치 보따리를 쌌다. 세계랭킹 1위 독일을 격파하는 역사적 이변을 연출해 전세계 축구팬의 환호를 샀지만 귀국인사를 하던 공항 레드카펫에는 계란이 날아들고 베개가 여럿 던져졌다.
물론 세계랭킹 57위가 1위를 무너뜨린 독일전의 통쾌한 반란에 찬사를 보내고 투혼을 높이 사며 잘 싸웠다고 격려하는 소리가 훨씬 많았다. 앞선 두 경기의 졸전과 16강 불발이 아쉽기는 해도 나름 유종의 미는 거뒀다는 위안과 카타르시스의 너그러움이었을 것이다.


지난 호 시사 한겨레 1면에는 월드컵 소식을 전하면서 ‘몸값으로 치면…월드컵 무대도 과분’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발행 다음 날 예정된 한국 대표팀의 독일과 16강 최종전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팀의 ‘패배에도 불구한 선전’을 예측한 기사였다. 당시는 한국이 독일을 이길 확률은 1%인 반면 독일이 한국을 7대0으로 이길 확률이 더 높다는 그럴 듯한 ‘예언’이 나돌 정도였다. ‘어떻게 세계 1위 독일을?’이라는 패색이 짙었기에, 한국팀이 ‘예상대로’ 패해도 ‘한국팀 23명 전체 몸값이 독일 선수 1명 몸값과 같기에’ 그들과 대적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아니냐는 위안과 변명의 재료를 제공하는 의도가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99%의 예상을 깨고 골리앗을 제압했으니, 앞선 경기들의 실망을 날려버린 것이다. 비록 계란이 날아들긴 했어도, 한국팀은 역시 기죽지 않는 전통의 ‘깡 축구’로 더 큰 비판을 막아낸 셈이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축구팬들은 허전하고 찜찜하다. “왜 한국축구는 항상 16강 문턱에서 좌절하나?”. “개인기가 왜 그렇게 시원찮나?”, “매번 경우의 수를 따지는 대진운의 소설을 언제까지 써야 하나?”… ‘희망고문’이니 ‘월드컵 스트레스’라는 ‘축구 후진국병’을 앓아야 하느냐는 원성이 터진다. 평소 축구장은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월드컵이나 국가대항전만 있으면 엄청난 민족주의로 무장해 승패에 격하게 반응한다는, 늘상 나오는 비판은 여전히 들은 체 만 체다.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말이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격언이다. 성경구절에도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는 경종의 말씀이 있다.


실제 따지고 보면 ‘월드컵 무대도 과분’하다는 말이 맞을 수밖에 없다. 팀 전체 23명의 몸값이 독일 선수 1명분과 맞먹는다는 비유는 한국축구의 현실과 꿈의 괴리를 실감나게 증명해 주고도 남는다. 투자도 여건도, 그간 쏟아부은 정력도 미미한데 어떻게 엄청난 성원과 땀을 흘린 팀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으며, 승리를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선수들과 감독·코치진이 한가하게 놀기만 했다거나 필승노력을 게을리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가령 감독과 선수를 능력이나 기량보다 연줄로 선정하는 졸속행정과 전략부재를 질타하는 말이고, 일본이나 중국의 프로리그에 비해 현저히 뒤지는 K리그 흥행현실 등을 보며, 평소의 ‘관심과 투자’가 부족하다는 지적인 것이다. 그런데 무조건 이기기를 바라고 16강에 못갔다고 한탄하는 것은, 그저 팥을 심고는 콩을 기다리는 격이요,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려는(緣木求魚)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8강이 확정된 현재까지의 이번 월드컵 성적과 기량을 보면, 역시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말과 정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다시금 일깨워 준다. 독일을 비롯해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아르헨티나 같은 쟁쟁한 팀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 그걸 웅변해준다.


아울러 호날두나 메시 등 맥없이 고개 숙인 대형 스타들이 말해주듯 출중한 몇몇 선수만으로 승전고를 울리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역시 끈끈한 팀웍과 세트플레이가 보여주는 훈련된 조직력이 승리의 관건임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고 있다. 축구는 개인전이 아니고 11명이 일사분란하게 포지션을 감당하며 뛸 때 최대의 성과를 내는 경기다. 단체전은 글자 그대로 단체라는 정체성에 충실할 때 이길 수 있음을 일깨운다.
계제에 우리들 삶에 주는 성경의 훈계 몇 구절을 더해본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 6:38) 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9장 6절에서는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라고 명확하게 규정했다. 그리고 시편(126: 5~6)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라고 깨우쳤다.

< 김종천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