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김정은 위원장이 볼턴 회고록을 본 걸까

● 칼럼 2020. 6. 26. 03:0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특파원 칼럼] 김정은 위원장이 볼턴 회고록을 본 걸까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쓴 <그 일이 일어난 방: 백악관 회고록>은 여러모로 씁쓸하다. 세 차례 이뤄진 북-미 정상의 만남에서 비핵화와 제재 해제에 대한 양쪽의 인식 차이가 얼마나 컸는지를 거듭 보여주기 때문이다. 북한에는 체제의 생존이, 한국에는 한반도 평화가 걸린 절박한 문제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는 언론에 얼마나 멋지게 비칠지, 재선에 도움이 될지의 관점에서 주로 다뤄졌다. 더구나 이 과정을 낱낱이 폭로한 이가 2000년대 북-미 제네바 합의를 깨뜨린 뒤 퇴장했던 초강경파 볼턴이라는 점에 또 한 번 씁쓸하다. 북한이 “인간쓰레기”로 부를 정도로 혐오하는 볼턴이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에 ‘훼방꾼’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볼턴의 책에서 남·북·미 정상의 관계가 눈길을 끈다. 우선, 북한 비핵화에 대한 미 행정부 내의 강력한 회의론 속에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개인적 친분까지 깨지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2월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요구대로 합의하면 선거에 질 수 있다’고 하자,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다치는 일을 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고 볼턴은 회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노 딜’ 이후에는 재무부의 대북제재 관련 발표를 철회하라고 트위터에 올려 혼란을 일으켰는데, 참모들에게 “오직 한 사람(김 위원장)”을 위한 트위트라고 하는 등 김 위원장과의 관계 유지에 신경을 썼다.

북-미 정상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당장 마주 앉을 여건은 못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대선에 여념이 없고, 뚜렷한 비핵화 성과 없이 또 만날 수는 없다는 생각이 확고해진 모습이다. 북한이 기존 태도에서 양보하면서 미국과 대화를 시도한다 해도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에서도 ‘북한의 쇼에 속지 마라’는 비판이 거세질 것이다.

그래서 책에서 눈에 띄는 두 번째는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이다. 미국의 금전적 이득과 자신의 재선 유불리를 최우선에 둔 트럼프 대통령, 한반도 평화 노력을 한국 ‘통일 어젠다’로 치부하는 볼턴 같은 강경파, 미국의 귀를 붙들고 끊임없이 ‘최대한의 압박’을 속삭이는 일본 사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그야말로 고군분투한 장면들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

지난해 2월 하노이에서의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노 딜’로 끝난 뒤, 문 대통령은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3차 북-미 정상회담을 제안하면서 그 장소로 판문점이나 미 해군 함정을 예시하며 북-미 대화를 되살리려 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이 미국 편에 서 있다고 북한이 보기 때문에 남북 사이에 의미 있는 대화가 그동안 이뤄지지 못했다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토로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화제를 돌리는 와중에도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안전보장을 원한다는 점을 집요하게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기가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의 중요한 첫걸음이라는 점도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통해 백악관에 강조했다.

이런 한국의 노력을 볼턴은 책에서 “사진찍기에 끼어들려는 시도”라거나 “조현병 환자 같은 생각”이라고 비하했다. 백악관 참모한테 이런 냉소를 받으면서까지 문 대통령은 중재에 공을 들였다. 그런데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은 최근 문 대통령을 향해 “자기변명과 책임 회피, 뿌리 깊은 사대주의”라고 비난했다. 볼턴 책은 북한이 존중하며 협력해야 할 대상이 누군지 명확히 보여줬다. 대남 군사행동 보류를 지시한 김 위원장이 볼턴 회고록을 본 걸까?

< 황준범 워싱턴 특파원 >


[한마당 칼럼] 사람 값과 코로나

● 칼럼 2020. 6. 20. 08:4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마당 칼럼]  사람 값과 코로나

       

사고로 사망한 사람에게는 피해 보상금이 주어진다. 가해자와 피해자 측 사이의 합의에 의해 거액이 보상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형편없는 금액에 유족들이 반발해 격한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람 값이 그 정도 밖에 안되느냐?, 인간을 무시하느냐!”는 격앙된 항의에 “죽은 사람 가지고 장사 하려느냐!”는 반박이 나온다. 그러다 결렬되면 법원에 맡기는 손해배상 소송에 들어간다. 하지만 법적 기준선과 산정은 항상 흡족할 리가 없다.

‘징벌적 손해배상’이 제도화 된 나라에서는 하찮은 잘못에도 천문학적인 보상을 하는 경우가 많다. 40년간 담배를 피운 폐암 환자에게 1억 달러를 물어준 담배회사, 추돌사고로 불이 나 죽은 4살 아이에게 미국법원은 SUV의 기름탱크 위치 잘못으로 사망했다며 1억5천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크라이슬러에 명하기도 했다. ‘사람 값’을 따지면 수백에서 수천 배의 차이가 난다.

이처럼 금액으로 따지는 사람 값은 돈이 우상이 된 황금만능 세상에서 사람들의 속물적이고 육적인 욕망의 척도를 드러낸다. 그런, 사람 값 비싸다고 좋은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지난 5월25일 미국 미네소타의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 무릎에 8분46초간 목이 눌려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46)는 ‘사람 값’을 다른 각도로 상기시켰다. 세계 1등국 미국에서 사람을 개 돼지처럼 압살한 경찰의 만행에 흑인들은 물론 세계인이 규탄하며 인종차별 반대시위로 번진 이유다. 살인 경찰관 앞에서 플로이드의 ‘사람 값’은 얼마로 여겨졌던 것일까.

영화 ‘뿌리(ROOTS)’를 보면 아프리카에서 ‘사냥’ 당해 미국 땅에 끌려온 쿤타킨테는 한 마리의 가축이나 사고파는 물건에 불과했다. 그렇게 삶이 나락에 떨어진 흑인들은 1863년 링컨의 노예 해방선언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인권 운동, 1964년 연방 민권법 제정, 그리고 2009년 대통령에 흑인 오바마가 등장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차별의 대상이고, ‘사람 값’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의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

어디 흑인 뿐인가. 이민자들의 나라, 다민족 국가의 나라라고 자랑하는 미국은 물론이고 캐나다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때로는 눈에 선명한 유색 차별의 실상이 심심치 않게 드러난다. 단속 경찰이 백인은 부드럽게 대하면서 유색인들은 함부로 대한다는 암묵적 인식부터, “꺼져라, 너희 나라로 가라!”고 대놓고 박대를 하는 거리의 사례까지. 얼마 전 어느 하원의원이란 자가 아시안계 연방 보건책임자에게 비슷한 막말을 했다는 보도가 바로 그런 증거다.

“너희들도 원주민 쫓아낸 이민자 주제에 주인행세냐!”는 말이 치밀어도 통할 리가 없으니 대부분 삼키는 현실. 돈이나 물질로 따질 수 없는, 또한 따져서도 안될 진정한 ‘사람 값’은 인간적 예우와 가치에 대한 존중 여부, 삶의 질에 연결된다.


흑백이나 유색에 대한 차별을 떠나 ‘사람 값’의 귀천은 지금 전세계적으로 8백만 명을 넘어선 코로나19 사태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미국에서 중증 확진자로 62일간 입원치료를 받았던 70세 노인이 무려 112만2천5백 달러(약 13억5천만원)의 치료비 청구서를 받았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한국에서는 건강보험 부담 치료비가 평균 489만원이라니 무려 270배가 넘는다.

이 엄청난 치료비는 사람 값이 높다는 것과는 상반되는 이야기다. 오히려 비싼 의료비 때문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고통을 견디며 ‘병을 껴안고 사는’ 수많은 서민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사람 값’이 너무 하찮은 곳이 세계 1등국 미국이라는 역설을 입증한다. 코로나 사태의 와중에 '선진'을 자랑하던 나라들의 민낯과 허상이 드러났다.

코로나19 최다 확진자와 사망자가 나온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에서 가장 피해가 큰 브롱크스 지역에는 백인이 9%에 불과하고, 영어를 쓰지않는 가구가 60% 정도라고 한다. 유색인종의 ‘사람 값 저평가’ 문제 만이 아니다. 온통 대선에 정신이 팔린 트럼프 대통령은 국민들이 코로나에 걸리든 말든, 빨리 경제활동을 재개하라고 핏대를 올린다. ‘브라질의 트럼프’라는 보소우나루 대통령 역시 ‘케 세라 세라(Que Sera)‘ 식 대응으로 확진자 10만명에 가까운 2위 국가가 됐다.

감염자 1만8천여명인 일본의 아베는 어떤가. 올림픽이 무산될 세라 감염을 쉬쉬하며 추적도 검사도 피하더니, 크게 늘렸다는 지금도 하루 4천건 정도의 진단검사만 한다. 인구 1억3천만 명인 나라의 총 검사수가 34만여 건으로, 1억 필리핀의 51만건, 1억6천인 방글라데시 53만 건에도 미치지 못하며 한국 120만 건에는 3할이 채 안된다.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의 수준이 높아서 감염이 적다고 자랑하는 정치인이 설치는 그들의 ‘사람 값’은, 단 한명이라도 찾아내 책임지고 고치겠다며 보건책임자들이 밤을 새우는 한국인들의 사람 값보다 과연 비싼 것일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됐다고 창세기는 기록했다. 인간을 존중하지 않고 값싼 짐승처럼 취급하는 곳 이야말로 ‘신의 형상’을 차별하고 비하한 죄인들의 지옥에 다름 아니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터널의 끝은...

● 칼럼 2020. 6. 20. 08:1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칼럼] 터널의 끝은...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전염병의 특성상, 사람의 죽음이 매일 더 해지는 통계의 숫자로 취급 되는 것이 무서웠고, 충분히 대처를 했다면 막을 수도 있는 죽음이라는 사실이 슬프게 했고, 그리고 나 자신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불안하게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번 일로 살아남은 사람도 변해야 한다. 애초 중국 우한에서 발생했을 때는 난 곧 끝나리라 생각했고, 코로나19가 전세계는 물론이고 미국이나 캐나다까지 크게 퍼지리라곤 생각 못했다. 미국과 캐나다가 이렇게 큰 타격을 입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이유는 의료시설과 방역제도가 잘 갖추어진 선진국이라고 막연히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두 달이 넘었지만 언제 끝날지 확실치 않다. 무엇보다 사태가 장기화 되자 병도 병이지만 경제가 심각한 문제이다. 특히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몇 달 동안 문을 닫아놓을 수 없어 위험부담을 안고서라도 서둘러 끝내기를 원하고 있다.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여기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다. 지금 어둡고 힘들지만, 마치 기차가 어두운 터널 속을 달리고 있듯,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지, 곧 밝은 세상을 본다는 뜻이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이제 곧 터널 밖으로 나갈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두려운 것은 이 터널을 빠져 나간다 해도, 이제는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알던 세상과는 다른, 그 동안 우리가 터널 속에 갇혀 있는 오랜 시간 동안,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소형 자영업자들은, 물론 대형 백화점도 포함 된다, 인터넷 쇼핑의 발달로 점점 자신들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사람들의 쇼핑 습관이 직접 가게를 찾아가서 만져 보고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 폰 화면으로 보고 물건을 고르는데 익숙해져 가고 있다. 그것이 시간을 절약하고 편리한 쇼핑방법이 되어 가고 있다. 이번 녹다운 기간을 통해 인터넷 쇼핑은 더욱 활성화 됐으리라 생각한다 이 기간 동안 식당도 많은 타격을 입었다.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가족들과 식사시간을 많이 가졌을 테고 그 장점도 깨달았을 것이다. 이민생활을 하며 이제는 가족끼리 모여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피자처럼 주문 배달하는 사업이 이득을 보았다. 영화도 굳이 영화관에 갈 필요 없이 Net Flex처럼 집에서 컴퓨터로 다운로드 받아 영화를 보는 것이 더욱 성행했을 것 같다.

직장인들이 집에서 근무하는 재테크와 학생들이 온라인으로 수업을 받던 일은 전에도 있던 일이지만, 이번 기회로 많은 기술적인 문제들이 해결되고, 더욱 그 방법이 발달되고 향상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나의 가능성으로 거론되던 방법들이 어차피 나가야 할 방향이었지만, 이제 눈앞에 현실로 다가온 것 같다.

가장 궁금한 것은 새 시대에 있어서의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이다 “우리는 굳이 만날 필요가 있을까?” 친구 없이, 만나는 사람 없이도 우리는 살 수 있다. ‘페친”이란 말이 있다. 페이스 북 친구, 보통 몇 백 명씩 몇 천 명씩 가지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하여 쉽게 만나고 헤어진다. 우리는 페친은 많아지면서 정말 만나는 친구는 줄고 있지 않은가? 친구가 없기에 친구 사귀기가 힘들기에 우리는 인터넷에서 친구를 찾고 있을까? 적어도 우리는 점점 직접 만나는 친구보다 한 번 만날지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인터넷의 친구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디.

이제 기차가 터널을 빠져 나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 언제를 모르고, 다시 이차 감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게 하고 있지만 곧 터널을 빠져나가리라 생각한다. 이 시점에 나는 두렵다. 모르기에 두렵다. 내가 터널 밖을 나가 보게 될 세상이 분명 바뀌었을 테고, 어떻게 변한 모습에 내 자신 적응해 나갈지……

< 박성민 시인, 소설가 >


‘불신’의 맞바람을 안고, 청와대는 평화로 나아갈까

● 칼럼 2020. 6. 20. 07:5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시론] 다시 위기에 빠진 남북관계, 어디로?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실기한 것일까요?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걸까요? 아니면 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시 길이 날 수 있을까요?

남북관계 이야기입니다.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말 그대로 날아갔습니다. 2년여 전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물로 남북 상시 소통의 장이었던 건물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콘크리트 더미로 변했습니다. 남북은 날 선 말들을 주고받았습니다. 세차례나 만나 백두산 천지까지 함께 오른 인연들 사이의 말이라고 하기엔 몹시 민망합니다.

어디서부터 틀어진 것일까요. 시계를 되감아 보면 사실 남북관계는 1년4개월가량 전부터 멈췄습니다.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남북은 의미 있는 전진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6월 판문점에서 깜짝 남북미 정상 회동이 있었지만 ‘깜짝’에 그쳤습니다. 하노이 이후 북한은 남쪽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인 듯싶습니다. 당시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에 관한 문 대통령의 중재안은 ‘러시아 스캔들’에 몰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강경파에 의해 거부당했고, 북한은 충격에 빠져 신뢰의 빗장을 걸어 잠갔습니다. 문 대통령의 충격과 당혹감도 적잖았습니다. 한 정부 책임자는 지난해 “사실상 남북 간 의미 있는 연락은 끊겼다”고 했습니다. 이달 초 북한이 남북 연락망 단절을 공식 선언하기 한참 전입니다.

그 뒤로 남북관계 활력은 눈에 띄게 잦아들었습니다. 남쪽도 북쪽도 섣불리 어떤 것을 함께 도모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청와대는 미국에 기댔습니다. 하노이 중재 실패 후유증이 짙은 탓인지 능동적으로 나서지 못했습니다. ‘한반도 운전자론’ 대신 “북미 협상이 우선”이란 말이 많이 들렸습니다. 궁여지책 같기도 했고, 책임회피 같기도 했습니다. 남북관계에 한-미 공동보조를 맞추자는 명목으로 미국이 주도한 한-미 워킹그룹이 거부할 수 없는 제동을 걸었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관성에 익숙해졌습니다. 차근차근 신뢰를 쌓기보단, 트럼프의 미국이 통 크게 ‘한 방’ 터뜨려주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이익이야 북한 비핵화보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것이겠지요. 무역분쟁과 화웨이 규제, 코로나19 책임 공격 등을 보면 미국의 눈은 중국에 가 있고, 이런 중국을 견제하는 데 북한은 버리기 어려운 카드입니다. 한반도, 정확히는 동북아, 더 정확히는 중국 견제에 북한을 빌미 삼는 것이 낫습니다.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한 북한의 쓰임새는 핵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북한의 쓰임새보다 못합니다. 청와대와 정부가 한동안 미국의 국익과 우리의 국익을 지나치게 동일시한 것은 아닐까요.

청와대와 정부는 통이 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문 대통령은 ‘역지사지’란 말을 자주 씁니다. 상대 처지에서 생각해보자는 것인데, 남북관계에서 다소 소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첫 정상회담 때 남한 시각에 맞춰 평양 표준시를 30분 앞당기고, 세번째 정상회담 때 문 대통령에게 15만명이 모인 평양 능라도 5·1경기장 연설을 허용한 것은 깎아봐도 북 내부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겁니다. 이를 감내했던 북한의 적극성에 견줄 만큼 청와대와 정부가 간절했는지, 남북관계가 얼음장같이 식은 지금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 대통령도 “잘못한 대처였다”고 인정한 대북전단 문제에서 전단 살포를 진작부터 강하게 막지 않은 것은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

이제 문 대통령은 전쟁 위기로 치닫던 2017년 세밑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적어도 남북 신뢰도 측면에서는 그렇습니다. 당시엔 북한이 불확실하나마 ‘기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신’이란 맞바람을 안고 나아가야 합니다. 청와대는 “사리분별 못 하는 무례한 언행”이라고 북한의 말폭탄에 맞대응했지만, 문 대통령의 말마따나 ‘구불구불 흐르더라도 끝내 바다로 향하는 강물처럼’ 남북이 가야 할 방향은 선명합니다. 6·15 남북공동선언 20돌 기념사에서 문 대통령이 새로운 제안을 내놓는 대신 “8천만 겨레” 앞에 함께한 약속을 언급하며 합의 정신을 강조한 것은 다시 신뢰의 기본기를 다지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남북관계는 길이 끊어져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길이 나곤 했습니다. 3년 전만 해도 그랬습니다. 문 대통령의 2017년 독일 쾨르버재단 연설이 남북관계를 평창→판문점→백두산으로 이끌지 예상했던 사람은 적었습니다. 문 대통령 앞에 놓인 길도 어찌 보면 단순합니다.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숙명과 그의 사명이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 성연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