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삼성, ‘4세 경영은 어차피 어려운 터에

재벌 대기업에서 ‘3세 경영시대를 처음 연 것은 1981년 두산그룹이었다. 40년에 이르는 국내 재벌 3세 체제의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재계 1위 그룹의 총수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2위인 현대차그룹의 경영을 사실상 이끌고 있는 정의선 총괄 수석 부회장은 그 상징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6일 대국민 사과문에서 언론의 집중 관심을 끈 대목은 ‘4세 경영포기 발언이었다. 다음날 주요 신문의 1면은 삼성 경영권 대물림 않겠다’, ‘4세 경영 포기 선언’, ‘제 아이들에게 경영권 물려주지 않겠다는 제목의 기사로 덮였다.

4세 경영 포기가 재계를 놀라게 했을지는 몰라도 경영계 동심원 바깥까지 흔든 것 같지는 않다. 이 부회장의 아이들20살 아들과 16살 딸이라 4세 경영 여부는 먼 미래 일이다. 또 그가 총수 역할을 하기 시작한 지 6년밖에 되지 않았다.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과 2세 이건희 회장의 재임 기간(49, 27)에 견주면 멀었다.

더 중요하게는 그룹의 핵심 중 핵심인 삼성전자의 덩치가 커져 특정 가문이 장악하기는 어렵고 더 어려워지고 있다. 4세 경영 포기라는 게 실상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안 하겠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허망함을 띠고 있다.

이 부회장 가문과 삼성 계열사 보유의 삼성전자 지분은 다 합쳐 20%를 갓 넘는 수준이다. 이건희 회장(4.18%), 삼성물산(5.01%), 삼성생명(8.51%)이 주요 축이며, 이 부회장 몫은 0.7% 수준이다. 그가 지주회사 격인 물산의 주식을 17.08% 확보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또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따른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의혹은 검찰 수사 대상이다. 도덕적 정당성 부족에 법적 위험이 겹쳐 있다. 편법과 탈법에 얽힌 탓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부회장이 아버지로부터 주식을 온전히 물려받으려면 막대한 세금을 물어야 한다. 현금을 10조원 이상 마련해야 할 것이란 추정이 있을 정도다. 다음 세대로 넘길 때마다 상속세 때문에 몫이 절반씩 줄어든다는 사정을 고려하면 4세 경영이 정상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삼성에서 4세 경영을 한다는 것은 곧 지금까지 한 것보다 더 심한 편법, 불법으로 지분을 부풀려야 한다는 얘기나 마찬가지”(김진방 인하대 교수).

헌법상의 노동 3권에 정면 배치되는 무노조 경영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고, 삼성에서 4세로 경영권을 넘기는 일 또한 정상적, 합법적으로는 어렵다. 기업 인수와 합병, 증자를 통해 덩치를 불린 데 따라 총수 가문의 지분율이 급락한 국내 최상위권 재벌의 공통 고민이다. ‘총수 자리에 오른 뒤 능력을 입증하려는비정상에서 벗어나 능력을 인정받아 총수 자리에 오르는정상 궤도 쪽으로 등 떠미는 요인이다.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이 부회장의 선언을 깎아내리기만 할 일이 아님은 물론이다. 허망함을 띤 선언이라도 안 한 것보다는 나을 테고, 후속 조처의 알맹이에 따라선 좋은 변곡점을 마련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 다음날 삼성 준법감시위원회는 정례회의를 연 뒤 노동 3권의 실효성 있는 보장, 시민사회의 신뢰 회복 방안과 함께 준법 의무 위반이 발생하지 않을 지속가능한 경영체계 수립을 주문했다. 총수와 가신을 중심으로 한 전횡 체제를 개선하라는 요구로 읽힌다. 사과의 진정성은 이에 대한 응답과, 진작 내놓은 약속의 이행 수준으로 판명 날 것이다.

이 부회장에 앞선 두 삼성 총수의 대국민 사과, 그에 따른 약속은 실천으로 뒷받침되지 않았다. 사카린 밀수 사건에 얽혔던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1966년 은퇴 선언은 1년 뒤 복귀로 번복됐다. 2008년 이건희 회장의 사퇴 선언과 차명계좌 45천억원 사회 환원, 지배구조 개선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이 부회장의 신약(새 약속)이 의구심을 남기는 것과 무관치 않은 사연이다. 구약(옛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터에 제시된 신약이 미덥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삼성과 이 부회장에게 신약 개발보다 더 필요한 것은 구약 이행일 것 같다. 구약 중에는 지금이라도 돌이켜 교정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구약의 이행이야말로 신약의 신뢰도를 높일 더없는 묘약이다. 신약에 따른 후속 조처의 실행은 금상첨화의 양약일 테고.

< 김영배 논설위원 >


전국민 긴급재난지원금전국민 갈라먹기” “무책임한 포퓰리즘이라며 반대했던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일부 언론이, 이번엔 자발적 기부에 트집을 잡는다. 구체적 근거도 없이 관제 기부라고 몰아간다. 기부할 마음이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자발적 기부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지는 마라.

전국민 긴급재난지원금이 지난 4일부터 지급되기 시작했다. 한시가 급한 저소득층 280만 가구가 먼저 현금으로 받고 있다. 현금 지급 대상이 아닌 나머지 국민은 11일부터 신용·체크카드, 선불카드, 지역사랑상품권 중 하나를 선택해 지급받는다.

긴급재난지원금은 신청 단계에서 전액 또는 일부를 기부하거나 일단 받은 뒤 근로복지공단을 통해 기부할 수 있다. 본인이 자유롭게 결정하는 자발적 기부. 지급 개시일로부터 3개월 안에 신청하지 않는 경우도 자발적 기부로 간주한다. 급격한 소비 위축에 신속히 대응하기 위해 지원금 사용 시한을 3개월로 정한 것과 동일한 기준이다.

전국민 긴급재난지원금을 전국민 갈라먹기” “무책임한 포퓰리즘이라며 반대했던 <조선일보><중앙일보> 등 일부 언론이, 이번엔 자발적 기부에 트집을 잡는다. 구체적 근거도 없이 관제 기부라고 몰아간다. 조선일보는 지난달 24긴급재난지원금 기부는 코로나 대책에 들어가는 재원 마련의 책임을 일부 고소득자에게 떠넘기는 정책이라며 정치권에선 조세 저항을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고 보도했다. 청와대가 당일 고소득자를 압박한 적이 없다기부는 고소득자만 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진행된다고 반박했다. 청와대는 이후에도 대통령이 기부를 하더라도 조용히 동참할 것이라고 거듭 설명했고, 더불어민주당도 기부 캠페인을 하지 않고 시민들의 자발적 의사에 맡긴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들 언론은 귀를 닫았다. “재난지원금 관제 기부로 환수’, 이건 국정도 아니다”(문화일보) “재계는 사재를 내놓으라는 얘기라고 우려한다”(중앙일보) “자발적 기부 유도는 강압적 준조세 협박”(조선일보) 등등. 기부 강요 사례를 단 한건도 제시하지 않은 채 기업 관계자’ ‘또 다른 기업 관계자’ ‘일부 공무원’ ‘정치권등 익명의 취재원에 기대 이런 주장을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4일 직접 기부는 선의의 자발적 선택이다. 강요할 수도 없고, 강요해서도 안 될 일이라며 형편이 되는 만큼, 뜻이 있는 만큼 참여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실적 악화로 벼랑 끝에 몰린 기업들을 닦달해 추가 기부를 요구하는 것은 박근혜 정부 때 케이(K)스포츠·미르재단 출연 요구를 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매일경제)는 주장까지 나온다. 재난지원금 기부를 박근혜·최순실의 국정 농단과 동일 선상에 놓은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떻게든 정부 정책을 흔들어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4·15 총선의 결과를 지켜보고도 교훈을 얻지 못한 것 같다.

경제적으로 또는 심적으로 조금 더 여유 있는 사람이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건 인지상정이다. 지금처럼 전대미문의 재난에 직면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정부는 국민들이 기부를 하면 고용 유지에 사용할 계획이다. 무급휴직에 들어간 가장, 정부 일자리 사업이 중단돼 생계가 막막해진 노인,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은 청년 등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쓰이는 것이다.

지난달부터 자체적으로 재난지원금을 지급한 지방자치단체들에선 이미 자발적 기부 움직임이 활발하다. 누가 강요하지도 않고 눈치를 주지도 않는다. 대부분 평범한 시민들이다. 지난달 25일 모 방송 뉴스에 수원에서 식당을 하는 임태선씨 인터뷰가 나왔다. “3월엔 정말 힘들었거든요. 근데 저희는 그래도 처지가 괜찮은 편이더라고요. 나보다 힘든 사람들은 얼마나 더 힘들까, 그래서 기부를 결정하게 됐어요. 적은 금액이지만, 적은 금액이 모이면 큰 액수가 되잖아요. 큰 액수가 돼서 많은 분들에게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수원시는 지난달 9일부터 기부를 받고 있는데 5일까지 1824명의 시민이 32천여만원을 모았다. 수원시는 기부금을 실직자와 소상공인 등을 위해 사용한다. 수원시만이 아니다. 부산 기장군, 경기 남양주시, 전북 장수군과 익산시 등에서도 주민들의 기부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기부는 연대와 상생의 손길을 내미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코로나19 방역에는 성공했지만 코로나발 경제 위기는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많은 어려움이 닥칠 것이고 이를 헤쳐나갈 때 연대와 상생의 정신이 큰 힘이 될 것이다.

기부는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기부를 하지 않는다고 비난해선 안 된다. 사람마다 사정이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자발적 기부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 된다.

< 안재승 한겨레 논설위원실장 >


망언 의원들을 줄줄이 낙선시키고 미래통합당에 초유의 참패를 안긴 것은 수구적 행태에 대한 유권자들의 응징이다. 보수언론도 함께 심판당했다. 곳곳에서협치를 제안하지만 수구보수 야당·언론이 건강한 보수로 재탄생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거대 여당도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국민적 공감이 많은 사안부터 우선순위를 정하고 완급 조절을 해야 한다.


민주화 이후 처음이라는 미래통합당의 역대급 참패는 중도층이 외면한 탓이 크다. 공천 실패에다 막판 패륜적 망언이 터져나오면서 중도층은 한 가닥 남은 미련마저 거둬들였을 것이다.

<조선일보>강경 지지층에 휘둘려 중도층을 잃었다고 했으나 <한겨레>는 사설에서 그 강경파 중 하나가조중동이라고 콕 짚었다. “모든 게 문재인 정부 탓이라는 조선·중앙 등 보수언론 프레임을 그대로 따르며 퇴행적 행태를 반복한 통합당 지도부 책임이라는 분석은 일리가 있다.

지난 3년 보수언론들이 집착해온반문재인 프레임은 코로나19 국면에서 결정적으로 한계를 드러냈다. 외국 언론들이방역 모범 사례로 칭찬하고 국민 65%가 정부 대응을 보며선진국임을 느꼈다”(19일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 조사)는데도방역 실패라고 억지를 부렸다. ‘시진핑 눈치 보느라 입국금지 안 했다는 조선·중앙의 논리를 앵무새처럼 따라 하며문재인 정권 심판구호로 선거를 치렀으니 그런 야당에 중도층이 표를 줄 리 만무했다.

차명진 미래통합당 후보의세월호 망언도 따지고 보면 보수언론의 책임과 무관하지 않다. “징하게 해 처먹는다에 이어텐트 망언으로 제명 파동을 겪은 뒤에도 성금이 답지한다며 천안함 유족들에게 보내겠다고 했다. 애초 세월호와 천안함의 유족 보상금 액수를 비교하며문제로 참사 유족들을 조롱한 원조는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책임 없다며 유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매도한 것도 모자라 검찰이 재수사에 착수하자세월호 또 우려먹겠다는 정권과 검찰, 해도 너무한다고 공격한 것도 조선일보다. 사실 차 후보 망언과 그리 다르지 않다.

김진태·이종명 의원 등의 ‘5·18’ 망언도 <TV조선> <채널에이 A>가 촉발한북한 특수군 침투발언에 원죄가 있다. 지금도 극우 유튜브엔 비슷한 영상들이 숱하게 걸려 있다.

북핵 위기를 협상으로 풀려는 노력을 색깔론으로 방해한 것도 보수언론들이다. 조선일보가천안함 폭침 주범 평창 온다한국과 유가족 능멸이라고 부추기자,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곧바로 통일대교 한복판에 자리를 깔았다. 김영철 방남을 저지하겠다며 길을 막고 철야 농성을 벌였다.

스스로 인정하진 않겠으나 보수언론 중에서도 조선일보는 탄핵 국면에서태극기부대의 불매운동 협박을 경험한 뒤 더욱 강경 보수로 치달았다. 광고 지면을 통째 선전장으로 내주며 아스팔트 우파에도 영합했다.

이번에 망언 의원들을 줄줄이 낙선시키고 통합당에 초유의 참패를 안긴 것은 이런 식의 수구적 행태에 대한 유권자들의 응징이다. 총선 국면에서 보수 통합을 독려하고 야당 대표 출마 지역구까지 찍어준 보수언론도 함께 심판당했다. 오죽하면 <미디어오늘> 1면 머리기사로참패한 조선일보라는 제목을 달았겠는가.

2016년 촛불 시민은 대통령을 탄핵했으나 국회는 이전 구도 그대로였다. 이번에 국회마저 획기적으로 바꿔놓은 건 촛불 정신을 완성시키라는 시민들의 뜻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번 총선은촛불 시즌2’라 일러도 지나치지 않다.

70여년 지탱해온 수구 기득권 체제는 적대적 남북정책을 고수하며 분단구조에 기생해왔다. 경제적으론 수출과 대기업 중심의 성장 우선주의로 시장경제마저 제대로 포용하지 못했다. 정치·경제 등 각 분야의 기득권 논리를 전파하며 연결고리 구실을 해온 게 수구보수언론들이다. 그런데 최소한의 복지조차사회주의” “포퓰리즘”’이라던 조선일보가 총선 이후 야당에 복지정책 보완과 기본소득제 검토를 주문하며, 사람도 노선도 행태도 바꾸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좀 더 지켜보긴 해야겠으나 내부 성찰의 결과이길 바란다. 곳곳에서협치를 제안하지만 수구보수 야당·언론이 건강한 보수로 재탄생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여권도 마찬가지다. 일각에서 윤석열 검찰총장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책임이 드러나기 전에 정치권이 나서서 몰아내려는 모양새는 역풍을 불러올 수 있다. 가족 수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그 결과에 따라 자연스럽게 결정하면 될 일이다. 거대 여당이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다수 국민과 함께 가야 한다. 입법과 정책도 국민적 공감이 많은 사안부터 우선순위를 정하고 현명하게 완급 조절을 해야 한다. < 김이택 대기자 >

       
1918년 스페인 독감은 5천만명의 목숨을 앗아 갔지만,

그 후 세계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세계의 지식인들이 언론을 통해 다양한 주장을 펼치면서 관련된 담론에 개입하고 있다. 대부분 코로나19 이후 세계가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를 논의하면서, 때로 논쟁을 불러오기도 한다.

한 예로 세계적 이론가 지제크는 <한겨레> 칼럼(2020413일치)에서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세계를 급진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그는 영국 총리가 코로나 사태 극복을 위해 철도의 일시적 국유화를 발표한 사례를 든다. 다른 매체에서 그는 이스라엘 총리가 코로나19와 관련해 팔레스타인을 적극 지원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가 제안한 두 가지 대책, 즉 지역공동체에 기반한 의료체계 개선과 자원 생산 및 공유를 위한 국제 공조체계 구축은 전적으로 동의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사례로 보면 세계가 바뀔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사실 영국 총리는 사태 초기에 신속한 대규모 검사 대신 인구 60%의 감염을 감수하는 집단면역이라는 전체주의적 전략을 선호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돕는 것은 악어의 눈물처럼 보인다. 그의 비판자들이 제기한 것처럼, 코로나19 이후 자본주의는 더 강력한 모습을 띨 수 있고, 시민들은 국가의 통제에 더 순응하게 될 수 있다.

전염병으로 세계사가 바뀐 사례들이 있긴 하다.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페스트)에 의한 인구 감소는 농업노동력 부족으로 봉건제의 해체를 가져왔고, 17세기 중국에서도 흑사병이 창궐하여 명 왕조가 붕괴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1918년 스페인 독감은 5천만명의 목숨을 앗아 갔지만, 그 후 세계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복잡한 정치·경제적 요소들로 치밀하게 조직되어, 그 내적 모순들을 심화시킬지라도 당면한 위기를 해소해왔다. 더욱이 이러한 위기 해소는 언제나 인종과 계급(빈곤)에 근거한 차별적 희생을 전제로 했고, 그 차별 메커니즘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작동했다.

인종 차별과 혐오는 코로나19가 중국 우한에서 확산되던 초기부터 지금까지 거론되는 문제다. 며칠 전 프랑스 한 언론매체의 인터넷판에 한국의 대응정책을 두고 감시와 밀고에 있어 세계 두번째 국가라고 비난하는 글이 실렸다. 이 글은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한 감시·권위국가를 비판하려 하지만, 자신의 처지는 덮어둔 채 자유에 대한 맹신과 프랑스 우월주의에 빠져 한국 나아가 아시아를 인종 차별적으로 무시한다.

미국 대통령이 중국 바이러스라고 칭하거나 중국 탓을 하며 세계보건기구(WHO)에 지원을 중단한 것은 인종 차별적 혐오 돌리기의 전형이다. 이로 인해 서구에서 다른 인종에 대한 개인적 혐오 발언이나 폭력이 정당화될까 두렵다. 나아가 인종 차별은 단지 정체성의 문제로만 치부될 수 없고, 현실에서 훨씬 심각한 비극을 초래한다. 코로나19 최대 발생국인 미국은 인종 차별이 빈곤 문제와 결합되어 어떤 양상을 드러내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지난 8일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코로나19 환자 중 흑인 비율이 백인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높다. 뉴욕주는 약간 다르게 라틴계 사망자 비율이 더 높지만, 시카고 등 흑인 인구가 많은 지역은 흑인 사망자 비율이 60~70%에 이른다. 엄청난 치료비 때문에 입원하지 못한 환자들을 고려하면, 흑인과 라틴계 비율은 더 높아질 것이다.

미국에서 이처럼 흑인과 라틴계가 코로나19에 취약한 것은 무엇보다 빈곤 때문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밖에 나가 일하지 않고는 하루를 살아갈 수 없다. 이들은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인해 자가 격리가 애초부터 불가능했고, 평소 빈곤으로 인해 기저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이들은 인종 편견 때문에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을까 봐 마스크 착용을 꺼린다.

빈곤에 따른 코로나19 희생은 제3세계 국가들에서 더 심각하다. 이 국가들의 확진자 수는 최근 급속한 증가 추세에 있다. 인도의 경우 코로나19로 도시봉쇄령이 발동되면서, 빈곤 노동자들은 도시에서 굶어 죽지 않기위해 도시 탈출을 감행하지만, 이 과정에서 감염이 급속히 확산될 위험이 있다. 반면 인도네시아에서는 빈곤한 도시 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할까 봐 도시 봉쇄를 아예 하지 않고 있다.

지제크의 말처럼 코로나19 대유행은 전세계에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또한 이번 사태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종 및 계급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코로나19 대유행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도록 해준다. 코로나19로 세계는 이러한 인종과 계급 문제를 해결하고, 급진적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 최병두 한국도시연구소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