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고려인 (카레이스키)

● 칼럼 2018. 8. 29. 12:36 Posted by SisaHan

나는 얼마 전에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고려인에 대한 특집 방송을 보게 되었다. 고려인이란 러시아에 살고 있는 동포들을 말한다. 그들이 누구인가를,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한 점이 많았다. 나도 그들과 다름없이 조국을 떠나온 동포 중의 하나이다. 우리 아이들은 2세가 되고, 곧 3세가 될 것이다. 흔히들 해외에 나와 사는 사람(동포)을 이야기할 때, 중국. 북미, 일본 이외의 동포들에 대해선 그들과의 접촉도 없었고, 그들의 살아온 과정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구 소련에 이주한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잘 모르고 있었다. 일제 때 사할린에 강제 노역으로 끌려간 동포들의 고향방문 이야기는 어렸을 때, 신문에 뉴스로 간간히 나오곤 했다.


지금 이야기하는 고려인들은 일제 때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갔거나, 또는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간 사람들이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관계로 그들이 삶의 터전을 찾아 그리로 이주한 것은 이해하겠는데, 어떻게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였는지 사뭇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허허벌판인 곳에서 살아남았으며 어떻게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유지했는지, 같은 고향을 떠나 온 사람으로 궁금했기 때문이다. 사실 스탈린의 독재와 강압 정치는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몇 십 만 명을 넘는 사람들이 그의 명령 하나로 이주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벌판인 땅에 버려져 거기서 벼를 심어 농사를 짓기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대단한 일이다.


그들은 구 소련이 무너지고 주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살다가, 그 두 나라가 한국과 교류가 빈번해지고 자유스럽게 왕래하기 시작하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살고싶어 하고 또 살려고 한다. 이 점은 몇 해 전의 중국의 조선족을 생각하게 한다. 이들은 조선족처럼 외모가 우리와 같았다. 다만 한국어를 못했는데, 이유는 스탈린의 강압정책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이 한국어를 배우면 이내 배울 거라 생각하며 5세까지 내려오며 한국인임을 지켜온 그들을 존경한다.
그들이 한국에 정착하려는 이유가 경제적인 문제 때문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피부 빛과 외모에서 오는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3세이든 4세이든 그들은 이웃과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 이민 3세가 한국으로 오는데, 같이 온 아이들은 이민 4세여서 동포로서의 국내 거주 자격이 없다고 한다. 학교를 다니던 자녀들은 성인이 되면 한국을 떠나야 한다. 나는 사실 해외 동포 법을 잘 모른다. 해외에 살면서 국민으로 해야 할 의무는 전혀 행사하지 않으면서 어떤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도 논리에 맞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한국민이 아니다. 한국인이다.


많은 이들이 현 해외 동포 법이 북미 같은 잘사는 나라의 동포들을 위한 법이라고 한다. 해외에 흩어져 사는 많은 동포들이 같은 조건 아래 살고 있지는 않다. 또 그에 따라서 조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를 수도 있다. 이제 한국이 잘 사는 나라가 되어 이곳 캐나다 생활을 접고 역 이민 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을 말할 때 한국에 나가 영주하려는 2세나 3세가 얼마나 될지 나는 모른다. 모든 문제에 있어서 감정적인 문제가 있고 그 다른 면에는 이성적인 문제가 있다. 그리고 한 국가에는 법과 원칙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쉽게 바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국정부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여 동등한 대우를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해외 동포 법이 잘못된 점이 있다고 해도 어느 한 지역의 동포만 다르게 대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다른 환경과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 살아온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이야기지만 자신은 한국인이라 해서 한국에 왔는데, 너의 부모까지는 동포이고 너는 아니라고 한다면, 그들이 한국에도 정착 못하고 우즈베키스탄에도 정착 못하는 떠돌이가 된다면…. 고려인 4세와 5세를 진정한 동포로서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우리 한국이 작은가?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한마당] 미꾸라지와 희망론

● 칼럼 2018. 8. 29. 12:33 Posted by SisaHan

살다보면 기대를 잔뜩 품었다가 어긋나는 바람에 실망할 때가 있다.
그 사람 능력있고 믿음직스러워 기대를 걸었는데 지나보니 실없고 형편없음이 드러나 맥이 풀리기도 하고, 소문난 밥집이나 명소에 들렀다가, 또는 대단한 제품인줄 알았다가 별거 아닌 엉터리여서 실소를 머금고 화가 나기도 한다. 가장 믿었던 친구나 연인이 배신하고 내편이 아님을 알았을 때 치솟는 배신감도 마찬가지다. 기대와 믿음이 큰 만큼 낙담과 상처도 더 클 것은 당연하다.


요즘 잇달아 터져나오는 대법원의 재판거래 의혹들에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도 법치국가의 최후 보루라는 최고법원의 위상만큼이나 기대와 신뢰의 크기가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깨졌을 때는 어떤가. 합당한 비교가 아닐 수는 있어도 대법원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의 강도보다 훨씬 강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대법원이 법이라는 사회적 성문(成文)규범을 지키는 세상의 마지막 파수꾼이라면, 교회는 영적(靈的)규범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신성한 형이상학적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교회를 정직하고 진실된 곳이라는 인식과 기대를 갖고 본다. 더구나 어느 목회자나 성도들의 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인이고 그의 몸인 ‘하나님의 집’이라고들 말한다. 그런 교회가 기대를 저버렸을 때 실망과 지탄이 작고 약하다면 말이 안된다. 10만 명이 넘는 대형교회가 부자세습으로 손가락질을 받고, 가장 큰 교단의 대표적 교회가 목사 자격시비에 사회법규를 어긴 일로 재판에서 망신을 당하는 모습 등에 깊은 탄식들이 나오는 것은 너무 당연할 것이다.


문제는 그런 교회들의 추락과 타락상을 갈수록 많이 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무분별한 성장 신화에 빠져 하나님보다는 돈과 건물을 중시하고, 성경보다는 목사의 입신양명이 더 중요시 되는 ‘회사 같은’ 교회, ‘기업인 같은’ 뻔뻔한 성직자들이 늘고있는 것으로 보여서다.
지금도 교계를 시끄럽게 하는 일부 한국교회들의 분란은 그런 실상을 드러낸다. 퇴임목사와 회계장로가 한통속이 되어 헌금을 멋대로 유용하고는 후임 목사도 그 악행에 끌어들이려다 뜻대로 안되자 쫓아냈다는 이익집단의 모습, 그런데 감독기관인 노회 마저 어찌된 일인지 분별을 못하고 쫓겨난 젊은 목사를 구제하기는커녕 도리어 면직을 시켰다니 성도들이 기가 막히다 못해 배신감으로 떠나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교인 1백명도 안되는 교회가 원로목사의 은퇴 예우금 문제로 다투는 모습은 요사이 본분을 잃은 목회자들의 의식구조를 그대로 보여준다. 교회 운영조차 어렵다는 재정상황에 아랑곳 없이 그 원로목사는 이렇게 당당히 주장했다. “내가 이 교회에 와서 13년을 지키며 부흥시켰는데, 1억5천만원도 못주나. 큰 교회들은 보통 10억 100억씩도 아무 조건 없이 주는데, 내가 그만큼 달라는 것이 무슨 문제냐!”


하지만 성도들은 재임 동안 교인수가 되레 반토막 났다며 반발했고, 보다 못한 노회에서 1억원을 주라고 중재에 나서 교회는 결국 일부를 일시금으로 주고 ‘잔금’은 5년간 매월 ‘퇴직급여’를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대형교회들이 모범을 보이기보다 타락의 본이 되어 가면서 작은 교회들 마저 뒤따라 가는 것은 아닌지, 교회를 흔들고 ‘하나님 욕보이는’ 일부의 일탈 때문에 착하게 섬기는 많은 목사와 성도들 가슴에 못을 박고 아프게 하는 일들이 자꾸 언론을 장식한다.
성직의 오염과 교회의 세속화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역시 일부의 탐욕스런 모습이 침소봉대 되어 신문지면을 메우는 실망의 현실도 그만큼 기대와 신뢰가 큰데서 연유함이리라.


그러면 희망이 없는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명을 다하는 대다수 교회들의 선행은 흔히 공기의 존재를 잊고 살 듯,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살펴보면 오지에서 묵묵히 땀흘리는 진실된 목회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매사가 그렇듯 수많은 교회에도, 성직자 가운데에도 미꾸라지는 있게 마련이다. 어쩌면 그들로 인해 신발끈을 다시 매고 경각심을 새로이 하는 효과는 긍정적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작위적 희망론’에 남은 ‘기대’를 걸어본다. 중세 가톨릭의 부패가 종교개혁을 부르고 개신교의 탄생을 가져 왔다는 반면교사로도 위안을 삼으면서 말이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고용 충격’의 진짜 원인

● 칼럼 2018. 8. 29. 12:32 Posted by SisaHan

최근 발표된 ‘충격적’인 고용지표의 원인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보수야당과 보수언론에선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부작용이라며 즉각 이를 폐기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해법을 내놓으려면 원인 진단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우선 지표를 보면, 제조업 일자리 감소와 건설업 일자리 증가 둔화, 인구구조 변화, 폭염, 자영업 구조조정 등이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첫째, 제조업 취업자는 지난해 7월에는 4만7천명 줄었는데, 올해 7월에는 무려 12만7천명이나 감소했다. 건설업 취업자는 지난해 7월 10만5천명 증가한 데 반해, 올해 7월에는 3만7천명 증가에 그쳤다. 둘째, 15살 이상 인구 증가폭은 지난해 7월 31만9천명에서 올해 7월 24만1천명으로 크게 둔화됐다. 셋째, 재난 수준의 폭염이 영세 자영업과 현장노무직, 노인층 등의 경제활동을 심각하게 위축시킨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영세 자영업자가 많이 포진한 도소매업과 음식점·숙박업 취업자 감소폭은 지난해 7월 3만6천명에서 올해 7월에는 8만명으로 크게 확대됐다. 이 업종의 부진은 중국의 사드 보복과 폭염, 최저임금 인상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영업 구조조정 가속화에서 보듯이 최저임금 인상의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저임금 인상이 마치 만병의 근원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아전인수식 해석이다. 경제학계에서도 최저임금 인상의 고용시장 영향은 찬반이 엇갈리는 오래된 논란거리다. 대체로 동의하는 견해는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두해 연속 두자릿수 인상이 고용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줬을 개연성이 있다. 다만, 현재까지 뚜렷한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최저임금 대상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용원 있는 자영업자’는 올해 7월에 오히려 7만2천명이 늘었다. 주목할 부분은 더 영세할 것으로 보이는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는 10만2천명이나 줄었다는 점이다. 그 이유를 정확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최근의 고용 부진은 우리 경제에 누적된 구조적 문제들이 폭발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제조업 부진은 재벌의 불투명한 지배구조와 과잉투자, 정경유착, 중국의 추격 등으로 기존 대기업 위주 산업경쟁력이 근본적으로 약화된 데 기인한다. 자동차산업은 올해 1~7월 생산은 8.8%, 수출은 9%나 감소했고, 조선업 부진은 몇년째 계속되고 있다. 생산가능인구 감소는 잘못된 인구정책과 미흡한 사회보장, 저임금 과로노동 등이 누적된 결과물이다. 자영업 구조조정도 외환위기 이후 대규모 실업자들이 생계형 자영업으로 몰려들면서 발생한 공급과잉 탓이 크다.

결국, 고용 충격은 소득주도성장의 폐기에서 답을 찾을 게 아니라, 오히려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 혁신성장’의 세바퀴 성장 전략을 더 강화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 정부는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의 방향은 제대로 제시했으나 그 실행에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재정확대를 통해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고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기획재정부는 엉터리 세수추계를 통한 초과세수로 오히려 긴축재정을 펴는 우를 범했다. 또 증세를 회피하고자 사회간접자본(SOC) 축소라는 세출 구조조정 방식을 택했는데, 이는 건설업 일자리 위축을 초래했다. 지금이라도 복지재원은 증세를 통해 마련하고, 필요한 사회간접자본 투자는 이어가야 한다. 자영업 구조조정의 연착륙에도 나서야 한다. 생계를 지원하거나 직업 재교육, 사회서비스업 확대 등을 통해 새로 임금노동 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 박현 - 한겨레신문 콘텐츠 2부문장 >


[1500자 칼럼] 오늘의 기적

● 칼럼 2018. 8. 13. 08:29 Posted by SisaHan

오랜만에 친지들을 만났다. 그날의 화제는 독감이 얼마나 지독한지 거의 두 달을 앓아도 완쾌되지 않는다고 했다. 독감예방 접종을 했는데도 심히 앓았다며, 젊은 시절엔 감기가 무슨 병이냐고 말했었는데 더 이상 그리 말할 수가 없단다. 그때 핼쑥한 얼굴의 한 분이 나서서 감기는 거의 회복이 되었는데 후유증으로 미각에 문제가 생겨 음식 맛을 잃었다는 것이다. 어느 음식이든 맛을 분별하지 못해 식욕이 감퇴하여 체중이 3kg이나 감소했다고 한다. 불현듯 오래 전 겪었던 악몽 같았던 시간이 떠올랐다.


어느 해 녹음이 짙은 여름 한 자락에서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린 적이 있다. 환절기도 아닌데 이 고약한 감기는 약을 먹어도 전혀 듣지를 않고 한 달 이상 끌었다. 처음에는 목이 아프고 음성이 변하더니 콧물감기로 발전을 하여 끝내 귀까지 쑤시고 욱신거렸다. 무엇보다도 괴로운 점은 냄새와 맛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감기는 거의 나았는데도 미각과 후각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혹 감기 후유증이 아닌 다른 병세인지 몰라 여러 검사를 거쳤으나 이상이 있는 기관은 없었다. 가정의는 잃은 기능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무조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2-3달이 지나도 별다른 진도가 보이지 않게 되자 걱정이 쌓여 갔다. 주부가 음식의 맛을 모르고 냄새도 맡을 수 없다니 보통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물의 영장답게 오로지 습관에 의존하여 요리를 하니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지만 일관성 없는 그 음식 맛을 짐작해 보시라.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태어날 때부터 아니면 신체의 한 기관에 이상이 생겨 미각과 후각을 잃은 경우는 반드시 정밀검사를 통해 치료방법을 찾아야 한단다. 단지 감기로 잃었을 경우는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치유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감각기관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라 뇌에서 잠시 맛과 냄새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라, 새로 맛과 냄새를 습득하는 훈련을 거치면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나는 작은 그릇에 식초, 설탕, 소금 등을 담아 하나씩 맛을 보며 신맛, 단맛, 쓴맛, 짠맛을 다시 인지하기 시작하였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네 가지의 기본적인 미각은 돌아왔으나 조리한 음식 맛은 도통 구별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소량의 마늘이 들어간 음식에서는 온통 마늘의 고약한 맛 하나로, 어떤 기름이든 기름을 넣은 음식은 모두 불쾌한 기름 맛으로만 느껴졌으니 말이다.


후각은 문제가 더 심각했다. 강한 향수 외에는 모두 휘발유 비슷한 고약한 냄새로만 인지할 수 있었으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거의 6개월이 지나 얼마간의 불편함도 익숙해질 무렵이 되니 드디어 미각과 후각이 자연적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예전만큼 완벽하진 못하다. 내가 즐기던 수박, 오이, 참외.. 이런 음식들이 고유의 맛 대신 똑같은 맛으로만 느껴져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삶을 이어가는 데는 지장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아직도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고, 다양한 음식을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설마 태어나면서부터 누려온 자신의 미각과 후각을 잃어버릴 수 있으리라 상상해본 적이 있겠는가. 대다수의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충격과 병으로 인해 얼마든지 내 신체기능의 일부를 잃을 수 있음을 남의 일로만 여기며 살아갈 뿐이다.

우리의 삶이란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는 과정’이라 말한다. 일단 태어난 후부터는 열심히 살아가지만 결국은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이니 말이다. 내 원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미각과 후각처럼 신체의 어느 부위이든 수술을 하거나 부상당한 부위는 더 이상 원상태로 복구되지도 않을 뿐더러 기능도 저하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가 맞이하는 건강한 오늘이, 지금 이 시간이, 기적의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무료한 일상조차도 더 바랄 것 없는 소중한 시간이라 여기니, 갑자기 숙연해진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