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언 의원들을 줄줄이 낙선시키고 미래통합당에 초유의 참패를 안긴 것은 수구적 행태에 대한 유권자들의 응징이다. 보수언론도 함께 심판당했다. 곳곳에서협치를 제안하지만 수구보수 야당·언론이 건강한 보수로 재탄생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거대 여당도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국민적 공감이 많은 사안부터 우선순위를 정하고 완급 조절을 해야 한다.


민주화 이후 처음이라는 미래통합당의 역대급 참패는 중도층이 외면한 탓이 크다. 공천 실패에다 막판 패륜적 망언이 터져나오면서 중도층은 한 가닥 남은 미련마저 거둬들였을 것이다.

<조선일보>강경 지지층에 휘둘려 중도층을 잃었다고 했으나 <한겨레>는 사설에서 그 강경파 중 하나가조중동이라고 콕 짚었다. “모든 게 문재인 정부 탓이라는 조선·중앙 등 보수언론 프레임을 그대로 따르며 퇴행적 행태를 반복한 통합당 지도부 책임이라는 분석은 일리가 있다.

지난 3년 보수언론들이 집착해온반문재인 프레임은 코로나19 국면에서 결정적으로 한계를 드러냈다. 외국 언론들이방역 모범 사례로 칭찬하고 국민 65%가 정부 대응을 보며선진국임을 느꼈다”(19일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 조사)는데도방역 실패라고 억지를 부렸다. ‘시진핑 눈치 보느라 입국금지 안 했다는 조선·중앙의 논리를 앵무새처럼 따라 하며문재인 정권 심판구호로 선거를 치렀으니 그런 야당에 중도층이 표를 줄 리 만무했다.

차명진 미래통합당 후보의세월호 망언도 따지고 보면 보수언론의 책임과 무관하지 않다. “징하게 해 처먹는다에 이어텐트 망언으로 제명 파동을 겪은 뒤에도 성금이 답지한다며 천안함 유족들에게 보내겠다고 했다. 애초 세월호와 천안함의 유족 보상금 액수를 비교하며문제로 참사 유족들을 조롱한 원조는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책임 없다며 유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매도한 것도 모자라 검찰이 재수사에 착수하자세월호 또 우려먹겠다는 정권과 검찰, 해도 너무한다고 공격한 것도 조선일보다. 사실 차 후보 망언과 그리 다르지 않다.

김진태·이종명 의원 등의 ‘5·18’ 망언도 <TV조선> <채널에이 A>가 촉발한북한 특수군 침투발언에 원죄가 있다. 지금도 극우 유튜브엔 비슷한 영상들이 숱하게 걸려 있다.

북핵 위기를 협상으로 풀려는 노력을 색깔론으로 방해한 것도 보수언론들이다. 조선일보가천안함 폭침 주범 평창 온다한국과 유가족 능멸이라고 부추기자,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곧바로 통일대교 한복판에 자리를 깔았다. 김영철 방남을 저지하겠다며 길을 막고 철야 농성을 벌였다.

스스로 인정하진 않겠으나 보수언론 중에서도 조선일보는 탄핵 국면에서태극기부대의 불매운동 협박을 경험한 뒤 더욱 강경 보수로 치달았다. 광고 지면을 통째 선전장으로 내주며 아스팔트 우파에도 영합했다.

이번에 망언 의원들을 줄줄이 낙선시키고 통합당에 초유의 참패를 안긴 것은 이런 식의 수구적 행태에 대한 유권자들의 응징이다. 총선 국면에서 보수 통합을 독려하고 야당 대표 출마 지역구까지 찍어준 보수언론도 함께 심판당했다. 오죽하면 <미디어오늘> 1면 머리기사로참패한 조선일보라는 제목을 달았겠는가.

2016년 촛불 시민은 대통령을 탄핵했으나 국회는 이전 구도 그대로였다. 이번에 국회마저 획기적으로 바꿔놓은 건 촛불 정신을 완성시키라는 시민들의 뜻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번 총선은촛불 시즌2’라 일러도 지나치지 않다.

70여년 지탱해온 수구 기득권 체제는 적대적 남북정책을 고수하며 분단구조에 기생해왔다. 경제적으론 수출과 대기업 중심의 성장 우선주의로 시장경제마저 제대로 포용하지 못했다. 정치·경제 등 각 분야의 기득권 논리를 전파하며 연결고리 구실을 해온 게 수구보수언론들이다. 그런데 최소한의 복지조차사회주의” “포퓰리즘”’이라던 조선일보가 총선 이후 야당에 복지정책 보완과 기본소득제 검토를 주문하며, 사람도 노선도 행태도 바꾸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좀 더 지켜보긴 해야겠으나 내부 성찰의 결과이길 바란다. 곳곳에서협치를 제안하지만 수구보수 야당·언론이 건강한 보수로 재탄생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여권도 마찬가지다. 일각에서 윤석열 검찰총장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책임이 드러나기 전에 정치권이 나서서 몰아내려는 모양새는 역풍을 불러올 수 있다. 가족 수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그 결과에 따라 자연스럽게 결정하면 될 일이다. 거대 여당이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다수 국민과 함께 가야 한다. 입법과 정책도 국민적 공감이 많은 사안부터 우선순위를 정하고 현명하게 완급 조절을 해야 한다. < 김이택 대기자 >

       
1918년 스페인 독감은 5천만명의 목숨을 앗아 갔지만,

그 후 세계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세계의 지식인들이 언론을 통해 다양한 주장을 펼치면서 관련된 담론에 개입하고 있다. 대부분 코로나19 이후 세계가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를 논의하면서, 때로 논쟁을 불러오기도 한다.

한 예로 세계적 이론가 지제크는 <한겨레> 칼럼(2020413일치)에서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세계를 급진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그는 영국 총리가 코로나 사태 극복을 위해 철도의 일시적 국유화를 발표한 사례를 든다. 다른 매체에서 그는 이스라엘 총리가 코로나19와 관련해 팔레스타인을 적극 지원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가 제안한 두 가지 대책, 즉 지역공동체에 기반한 의료체계 개선과 자원 생산 및 공유를 위한 국제 공조체계 구축은 전적으로 동의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사례로 보면 세계가 바뀔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사실 영국 총리는 사태 초기에 신속한 대규모 검사 대신 인구 60%의 감염을 감수하는 집단면역이라는 전체주의적 전략을 선호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돕는 것은 악어의 눈물처럼 보인다. 그의 비판자들이 제기한 것처럼, 코로나19 이후 자본주의는 더 강력한 모습을 띨 수 있고, 시민들은 국가의 통제에 더 순응하게 될 수 있다.

전염병으로 세계사가 바뀐 사례들이 있긴 하다.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페스트)에 의한 인구 감소는 농업노동력 부족으로 봉건제의 해체를 가져왔고, 17세기 중국에서도 흑사병이 창궐하여 명 왕조가 붕괴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1918년 스페인 독감은 5천만명의 목숨을 앗아 갔지만, 그 후 세계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복잡한 정치·경제적 요소들로 치밀하게 조직되어, 그 내적 모순들을 심화시킬지라도 당면한 위기를 해소해왔다. 더욱이 이러한 위기 해소는 언제나 인종과 계급(빈곤)에 근거한 차별적 희생을 전제로 했고, 그 차별 메커니즘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작동했다.

인종 차별과 혐오는 코로나19가 중국 우한에서 확산되던 초기부터 지금까지 거론되는 문제다. 며칠 전 프랑스 한 언론매체의 인터넷판에 한국의 대응정책을 두고 감시와 밀고에 있어 세계 두번째 국가라고 비난하는 글이 실렸다. 이 글은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한 감시·권위국가를 비판하려 하지만, 자신의 처지는 덮어둔 채 자유에 대한 맹신과 프랑스 우월주의에 빠져 한국 나아가 아시아를 인종 차별적으로 무시한다.

미국 대통령이 중국 바이러스라고 칭하거나 중국 탓을 하며 세계보건기구(WHO)에 지원을 중단한 것은 인종 차별적 혐오 돌리기의 전형이다. 이로 인해 서구에서 다른 인종에 대한 개인적 혐오 발언이나 폭력이 정당화될까 두렵다. 나아가 인종 차별은 단지 정체성의 문제로만 치부될 수 없고, 현실에서 훨씬 심각한 비극을 초래한다. 코로나19 최대 발생국인 미국은 인종 차별이 빈곤 문제와 결합되어 어떤 양상을 드러내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지난 8일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코로나19 환자 중 흑인 비율이 백인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높다. 뉴욕주는 약간 다르게 라틴계 사망자 비율이 더 높지만, 시카고 등 흑인 인구가 많은 지역은 흑인 사망자 비율이 60~70%에 이른다. 엄청난 치료비 때문에 입원하지 못한 환자들을 고려하면, 흑인과 라틴계 비율은 더 높아질 것이다.

미국에서 이처럼 흑인과 라틴계가 코로나19에 취약한 것은 무엇보다 빈곤 때문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밖에 나가 일하지 않고는 하루를 살아갈 수 없다. 이들은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인해 자가 격리가 애초부터 불가능했고, 평소 빈곤으로 인해 기저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이들은 인종 편견 때문에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을까 봐 마스크 착용을 꺼린다.

빈곤에 따른 코로나19 희생은 제3세계 국가들에서 더 심각하다. 이 국가들의 확진자 수는 최근 급속한 증가 추세에 있다. 인도의 경우 코로나19로 도시봉쇄령이 발동되면서, 빈곤 노동자들은 도시에서 굶어 죽지 않기위해 도시 탈출을 감행하지만, 이 과정에서 감염이 급속히 확산될 위험이 있다. 반면 인도네시아에서는 빈곤한 도시 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할까 봐 도시 봉쇄를 아예 하지 않고 있다.

지제크의 말처럼 코로나19 대유행은 전세계에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또한 이번 사태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종 및 계급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코로나19 대유행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도록 해준다. 코로나19로 세계는 이러한 인종과 계급 문제를 해결하고, 급진적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 최병두 한국도시연구소 이사장 >

지난 4월13일치 한겨레 만평이 요 며칠 화제가 됐다. 4·15 총선 국면에서 펼쳐진 최근 3대 미스터리를 다뤘다. 총선 기간 갈피 제대로 못 잡고 헤매던 보수 야권의 모습을 순간 포착한 것인데, 총선 결과가 나온 뒤 아귀를 맞춰보니 절묘하기 그지없다. 소름.

첫째 미스터리는 왜 그 당에 갔나?’이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주인공이다. 만평 속 그는 길을 잃은 모양이다. “난 누구?” “여긴 어디?” 혼잣말을 하고 있다. 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을 거쳐 미래통합당 총선을 책임지겠다고 노구를 이끌고 왔건만, 이번엔 도대체 왜 약발이 듣지 않는 걸까? 망언 거듭하는 차명진 당장 자르랬더니 자꾸 살려주는 건 뭐지? 노정객이 처한 현실이 정말 미스터리하다. 통합당 총선 참패와 함께 김 위원장도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됐다.

둘째 미스터리는 왜 시장인가?’이다. 코로나19 방역에 헌신하는 의료진에 돌아가야 할 수당을 쌓아둔 채 뒷짐 지고 서 있는 권영진 대구시장을 묘사했다. 권 시장은 코로나19로 당장 생계가 막막한 서민을 위한 긴급재난지원금 지급도 총선 뒤로 미루겠다고 하는 등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미스터리한 행적을 선보인 바 있다. 일각에선 총선 전에 지급하면 혹여 대구 시민들이 정부 여당에 우호적으로 돌아설까 봐 그러는 게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지만, 믿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권 시장은 재난지원금 즉각 지급을 요구하는 시의원과 설전을 벌인 끝에 갑자기 실신하고는 사흘간 입원함으로써 시급한 시정을 잠시 중단한 바 있는데, 이는 실로 아프거나 자가격리된 많은 시민들과 동병상련을 나누겠다는 목민관적 자세의 발로라고밖에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선 개표 방송을 보다가 카이저 소제급 충격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범진보 대구 전패! 김부겸도 떨어졌다. 정말 다 계획이 있었나?

셋째 미스터리는 왜 뛰는가?’이다. 짐작하시다시피 선거 기간 내내 포레스트 검프처럼 달리기에만 열중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그렸다. 안 대표는 대구에서 땀에 젖은 의료복으로 점수를 딴 뒤, 돌연 마라톤맨으로 변신해 국토 대종주 달리기를 하는 미스터리하기 짝이 없는 선택을 한 바 있다. 미래통합당 후보들이 망언·막말·선동 3종 세트를 마구 난사하면서 중도층 민심이 정처 없이 흩어질 때도, 안 대표는 큰 실망을 금할 수 없다고 일갈했으나 곧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개정을 위해선 누구와도 손을 잡겠다며 통합당과 연대할 뜻을 내비침으로써 경쟁 상대마저 감싸안는 대범함을 보여줬다. 피아식별 안중에 없는 그 미스터리함이 하늘을 찌른다.

권범철 화백의 촌철살인에 미스터리 하나만 더 보태볼까 한다. 제목은 왜 머리띠를?’이다. 이 넷째 미스터리는 14일 마지막 선거운동에 나선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를 포착한 사진 한 장에 담겨 있다. 사진 속 황 대표는 밀레니얼 핑크색 머리띠를 두른 채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고 있다. ‘독재 타도를 외치던 운동권 투사의 기운이 풍긴다. “가장 적성에 맞는다고 밝힌 공안검사 시절 운동권 때려잡던 뼛속까지 공안통인 그가 머리띠 두르고 문재인 독재 막겠다며 주먹을 추어올리는 초현실적 풍경. 어쩌면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 그림 제목처럼 이것은 머리띠가 아니다일지도.

황 대표는 지난해 9월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삭발식을 하고 장외투쟁을 했다. 11월에도 청와대 앞에 몽골텐트를 치고 단식농성을 했다. 전광훈 목사가 주도하는 문재인 하야농성집회장을 찾아 함께 만세를 불렀다. 12월엔 국회 본관에서 공수처법·선거법 등 개혁 법안 패스트트랙 저지를 내걸고 밤샘 농성을 했다. 머리띠 유세는 황 대표 개인사 측면에서 보면, 삭발단식을 잇는 운동권 코스프레’ 3부작의 대미를 이루는 화룡점정아니었을까.

변신 3부작이 불러온 놀라운 결과가 펼쳐졌다. 민심은 표로 응답했다. 종로 낙선, 당의 참패. 새로 꾸려질 보수야당 리더십은 황 대표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삭발 그만, 단식도 그만, 무조건 발목잡기 금지. 대화하고 대안 내고, 표결은 꼭 하기. < 손원제 논설위원 >

 

인류가 소위 문명생활을 시작한 이래, 역병은 인간 사회를 끊임없이 괴롭혀왔다. 세계의 역사는 어떤 점에서 전염병의 역사라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때로는 국지적으로, 때로는 대륙 전체에 걸친 역병의 창궐과 그 후유증으로 세계사의 큰 흐름이 바뀌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놓고 세계사의 물줄기를 변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은 생산력의 발전이나 계급투쟁 혹은 전쟁이 아니라, 감염력이 강하고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대표적인 예는 중세 말기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페스트일 것이다. 당시 중국 쪽에서 시작된 페스트균이 실크로드를 타고 유럽으로 이동·확산함으로써 유럽 인구의 태반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대규모 인명 소실로 유럽 중세 질서가 결정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큰 피해를 입은 농노와 하층민의 인구가 대폭 줄어들자 중세 질서의 하부구조, 즉 농노제의 지속적인 유지는 크나큰 난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불같은 열정으로 신대륙을 탐사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꽉 막힌 폐색 상황을 타개하려는 유럽인들의 필사적인 기도에서 비롯된 기획들이었다.

역병의 역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야기는 고대 아테네의 비극적 재난이다. 기원전 430, 스파르타를 상대로 벌인 펠로폰네소스전쟁 2년째, 아테네는 돌연히 전염병의 창궐에 휩싸였고, 그 때문에 결국 전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희생되는 참사를 겪었다. 이 정체불명의 괴질 앞에서는 건강한 젊은 병사들도 속수무책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테네의 영웅적인 지도자 페리클레스와 그 아들들도 괴질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전쟁 중에 지도자를 잃고, 대규모의 병력을 잃은 아테네 군대는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단지 대규모의 병력 손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괴질이 창궐하여 가족, 친지, 수많은 동료 시민들이 느닷없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계속되자, 아테네인들의 인생관과 윤리관에 큰 동요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절제의 기율을 팽개쳐버리고, 법을 우습게 여기고, 더 이상 신을 섬기지도 않고, 찰나적인 향락에 빠져버리기 시작했다고, 당대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서 기록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테네인들 사이의 이러한 풍속의 변화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튼튼한 민주주의가 성립하려면 무엇보다 자기절제라는 시민적 덕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 이는 그리스 출신의 20세기 철학자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였다. 인간이 전지전능한 존재일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키려는 자세야말로 민주주의의 불가결한 성립 요건이라는 그의 통찰은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독창적인 탐구의 성과였다. 그런데 바로 자기절제라는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무너짐으로써 아테네 민주주의는 불가피하게 쇠락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로 인한 정치적·사회적 혼란 끝에 마침내 마케도니아라는 외부 세력의 침략을 받고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로 세계 전체가 환란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비상상황에 처해 있다. 아직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탓에 오직 사회적 거리두기만이 그나마 유용한 대응책일 수밖에 없으므로, 기존의 익숙한 사회생활이 거의 전면적으로 작동 정지 상태가 되었다. 이에 따른 개인적·사회적 피해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래 최대의 위기라는 메르켈 독일 총리의 말은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코로나 사태는 인간의 역사에서 전혀 낯선 종류의 경험이 아니다. 고대, 중세의 역병과 다른 게 있다면 감염 속도가 대단히 빠르고, 그 범위가 전 지구적이라는 점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자본주의의 폭주, 과잉 산업 발전과 소비주의의 소산이다. 오로지 이윤과 성장을 추구하는 데 혈안이 되어 무절제한 탐욕의 정신이 온 세상을 압도하는 바람에 야생생물들의 서식지를 포함한 생태계는 대대적으로 파괴되었고, 거기에 자본, 물자, 사람의 대량 이동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적 자유무역 논리까지 합세하여 지금과 같은 파국적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은, 역병의 창궐이라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문명의 흥망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의 본질과 성격을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로의 복귀를 고대하며, 백신이나 치료제의 조기 개발이 급선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종래의 생활이 과연 정상적인 생활이었는지 우리는 물어볼 필요가 있다. 뉴스에 의하면, 지금 세계 곳곳에서 소비와 산업 활동이 일시적이나마 정지 내지는 둔화되자, 대기가 청명해지고, 소음이 잦아들고, 자연 만물이 모처럼 생기를 되찾았다. 이는 종래의 생활이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확연한 증표가 아닌가. 그렇다면 길은 하나, 더 이상 생태계에 폭력을 가하지 않고 인간다운 생존·생활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길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아직도 우리들 대다수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붙들려 있는 신화, 즉 새로운 과학기술의 개발을 통한 끊임없는 성장(혹은 진보)의 추구라는 관념과 깨끗이 결별하는 게 진짜 급선무인 것이다.

온갖 징조로 봐서, 앞으로 코로나바이러스와 유사한 역병은 빈발할 것임이 틀림없다(존스홉킨스대학의 보건연구팀에 의하면, 오늘날 신종 바이러스는 연간 200종이 넘게 출현하고, 그 대부분은 잠재적으로 팬데믹을 유발할 수 있는 바이러스들이다). 현실이 이런데도 역병이 창궐할 때마다 백신과 치료제를 찾느라고 허둥댈 것인가.

물론 당장은 기술적 해법을 찾아야 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책은 우리 모두의 정신적·육체적 면역력을 증강하는 방향이라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의 생태계 훼손을 막고, 맑은 대기와 물, 건강한 먹을거리를 위한 토양의 보존과 생태적 농법,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소박한 삶을 적극 껴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를 구제하는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도 마스크도 손씻기도 아니다. , 장기적인 고립생활이 면역력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다.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